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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공민왕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꿈꿨지만 권력을 탐하여 처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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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공민왕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꿈꿨지만 권력을 탐하여 처형당하다

1. 노비로 살게 된 신돈의 탄생

고려 계성현
고려 계성현

1300년대 초, 현재 경상남도 창녕인 고려의 계성현 '옥천사'라는 절에서 갓 태어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이때 옥천사라는 절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신돈'이었습니다.

옥천사 노비였던 신돈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러 온 신 씨 성을 가진 한 유지와 사랑에 빠져서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신돈은 어머니가 절에서 아이를 낳게 된 아이였던 것입니다.

부모 중 한 명의 신분을 계승한다는 당시 신분 계승의 원칙에 따라서 신돈의 삶은 어머니의 신분을 계승하여 노비로 시작합니다.

2. 신돈, 절의 노비에서 승려가 되다

그러던 어느 날 옥천사의 노비였던 신돈은 머리를 깎고 승려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당시영산의 유지였던 신돈의 아버지가 신돈이 노비신분에서 해방이 되도록 돈으로 도움을 줬다는 의견도 있고 절에서 잡일을 하면서 승려처럼 행세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존재합니다.

승려가 된 신돈은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바로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을 가진 '편조('遍照)'입니다.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무척 높았습니다.

심지어 왕가에서도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신돈은 고려의 승려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3. 신돈, 죽은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승려 '매골승'이었다

노비에서 승려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절에서 신돈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옥천사의 일부 승려들이 신돈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승려가 되었지만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동료 승려들에게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돈은 당초 매골승(埋骨僧)이었다'

'매골승'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승려를 말합니다.

보통의 승려들은 고된 '매골승'일을 하지 않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출신이 미천했던 신돈이 보통의 승려들이 꺼리는 매골승 역할을 도맡아 하게 된 것입니다.

매골승이 된 신돈은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게 됩니다.

4. 신돈, 매골승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권문제족의 횡포를 몸소 보게 되다

그리고 이때 신돈의 눈에 포착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권문세족(權門勢族)입니다.

권문세족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토지도 불법적으로 빼앗고 착취를 일삼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러한 권문세족의 횡포를 매골승이 된 신돈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전국을 떠돌며 여러 가지 사실들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세상 곳곳에 살기 힘든 백성들이 넘쳐나는 참혹한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5. 신돈, 부조리한 세상의 개혁을 위해 고려의 왕 '공민왕'을 만나기를 꿈꾸다 

신돈은 매골승이 되어 전국을 떠돌다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신돈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름 아닌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을 만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신돈은 왕 옆에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개혁을 꿈꿨던 것 같습니다.

6. 공민왕, 신돈의 총명함에 반하다

그러던 1358년 어느 캄캄한 밤, 공포에 질린 공민왕의 목소리가 궁 안에 울려 퍼집니다.

'제발... 나를 살려주게!'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괴한이 공민왕에게 달려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퍼런 칼을 들고 공민왕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날카로운 칼로 공민왕의 목을 베어버리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립니다.

공민왕의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은 깡마른 몸에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공민왕을 위협하던 남자를 거침없이 쓰러뜨립니다.

그리고 잠시 후 공민왕은 침상에서 눈을 번쩍 뜹니다.

압박감에 시달리던 공민왕이 끔찍한 악몽을 꾼 것입니다.

공민왕은 어머니 '명덕태후'의 처소를 찾아가 간밤에 꾼 그 악몽에 대해서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이때 명덕태후의 처소에 찾아온 누군가를 보고 공민왕은 깜짝 놀라 다리가 풀려버립니다.

'마침 김원명이 신돈(辛旽)을 알현시키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닮았다'

<고려사>

공민왕이 꿈속에서 봤던 남자와 꼭 닮은 신돈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게다가 공민왕은 신돈과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니 그의 총명함에 반하기까지 합니다.

공민왕은 여러 차례 신돈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함께 불교의 이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가까워지게 됩니다. 

공민왕은 자신의 눈앞에 운명적으로 나타난 승려 신돈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7. 신돈은 어떻게 김원명과 함께 운명적으로 공민왕을 만날 수 있었던 걸까요?

김원명은 공민왕이 기철과 친원세력을 제거할 때 이를 도왔던 공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공민왕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매우 가깝고 신임하는 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돈은 김원명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요?

신돈은 매골승으로 떠돌다 우연히 김원명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그때 공민왕과 김원명이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엄청난 불교 신자였던 공민왕은 절에도 많이 다녔는데 김원명의 소개가 아닌 절에서 신돈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 데려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8. 신돈,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해 공민왕의 마음을 사로잡다

오랜 매골승 생활을 하며 거리를 떠돌던 그 경험 때문이었는지 신돈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자 했던 공민왕의 마음과 처지를 신돈은 아마도 잘 읽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민왕이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말하는 총명한 신돈이 자신을 지지할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던 공민왕에게는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자신과 말이 잘 통하는 신돈을 점점 더 총애하기 시작합니다.

공민왕이 아내인 노국국주 이외에 스스럼없이 말을 터놓는 든든한 파트너를 얻게 된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공민왕과노국공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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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하들, 신돈을 가까이하는 공민왕에게 반발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자의 대부이자 정계의 거물로 불리던 '이제현'이 공민왕을 찾아옵니다.

이제현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골격이 옛날 흉악한 자들처럼 생겨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이제현은 흉악한 골상 즉 관상을 핑계로 신돈을 비난합니다.

또 다른 신하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까까머리는 국가를 반드시 어지럽힐 자입니다!'

신하들은 관상까지 트집 잡으며 신돈을 향해 비난을 쏟아냅니다.

10. 공민왕, 신돈을 향한 암살계획을 알고는 신돈을 구하기 위해 궁에서 떠나게 하다 

신하들의 신돈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던 어느 날, 공민왕은 신돈에게 대뜸 의미심장한 말을 전합니다.

'지금 당장 궁을 떠나시오!'

청천벽력 같은 공민왕의 말에 신돈은 화들짝 놀랍니다.

공민왕은 대체 왜 신돈에게 궁을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사실 공민왕이 누군가 신돈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암살 계획을 알게 된 공민왕이 신돈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급히 궁을 떠나 몸을 피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공민왕과 함께 나라를 바꿔볼 기회를 엿보던 신돈의 꿈은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신돈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자신을 암살하려던 이들을 피해 수도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신돈은 또다시 떠돌이 승려가 되어 고려 전국을 누비게 됩니다.

11. 공민왕, 원나라와 무인세력의 위협으로 위기에 몰리다

그런데 신돈이 등 떠밀리듯 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361년 10월, 공민왕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홍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른 이들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토에 침입합니다.

이들은 단숨에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옵니다.

원나라 말기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반원 운동, 홍건적( 紅巾賊 )들이 난(亂)이 일으켰고 고려까지 쳐들어 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고려는 이성계나 최영 같은 무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홍건적을 물리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건적의 난 이후 공민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란의 영웅, '이성계와 최영'이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갖기 원하던 공민왕에게 큰 위협으로 성장한 무인 세력은 그만큼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이어 새롭게 성장하는 무인세력까지 경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12. 공민왕, 또 하나의 보호막 아내 '노국공주'를 잃다 

게다가 공민왕이 의지하던 보호막이 또 사라지게 된 사건이 생깁니다.

1365년 3월 8일, 원나라의 공주이자 공민왕의 곁에서 그를 믿고 지지해 주던 아내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흔적이 남은 궁에 머물며 아내를 기억하려 그리운 마음에 초상화까지 그립니다.

그리고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밤낮으로 보고 또 봅니다. 

심지어 초상화를 앞에 두고 식사까지 하거나 눈물까지 흘리며 노국공주를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대로 계속 슬픔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서 정치적인 방패가 되어준 아내 노국공주가 사망한 이상 원나라에서 언제든 무력으로 자신을 폐위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왕위가 위태로울 수 있는 위기였던 것입니다.

13. 공민왕, 친원세력이 많았던 당시의 권문세족의 눈을 피해서 개혁을 대신해 줄 대리인으로 '신돈'을 생각하다

존재만으로 공민왕에게 위협이 되는 권문세족과 전란으로 공을 세우면서 커진 무인 세력, 이들의 권세를 누르기 위해서는 그 어느 곳에서든 공민왕의 편이 되어줄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공민왕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다름 아닌 7년 전 궁을 떠났던 신돈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친원세력이 많았던 당시의 권문세족의 눈을 피해서 개혁을 대신해 줄 대리인이 필요했습니다.

대리인으로서 신돈이 가장 적합한 이유는 정치적 관점에서 떠돌이 승려였기 때문에 주변에 세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신돈을 왕의 대리인으로서 공민왕의 명을 철저히 이행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떠올렸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우고 뒤에 숨어 원나라의 의심을 피하면서 개혁을 단행해 왕권을 강화할 것을 꿈꿨던 것입니다.

14. 신돈, 고려최초' 승려 출신 정치인'이 되다 

이후 공민왕은 암살을 피해 궁을 도망쳐 이곳저곳을 떠돌던 신돈의 거취를 수소문합니다.

그리고 어렵사리 찾은 신돈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입니다.

1365년 5월, 7년여 만에 궁으로 돌아온 신돈에게 공민왕은 간절한 개혁의 마음을 담아 이 역할을 맡아달라고 청합니다.

바로 '왕사(王師)'입니다.

왕사란 바로 '왕의 사부'를 합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자신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왕사는 왕에게 학문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함께 국정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또한 왕이 중요한 정책을 펼칠 때 자문을 구하기도 합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왕의 사부가 되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신돈을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로 삼았다'

<고려사>

공민왕이 신돈에게 무려 7개의 관직을 동시에 내려준 것입니다.

고려에 승려출신의 정치인이 탄생하는 전무후무한 순간이었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내려준 7개의 관직 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영도첨의사사사'는 행정부의 총책임자를 말합니다.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감찰사사'는 국정이나 신하들을 감찰하는 오늘날 감사원장 역할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관리들을 감독하고 인사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제조승록사사'는 불교를 총섭하는 수장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판서운관사'는 음양천문관의 총책임자로 요즘으로 치면 기상청장 격의 권한입니다.

그 외 3개의 관직은 일종의 명예직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이렇게 고려의 주요 관직을 모두 신돈에게 몰아준 것입니다.

15. 신돈, 공민왕에게 자신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서'를 써달라고 요구하다

7개의 관직을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내리는 결정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문벌과 귀족이 영위해 오던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려였던 신돈이 고려 정치판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한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칼자루를 쥐어주고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 전면에 나서서 개혁에 힘써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돈은 공민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찍이 듣건대, 국왕과 대신이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고 하니 삼가며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이에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사실 공민왕과 신돈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신하들의 반발이 거셌고 심지어 신돈을 향한 암살 계획까지 있어 자칫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공민왕을 대신해 신돈이 정치 전면에 나설 경우, 신하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뒤에서 신하들이 신돈을 이간질하는 내용을 믿어서는 안 되며 신하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고 신돈은 공민왕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고 안전하게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있도록 공민왕에게 '확실한 나의 보호막이 되어 달라'라고 요구한 것이며 이런 약속이 보장된다면 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왕은 이런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그 직을 맡을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드러내는 신돈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안전을 보장한다'며 다시 관직을 내립니다.

그러자 신돈은 공민왕에게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공민왕에게 자신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서' 즉 '각서'를 써달라고 한 것입니다.

'맹세서를 써달라'는 예상치 못한 신돈의 요구를 들은 공민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신돈이 보는 앞에서 몸소 붓을 잡고 순순히 맹세서를 써주었고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고려사절요>

공민왕은 신하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신돈의 방패막이되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각서를 써줍니다.

공민왕의 약속까지 받아낸 신돈은 결국 자신을 대신해 정치 일선에 나서 달라는 공민왕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공민왕은 뒷배가 없는 신돈을 이용해 고려를 개혁하려 했고 신돈은 공민왕이 쥐어준 권력으로 출세도 하고  살기 힘든 세상 제대로 뒤집어 개혁을 이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상이몽이었지만 두 사람의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져 신돈은 공민왕의 오른팔이 됩니다.

16. 신돈, 자기를 비방하는 자는 모두 처단하다

근본도 없는 떠돌이 승려가 갑자기 튀어나와 공민왕을 등에 업고 개혁의 칼날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상황, 이 상황을 지켜보는 신하들의 반응을 어땠을까요?

왜 신돈에게 권력을 줘서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게 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느냐며 공민왕에게 신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이런 신하들의 격한 반발을 들은 공민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공민왕은 신돈을 지켜주겠다는 맹세서를 썼기 때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합니다.

그렇다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 신돈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를 비방하는 자는 모두 중상모략하여 바다에 사장하였다'

<고려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없는 죄까지 만들어 바다에 수장시켜 죽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옥사(獄事)를 꾸며냈다. 관적에서 삭제하여 일반민으로 삼았다. 모두 그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머리를 깎아 산사로 내쳤다'

<고려사>

암살을 피해 궁을 몰래 빠져나갔던 과거의 신돈은 이제 잊으라는 듯, 아무도 자신의 말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자들을 왕에게 불충을 저질렀다면서 거짓 옥사를 꾸며내거나  신분과 재산, 관직을 모두 박탈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절에 보내버리기까지 합니다.

17. 신돈, '최영'을 왕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했다며 모함해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리다

그리고 이때, 신돈의 날카로운 레이더망에 제대로 걸려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개성으로 쳐들어온 홍건적을 쫓아내는데 공을 새운 '최영'이었습니다.

최영이 몇몇 환관들과 결탁해서 왕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했다며 신돈은 거짓으로 최영을 모함해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립니다.

공민왕은 신돈의 말만 듣고 공신 무장 최영을 내친 걸까요?

사실 최영은 당시 무인 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의 입장에서도 세력이 크고 무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최영이 굉장히 껄끄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차에 공민왕은 마침 신돈이 최영을 모함한 틈을 타서 기다렸다는 듯 신돈을 이용해 최영을 숙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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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돈, 인사권을 활용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 조정에 꽂아 넣다

원나라로부터 공민왕을 지켜온 공신도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신도 신돈의 서슬 퍼런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나가떨어지면서 조정이 텅 비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빈자리는 누구로 채워졌을까요?

'스스로는 현량한 사람을 뽑는다고 칭하였으나 명단이 나오고 보면 뽑힌 자들이 모두 그가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신돈의 수많은 관직 중 '판감찰사사'가 가진 권한인 인사권을 활용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조정에 꽂아 넣었던 것입니다.

신돈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공민왕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심지어 공민왕은 신돈에게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신돈은 왕의 대리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신돈의 입지를 더욱 강화해 줍니다.

물론 공민왕의 의도도 있었습니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일이 잘못돼도 자기 책임이 아닌 것이라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신돈을 처음 임명할 때부터 공식적으로 왕의 대리인 자격을 넘겨줬기 때문에 공민왕은 뒤에서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돈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대신 제거해 주고 있는 상황이라 말 그대로 공민왕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19. 신돈, 자신의 여종이자 첩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을 자랑하던 신돈은 마치 왕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위세를 맘껏 펼쳐 보입니다.

하지만 신돈이 유독 고분고분하게 대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을 알현하면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채소와 과일을 먹고 차만 마셨다'

<고려사>

신돈은 공민왕에게는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 소박한 생활을 하며 고상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서 신돈은 '반야'라는 여인을 바치기로 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었으니 바로 '반야'의 정체입니다.

반야는 신돈이 아까는 여종이자 첩이었습니다.

신돈은 노국공주를 잃고 시름에 빠져있던 공민왕의 공허한 마음을 제대로 공략한 것입니다.

공허했던 공민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반야가 만약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신돈과 공민왕과 더 끈끈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신돈은 첩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쳐 공민왕과 더 가까운 관계가 돼서 고려를 더 쥐락펴락 하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0. 신돈, '탐욕'을 부리기 시작하다 

공민왕 앞에서는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소박한 생활을 이어 간 신돈은 공민왕이 없을 때는 어떤 행실을 보였을까요?

'신돈이 탐욕을 부리고 음란한 것이 날로 심해져서 뇌물로 폭주하고 집에 있을 때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제멋대로 여색을 즐겼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더 놀라운 것은 신돈의 여성 편력이었습니다.

<용재총화>라는 야사집에 신돈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신돈은 관리들의 처첩 중에 용모가 뛰어난 여인이 있으면 사소한 트집을 잡아 그 남편을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는 연통을 넣어 부인이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러 오게 했다. 신돈은 별실에 이부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용재총화>

신돈이 관리의 처첩들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어떻게든 트집 잡아서 자신의 집에 끌어들이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신돈은 승려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세속인이 됐고 더군다나 많은 권력도 얻은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신돈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데에는 당시 신돈을 반대했던 세력들이 퍼트린 부분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특히 신돈의 이야기를 고려사에 쓴 것이 조선의 유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승려였던 신돈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신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대로 기록에 실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들도 있습니다.

빈손으로 전국을 떠돌며 시체를 묻던 매골승 신돈이 이렇게 공민왕이 보지 않는 곳에서 점점 권력과 속세의 맛에 취해갑니다.

21. 신돈, 5도도사심관이 돼서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권력을 통제하겠다는 야욕을 보이지만 공민왕이 거절하다  

그리고 신돈은 1369년 2월, 자신의 지휘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바로 '5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제도를 부활하고 본인이 직접 총괄 관리 하겠다는 의사는 공민왕에게 전한 것입니다.

'5도도사심관'은 중앙의 관리가 된 지방 출신 사심관을 그 출신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이를 총괄 관리하는 관직으로 중앙의 권력이 지방까지도 미칠 수 있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신돈은 중앙 정치 세력을 장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을 사심관으로 임명한 다음 그들을 전국 곳곳으로 보내 중앙은 물론 지방권력까지 신돈이 통제하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과연 신돈의 이런 제안을 들은 공민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공민왕은 신돈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사심관이라는 관직은 각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공물을 그 지역 내에 분배를 하는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심관을 직접 신돈이 임명하겠다고 하는 것은 지방과 연계되어 있는 경제권을 장악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의 입장에서 아무리 본인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신돈이지만 이것은 선을 넘는다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신돈의 선 넘은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였고 자신이 준 권력 이상을 원하는 신돈의 행태에 신돈을 보는 공민왕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22. 신돈과 공민왕, 5도도사심관문제와 노국공주 영정공사 문제로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다 

5도도사심관제도를 부활시켜 중앙뿐 아니라 지방까지 고려 전체의 경제권을 장악하려 했던 신돈의 계획이 무산되고 난 후 1년의 시간이 지난 1370년, 신돈이 공민왕의 뜻에 결사반대를 외치는 일이 생깁니다.

그동안 공민왕의 환심을 사기 바빠 공민왕에게 듣기 좋은 말만 일삼던 신돈이 공민왕이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이야기를 던진 것입니다.

'전하, 노국공주 영전 공사를 당장 중지하여야 합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신돈이 공민왕의 애도가 담긴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를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사실 신돈도 공민왕에게 영전공사를 반대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370년 영전공사 도중에 백성 26명이 압사당하는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노국공주 추모사업으로 국고는 탕진된 지 오래였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까지 잃고 있는 상황에서 공민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물론이고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까지 나서서 공민왕을 말릴 정도였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명색이 왕의 사부인 신돈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신돈 역시 공민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승으로서 노국공주 영전 공사 중단이라는 충언을 전한 것입니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당연히 신돈이 괘씸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5도도사심관 제도를 이야기할 때부터 공민왕은 신돈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이 가장 아꼈던 아내 노국공주가 죽은 후 영정 공사 중단을 요청하는 신돈에게 '그가 진짜 자신의 편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나오게 됩니다.

신돈은 이렇게 공민왕의 역린을 건드리며 끈끈했던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23. 신돈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공민왕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면서 '친정'을 선포하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370년 7월, 전라도를 시찰하고 온 한 관리의 행동 때문에 궁궐이 발칵 뒤집어집니다.

공민왕이 그야말로 엄청난 분노를 쏟아낸 것입니다.

바로 시찰을 하고 온 관리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을 먼저 찾아가 그에게 보고를 한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공민왕은 곧바로 자신을 무시한 그 관리를 붙잡아 곤장형을 내립니다.

이쯤 되면 신돈도 이전과는 다른 공민왕의 태도에 위험을 직감하게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돈이 공민왕의 눈치를 보게 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이 당시는 오랜 기간 동안 고려를 괴롭혔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들어서던 '원명 교체기'였습니다.

새롭게 들어선 명나라도 원나라처럼 고려와 사대 관계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공민왕 역시 원나라처럼 명나라와도 충돌을 피하고 왕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서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기로 합니다.

그래서 명나라가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책봉하려던 그때, 공민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를 듣게 됩니다.

명나라 사신이 신돈을 '상국신돈'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상국신돈(相國辛旽)에서 '상국'이란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이렇게 삼정승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심지어 명나라 사신들은 신돈에게 비단까지 하사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황제의 인장이 찍힌 조서까지 함께 신돈에게 전달됐다고 합니다.

새롭게 사대한 명나라에게마저 신돈의 위상이 인정받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신돈이 역모를 꾸미진 않을까?'라고 하는 공민왕의 신돈을 향한 그동안 모락모락 피어나던 의심이 확신이 돼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얼마 후, 신하들 앞에서 공민왕은 아주 뜻밖의 발표를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선왕들은 모두 몸소 정무를 듣고 처리하였으니... 각기 나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게 하라'

공민왕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면서 '친정'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어서 공민왕은 즉각 신돈에게 자신이 직접 내린  최고의 권력이었던 왕의 대리인 자격까지 박탈해 버립니다.

갑자기 모든 권력을 잃은 신돈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왕이 결정한 이상 신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신돈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4. 공민왕, 신돈을 역모죄로 유배 보내고 즉결 처형하다

공민왕이 친정을 선언하고 약 9개월이 지난 1371년 7월, 공민왕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익명의 고발이 들어옵니다.

'흉악한 모의를 모두 알게 되어 몰래 이를 기록하였다'

'흉악한 모의'는 '역모'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모를 모의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신돈'입니다.

우연히 신돈의 역모 계획을 눈채챈 한 관리가 이를 공민왕에게 밀고한 것입니다.

신돈의 역모 계획을 알게 된 공민왕은 역모 고발을 듣고 단 사흘 만에 신돈을 지금의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신돈은 순식간에 대역죄인이 되어서 수원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배지인 수원에 도착한 신돈은 누군가를 급히 불러냅니다.

다름 아닌 공민왕이 보낸 신하였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하러 온 것입니다.

신돈은 '늦게나마 공민왕이 자신의 진심을 들어주려고 하는구나' 하면서 기뻐하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신돈에게 곧장 서슬 퍼런 칼날이 휘둘러집니다.

공민왕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신돈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역모 혐의로 즉결 처형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돈이 죽고 공민왕은 한 가지 명을 내립니다.

목이 베어 죽은 신돈의 사지를 절단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잘린 목은 개경 도성의 숭인문에 내걸렸고 그의 몸, 팔, 다리는 갈가리 찢겨 여러 도에 보내져 전시됩니다.

그렇게 신돈은 죄인으로 고려 전체에 철저히 낙인찍힌 것입니다.

신돈은 진짜 역모를 계획한 것일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것도 두 가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신돈이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신돈과 공민왕 사이가 멀어진 것을 틈타 모종의 세력이 익명서 같은  것을 만들어 신돈을 제거하려 했다고 보는 쪽도 있습니다.

미천한 승려에서 공민왕의 오른팔이 되었던 신돈, 인생역전 드라마를 꿈꿨던 신돈의 시대는 그가 권력을 잡은 지 6년여 만에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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