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우게 한 메디치 가문의 명암 2
28. 로렌초, 엄청난 돈을 문화와 예술에 투자해서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일조하다다
로렌초가 나폴리로 가서 피렌체를 구했다는 사실은 곧 이탈리아와 유럽은 물론 이집트에까지 알려집니다.
이후 각국의 사절단들이 메디치를 찾아옵니다.
위 그림의 '기린'은 이집트의 술탄이 보낸 값비싼 선물이었습니다.
기린은 당시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메디치 가문의 화가였던 '조르조 바사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특히 미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16세기 조르조 바사리가 쓴 '미술가 열전'이라는 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사리는 메디치 가문의 공식 전담 예술가였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의 의도에 따라 기린을 더 과장해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대외 선전용 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전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쓸어 담았던 메디치 가문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엄청난 돈을 문화와 예술에 투자해서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활동했던 때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 란 Re(다시)+naissance(탼생)의 합성어로 이탈리아에서 서유럽까지 확대된 그리스, 로마 고전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한 문화운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던 이때 메디치 가문의 투자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던 15세기, 할아버지 코시모에게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로렌초는 예술가들에게 마음껏 투자합니다.
당시 재료비까지 포함해서 수천, 수억 원의 비용을 주고 예술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매달 일정 비용을 주면서 돈걱정 없이 예술활동을 하도록 후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르네상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메디치가문1
29. 메디치 가문은 왜 문화 예술에 투자를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로렌초가 어떤 목적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것일까요?
사실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였고 재능 있는 예술가라고 판단하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로렌초에게 예술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오타비오 바니니 <위대한 로렌초와 당대의 예술가들>이라는 그림 속에는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로렌초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도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천재화가로 불리는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로렌초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알아보고 고급 인문학 강의를 받게 해 준 것은 물론이고 매달 500만 원 정도의 돈을 지원해 주면서 마음껏 작업하도록 해줍니다.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에게 인체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시체까지 제공하기도 합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능력을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로렌초와 미켈란젤로의 첫 만남에 대한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2살에 조각 영재로 뽑혀서 메디치 가문 정원에서 그리스 신화 속 '사티로스' 신을 조각하고 있을 때 우연히 그 옆을 로렌초가 지나가면서 '늙은 사티로스인데 이가 너무 건강하구나' 한 마디 던집니다.
이때 미켈란젤로가 그 말을 듣고 조각을 다듬어 노인처럼 만들었는데 이를 보고 로렌초가 깜짝 놀랐다고 하며 사티로스 조각 이후에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후원을 본격적으로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집세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말을 듣고 수정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30. 메디치 가문이 의뢰를 가장 많이 한 예술가는 누구일까요?
바로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화가이자 로렌초가 친구로 삼았던 '보티첼리'입니다.
비너스는 당시 피렌체에서 최고의 미녀였던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여자였는데 보티첼리가 시모네타를 짝사랑 중이었다고 합니다.
시모네타는 유부녀였는데 그녀는 로렌초의 남동생 줄리아노와 불륜관계였습니다.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모네타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보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피치 미술관에는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전시실에 걸쳐 보티첼리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31. 메디치 가문, 화가를 후원하며 화가가 아닌 메디치의 의도가 담긴 그림을 제작하게 하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와 작품을 계약한 후 그림의 주제와 등장인물은 물론 각각의 인물들을 어떤 크기로 그릴 지 또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등에 대해서까지 합의하곤 했습니다.
그림에 화가가 아닌 메디치의 의도가 담기는 것입니다.
15세기는 화가보다는 주문자의 의도가 그림에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보티첼리가 그린 그림 중에는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프리마베라'는 이탈리아말로 '봄'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미술사에서도 해석이 분분한 그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각으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메디치 가문가문의 시선에 이 그림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꽃이 유독 많아 보이는데 오른쪽에 두 여신은 꽃의 여신 '플로라'와 봄의 여신 '클로리스'입니다.
꽃과 봄의 여신은 꽃의 도시인 피렌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맨 왼쪽에는 전령의 신이자 상업과 무역의 신 헤르메스가 있습니다.
피렌체에서 상업과 무역하면 메디치 가문이 떠오르게 되는데 상업과 무역의 신 헤르메스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피렌체에 어두운 시대가 가고 메디치 가문이 이끄는 새로운 시대, 즉 봄이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의도가 아주 노골적인 드러난 보티첼리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입니다.
사실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 가족사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예수의 발을 닦고 있는 첫 번째 동방박사는 '코시모 데 메디치'이고
붉은 망토를 걸친 두 번째 동방박사는 '피레로 데 메디'입니다.
그리고 암살 사건 때 죽은 로렌초의 남동생 줄리아노의 모습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렌초는 왼쪽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결국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가족사진'이었던 것입니다.
32. 사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음악과 발레에도 관심이 많았다
1600년대,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이 있었고 축하연이 피렌체에서 열렸는데 바로 이때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음악가들이 대중 앞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음악이 프랑스와 유럽에 전파돼서 지금의 오페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발레도 메디치 가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카레리나 데 메디치'라는 여성이 프랑스왕 앙리 2세와 결혼을 했는데 그 아들인 앙리 3세 때 카테리나가 발레를 만들라고 지시해 1581년 최초로 발레 공연이 이루어졌다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 예술의 대부분이 메디치 가문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메디치 가문은 현대 예술의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줍니다.
33. 우리가 몰랐던 메디치 가문의 또 다른 후원, 르네상스 학문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야는 예술뿐만이 아닙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가 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학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메디치 가문의 또 다른 후원이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르네상스는 단순한 예술 사조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정신의 부활'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메디치 가문이 설립하고 후원한 중요한 클럽이 하나 있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였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란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문과 문학을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이때 메디치 가문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플라톤을 연구하는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기도 했고 희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 일명 '책 사냥꾼'까지 고용했습니다.
책 사냥꾼은 직업은 아니었지만 돈을 주고 유럽과 멀리 비잔티움 제국까지 뒤져서 흩어져 있는 고전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학문 후원에 얼마나 열의를 보였는 알 수 있는 곳이 피렌체에 있는데 바로 유럽 최초의 공공 도서관 '라우렌치아나'입니다.
과거에는 책이 비싸서 도서관은 왕족이나 귀족에게만 허용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도서관은 모든 시민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도서관은 내부도 아름답지만 특히 입구의 계단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바로 이 계단을 '미켈란젤로'가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계단에 설계 의도를 숨겨놨는데 계단은 무척 어둡고 계단 안쪽 도서관 내부는 밝아 보이도록 해서 '어둠에서 광명으로'라는 콘셉트로 설계했다고 합니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는 1만 권 이상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이곳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 도서관이라고 평가받는 의미 있는 공공 도서관입니다.
사실 메디치 가문은 공공 도서관뿐만 아니라 과학 아카데미로 설립해서 과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천문학자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는데 그를 초빙해서 오일과 에탄올의 밀도 차를 이용한 최초의 온도계를 탄생시킵니다.
그 외에도 16세기 메디치 가문은 미술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미술가들을 키우기도 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입니다.
이곳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볼 수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은 이렇게 적극적을 학문을 후원하면서 메디치가 학문적 소양을 갖춘 뼈대 있는 가문임을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34. 탐욕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을 염려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기부하다(두오모 성당 돔 지붕, 산 마르코 수도원 건설 및 치장을 위해 후원)
메디치 가문은 돈과 권력, 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지만 사실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탐욕스러운 자의 심장을 찾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라는 그림 안쪽을 자세히 보면 옆방에 있는 금고 속에 은행가의 붉은색 심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상에 재물을 축적하지 말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고 금고에 재물과 마음을 쌓아둔 이자대부업자의 탐욕을 그려낸 그림입니다.
탐욕은 당시 교회에서 규정한 7가지 죄목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가장 중하게 여겼던 죄입니다.
때문에 당시 은행업자, 이자대부업자 들은 자신들이 지옥에 떨어질까 봐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구원을 얻는 방법을 이렇게 가르쳐줬습니다.
'부당하게 얻은 이자와 이익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라. 돌려줄 이가 없으면 교회에 기부하라'
메디치 가문은 그냥 은행도 아니고 무려 당시 유럽 최고의 은행을 운영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기로 했는데 메디치 가문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하기로 했을까요?
메디치 가문은 당시 지붕이 없었던 피렌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드는데 엄청난 후원을 합니다.
두오모 성당은 압도적인 크기의 돔 지붕으로 유명한데 이 돔은 세계사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예술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돔의 지름은 약 45m로 무게 약 2.5돈을 견뎌야 하는 큰 규모의 돔을 만들 건축 기술이 부족해 오랜 기간 동안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예술가가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수직과 수평을 교차해 벽돌을 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드디어 돔 공사를 시작했지만 돈이 부족해 무려 16년간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상인들의 후원으로 도오모 성당의 돔은 완성됩니다.
실제로 메디치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업자들에게 가장 확실한 천국 가는 방법이 교회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두오모 성당뿐 아니라 피렌체 전역에 걸쳐서 성당과 수도원에 엄청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후원자가 없어서 방치되고 있었던 '산 마르코 수도원'이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산 마르코 수도원에 약 4만 플로린(약 400억)을 후원해서 15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투자는 사실 메디치 가문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수도원 증축의 대가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메디치 가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문서를 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피렌체의 아름다운 건물들에 메디치 가문의 상징들도 곳곳에 숨겨두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피렌체에 가면 곳곳에서 메디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5. 로렌초의 마지막 투자
로렌초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돈과 로비를 통해 메디치 가문에서는 두 명의 교황까지 배출합니다.
이렇게 중세시대 유럽에서 돈, 권력, 문화, 종교까지 모든 것을 장악했던 메디치 가문이었지만 후예들이 사치, 자만에 빠져버렸고 결국 막대했던 부는 점점 바닥을 드러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문의 대는 18세기 초 무렵 끊어지고 맙니다.
그 이후 마지막 상속자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메디치의 예술품들을 모두 국가에 기증합니다.
조건은 기증품 중 단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메디치 가문의 미술품은 온전히 피렌체에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동안 메디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라고 일방적으로 찬양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찬양 속에는 메디치 가문이 권모술수를 부려 권력을 장악했던 또 다른 이면이 있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사 속의 인물들과 이야기들은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하나의 면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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