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끈 조선 최대의 농민봉기! 동학농민혁명
1. 조선의 농민들은 왜 분노했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들의 착취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난 조선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농민봉기입니다.
동양평화를 주장하며 32살에 순국하신 안중근의사 (tistory.com)
1892년 4월,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에 해당하는 고부 지역은 드넓은 평야와 눈부신 해안을 끼고 있어서 전라도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알려진 곳으로 고부 지역에 부임해 온 신임 군수 '조병갑'의 취임식이 열립니다.
조병갑에게는 고부에 부임해온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병갑은 손꼽히는 곡장지대인 고부에서 농민들의 세금을 뜯어갈 속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조병갑은 고부 군수 취임과 동시에 농민들을 향해 각종 수탈을 시작합니다.
조병갑에게는 농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낼 수 있는 듣도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효죄, 형제간에 화목하지 않았다 하여 불목죄 등으로 각종 죄를 만들어 세금을 뜯어냅니다.
급기 에 조병갑은 본인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를 세우려고 한다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조병갑은 수탈을 위해 '만석보(萬石洑)'를 설치합니다.
'보'는 물을 모으기 위해서 강이나 하천, 골짜기를 가두어 만든 저수지를 말합니다.
농민들은 조병갑이 만석보를 짓는다고 하니 황당해합니다.
이유인즉슨 이미 고부에는 만석보와 같은 저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에 이미 저수지가 있는데 조병갑은 왜 이런 황당한 지시를 한 것일까요?
조병갑은 만석보를 설치해서 저수지를 이용하는 '물세'까지 2배로 따로 걷으려는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만석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조병갑은 만석보를 만들기 위해 농부들에게 노동을 시켜고는 대가도 주지 않는 무임금 노동을 하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탐관오리' 불렀습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탐낼 탐, 벼슬 관, 더러울 오, 벼슬아치 리)'란 벼슬과 재물을 탐하는 행실이 나 부패한 관리를 뜻합니다.
당시 농민들을 착취해서 자신의 배를 불리는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바로 조병갑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습니다.
2.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동학'에 농민들은 한 줄기 희망을 걸다
이런 상황에서 핍박받던 조선의 농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제시했던 종교가 바로 '동학(東學)'이었습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의 종교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랐던 농민들이 믿었던 것이 바로 '동학'이었습니다.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최시형이 세력을 확장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왜 '동학' 즉 '동쪽의 학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이것은 동학의 반대말인 '서쪽에서 온 학문'을 뜻하는 '서학'에서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서학은 현재의 천주교로 천주교의 교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조선에서 굳이 서양의 것을 따를 필요가 있겠냐며 이 서학에 대항하여 모두가 평등하는 내용을 담은 우리만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면서 양반과 농민과 같은 신분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하고 자주적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봉건, 반외세를 강조하며 동학은 조선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어 갑니다.
3. 고부 농민의 '항의 탄원서'를 대신 작성해 준 '전창혁' 매 맞은 후유증으로 사망하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사건이 일어납니다.
1893년 6월, 조병갑의 도를 넘는 횡포에 지친 농민들은 견디다 못해 누군가를 찾아갑니다.
바로 고부 마을의 몰락한 양반인 전창혁(1827~1893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글을 쓸 줄 알았던 전창혁 통해 일종의 탄원서를 작성해서 관청에 제출하려 했던 것입니다.
농민들은 정식으로 항의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 탄원서를 받은 사람이 조병갑이었습니다.
탄원서를 받은 조병갑은 항의한 농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매질을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고부 농민들을 더욱더 분노케 만들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글을 써줬던 전창혁이 곤장을 맞은 후유증으로 끙끙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4. 사망한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 분노하다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분노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전봉준입니다.
전봉준은 그 누구보다도 전창혁의 사망에 극도로 분노하는데 전봉준이 바로 사망한 전창혁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5. 전봉준은 어떤 인물일까요?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맞은 전봉준(1855~1895)은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녹두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녹두는 작고 단단합니다.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져 붙여진 별명이 바로 '녹두'였습니다.
그러나 전봉준은 작은 체구를 뛰어넘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지녔습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전봉준을 '녹두 장군'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전봉준은 평소 동학을 믿으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봉준은 굳은 표정으로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조병갑을 이대로 둘 수 없다'
6. 전봉준,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다
아버지 전창혁이 죽은 지 3개월 후 1893년 11월, 전봉준은 고부 마을의 한 곳에 수많은 동학교도 및 농민 30여 명과 은밀한 모임을 가집니다.
자신이 믿는 동학교도들과 뜻이 맞는 교부마을의 농민들이 모인 이 모임의 정체는 바로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면 당시 고부를 점령하고 있었던 조병갑에게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꺼내듭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이름을 둘러가며 적은 문서를 말합니다.
원을 중심으로 전봉준의 이름이 확인됩니다.
이는 혹시라도 거사가 적발되더라도 주동자는 쉽게 발각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였던 것입니다.
사발통문으로 결의를 다진 전봉준과 농민들은 다음의 내용을 결의합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관오리를 쳐 징계할 것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봉준은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사발통문의 마지막 항목에 그 최종목표를 적었습니다.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로 직행할 것
7. '고부농민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으로 '무장'으로 피신하다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 드디어 준비했던 그 계획을 실행합니다.
감시가 소홀했던 밤이었습니다.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들과 횃불을 들고 고부관아로 바로 진격합니다.
이를 '고부농민봉기'라고 하며 전라도 고부 지역에서 전봉준과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탐관오리 조병갑을 몰아낸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고부농민봉기에 관한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고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병갑의 처벌을 해야 했습니다.
조선조정은 도망간 조병갑을 붙잡고 파직시킵니다.
게다가 지금의 완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 조병갑의 후임자로 신임 군수를 임명하고 고부농민봉기를 조사하고 수습하는 관직인 안핵사 이용태라는 인물도 파견합니다.
이용태(1854~1922년)는 1894년 고부농민봉기의 진상 조사를 위해 안핵사로 파견된 관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핵사 이용태가 부임하자마자 고부 농민들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마을 곳곳에는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고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용태가 안핵사로 본 고을에 와서 인민을 동학이라 통칭하고 당사자가 없으면 처자를 체포하여 살육을 행하는 고로 다시 기포하였나이다'
<전봉준 공초>
안핵사 이용태가 8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고부에 와서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서 체포한 것입니다.
심지어 집에 당사자가 없으면 그의 아내를 잡아 간음까지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항하면 가차 없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전봉준은 이 과정에서 고부에서 멀지 않은 무장으로 피신합니다.
8. 전봉준, '손화중'과 의기투합해서 한양으로 진격하기로 하다(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피신한 전봉준은 좌절하지 않았고 무장에서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을 만납니다.
호남에서 가장 큰 동학세력을 움직였던 '손화중(1861~1895년)'으로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의기투합해서 못다 한 거사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려고 합니다.
원래 고부농민봉기의 최종 목표대로 조선 조정을 뒤엎고 중앙정치를 바꾸기 위해서 한양으로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894년 3월, 전봉준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전봉준과 같은 뜻으로 모인 4천여 명의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하나의 조직체계를 갖춘 군대의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이제까지는 농민들끼리 모여 일으킨 봉기였다면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군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9. 동학농민군,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에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전주성을 향하던 동학농민군은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기세등등하던 모습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전주를 거의 코 앞에 두고 후퇴를 하기 시작합니다.
전주의 관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기세를 선점하기 위해서 동학농민군을 뒤쫓아 매섭게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1894년 4월 6일, 마침내 동학농민군과 관군들은 마주칩니다.
동학농민군을 화들짝 놀라면서 황토현에서 가장 높은 고갯마루까지 후퇴를 합니다.
기세가 등등해진 전주 관군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기 바쁜 동학농민군을 어느새 황토현 고개까지 추격합니다.
전주 관군들은 동학농민군을 비웃고 심지어 소를 잡고 술판을 벌이다가 잠들기까지 합니다.
관군들은 전투 경험이 없었던 농민들과의 전투에서 쉽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 멀리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동학농민군이 총칼과 죽창을 들고 관군을 향해 돌진해 온 것입니다.
이에 1000여 명의 전주관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기습공격으로 관군은 대패하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은 조선 관군들의 방심을 역이용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유인작전이었던 것입니다.
황토현전투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10. 동학농민군,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서 두 번째황룡천 전투에서도 관군에 승리하다
전주 관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만만찮은 동학농민군에게 다시 한번 질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한양에서 최정예 관군을 파견합니다.
첫 번째 전투 2주 뒤인 1894년 4월 23일, 한양에서 파견된 최정예 관군과 동학농민군은 황룡천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관군들은 동학농민군이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대포를 쏩니다.
이 포격에 농민군 수십여 명이 한꺼번에 쓰러질 정도로 최신식 대포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주 무기는 여전히 대나무로 만든 죽창과 조총 몇 자루 정도였습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리한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활용합니다.
바로 비장의 무기인 거대한 '장태'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거대한 장태를 방패 삼아서 진격합니다.
장태는 대나무를 쪼개 엮어 만들고 그 속에 솜이나 짚을 가득 채워서 만들고 그 뒤에 몸을 피하며 총알을 막는 은폐물로 사용된 무기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일종의 방탄차 역할을 한 장태 뒤에 숨어서 돌격합니다.
게다가 동학농민군은 잘 알고 있었지만 관군들은 몰랐던 지형을 활용하는 것이 황룡천 전투의 또 다른 승리 요인이었습니다.
활룡천 일대는 황룡천의 강가는 지대가 낮은데 반해, 주변 뒷산은 높았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은 이런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서 지대가 높은 뒷산에서 지대가 낮은 황룡천 강가쪽으로 장태를 아래로 굴리면서 돌격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동학농민들은 조선 관군과의 2번째 전투였던 황룡천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11. 동학농민군, 전주성에 무혈입성하다
자신감에 찬 동학농민군의 다음 목적지는 전주성이었습니다.
동학농민들을 더욱더 기세 등등 하게 만든 것은 바로 조선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였습니다.
1894년 4월 27일,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어떤 전투도 없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합니다.
관군들을 지휘해야 하는 전주성의 총지위관이었던 전라 감사가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너무 놀라서 도망가버렸기 때문입니다.
12. 전봉준, 원치 않은 외세의 개입으로 동학농민군을 자진해산하기로 하다
백성들의 환호까지 받으며 전주성 함락으로 한양이 눈앞에 다가오며 승승장구했던 동학농민군은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전주가 함락되고 청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고종실록>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기존에 일본과 청이 맺은 '텐징조약'을 빌미로 자신들도 조선에 군대를 보내던 것입니다.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외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백성을 위해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며 모인 동학농민군이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조선인들 간에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조선에 외국군대가 들어오게 되는 것을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며 외세의 개입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이에 모두가 놀랄 만큼 결단을 내립니다.
전봉준은 외세의 개입이 아닌 자주적 해결을 원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을 자진 해산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봉준은 조선 관군에게 우리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자진해산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재빨리 이 사건을 수습하고 싶었던 조선 조정은 바로 다음날인 1894년 5월 8일에 동학농민군과 협약을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주화약'입니다.
13. '전주화약'의 폐정개혁안으로 동학농민군이 요청한 것
'집강소를 설치할 것'
동학농민군이 해산하며 이것만큼은 꼭 설치해야 한다고 했던 것은 바로 '집강소(執綱所)'입니다.
집강소란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일종의 자치기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방 행정과 치안을 위해 설치한 자치 기구입니다.
전봉준이 집강소를 만들자고 한 이유는 추후에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가 또 나와서 농민들을 수탈할 수 있으니 이를 막기 위해서 농민들이 스스로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농민의 정치를 실현했던 것입니다.
'탐관오리를 척결할 것'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하나하나 조사해 엄중하게 징벌해 달고 요청합니다.
'노비 문서를 불태워달라'
그리고 가장 파격적인 요청을 합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라는 것은 신분제를 폐지해 반상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14. 전봉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하다
1894년 6월 21일, 정봉준에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는 정말 황당한 소식이 들어옵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온 후 혁명군이 모두 해산한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급기야 왕이 있는 경복궁을 점령해 버리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주둔한 것은 동학농민군 진압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며, 조선을 차지하는 것이 일본의 궁극적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친일파 관료들이 조선의 정부를 장악하고 조선의 군대까지 일본이 관리하게 됩니다.
1894년 9월,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전봉준은 고심 끝에 또 하나의 결심을 합니다.
'일본이 우리 도성에 침입해 야반에 왕궁을 쳐부수고, 우리의 임금을 놀라게 하였으니! 의로운 병사를 규합해 일본군과 싸우겠다'
전봉준은 탐관오리는 둘쨰치고 우선은 외세를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전봉준의 목표는 조선전체의 탐관오리를 몰아내자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자 쪽으로 수정합니다.
15. 동학농민군, 일제에 맞서다(2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전봉준은 결심이 서자 일본과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해 전라도 삼례로 향합니다.
삼례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삼례를 거점으로 삼아야만 각지의 농민군을 모으기 쉽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전봉준은 삼례에서 뜻을 함께 할 동학농민군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때 전봉준이 모은 동학농민군의 숫자는 무려 4,000여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2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입니다.
1894년 10월, 전봉준과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삼례를 떠나 한양으로 향합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한양으로 가는 도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일본군을 몰아내는 일에 농민들이 너도나도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한양을 향하는 동안 동학농민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어 그 숫자가 무려 4만여 명에 달하게 됩니다.
'동학군의 세력은 산과 들을 덮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한판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일본군과 싸우던 동학농민군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쌓여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일본군의 무기인 '총'때문이었습니다.
사방에서 보이지도 않는, 수없이 날아오는 총알 때문에 농학농민들이 대응하지 못하고 무참히 쓰러진 것입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총은 조총(화승총)으로 탄환과 화약을 따로 집어넣어서 불을 붙여야 발사가 가능해 발사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반면에 일본군이 사용한 소총은 현재 운영하고 있는 소총과 같이 '즉시 격발'이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최대 사거리가 1,800m에 육박할 만큼 근대식 소총이었습니다.
긴 사거리와 빠른 장전속도를 가진 당시 일본군의 무기는 동학농민군의 화승총과는 비교자체가 불가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신식무기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봉준과 동학동민 군이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공주 인근에서 대패한 후 논산으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1894년 10월 27, 일본의 총지휘관은 일본군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열함을 요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하라'
<가와카미 소로쿠의 전보>
한마디로 일본군에 반기를 든 조선땅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찾아내서 학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전봉준이 공주 일대에서 패배한 뒤에도 동학농민군을 향한 일본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잔혹한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16. 일본군에 맞선 최후의 전투, 우금치 전투
이런 상황에 놓여있으니 동학농민군은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됩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에 전봉준은 논산에서 동학농민군을 또다시 소집하는 데 이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전봉준이 재소집을 명했을 때 농민들이 다시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기세로 재소집에 응한 동학농민군의 수가 2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1894년 11월, 전봉준과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은 최후의 결전지 '우금치'로 향합니다.
1894년 11월 9일,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혁명 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동학농민군은 2만여 명이었고 일본군과 조선 관군은 2천여 명으로 수적으로는 10배가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상황은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지형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우금치 고개의 높은 지대를 먼저 장악해 높은 지대에서 동학농민군이 올라 올 아래쪽을 향해 미리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동학농민군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야만 우리 후손들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절박함이 이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이런 수세에 몰리고서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우금치 고개 위로 죽기 살기로 돌진합니다.
이 전투의 결과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사를 점검했더니 남은 군사가 불과 3천 명이었다. 그 뒤에 다시 접전 후 세어보니 500명에 불과했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는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도 있었지만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또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동학농민군이 군인이 아닌 일반 농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농민들은 전략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잘 훈련된 일본군 앞에 무너질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17. 전봉준,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하다
전봉준은 우금치에서 참패한 뒤 가까스로 도망쳐서 목숨을 구한 후 또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을 모아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본군에 항전을 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일본군에 패하게 되고 결국 1894년 11월 27일, 전봉준은 끝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합니다.
18. 녹두장군 전봉준의 최후
동학농민군이 해산됐다고 해서 일본이 전봉준을 가만히 뒀을까요?
일본군은 전봉준을 가만 둘 경우 또다시 언제든 항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전봉준에게 현상금을 걸어 잡아들이려고 했고 전봉준은 일본군에 쫓기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전봉준은 몸을 숨기게 되는데 그러던 중 전북 순창에서 옛 부하와 만나게 됩니다.
전봉준은 옛 부하의 소개로 한 민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봉준이 은신하고 있던 집에 갑자기 관군이 들이닥칩니다.
다름 아닌 전봉준을 숨겨준 옛 부하가 관아에 밀고하여 잡히게 된 것입니다.
1894년 12월, 전봉준은 옛 부하에게 배신당한 채 결국 체포됩니다.
전봉준에게 내려진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
근대식 법원이 생기고 최초로 선고된 사형 판결이었습니다
전봉준은 결국 그토록 바라던 평등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9. 조병갑,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하다
그리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마저 교수형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최시형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밝혀집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이 바로 '조병갑'이라는 사실입니다.
조병갑은 2차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석방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고종에게 고등재판소 판사로 중용되기까지 합니다.
20. 실패한 동학농민혁명, 항일 의병 운동의 초석이 되다
동학농민혁명은 안타깝게도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농민들은 그 이후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항일 의병 운동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나는 이들은 이름 없는 그 시대의 힘없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삼일(사흘)천하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혁파 김옥균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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