효종, 형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라 여생을 위기와 불안의 연속으로 살다
1. 봉림대군, 청나라에 항복한 후 아버지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쳐들어옵니다.
청나라 기병이 침공하던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봉림대군은 강화도에 있었습니다.
강화도는 기마병을 끌고 온 청나라 군대와 맞서기에 탁월한 천애의 요새였습니다.
봉림대군은 왕실 가족과 함께 한양 도성을 떠나 강화도로 먼저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무사히 강화도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는 가족들이 있는 강화도로 오지 못합니다.
인조와 소현세자가 아직 도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예상보다 빨리 청나라군이 진격해 강화도로 가는 길을 이미 차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을 알게 된 인조와 소현세자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피신합니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선택은 바로 '남한산성'이었습니다.
그렇게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으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강화도에 갇히게 됩니다.
청나라군대는 곧장 군대를 나눠서 봉림대군이 있는 강화도와 인조와 소현세자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각각 진군합니다.
이윽고 강화도 앞바다에서는 수십 척의 청나라배와 조선 수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 끝에 청나라 군사들은 강화도에 상륙했고 봉림대군이 있는 성은 포위 당하고 맙니다.
전세는 이미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청나라로 기울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 속에서 결국 봉림대군은 성문을 열고 청나라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봉림대군은 인조와 소현세자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끌려옵니다.
비참한 심정으로 끌려온 남한산성에서 봉림대군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되며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참담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인 '삼전도의 굴욕'을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2. 청나라, 패배한 조선의 왕자들을 볼모로 잡아가다
이후 청나라는 패배한 조선의 완벽한 굴복을 바라면서 굴욕적인 협약을 맺습니다.
1.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을 것
2. 왕위 후계자인 소현세자를 인질로 데려갈 것
이러한 청나라의 요구에 조선은 발칵 뒤집힙니다.
그런데 이때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간 것은 소현세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세자가 아닌 동생 봉림대군까지 포로로 잡혀 갔는데 왜일까요?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병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 청나라는 조선을 쥐고 흔들 막강한 패를 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만일을 위해서 대체할 수 있는 인질로 둘째 왕자 봉림대군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자신들에게 닥칠 험난한 청나라 볼모생활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짐짓 예측했을 것입니다.
3. 형 소현세자, 청나라 볼모생활 중 병으로 앓아눕다
그런데 어느 날, 끝내 바라지 않던 상황이 벌어집니다.
형 소현세자가 병으로 앓아눕게 된 것입니다.
이전부터 건강이 안 좋던 소현세자는 봉림대군과는 달리 몸이 자주 아팠고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더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누워만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소현세자는 꼬박 한 달이 넘는 기간 병상에 누워서 지내게 됩니다.
4. 봉림대군,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명나라군과의 전쟁터에 나가 청나라의 막강한 힘을 직접 목격하다
1638년 10월, 또다시 왕자일행들이 볼모생활을 하던 심양관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됩니다.
'대군이 서쪽을 가는 것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황제께서 친히 가시는데 세자도 마땅히 수행해야 하니 장비를 다스리고 기다리십시오'
<심양장계>
즉 청나라와 명나라와의 전쟁터에 소현세자를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봉림대군이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대신 가기를 청하고자 하니 즉시 정명수를 불러들여 직접 말하시오'
<심양장계>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의순공주
봉림대군이 형 소현세자의 몸이 좋지 않으니 명과의 전쟁터에 대신 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청나라 황제는 봉림대군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청나라 황제도 역시 쇠약한 소현세자가 전쟁터에서 화를 입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섭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봉림대군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 청나라 군대의 중심은 바로 '기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승마술과 무예로 달련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서 명나라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본 것입니다.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 군대에 왕으로 섬겨왔던 명나라 군대가 처참히 짓밟히는 모습을 본 봉림대군은 이제 세상의 힘이 청나라로 기울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봉림대군은 지금껏 의심해마지 않던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이변을 목격한 후 두렵고도 놀랐을 것입니다.
이후 봉림대군은 전쟁터에서 무사히 심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군사력부터 투항하는 명나라군사들의 모습까지 더 이상 명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들려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소현세자도 명나라와의 전쟁터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가며 청나라의 힘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1644년 5월 2일, 조선이 그렇게 오랑캐라고 여기면서 무시하던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점령해 버립니다.
5. 봉림대군,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가던 중 형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사망 소식을 듣다
이후 왕자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습니다.
드디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 둔 이유는 명나라와 조선의 내통을 막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망하게 되고 볼모로 잡아둘 이유가 없어지자 1644년 11월 11일, 청나라황제는 형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1644년 11월 20일, 형 소현세자의 북경을 떠나 조선으로 향합니다.
다만 봉림대군은 소현세자가 떠난 북경에서 5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청나라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시간을 두고 차례로 왕자들을 조선으로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형 소현세자가 떠나고 5개월 후인 1645년 3월 26일 , 봉림대군은 북경에서 출발해서 1645년 5월 14일에 조선에 도착합니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에서의 약 8년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봉림대군의 표정은 기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낯빛은 어두운 데다 어딘가 슬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에 도착하기 전 봉림대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청나라에서 동거동락했던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비보였습니다.
봉림대군이 소현세자 다음으로 귀국길에 오른 지 한 달여 만에 일이었습니다.
형 소현세자의 죽음뿐만 아니라 봉림대군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 또 있었습니다.
형 소현세자 죽음을 둘러싼 해괴한 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
바로 아버지 인조가 형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소문이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소현세자2
6.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봉림대군이 없던 조선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소현세자 복귀 5개월 전인 1644년 11월 20일, 귀국길에 오른 소현세자는 추운 겨울 약 1,000km 이상의 먼 거리를 이동합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 조선에 도착합니다.
추운 날 긴 여정을 달려오느라 몸상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북경에서 출발할 때부터 좋지 않았던 소현세자의 병세는 귀국 후에도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벽 내내 숨이 차고 두통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집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의원들이 온갖 탕약을 바쳐도 소현세자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그때 한 내의원 의관이 소현세자를 진맥 하더니 병명을 내립니다.
'학질'이었습니다.
당시 소현세자가 걸린 '학질'은 지금의 '말라리아' 증상과 비슷한 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열, 설사, 구토 등을 일으키는 전염병이었습니다.
아픈 아들 소현세자를 보다 못한 인조는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한 의원에게 세자의 병을 치료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는 바로 침술 전문 의원 '이형익'입니다.
이형익은 충청도 지역에서 기묘한 침술로 아주 유명했던 의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형익의 침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번침'
'번침'은 침을 놓은 주변에 뜸까지 더해 치료하는 의술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형익의 침술이 유명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저주를 받아 몹쓸 병에 걸렸을 때, 이형익의 침을 맞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인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원 이형익에게 세자의 치료를 맡겼을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처음 이형익의 침을 맞은 것은 1645년 4월 24일 새벽 3시경이었습니다.
1차 치료 후 소현세자의 병세에 차도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645년 4월 25일 새벽 3시경 이형익은 전날과 같은 자리에 침을 또 놓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침을 맡고 난 다음날 아침, 소현세자가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더니 두꺼운 솜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립니다.
펄펄 끊는 열과 오한에 시달리기를 반복하던 소현세자는 그날 정오 창경궁에서 돌연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시신을 염습하던 날, 사망한 소현세자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소현세자의 시신이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눈, 코, 입, 귀등 온갖 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고 온몸이 검게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사망한 듯하다는 목격자의 증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허망하게 아들을 잃게 된 인조는 곡기까지 끊으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괴이한 침술로 세자를 죽게 한 의원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칩니다.
이에 인조는 곧바로 어명을 내립니다.
'(이형익을)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인조실록>
당시에도 치료를 하다 사람이 죽는 사고가 벌어지면 당연히 법에 따라 심문을 하고 처벌해야 마땅한데 인조가 이형익의 죄를 묻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신들이 장례절차에 따라 소현세자의 관을 모실 '찬실'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인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찬실은 설치하지 말도록 해라!'
아버지 인조가 직접 나서서 아들의 장례를 간소하게 진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형익은 인조의 전담 주치의였습니다.
무려 12년 간 인조 가까이에 있었던 측근이었던 것입니다.
7. 소현세자 죽음의 배후에 인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봉림대군이 조선에 와서 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끔찍한 소문은 정말 사실일까요?
왕자 일행이 처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때, 인조는 매일매일 그 아들들을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왕자들이 청나라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아들들이 청나라와 가까워질수록 인조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의심들이 쌓여갔습니다.
조선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가장 먼저 아버지 인조에게 달려가서 청나라에서 챙겨 온 진귀한 물건들을 펼쳐 보이면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기쁜 얼굴로 청나라 황제가 준 선물이라면서 인조 앞에 '벼루'를 꺼내보였습니다.
선물을 본 인조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인조는 분노로 이성을 잃고 아들이 건넨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고 합니다.
사실 이 벼루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에 수록된 야사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당시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소문이 났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소현세자가 조선에 온 지 두 달 만에 사망했으니 모종의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서 사람들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이 있다고 의심을 한 것입니다.
소현세자 죽음의 배후에 인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인조의 혐의를 인정하는 입장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정황증거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사건이 발생된 이후에 아버지이자 국왕인 인조가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곡기도 끊을 만큼 슬퍼했던 아들의 죽음이라면 당연히 수사를 확대하고 꼼꼼하게 했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덮으려고 했던 인조의 행동들을 놓고 볼 때, 인조의 사건 가담 정황이 높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적어도 인조가 사건에 대해 애초에는 몰랐을지라도 묵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는지 아닌지는 기록상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현세장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8. 봉림대군, 아버지 인조를 두려워하다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형의 죽음에 아버지 인조가 가담했다는 끔찍한 소문을 들은 봉림대군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봉림대군의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 또한 소현세자처럼 청나라 관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었고 그들과 가까이 지냈던 것입니다.
혹시 아버지 인조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 탐탁지 않게 여기면 본인도 형 소현세자처럼 죽데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봉림대군은 이에 더욱더 조심하며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는 본인의 사가로 돌아가 조심하며 생활했습니다.
9. 봉림대군, 아버지 인조의 뜻에 따라 형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 자리에 오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봉림대군이 조선에 돌아온 지 약 두 달 후, 조용히 살고 있었던 봉림대군이 아버지 인조와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봉림대군이 아버지 인조에게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갑자기 신을 세자의 자리에 올리시는 전교를 내리시니... 부득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말씀을 드립니다...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인조실록>
당시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이 원손으로서 세자 수업을 9년째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조가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인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을 다음 후계자인 세자로 앉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조가 적장자 원칙을 어기고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인조의 나이가 50세로 건강도 좋지 않아 당시 10살인 원손이 어리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거절한 것입니다.
'세조께서는 원손에게 자리를 전하지 않고 예종에게 전하였는데도 신하들이 이의가 없었으니 그렇다 그들은 모두 불충한 자들인가?'
<인조실록>
제발 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는 봉림대군의 요청에 인조는 맏형이 죽으면 동생이 계통을 잇는 당시에는 통용되지 않던 177년 전의 세조의 전례까지 들며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고집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세조2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인수대비
하루아침에 왕세자 후보가 된 봉림대군은 첫 번째 상소를 올리고 3일 뒤 또다시 상소를 올립니다.
'막중한 후사의 자리를 일개 불초한 신에게 부탁하시니, 이것이 어찌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만큼만 어려울 뿐이겠습니까'
<인조실록>
봉림대군은 자신이 다음 왕의 대를 이을 세자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임을 말한 것입니다.
봉림대군은 제발 명을 거둬달라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겠다는 인조의 뜻은 너무나도 확고했습니다.
결국 봉림대군은 인조의 뜻대로 1645년 9월 27일, 세자에 책봉됩니다.
10. 봉림대군, 불안한 세자자리에 노심초사하다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의 선택으로 다음 왕위 후계자 자리에 올랐지만 봉림대군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든 봉림대군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봉림대군의 동생인 '인평대군'이었습니다.
만약 봉림대군이 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사게 되거나 왕세자감이 아니라고 낙인이 찍히면 왕세자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봉림대군은 아버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혹시라도 말실수라도 할까 봐 술까지 끊습니다.
봉림대군은 그렇게 인조의 눈치를 살피며 종종 불안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11. 봉림대군, '사질'에 걸렸다며 이형익의 침을 맡으라는 인조의 권유를 거부하다
그런데 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된 지 2개월 후인 1645년 11월, 봉림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며칠 쨰 감기로 고생 중인 봉림대군의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곧장 의원을 보냅니다.
아픈 봉림대군은 바로 소현세자에게 침을 놨던 의원 이형익을 마주합니다.
봉림대군의 맥을 짚은 이형익은 심각한 표정으로 봉림대군의 병명이 '사질(邪疾)'이라고 진단합니다.
사질은 '저주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깜짝 놀란 인조는 저주에 효험이 있다는 이형익의 침을 맡으라고 권유합니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권유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감기이옵니다! 어찌 사질이겠습니까?'
화들짝 놀라 이 말을 한 봉림대군은 이형익의 침을 맞지 않고도 씻은 듯 병이 낫습니다.
12. 인조, 소현세자빈 강 씨 역모죄로 몰아 사약을 내리고 소현세자의 아들 셋은 제주도로 유배 보내다
그리고 사질 소동 4개월 후인 1646년 3월, 아버지 인조가 죽은 형 소현세자의 아내 세자빈 강 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합니다.
인조가 먹을 전복구이에 누군가 독을 탔는데 인조가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세자빈 강 씨였던 것입니다.
인조는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며느리 세자빈 강 씨를 범인으로 몰아 죽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의 비정한 칼부림은 소현세자빈 강 씨가 죽고 난 다음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소현세자빈 강 씨의 세 아들을 죄인의 자식이라며 제주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후 유배지에서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목숨을 잃습니다.
인조는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소현세자 가족을 죽인 것일까요?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해서 앉힌 이상 봉림대군 앞날에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은 소현세자가 남긴 세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봉림대군을 세운 이상 인조는 봉림대군의 안전을 위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까지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봉림대군은 이렇게까지 하는 아버지 인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13. 봉림대군, 조선의 왕 '효종'이 되다
그렇게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까지 죽음을 맞이하고 6개월의 시간이 흐른 1649년 5월 8일, 봉림대군은 살얼음판 같던 왕세자 생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인조가 죽은 후 봉림대군은 왕세자에서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효종의 제1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의 왕으로 인정받고 전란으로 황폐화된 민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4. 효종, 김자점을 버리고 조정에 필요한 인재인 '산림'들을 선택하다
즉위하고 1개월 후 효종은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김자점의 죄는 온 나라 사람이다 알고 있는데 어찌 신이 홀로 모르겠습니까... 그대로 관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관원의 관직을 교체하는 일)하소서'
<효종실록>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일하는 김자점과 도저히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사직을 해달라며 신하들이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김자점은 영의정으로 선왕이었던 인조의 최측근이자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때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오르는 데 일동 공신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영의정 김자점은 선왕 인조의 공신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관원들을 노예처럼 대하며 조정의 물을 흐린 탐관오리라며 효종에게 처벌하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사실상 신하들이 효종에게 김자점의 죄를 물어 에둘러 인조의 실정을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의 이런 빗발치는 비판에 효종은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시키면 안 됐을까요?
김자점은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울 때 공을 세웠고 특히 강빈의 옥사를 주도하면서 소현세자 가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그렇다 보니 김자점의 죄를 추궁하다 보면 소현세자 가족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결과 강빈의 옥사가 김자점의 모함 때문에 죽은 것이 밝혀진다면 효종의 왕위 계승 과정이 부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어 정통성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자점의 죄를 묻게 되면 강빈 옥사사건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문제까지 호박넝쿨처럼 줄줄이 엮여서 결국은 효종 즉위의 정통성까지 문제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효종이 신하들의 사직상소를 반려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을까요?
효종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직상소를 연달아 내는 신하들은 효종에게 꼭 필요한 귀한 인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산림(山林)'이라 불렀는데 산림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인조 밑에서 일할 수 없다면서 조정을 떠났던 신하들이 주축이 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한 후 많은 산림의 학자들이 새로운 왕 효종에게 기대를 걸고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많아지니 효종도 힘이 났었고 다시 돌아온 산림을 잡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조정에 돌아온 산림들이 김자점이 있는 한 그와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면서 사직서를 내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자점을 두둔한다면 겨우 잡은 산림들을 대거 놓치게 되는 것이니 효종의 고민이 깊어졌던 것입니다.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효종의 선택은 이랬습니다.
'영의정 김자점을 파직하라!'
효종이 김자점을 버리고 조정에 필요한 인재인 산림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효종에게는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신하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15. 산림들이 소현세자빈 강 씨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자 효종은 형과 조카의 자질을 문제 삼으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다
산림들의 요구에 김자점을 파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효종이 우려하고 괴롭게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세자빈 강 씨 사건을 다시 조사하셔야 합니다!'
김자점이 소현세자빈 강 씨에게 누명 씌운 것 같다면서 세자빈 강 씨의 죽음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효종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효종은 위기에 몰리자 결국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합니다.
'선왕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결코 기업(基業/대대(代代)로 이어진 사업)을 부탁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
<효종실록>
즉 무능력한 소현세자와 그 피를 물려받은 조카는 왕이 될 인물이 아니라며 폄훼를 한 것입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의 아들 자리를 차지하고 왕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정당함 주장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형과 조카의 자질에 흠집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청나라에서 동거동락했던 형 소현세자마저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6. 효종, 청나라를 정벌해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자 한다는 '북벌론'을 앞세워 산림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위기를 넘기다
이후 효종은 산림학자들의 마음을 굳히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산림학자의 마음을 뺏기 위해 효종이 선택한 비장의 카드는 바로 '북벌론(北伐論/북녘 북, 칠 벌, 논의할 논)'이었습니다.
북벌론이란 조선의 북쪽에 있는 청나라를 정벌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같고자 한 정책입니다.
청나라에게 굴복한데 큰 불만을 가진 산림의 학자들에게 자신은 청나라에 굴복한 아버지 인조와 청나라와 친하게 지냈던 소현세자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확실한 한방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효종은 망가진 조선의 국방시스템을 재정비하고 군대를 다듬는 일에 몰두합니다.
효종에게 있어서 가장 불안했던 것이 '왕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변에 보호막을 치려 군대를 키우려고 했고 그 군대를 키우는 명분으로 북벌론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북벌론은 청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왕권 안정을 위한 조선 내의 정치적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조선의 국방력을 키워서 앞으로는 삼전도 굴욕과 같은 치욕을 막겠다는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이를 위해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방어력을 갖출 국방력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효종은 호서, 호남의 대동법을 부활시키며 민생안정에도 신경을 썼고 조선을 전란을 극복하려 노력을 합니다.
효종은 그야말로 성군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의순공주
그렇게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 10년이 지난 1659년 5월 4일, 평온했던 궁안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집니다.
효종이 머무는 대조전에 가까워질수록 조정 대신들의 표정은 급격히 나빠집니다.
효종의 거처에서 지독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딩시 효종은 종기 때문에 침을 맞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효종에게 침을 놓던 의관이 실수로 효종의 혈을 잘못 찔러 큰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효종의 몸에서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고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고 어떠한 처방에도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형 소현세자처럼 침을 맞다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효종의 나이는 40살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을 겪고 8년의 볼모생활까지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효종, 형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갑자기 왕위에 올랐던 그의 삶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와 같이 불안함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효종은 자신이 처한 험난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북벌론을 제시하며 나라의 안정을 찾고 백성들을 돌보려고 노력한 왕이었습니다.
<출처: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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