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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과 신라 김춘추, 백제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 두 사람의 질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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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과 신라 김춘추, 백제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 두 사람의 질긴 인연 

1. 의자왕(義慈王) 이름에 얽힌 이야기

 

'의로울 의, 사랑 자'를 쓰는 의자왕의 이름은 '의롭고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왕들은 본명과 후대에 불리는 시호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본명은 무엇일까요?

의자왕의 본명은 '의자'입니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죽은 뒤에 그의 시호를 지어줄 신하들조차 없었기 때문에 본명과 시호가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을까요?

의자왕이 무능했기 문이었을까요?

그 진신을 알아보기 위해서 의자왕이 왕으로 재위했던 그 당시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2. 백제 의자왕, 신라 김춘추와 악연에 얽힌 이야기

의자왕은 매 전투마다 승리를 가져왔던 '정복군주'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던 삼국시대, 당시 백제 의자왕이 그중에서도 가장 노리고 있었던 적은 바로 '신라'였습니다.

'신라 전적들을 척결하고 대백제의 중흥을 이루는 사명을 잊지 말라!'

의자왕은 왜 신라를 압박하며 치열하게 공격했을까요?

백제의 의자왕에게 신라는 복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제 의자왕과 신라 김춘추 그들은 왜 서로에게 칼을 겨눴는지, 그리고 백제 의자왕과 신라 김춘추 사이의 깊은 악연 때문에  결국 백제가 멸망하게 된 사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백제 의자왕,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러 나간  첫 전투에서 40여 개의 성을 빼앗다 

7세기 중반 삼국시대
7세기 중반 삼국시대

의자왕이 31대 왕으로 즉위하던 641년, 당시  7세기 중반 삼국 시대 지도입니다.

이 시기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립하던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이때 백제가 특히 경계하던 나라는 바로 옆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신라'였습니다.

백제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하고 이듬해인 642년,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섭니다.

'가을 (음력) 7월에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성 등 사십여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한  첫 전투에서 현재 경상남도 서쪽 일대인 미후성을 비롯해서 무려 40여 개에 이르는 신라성을 빼앗은 것입니다.

4. 443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 '나제동맹'을 맺는 동맹관계였다

삼국이 서로 맞대고 있던 시기, 왜 백제는 유독 신라의 성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것일까요?

지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자주 부딪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유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복수심 때문입니다.

무려 4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생긴 원한이 있었는데 그 시작이 된 사건은 '나제동맹(羅濟同盟)'입니다.

나제동맹이란 신라의 '나'와 백제의 '제'에서 따온 말로 신라와 백제가 힘을 합쳐서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맺은 동맹입니다.

의자왕때와는 다르게 그로부터 200여 년 전인 443년, 서로 동맹을 맺을 정도로 백제와 신라의 사이는 돈독한 관계였습니다.

당시에는 두 나라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제와 신라의 공공의 적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세기 나제동맹 당시 삼국시대
5세기 나제동맹 당시 삼국시대

위 그림은 5세기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입니다.

한강유역 이남까지 한반도 대부분의 영토를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었고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지로 농사짓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가 어마어마하게 영토를 넓히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남하정책을 벌였고 당연히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견제하려 군사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5. 백제,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독차지한 신라에 복수를 다짐하다

나제동맹으로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의 영토를 빼앗게 되면 신라는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나눠 갖기로 두 나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나제 동맹 120여 년 후,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밀어내고 그토록 바라던 금싸라기 같은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게 됩니다.

6세기 신라 전성기 당시 삼국시대
6세기 신라 전성기 당시 삼국시대

위 지도는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한 이후 삼국시대 지도입니다.

그런데 오직 신라만 한강 유역의 상류와 하류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한강유역단 전체를 탐냈던 신라가 백제를 배신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둘도 없는 원수사이가 되었고 백제는 동맹을 깨고 배신한 신라에 복수를 다짐합니다.

6. 백제 '성왕', 신라군에 참수형 당하고 그 머리뼈를 신라궁궐 계단에 묻은 후 백제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다 

그리고 여기서 백제와 신라 두나라의 운명을 바꿔놓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신라의 배반에 분노한 백제군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수를 위해 신라로 쳐들어갑니다.

진격 당시 백제군은 사기를 돋우고 격려하기 위해서 '성왕'도 직접 군사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깜깜한 밤, 백제군은 지금의 충북 옥천에 있는 '관산성'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성왕 주변에 말발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점점 그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말발굽 소리에 당황한 성왕에게 접근한 이들은 바로 성왕을 노리고 매복해 있던 신라군이었습니다.

신라군의 야간기습에 성왕과 백제군은 신라군에 포위당하고 성왕은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때 사로잡힌 성왕은 신라군에 의해 목이 잘리는 형벌인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심지어 성왕이 죽은 후 신라는 성왕의 머리뼈를 신라 궁궐 계단 아래에 묻어 버립니다.

백제 성왕의 머리 위를 수많은 신라인들이 밟고 다니게 만들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백제인들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었고 이때부터 백제의 철천지 원수는 신라가 된 것입니다.

7. 의자왕, 33년 만에 태자로 책봉된 첫 번째 이유는 신라 선화공주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 때문이었다

성왕의 후손 중에는 이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했던 사람이 있았으니 바로 '의자왕'입니다.

의자왕 가계도
의자왕 가계도

성왕은 의자왕의 4대조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가문의 원한 때문에 신라의 성 40여 개를 공격하며 신라를 향한 복수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자왕의 복수까지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첫째 아들 즉 적장자였습니다.

왕으로서 꼭 필요한 정복 능력에다가 왕위 적통성까지 지녔으니 의자왕이 왕위에 쉽게 올랐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장자인 의자왕에게도 정말 긴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으니 너무나도 늦게 '태자'가 된 것입니다.

'태자'는 다음 왕이 될 후계자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자왕은 태자가 되기까지 무려 33년이 걸려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가 됩니다.

왜 의자왕은 이렇게 늦은 나이에 태자에 오른 것일까요?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씩씩하고 용감하며 대담하고 결단성이 있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한마디로 의자왕을 중국의 효심 같은 인물 '증자'에 비유까지 한 것이었고 효자라는 의자왕의 명성이 바다 건너 중국 당나라에까지 퍼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적장자이면서 모범적인 아들이었던 의자왕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태자에 자리에 오르는데 그토록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일까요?

 

바로 의자왕의 '출생의 비밀' 때문입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삼국유사>에서 전해지는 4구체 향가인 '서동요(薯童謠)' 이야기를 알아야만 합니다.

어느 날 백제의 '마'를 캐는 소년 '서동'이 어여쁘기로 정평이 난 신라 왕의 셋째 딸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서동이 바로 신라로 건너가 자신이 캔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두고 맛둥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은 거짓으로 신라의 선화공주가 서동과 몰래 만나서 정을 통한다는 염문설을 퍼트린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내용의 노래를 경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르게 한 것인데 결국 이 소식은 신라 왕실에 까지 들어가게 되고 왕실은 발칵 뒤집어지게 됩니다.

신라왕은 분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당장 쫓아내라!'

이렇게 오갈 데 없이 쫓겨난 선화공주는 소문의 주인공 서동을 찾아가고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 마를 주면서 신라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서동은 과연 누구일까요?

의자왕의 아버지이자 훗날 백제 제30대 왕이 되는 '무왕'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의자왕의 어머니는 신라의 선화공주가 되는 것입니다.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출생의 비밀과 의자왕이 태자로 늦게 책봉이 된대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백제에게 신라는 복수의 대상이었고 신라출신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의 입지는 약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8. 의자왕, 33년 만에 태자로 책봉된 두 번째 이유는 계모인 '사탁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는 견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된 대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의자왕은 왕위를 두고 백제 내에 또 다른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의자왕자의 태자 책봉을 방해한 인물은 바로 '사탁왕후'입니다.

의자왕이 장성했을 당시 무왕이 새로 맞이한 아내가 바로 사탁왕후였습니다.

사탁씨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가문 8개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쏀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탁왕후에게 아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의붓아들 의자왕자와 자신의 친아들 중 사탁왕후는 어느 쪽이 다음왕위에 오르는 것을 바랐을까요?

당연히 친아들이었습니다.

계모인 사탁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는 견제 때문에 의자왕자의 태자 책봉이 늦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보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물에 보면 사탁왕후가 탑을 세우면서 소원을 담아놓았습니다.

'대왕폐하(무왕)의 수명이 산악처럼 오래가고 보력(치세)은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무왕을 향한 사탁왕후의 기원문>

남편인 무왕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정작 아들인 의자태자에 대해서는 어떤 기원도 올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의자왕은 효를 강조하고 행실을 반듯하게 하면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 왕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9. 백제,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에 승리를 거두다

33년을 기다려 결국 태자로 책봉된 의자왕은 태자 책봉 무려 9년 뒤 무왕 42년이었던 641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백제의 왕으로 드디어 등극합니다.

그리고 즉위 후 1년 4개월 만에 신라 40여 개성을 빼앗은 성과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신라에 아주 중요한 신라 수도로 가는 길목인 '대야성'을 공격합니다.

대야성
대야성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근처로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제가 만일 대야성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까지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당연히 신라는 침략에 대비해 이 대야성을 지키는 성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을 앉혀놓았습니다.

성왕을 무참히 죽인 신라에 복수의 칼을 간 백제와 수도 경주로의 백제의 진군을 꼭 막아야 했던 신라 사이의 이 전투 상상만 해도 치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치열할 것만 같았던 대야성 전투는 너무나도 손쉽게 백제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대야성 전투에는 숨겨진 내막이 있었습니다.

백제를 찾아와 도움을 준 신라의 첩자, 신라 장수 '검일'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신라 장수 검일은 왜 백제를 도왔을까요?

검일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를 신라 대야성의 성주인 '김품석'이라는 인물이 강제로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검일은 이에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해서 신라 대야성의 식량 창고위치를 백제군에게 정확히 알려줍니다.

백제군은 대야성의 식량 창고를 불태웠고 식량 부족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신라군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손쉽게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10. 의자왕이 죽인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는,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대야성 전투 승리 후 백제군이 했던 일에 대해서 기록으로 보겠습니다.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로 보냈으며...'

<삼국사기>

의자왕은 장군 윤충을 보내 항복한 성주와 그 아내까지 목을 베어 처형합니다.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 백제가 성주와 그의 아내까지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신라 최고 권력자 김춘추(604~661)와 아주 연관이 깊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춘추는 신라 진골 신분의 왕족이자 신라의 훗날 제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정치적 실권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의자왕이 죽인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이 신라 김춘추의 '사위'였고 김품석의 아내는 다름 아닌 김춘추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의자왕은 대야성을 차지하고 성주 부부를 죽인 뒤 성왕의 복수에 성공했다면서 아주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김춘추 딸과 사위의 유골을 백제 감옥에 묻은 뒤 백제의 죄수들이 그것을 밟고 다니게 합니다.

의자왕의 복수는 김춘추에게는 또 다른 원한이 됩니다.

사랑하는 딸을 적군의 손에 잃은 아버지 김춘추의 심정이 어떠했을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생각에 멍하니 누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김춘추는 당연히 이 일을 계기로 의자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합니다.

대야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는 새로운 원한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11. 신라 김춘추, 고구려에 동맹을 제안하지만 고구려의 영토반환요구에 성사되지 않다

신라 김춘추 입장에서는 백제를 향한 복수가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백제를 공격하기 어려웠고 김춘추가 해결한 방법은 외교를 통해서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에게 가서 김춘추가 말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라여왕3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3)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3) 5. 여왕이 통치하는 일에 대해서 여왕에게 반발하는 세력은 없었던 걸까요? 그러나 후대에 비해서 아무리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여왕이 탄생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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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군사를 빌려 백제에 원한을 갚겠습니다'

선덕여왕은 이를 허락하고 642년 차가운 겨울,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도착합니다.

김춘추는 그동안 신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구려와 평화협정을 맺기로 제안했고 백제를 이길 수 있도록 군사를 빌려달라고 고구려왕에게 요청합니다.

고구려왕은 과연 김춘추의 말을 순순히 들어줬을까요?

고구려의 왕은 김춘추에게 황당한 제안을 하나 합니다.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개소문2

 

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2(2차 여당전쟁, 평양성 전투

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2(2차 여당전쟁, 평양성 전투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8. 연개소문, 태대대로(太大大盧) 관직을 새로 만들다 기존에 고구려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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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시 차지하고 있던  현재 경북 영주 위에 한강유역을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춘추 입장에서는 당연히 영토 반환이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2. 신라, 당나라와 백제를 칠 '나당연합(羅唐聯合)'을 결성하다 

김춘추는 여기서 백제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다른 동맹을 찾아 떠납니다.

복수를 위해 김춘추가 마지막으로 향한 나라는 바로 '당나라'입니다.

648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칠 '나당연합'을 결성합니다.

사실 당나라는 백제와 꾸준히 교류를 이어가며 사이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신라의 손을 잡아 준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당나라를 비롯해서 중국의 수많은 나라가 고구려를 넘봤습니다.

645년, 당나라의 태종 역시 영토를 확장하려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 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입니다.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으로 고구려 안시성에 총공세를 펼치지만 고구려군은 필사 항전하며 결국 당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됩니다.

안시성 전투를 포함해서 당나라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니 고구려와 당나라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때 신라 김춘추가 당나라에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백제의 멸망에 협조해 주시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가 힘을 합치겠습니다. 당나라 군대에 필요한 옷이라든지 곡식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

백제의 공격을 먼저 도와줄 경우 당이 고구려 정벌을 할 때 신라가 협조를 해 고구려를 치기 쉬워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춘추는 외교협상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이 논리로 당나라를 공략했고 동맹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십자동맹
십자동맹

이로서 의자왕 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 당나라 간 십자동맹 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13. 의자왕, 백제 내부 최대 견제세력 사탁왕후가 죽자 주색에 빠져 정사를 외면하기 시작하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김춘추는 자신의 딸을 죽인 백제 의자왕을 향한 복수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이렇게 신라 김춘추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때, 백제 의자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의자왕은 이미 신라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대야성에서 죽임을 당한 할아버지 성왕의 복수까지 갚았습니다.

의자왕은 자신이 원하던 일을 이루어내고 난 후 처음 즉위했을 때의 모습과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해동증자이자 정복군주였던 의자왕, 그는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655년, 의자왕 즉위 15년이 되었을 때 백제 내부에서 의자왕이 가장 견제했던 세력이 사라집니다.

바로 계모 '사탁왕후'가 사망한 것입니다.

의자왕은 자신을 평생 견제하던 숙적이 사라진 것입니다.

의자왕은 사탁왕후가 죽자마자 바로 사탁왕후의 이복 조카와 가족, 측근세력까지 총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을 백제 내에서 모두 없애버린 의자왕은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16년 봄 3월에 왕이 궁인들과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지금까지 의자왕은 자신의 4대조 할아버지 성왕의 복수를 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던 정복군주의 모습이었습니다.

백제 부흥을 이끌던 의자왕은 술과 여자와 빠져 흥청망청 놀면서 정사를 외면하는 등 완전히 변해버린 것입니다.

14. 의자왕, 왕비 '은고'가 실권을 장악하고 은고 아들을 태자로 하루아침에 바꿔버리다

그런데 의자왕이 변한 아주 중요한 이유로 거론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라이벌 세력이 사라진 뒤 의자왕을 방탕하게 한 또 다른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

그 단서는 우리나라 국보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대당평백제국비명>

의자왕 옆 '요망한 계집'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의자왕의 왕비인 '은고'라는 여인이고 그녀는 당시 백제의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백제는 이렇게 왕이 아닌 다른 인물이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의자왕은 태자로 책봉했던 기존의 태자 '융'을 갑자기 폐위시키고 은고의 아들을 새로 태자로 세우기로 합니다.

하루아침에 왕위 후보자인 태자가 은고의 아들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새로운 태자의 위엄을 세워주기 위해서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수리해서 백성들의 분노까지 자아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민심도 흉흉해지기 시작합니다.

15. 의자왕, 충신 '성충' 감옥에서 굶겨 죽이다

그런데 이때 의자왕을 보좌한 고위관료였던 백제의 충신 '성충'(?~656년)이 의자왕의 앞에 나타나 간절히 외칩니다.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백제 관료 품계표
백제 관료 품계표

성충은 백제의 '좌평'으로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의 고위관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충이 의자왕에게 나라를 위해 방탕한 생활을 멈추어달라면서 충심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왕은 성충을 감옥에 가둔 뒤 물과 음식도 주지 않고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도록 합니다.

충신 성충은 이대로 포기했을까요?

충신 성충은 점점 기력이 쇠해지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나라 백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자세를 바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성충은 눈물을 흘리며 백제의 안위를 걱정하며 상소문을 다시 작성합니다.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비하셔야 합니다. 국제정세를 살펴보니  신라와 당나라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눈물 어린 성충의 마지막 유언을 의자왕은 들어주었을까요?

의자왕은 성충의 마지막 상소문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의자왕은 여전히 매일 술과 향락에 빠져 조정은 돌보지 않고 연회를 즐깁니다.

그 사이 성충은 감옥에서 결국 굶어 죽게 됩니다.

성충의 충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의자왕, 더 이상 백제에서 의자왕에 맞설 이는 없었습니다.

 16. 김춘추, 신라왕이 되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서 백제를 공격하다

648년 당나라와 나당연합을 맺고 6년 후인 654년, 김춘추는 신라 29대 왕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신라의 실권자에서 왕이 되었고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에 복수할 힘을 갖게 됩니다. 

백제 의자왕이 정사를 멀리하고 백제가 기울어가던 660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김춘추는 드디어 회심의 일격을 날립니다.

나당 연합을 맺고 12년만, 대야성 전투로 김춘추의 딸이 죽은 지 18년 만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돼서 백제를 공격한 것입니다.

백제점령을 목표로 전쟁을 일으킨 신라와 당나라, 나당 연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과 신라 5만 군 해서 무려 18만 군이라는 대군이었습니다.

당시 백제 수도 사비성의 인구가 6만여 명이 채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거의 3배가 넘는 규모였던 것입니다.

17. 백제 충신 '성충'은 죽기 전 올린 상소문에 이미 나당연합군의 침입경로를 알려주었었다 

18만 규모의 나당 연합군에 당황한 의자왕과 백제군은 그제야 뒤늦게 소식을 듣고 대책회의를 시작합니다.

그때 백제 신하 중 한 명이 나당연합군을 막아야 될 침입경로를 보고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의자왕이 알고 있었던 곳입니다.

충신 성충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도 남겼던  상소문에 이미 나와있었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침략을 당하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삼국사기>

신라와 당나라 대군이 성충의 유언 상소와 똑같은 방향으로 백제를 공격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제 탄현, 기벌포

탄현은 지금의 완주군 운주면 일대, 기벌포는 금강하구를 말합니다.

나당 연합군 백제 침입경로
나당 연합군 백제 침입경로

당나라군대는 바다를 통해 백제의 기벌포로 향하고 있었고 신라는 육로를 통해서 탄현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는 양쪽방향에서 공격한 뒤에 백제의 수도 사비 앞에서 합류해 함께 사비를 공격하기로 작전을 짠 것입니다.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수도를 점령해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충신 성충의 의견을 듣지 않은 대가로 의자왕은 나당연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 백제 수도 사비성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 '황살벌'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시작되다 

이렇게 의자왕이 우왕좌왕 당황하는 사이에 신라의 5만 대군이 탄현을 넘어 백제를 공격해 옵니다.

이제 신라군은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만 뚫는다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을 어디였을까요?

바로 계백의 5 천군사가 지키고 있는 '황산벌'입니다.

황산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말합니다.

황산
황산
황산벌
황산벌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벌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뚫리면 백제의 수도, 지금의 부여인 수도 사비가 위험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황산을 지켜야만 하는 백제군과 이곳을 뚫어야만 하는 신라군이 바로 이곳 황산벌에서 두 나라의 생사를 건 전투를 시작합니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백제와 신라는 그렇게  최후의 혈전을 벌였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천 명의 백제군으로 5만 신라군을 막기에는 수적으로 열세를 보이며 결국 백제는 신라에 패배하고 맙니다.

19. 황산벌전투에서 백제가 패배하고 나당연합군은 합세하여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키다

황산벌이 뚫리자 기벌포로 들어온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합세합니다.

660년 7월, 18만 나당 연합군이 백제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의자왕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 구군분투합니다.

의자왕의 신하를 당나라 장군한테 보내서 군사를 철수해 달라 애원하며 가축과 음식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자왕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패배를 직감한 의자왕은 탄식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정말 후회스럽다고 말을 남기며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야 충신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의자왕이 깊은 후회를 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고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의자왕은 겨우 며칠 만에 항복선언을 합니다.

18만 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공격 앞에 700여 년 역사의 백제는 660년 7월 18일,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20. 신라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장에서 백제 의자왕은 신라 김춘추에게 고개 숙여 술을 따르다

백제가 항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왕은 질긴 악연의 주인공 김춘추와 만나게 됩니다.

660년 8월 2일, 사비성에서는 백제의 항복 의식이 치러집니다.

4대조부터 대를 이어서 신라에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 의자왕 그리고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에게 복수를 다짐한 김춘추, 원수였던 두 사람의 만남은 승리를 축하하는 김춘추의 연회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김춘추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상석에 앉았고 끌려온 의자왕은 초라하게 바닥에 무릎 꿇고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라 김춘추가 백제 의자왕에게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술 한잔 따라 보시게'

상석에 앉은 신라의 왕 김춘추에게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따라야만 하는 백제 의자왕은 치욕적이었지만 술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제의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21. 의자왕, 당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하다

'의자왕은 얼마 후 당에서 병사하니 옛 신하들에게 상례를 허락하였다. 북망산에 장사 지내고 비를 세웠다'

<구당서>

강성한 백제를 이끌던 의자왕은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가 그곳에서 병으로 사망합니다.

의자왕이 백제 멸망 당시 백제 최고의 통치자였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책임을 결코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자왕 개인의 자질 문제와 연결되어서 의자왕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자왕 당묘
의자왕 당묘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던 한때 해동증자로 불리며 강국 백제를 이끌었던 의자왕은 1300여 년 만에 돌아와 백제왕실 묘역에 아들 융과 함께 다시 묻혔습니다.

멀리 옛 백제의 도성을 바라보며 3천 궁녀에 가리어진 그의 진실을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KBS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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