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권력을 향한 욕망, 아들 고종과 원수지간이 되다
1. 후사 없이 죽은 '헌종'의 뒤를 이을 후보 중 한 명이었던 흥선대원군
1849년, 조선 전체가 들썩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23살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사망을 합니다.
이때 너무도 뜻밖에 왕위 후보에 오른 인물이 있습니다.
'철종'과 함께 후보자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조선 후기 왕들은 마땅한 후계자 없이 일찍 사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헌종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합니다.
그렇게 헌종이 후계자 없이 승하한 뒤 직계 혈통으로는 후보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직계는 아니지만 왕위에 적합한 왕가의 후손 종친들 중에서 인물을 찾아야 했습니다.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마침내 종친부에서 일하던 흥선대원군까지 왕위 후보가 올라간 것입니다.
2. 조선 조정을 장악한 '안동 김 씨' 세력에 의해 세원진 왕 '철종'이 제25대 왕으로 즉위하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철종
결국은 당시 조선 조정을 장악한 안동 김 씨 세력에 의해 세워진 왕은 강화도 나무꾼 출신 '철종'이었고 그는 제25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왜 왕위 후보에서 떨어졌던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나이도 29살로 장성했으며 너무 유능하고 똑똑했기 때문입니다.
안동 김 씨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왕위 뒤를 조정할 허수아비 왕을 찾았던 것인데 흥선대원군은 나이가 많고 능력이 뛰어나 얼마든지 혼자 자유롭게 정사를 돌 볼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고 능력이 부족해 마음껏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철종을 안동 김 씨 세력은 일부로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한마디로 안동 김 씨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보다는 철종이 허수아비 왕으로 두기에 적절했던 것입니다.
3. 흥선대원군, '상갓집 개'라고 불리다
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흥선대원군이 양반들에게 '상갓집 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심지어 질나 가는 안동김 씨 가문을 찾아가서 구걸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뿐 아니라 장안에서는 흥선대원군을 두고 이런 말까지 떠돌았습니다.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하여 무뢰한과 잘 어울렸다. 기생집에서 놀다가 가끔 욕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조관(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신하)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세조선정감>
흥선대원군이 흥청망청 난봉꾼처럼 산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진 것인데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양반이었지만 양반대접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들은 정사가 아닌 야사에 실린 것입니다.
야사 중에서는 유명한 소설 김동인이 쓴 '운현궁의 봄'이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운현궁의 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따라서 기록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세도가문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리고 청탁을 하는 등 세도가문들의 멸시를 일부러 받았던 이상한 행동들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왕위 후보까지 올랐던 흥선대원군이 대체 왜 태도를 바꿔 방탕한 생활을 했을까요?
당시에는 왕족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종친들은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유능한 종친들은 언제든 역모를 일으켜서 현재 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정에서 왕족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동 김 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가문이었습니다.
안동 김 씨 가문은 종친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경계합니다.
방해되는 종친은 죄를 뒤집어 씌워서 가차 없이 유배를 보내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종친들은 언제든 스스로가 왕이 되거나 새로운 왕을 올려서 안동 김 씨의 위세를 꺾을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흥선대원군도 자신도 역시 세도가문의 표적이 될까 봐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인 비행이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전략은 통했을까요?
안동 김 씨 세력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흥선대원군을 전혀 경계하지 않습니다.
비록 최종적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강화도 나무꾼이 왕이 되는 모습을 지켜본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직계 혈통은 이미 끊긴 지 오래이니 언젠가 나도 왕이 될 수 있겠구나'
4.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로 결심하다
철종이 즉위한 지 10여 년이 지난 1863년 겨울,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기다리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철종의 건강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궁궐에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위독한 철종에게는 다른 큰 문제가 있었으니 철종 역시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철종이 위중하다는 소식에 안동 김 씨 세력은 분주해집니다.
철종에 이어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인물이 왕이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안동 김 씨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동 김 씨는 반드시 자신들의 가문을 비호해 줄 왕을 다시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동 김 씨 못지않게 이 상황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자신이 아닌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흥선대원군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40~50대였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미 나이가 43살이었습니다.
당시 33세의 철종보다 무려 10살이나 많았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왕위후보에 오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위에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5. 흥선대원군, 다음 왕위를 지목할 '신정왕후'를 찾아가다
흥선대원군은 먼저 궁궐 안의 궁녀와 환관들을 포합 하면서 궁궐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1808년~1890년)를 찾아갑니다.
철종이 후계자 없이 승하한다면 다음 왕을 지목하게 될 사람이 바로 '신정왕후'였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만약 국왕이 서거했을 때 김 씨들이 다른 왕족으로 철종의 뒤를 잇게 한다면 김 씨들의 권세가 강구해질 것입니다'
< 흥선대원군 약전>
이 말은 철종의 후계자를 절대 안동 김 씨가 정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안동 김 씨가 세운 철종이 왕이 되면서 권력싸움에서 밀려났던 풍양 조 씨 세력이 바로 신정왕후의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신정황후를 찾아간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만약 이때를 틈타 저의 계책대로 하신다면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약전>
이 말은 곧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 안동 김 씨를 막으려면 나의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계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아들을 신정왕후의 양자로 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정왕후는 남편 효명세자가 죽은 이후 자신이 낳은 아들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신정왕후 쪽에서는 왕위를 물려받을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종친인 흥선대원군 아들 중에 한 명을 신정왕후의 남편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효명세자의 대도 잇고 신정왕후 또한 헌종에 이어 또다시 왕의 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안위도 보살필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흥선대원군, 12세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세우다
당시 흥선대원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재면, 둘째 아들은 이명복이었습니다.
두 아들 중에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되는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둘째 아들 '이명복'이었습니다.
첫째 아들 이재면은 19세로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왕이 된다면 신정왕후가 정사를 보는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라 신정왕후가 권력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장성한 아들 뒤에서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것은 흥선대원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은 당시 12세였고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이 가능해지는 것이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아들 뒤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으니 결국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 모두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은밀한 제안을 했을 때 신정왕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계획에 동의합니다.
비주류 왕실 종친으로 태어나서 돌아가는 판을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흥선대원군에게 어쩌면 정치는 생존의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7. 고종, 철종 사망 당일 왕에 오르고 신정왕후는 어린고 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선언하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이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1863년 12월 8일, 제25대 왕 철종이 결국 승하하고 맙니다.
그리고 철종이 사망한 당일, 일사천리로 다음 왕이 정해집니다.
바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으로 즉위합니다.
철종이 죽은 바로 그날, 고종은 궁궐로 입궁합니다.
그리고 신정왕후는 궁궐에 입궁한 고종의 손을 잡고 강하게 선언합니다.
'고종은 나의 아들이다!'
이 말은 곧 고종이 이제 나의 아들이 되었으니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겠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의 밀약이 현실이 되고 맙니다.
고종의 왕위 계승에 안동 김 씨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왕으로 만든 방법이 사실 안동 김 씨가 철종을 왕으로 만든 방법과 똑같습니다.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입양시켜서 순원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겼던 것처럼 안동김 씨 세력이 사용한 방법을 고스란히 활용하여 역으로 치고 들어오니 고종의 왕위 계승 방식에 불만이 있어도 안동김 씨 세력은 항의할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8. 흥선대원군, 고종 즉위 직후 자신의 집 운현궁과 고종이 사는 창덕궁을 잇는 '전용문( 門 )'을 만들다
왕실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왕이 된 직후부터 고종의 뒤에서 조선의 국정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집 운현궁에서 놀라운 일을 벌입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과 긴밀한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종과 흥선대원군만 다니는 전용 문(門)을 만든 것입니다.
운현궁과 창덕궁을 잇는 전용 문을 만들어 흥선대원군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궁궐에 찾아가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전용 문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습니다.
문 하나의 이름은 '공근문(恭覲門)' 그리고 또 하나는 '경근문(敬覲門)'이었습니다.
'공근문'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창덕궁에 갈 때 드나들던 문이었고, 경근문은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에 갈 때 드나들던 문입니다.
흥선대원군 사저에 궁궐로 드나드는 전용 문을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그만큼 왕과 가까운 사람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언제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문에 붙인 이름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문의 이름에 담긴 내밀한 속뜻은 무엇일까요?
문의 앞글자만 따면 '공경'입니다.
공경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글자는 '근( 覲 )'자입니다.
'뵐 근'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뵈러 간다'는 의미로 왕인 아들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뵈러 온다는 뜻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아버지 이전에 공식적으로는 왕의 신하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왕을 뵈러 갈 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갖추되, 왕이 자신을 찾아올 때 또한 '근' 자를 붙여 아무리 왕이라도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뵈러 올 때는 예우를 갖추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왕에게도 존중받을 사람이다'라는 것을 문 이름으로 은연중에 녹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집 운현궁과 궁궐을 잇는 핫라인까지 만든 흥선대원군은 정치 개입을 본격화합니다.
9. 흥선대원군, 왕권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폐지하다
흥선대원군이 탐탁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지난 60여 년간 이어온 '세도정치'로 왕권이 너무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탄탄한 미래를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비변사'를 폐지합니다.
'비변사'는 조선 후기 인사권과 군사권을 갖춘 조정의 핵심기구였는데 이를 안동 김 씨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오랜 기간 동안 왕권을 약화시켜 온 비변사를 폐지시킵니다.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안동 김 씨 가문의 힘을 뺸 흥선대원군은 얼마뒤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10. 흥선대원군, 며느리 '명성황후'를 직접 간택하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엄청난 결심을 합니다.
바로 흥선대원군 자신이 직접 며느리를 고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세도가였던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두 가문은 왕과의 혼인을 통해서 왕의 외척이 된 뒤 권력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아들 고종의 왕위가 바로 그런 외척세력에 의해서 흔들릴까 봐 걱정을 한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력이 고종의 권위를 흔들 수 없게 왕권에 위협적인 외척 세력을 사전에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15살이 되던 해, 흥선대원군이 점찍은 고종의 아내는 누구일까요?
바로 명성황후입니다.
바로 훗날 명성황후가 될 '여흥 민 씨' 가문의 '민자영'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가문과 여흥 민 씨 가문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어머니가 여흥 민 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아내 또한 여흥 민 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여흥 민 씨가 또 다른 안동 김 씨가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굳이 명성황후를 선택합니다.
명성황후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일찍 죽었었고 그래서 명성황후가 고종의 아내가 되면 안동 김 씨와 같은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11. 흥선대원군, 왕권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다시 지시로 하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문들에 짓눌렸던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서 '경복궁'을 다시 짓기로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경복궁을 다시 복원한 것이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270년 넘게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위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기존에 정도전이 지었던 것보다 더 크게 경복궁을 증축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바로 잡기 위한 일이다'
12.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비용문제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당백전'을 만들다
그런데 경복궁 중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백성들의 불만이 들끓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자리에 보상비도 줘야 했고 대규모 토목공사에 자재비, 인건비까지 천문학적인 규모로 공사비용이 늘어났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흥선대원군 때 만들어진 화폐 '당백전(當百錢)'입니다.
당백전은 당시 상용되던 화폐 '상평통보'에 무려 100배에 달하는 고액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행했던 당백전이 조선사회 전체를 마구 흔들어 놓습니다.
갑작스러운 고액권 등장으로 조선의 물가가 고공행진을 했던 것입니다.
'땡전 한 푼 없어!'
이는 요즘 사람들도 흔히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땡전'이 바로 당백전의 가치가 추락한대서 유래된 말입니다.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의 등장으로 화폐 가치는 폭락하고 물가는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하자 삶이 너무 고달파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6개월 만에 당백전 사용을 전면 금지시킵니다.
13. 흥선대원군, 부패하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서원'을 철폐하기로하다
1868년 7월, 백성들의 원성을 사며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이 완성됩니다.
경복궁 중건으로 바닥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은 '서원(書院)'을 철폐하기로 했습니다.
서원은 조선 시대 유교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자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곳으로 일종의 지방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왜 서원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비용을 나라에서 지원해 줬는데 서원의 수가 600개 이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유지비용이 많이 들었던 것입니다.
게다사 서원의 유생들이 그 지역의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 혹은 제사비용을 징수하는 등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 백성의 등골을 빼먹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었던 서원을 흥선대원군이 없애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백성들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나라님이 바뀌니 세상이 바뀌었다!'
14.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온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
이렇게 승승장구 이어지던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흥선대원군이 내부 단속에 힘쓰고 있던 사이에 조선을 위협하고 있던 사건이 나라 밖에서 닥쳐온 것입니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온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물론이고 조선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 모두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왜 조선에 쳐들어온 것일까요?
15. 병인양요의 원인은 '병인박해'였다
병인양요의 시작은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 때문이었습니다.
1860년, 러시아는 청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벌이며 조선에 교역을 요구합니다.
그때 흥선대원군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바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다른 서양세력인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체류 중인 프랑스 선교사에게 은밀하게 편지를 보냅니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원래 적을 이용해서 또 다른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보낸 편지 내용은 어땠을까요?
'만약 러시아인의 침입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천주교 포교를 위해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천주교의 자유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프랑스 선교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정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
분명한 거절 의사를 내보인 것입니다.
프랑스 선교사의 거절의사가 담긴 편지를 받은 흥선대원군은 분노합니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1866년, 조선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격한 천주교 탄압을 명령합니다.
바로 '병인박해(丙寅迫害)'입니다.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지속된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합니다.
병인박해를 문제 삼아 약 6개월 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잘못된 판단이 큰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연이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설상가상으로 그들과 비밀리에 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백성들 사이에 소문으로 돌며 최악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침략은 프랑스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선과 교역하겠다고 항구를 찾아온 서양세력이 또 있었으니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1866년 7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을 침략합니다.
연이어 벌어진 외세의 침략에 조선 백성들은 이러다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며 점점 불안에 빠집니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교섭을 했었던 사실이 소문으로 퍼져나가기까지 하고 이 소문을 듣게 된 사람들 흥선대원군이 서양과 내통하는 것 아니냐며 민심이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고 왕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 됩니다.
조선은 물론이고 흥선대원군도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16. 흥선대원군,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통상수교거부정책' 카드를 들고 나오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통상수교거부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을 꺼내듭니다.
'화친은 곧 매국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절대 교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통해서 노린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서양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제거하려 합니다.
둘째는 백성들로 하여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서 맞서 싸우지 않으며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쳐해 있음을 보여주면서 외부의 적을 통해 조선인의 결속력을 강화하려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흥선대원군의 가장 중요한 지지세력인 종친들이 종친부 외에 많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 바로 군대였습니다.
전쟁을 해서 군대 내 종친들의 세력이 전공을 세우면 승진을 하게 되고 그들이 군권을 장악하게 되고 종친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흥선대원군의 영향력도 상승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흥선대원군은 기획한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통상수교거부정책 이후에 조선의 상황은 나아졌을까요?
거짓말처럼 서양 배들의 침략이 줄어듭니다.
사실 서양은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조선은 청나라나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창구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조선과 그 긴 기간 전쟁을 하면서까지 조선과 교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국제 정세까지는 백성들이 알 수 없었고 백성들 입장에서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때문에 서양세력의 침략이 줄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추락한 민심을 되돌리고 흥선대원군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지지율이 급상승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나라 안은 파격적인 개혁으로 나라 밖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통상수교거부로 권력을 휘어잡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 위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권력을 휘어잡고 10여 년간 고종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18. 고종, 고종과 명성황후만을 위한 '건청궁'을 만들다
그러던 어느 날, 흥선대원군을 충격에 빠드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재위 10년 차가 된 아들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적인 일을 벌인 것입니다.
바로 고종이 경복궁 안에다가 자신의 독립된 공간 '건청궁(乾淸宮)'을 만듭니다.
궁 안에 있는 또 다른 궁, 왕과 왕비만을 위한 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을 받기 싫다는 의미였습니다.
건청궁 설립을 통해서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왕위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자신의 기세가 등등하기에 고종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흥선대원군의 삶을 산산조각 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종실록>
누군가 정면으로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상소를 올린 주인공은 왕의 비서 중 가장 말단인 '최익현(1833~1906)'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상소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공식적인 직책도 없는 단지 국왕의 생부일 뿐인 대원군이 왜 국정에 참여하느냐며 당장 흥선대원군의 국정 참여를 제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 상소를 본 고종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이 상소는 실로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다른 논의를 하는 자가 있다면 소인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종실록>
고종 역시 흥선대원군에 대한 반발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실제로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칙상 대원군이라는 자리는 엄청난 권위는 있지만 공식적인 실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사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이 국왕인 아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미지를 밖에 보여주면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남용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굉장히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아마도 속으로는 화가 났었겠지만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한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측근 신하들을 이용해서 '최익현을 처형하라, 최익현을 처벌하라'며 고종에게 상소를 보내 압박합니다.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고종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종은 항의하는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키거나 유배 보내버리고 최익현을 적극적으로 보호합니다.
19. 고종, '친정선언'을 하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만한 일이 또 생깁니다.
1873년, 고종이 이제부터 직접 정치를 하겠다며 '친정(親定)'선언을 합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이제 그만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시지요'라는 공식선언을 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아버지를 향한 일종의 '권고사직'을 한 것입니다.
실록에는 '이제부터 내가 직접 기무를 총괄한다'라고 하는 한 줄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직접 정치를 하지 않는 경우는 딱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는 왕이 너무 어려서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대신 정사를 보는 것 즉 '수렴청정'이고 또 하나는 왕이 너무 나이가 들었을 때 왕의 아들인 왕세자가 대신 정사를 보는 것 즉, 대리청정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수렴청정과 대리청정 이외에는 왕 대신 정치를 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고종이 이제부터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 것은 '지금까지 내 아버지가 나 대신 정치를 하여 반역을 저질러왔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0. 고종, 흥선대원군의 집과 고종이 있는 궁궐을 잇는 '전용 문'을 폐쇄하다
그리고 고종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조치도 감행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고종이 있는 궁궐을 잇는 '전용 문'을 폐쇄한 것입니다.
아들 고종이 한 충격적인 친정선포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예상외로 흥선대원군은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연궁과 자신의 별장을 오가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에서 승리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전권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873년 12월 10일, 궁궐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야심한 밤궁궐에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집니다.
바로 왕이 사는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재 이틀 뒤, 화재 이후 이와 관련된 충격적인 상소가 하나 올라오는데 대체 어떤 내용의 상소였을까요?
'효의 도리란 부모의 뜻을 잘 받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제 화재의 경보는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재앙은 이유 없이 생겨나지 않으니 어찌 그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승정원일기>
이것은 부모의 뜻을 거역해서 즉 '불효'해서 벌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의 상소였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불효란 조선에서는 왕의 폐위 사유가 될 정도로 엄청난 일입니다.
이런 상소는 효를 행하지 않는 고종이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상소를 받아 든 고종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벌레 같은 무리는 사람으로 보고 책망할 수도 없다'
자신을 비난한 신하들을 벌레라 칭하며 분노하며 곧장 해당 상소를 올린 신하를 유배 보내버립니다.
이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 것입니다.
21. 흥선대원군, 고향 양주로 내려가다
결국 이 사건 이후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고향인 '양주'로 내려갑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이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놓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양주로 내려간 것은 매우 정치적인 행동입니다.
'불효한 왕이 아버지를 고향으로 쫓아냈다'
이러한 모양새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통해 신하들에게 자신이 조정에 돌아갈 수 있게 고종을 압박하는 '사인'을 보낸 것입니다.
22. '동학동민혁명 진압을 돕는다' 명목으로 조선에 청나라와 일본이 주둔하게 되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전봉준
음력 1894년 6월 21일 어스름한 새벽, 한양에서 탕 하는 고요한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울립니다.
바로 일본군이 경복궁에 무단침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가택연금 중이던 흥선대원군이 일본군과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건의 발단은 1894년에 벌어진 한국사에서 중요한 '동학농민혁명'이었습니다.
이 농민 봉기를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고 이번에도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자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오게 되고 문제는 청나라 주둔을 빌미로 일본 역시 병력을 파병한 것입니다.
이때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조선이 혼란한 기회를 틈타 그대로 한양으로 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을 통째로 삼키려는 야욕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리수가 따랐고 일본은 조선 조정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협조자가 필요했는데 일본이 선택한 협조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던 것이고 흥선대원군 또한 그에 응한 것입니다.
23. 고종, 무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위협에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기다
흥선대원군은 '화친은 곧 매국이다'를 외치며 외국과의 교류를 완강하게 반대한 인물입니다.
그랬던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평소 신념과 달리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이런 교지를 내립니다.
'지금의 크고 작은 서무를 막론하고 긴중한 문제가 생기면 먼저 대원군께 아뢰어 결재(決裁)를 받으라'
<고종실록>
무력을 앞세운 일본군 앞에서 고종은 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들 고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원하던 권력을 다시 손에 넣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나이는 무려 75세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초고령의 나이에도 권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집착은 무척이나 강력했습니다.
24.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폐비 안을 일본 공사관에 승인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민 씨 세력 축출에 나서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에 입궐하고 바로 다음 날, 일본공사관에 아주 충격적인 서신을 보냅니다.
'대원군의 심복 이원긍이 (흥선대원군의) 분부라면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내용의 폐비안을 들고 일본 공사관을 방문했다'
<재한고심록>
고종이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조선조정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에 사전 승인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에 대한 폐비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공사관측은 흥선대원군의 폐비요청을 거절합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주변으로 눈을 돌려 명성황후를 대신해서 명성황후의 집안인 민 씨 세력을 곧바로 축출에 들어갑니다.
민 씨 세력 들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파직되거나 유배형을 받습니다.
고종의 정치적 기반인 민 씨 세력을 축출한 흥선대원군의 소식을 듣게 된 아들 고종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25. 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기로 결심하다
조선 조정에 복귀하자마자 민 씨 세력을 몰아낸 흥선대원군은 조선 조정을 더욱더 빠르게 장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바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입니다.
이준용은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맏아들이었으며 고종에게는 조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손자 이준용을 권력의 심장부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노골적으로 밀어 넣습니다.
1894년 설립된 군국기무처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에 조선의 정치, 군사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서 세운 최고의 정책기관이었습니다.
이준용을 오른팔로 세운 후에 흥선대원군이 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젊고 능력 있는 손자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준용이 왕이 된 이후에 또 다른 허수아비 왕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흥선대원군이 또다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과는 다르게 굉장히 똑똑하고 유능했던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종은 20살이 되니까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데 이준용은 20대 중반이 됐는데도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따르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면 안전하게 그 뒤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26. 흥선대원군, 청나라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려는 '밀서'를 들켜 조선 조정에서 쫓겨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 계획을 눈치챈 고종은 당연히 이준용을 군국기무처에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힘을 잃은 고종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됩니다.
조선의 왕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고종은 일본과 손잡고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계획을 막을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간절한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궁밖으로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인에게 아부하여 매국 행위를 감행한 간악한 무리들을 하루빨리 일소하여 이 위기를 구제해 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일본인에 아부하여 매국하는 무리들을 한 번에 싹 제거해 달라는 이 편지는 대체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요?
이 편지는 청일전쟁을 앞둔 1894년 7월, 흥선대원군이 평양에 주둔하는 청나라군에 보낸 밀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전권을 장악했지만 자신이 온전히 조선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동행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때문에 정치 9단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이제 일본은 이용 가치가 없으니 청나라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은 평양감사에게 청일전쟁이 발발하면 몰래 청나라를 원조하라는 밀서까지 보냅니다.
정치 9단 흥선대원군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 즉 앞에서는 일본에 협조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청나라의 손을 빌려서 일본의 뒤통수를 때리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청나라 군대를 활용해서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던 흥선대원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일본을 쉽게 이길 것이라고 믿었던 청나라군이 흥선대원군의 예측과는 반대로 맥없이 일본에 패배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보냈던 밀서가 발각까지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일본에 의해 조정에 복귀한 지 약 4개월 만에 다시 일본에 의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27. 고종, 일본의 동의하에 쫓겨난 흥선대원군을 가택연금시키다
심지어는 아들 고종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공덕동 별장 아소당에 가택연금 당하기까지 합니다.
'대문에 총순, 순검들이 돌아가면서 입직하게 한다...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칙명(勅命, 임금이 내린 명) 이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한다'
<고종실록>
그리고 조선 조정을 장악한 일본 역시 고종의 선택에 동의를 해줍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의 세력은 모두 힘을 잃게 됩니다.
28. 흥선대원군,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의 성원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다시 전권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다
흥선대원군의 나이가 이미 70대였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하지만 이때 기록을 보면 그는 여전히 정신이 총명하고 기력이 정정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꼿꼿했으며 활기에 차 있었다. 얼굴엔 주름이 거의 없고, 약간의 흰머리가 있었으며 눈빛은 놀랍도록 반짝이고 맑았다'
<The Korean Repository 1898. 07>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권력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상황이 좋아지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때 조선백성들은 고종 보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종은 임오군란 터졌을 때 청나라 군대를 부르고 동학농민혁명 터지니 또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등 조선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면 외세의 힘으로 탄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백성들이 흥선대원군이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계속된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의지를 놓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29. 흥선대원군, '을미사변' 현장에 함께 있었다
아소당에 갇혀 지내던 흥선대원군은 3개월이 지난 1895년 8월, 경복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곁에는 또다시 일본인 무리가 함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왜 아들 부부가 있는 경복궁을 일본인들과 함께 찾은 것일까요?
어두운 새벽 '건청궁'에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일본 자객들에게 궁녀들과 명성황후가 포위됩니다.
한나라의 왕비였던 명성황후가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인 자객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합니다.
을미사변 당일 자정이 넘은 시각, 손에 칼을 쥔 일본군이 흥선대원군의 별장 아소당에 침입합니다.
담장을 넘어 아소당에 들어간 일본군은 흥선대원군을 집밖으로 끌어내 경복궁으로 끌고 갑니다.
흥선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끌고 간 데에는 일본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배후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있다'라고 하는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일본군의 이와 같은 끔찍한 계획을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에 대한 의견은 학계에서도 아직까지 분분합니다.
하지만 '을미사변 사건 한가운데 명성황후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논란이 됩니다.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이런 만행을 저지른 일본이 증오스러웠을 테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일본인자객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유야 어쨌건 고종은 아버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0. 흥선대원군, 고종과 원수가 되어 죽는 날까지 아들 얼굴을 보지 못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흥선대원군과 고종 부자는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맙니다.
또한 흥선대원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이라면서 백성들에게도 손가락질받게 됩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에 의해 또 한 번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원수가 되어 다시 못 볼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약 3년이 지난 1898년경, 흥선대원군은 병을 얻어 은연궁에서 앓아눕고 맙니다.
흥선대원군은 생의 마지막을 맞기 전에 아들 고종과의 화해를 원했던 것인지 병이 깊어질 무렵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내가 주상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마지막으로 한 번은 아들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고종은 심지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습니다.
결국 1898년 2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왕으로 만든 아들 고종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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