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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프로일잘러' 황희, 87세에 비로소 세종에게 은퇴를 허락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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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프로일잘러' 황희, 87세에 비로소 세종에게 은퇴를 허락받다

1. 황희, 14살에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고려 제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때황희는 처음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는 14살에 불과했습니다.

황희는 어떻게 14살이라는 이른 나이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음서제도'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있습니다.

음서(蔭敍)란 고려, 조선 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을 말합니다.

황희는 음서를 통해 품계가 없는 말단 관리직을 맡아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과거에 급제합니다.

이때 황희는 개경에서 성균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성균관 학관이 됩니다.

품계도 없었던 말단직에서 품계도 얻고 더 높은 직급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황희, 새로운 관직생활 3년 만에 실직자가 되다

그런데 황희의 새로운 관직 생활은 겨우 3년 만에 막을 내립니다.

황희 앞에 역사가 뒤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의 나라 조선이 들어서면서 나라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황희는 나라가 망하고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백수가 된 것입니다.

3. 태조 이성계, 일하기로 소문난 황희를 직접 조선의 관리로 임명하다

그런데 조선이 개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황희를 찾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황희가 똑똑하고 행실도 단정한 사람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조선의 관리로 임명합니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의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어서 조선의 새로운 왕 태조를 자신의 네 번째 왕으로 모시게 됩니다.

이후 1392년, 황희는 30세에 이전과 같이 성균관 학생을 가르치는 성균관 학관으로 복직합니다.

게다가 같은 해, 조선의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정 7품 '세자 우정자'로 또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395년,  33세의 황희는 왕이 옳지 못한 일을 할 때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그 옆에서 보좌하면서 말을 올리는 관직인 정 6품 '문하부 우습유'로 임명됩니다.

황희는 태조가 듣던 대로 특출 나게 일을 잘하는 관리였고 이후 승진을 거듭해 나갑니다.

그렇게 조선 조정에서 황희는 승진을 거듭하면서 일을 참 잘하는 신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4. 황희,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는 '지신사'가 되다

그리고 황희가 서른아홉 살이 됐을 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왕이 등극합니다.

바로 조선 제3대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황희는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6번째 왕을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황희가 43세가 되던 1405년, 황희의 관직인생을 확 바꿀 사건이 벌어집니다.

'조정의 신하 중에는 마땅한 자가 없습니다. 다만, 황희가 참으로 적합한 인물입니다'

<용재총화>

황희는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과도 같은 '지신사'로 추천받은 것입니다.

지신사(知申事)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정 3품의 벼슬로 훗날의 도승지에 해당하는 관직이었습니다.

황희는 누구보다 왕 가까이에서 왕을 보필하는 관리가 된 것입니다.

지신사는 왕 가까이에서 왕을 돕는 조력자였기 때문에 사태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도 요구되는 자리였습니다.

왕의 심기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정확히 원인을 파악해서 왕이 이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신사는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단 1명이었습니다.

왕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이 막중한 임무를 황희가 맡게 된 것입니다.

지신사는 왕의 측근이기 때문에 입이 무겁고 비밀을 잘 지켜야 하는데 황희는 이것을 잘 지키고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 곁에서 황희는 계속 함께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지신사 역할을 훌륭히 해냅니다.

그렇게 지신사로 임명된 이후 황희는 정국을 결정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황희는 태종 곁에서 자신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고 태종이 제일 먼저 의견을 나누는 상대가 됩니다.

5. 46세 황희, 사직 요청이 시작되다

그런데 태종의 무한신뢰를 받고 있던 황희가 태종에게 폭탄선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1408년 어느 날, 한 관리가 황희를 찾아와서는 노발대발 화를 냅니다.

자신이 관직에 채용되지 못하니 항희에게 인사 비리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며 몰아붙인 것입니다.

새로운 관리를 뽑을 때 태종은 종종 당시 지신사였던 황희에게 의견을 묻고 결정했습니다.

때문에  황희는 원치 않게 채용 논란에 휘말리게 된 것이고, 이에 황희는 46세의 나이에 태종에게 첫 사직 요청을 올립니다.

하지만 태종은 인사 논란 이후 황희에게 더 많은 권한을 줍니다.

다음 해인 1409년, 황희는 '형조판서' 자리에 오릅니다.

6. 참고: 조선의 핵심 관청 육조의 구성

형조는 조선의 핵심관청인 '육조(六曹)' 중 하나입니다.

육조
육조

육조란 조선 국정을 나누어 맡은 여섯 개의 핵심 관청을 일컫습니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 일대를 당시에는 육조거리라 하였고 육조는 이곳에 모여서 일을 했습니다.

육조거리
육조거리

위는 당시 육조거리의 모습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광화문 광장
광화문 광장

지금 광화문 일대와 비슷한 육조 거리의 모습입니다.

병조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며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입니다.

형조는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하며 법무를 총괄하는 관청입니다.

공조는 지금의 국토교통부에 해당하며 산림, 하천, 건축, 토목공사등을 총괄하는 관청입니다.

이조는 지금의 인사혁신처에 해당하며 관리의 임명과 승진, 좌천 등을 총괄하는 관청입니다.

예조는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에 해당하며 국가의 주요 행사나 과거시험등을 관장하는 관청입니다.

마지막으로 호조는 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며 나라의 돈을 관리하는 곳으로 인구, 세금, 곡식을 관장하는 관청입니다.

이 여섯 관청의 우두머리를 '판서'라고 불렀고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입니다.

7. 54세 황희,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하다

태종은 황희를 형조 판서 즉 법무부 장관급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1409년에 형조판서를 받은 이후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 1415년 이조판서와 호조판서, 1416년에 공조판서까지 받게 됩니다.

황희는 지신사로 임명된 지 약 10년 만에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합니다.

태종은 황희를 자신의 심복처럼 의지하면서 국가 전분야의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게 합니다.

태종에게는 황희만 한 신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태종은 황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내가 죽는 날에 황희도 따라 죽기를 원한다'

태종이 황희와 죽어서도 함께 하고픈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황희를 그만큼 애지중지 아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웬만한 신하들은 황희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쉽게 내놓지 못합니다.

황희는 조정 내 독보적인 입지를 바탕으로 태종이 신하들과 의견차이로 부딪치면 태종의 뜻이 전해지도록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황희는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태종의 마음을 잘 간파하고 빈틈없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8. 황희, 비행 일삼는 세자 양녕대군을 두둔하면서 태종과 정치적으로 정면충돌하다 남원으로 유배 보내지고 평민으로 강등되다

1416년, 황희가 태종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면서 정치적으로 정면충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 이후로 황희는 태종의 큰 오해를 사게 됩니다.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거취문제로 황희와 태종의 의견이 정반대로 갈린 것입니다.

세자 양녕대군은 밤마다 궁밖을 나가 방탕한 짓을 저지르는 등 갖은 비행을 일삼았습니다.

장차 왕이 될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태종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태종은 이문제로 걱정은 태산처럼 쌓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이 모습을 본 황희는 태종에게 세자가 아직 어려서 실수한 것이라며 양녕대군을 감쌉니다.

이후 양녕대군의 비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갑니다.

급기야 신하의 첩을 몰래 궁궐에 들였고 그 첩을 임신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태종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희는 양녕대군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그를 두둔합니다.

1418년, 참다못한 태종은 황희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랫동안 나를 섬겨서 내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항상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생각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그리고 태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혹시 세자에게 아부하려는 것인가?'

태종 입장에서는 황희가 세자에게 아부한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황희의 이런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태종의 이 말은 들은 황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의 얼굴이 붉어지고 줄줄 눈물이 납니다... 무슨 마음으로 전하를 저버리고 세자에게 아부하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은 황희의 이 말을 믿었을까요?

이때 태종은 '세자에게 아부하려는 뜻이 없다'는 황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끈끈했던 태종과 황희 사이의 관계는 양녕대군의 문제로 어긋나 버리고 맙니다.

끝내 태종은 황희를 멀리 남원으로 유배를 보내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황희의 지위와 혜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합니다.

9. 황희, 유배지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속죄하며 지내다

유배지 남원에서 황희의 주변은 늘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당시 황희처럼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은 유배 중에도 조정에 힘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계에 연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황희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희는 일절 누구와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약 황희가 유배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소식이 태종에게 전해진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황희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고 태종에게 더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황희는 온몸으로 자신에게는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누구도 만나지 않고 유배생활을 이어갑니다.

10. 세종, 태종의 추천으로 황희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다

그런데 황희가 유배를 떠난 그해, 조선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세종의 즉위 이후 여전히 황희는 유배 중이었습니다.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를 가고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은 흐른 1422년, 유배지로 찾아오던 사람마다 내쳤던 황희가 누군가를 맞이하더니 부랴부랴 짐을 쌉니다.

'황희를 남원에서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태종의 권유로 세종이 황희를 유배지에서 궁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물론 태종이 믿고 의지했던 만큼 황희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황희를 유배 보낸 후에도 유배지로 사람을 보내 황희의 소식을 남몰래 챙겨 듣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황희가 자신을 원망하기는커녕 깊이 후회하면서 근신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후 태종은 황희의 진심을 알게 됐고 그동안 쌓였던 오해도 모두 풀게 됩니다.

이에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를 추천했고 세종의 부름에 황희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권을 물려주며 왕권에 위협이 될 야심이 큰 신하들은 사전에 제거하고 오직 자신이 믿고 신뢰할 만한 신하를 붙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황희에 대한 오해를 푼 뒤 자신이 가장 믿었고 또한 지신사부터 육조의 판서까지 모두 경험했던 노련하고 일 잘하는 황희가 세종을 보필하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황희가 없어선 안 된다'

11. 황희, 자신의 7번째 왕 세종을 보필하기 시작하다

황희는 이렇게 4년 만에 중앙 조정으로 돌아옵니다.

황희가 돌아오고 3개월 뒤, 태종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태종과 황희는 그렇게 이별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어느덧 60세, 황희는 자신의 7번째 왕 세종을 보필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1년 후 황희가 61세가 되던 1423년, 세종은 당시 예조판서였던 황희에게 뜻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겠다'

세종이 예조판서 황희의 직급을 낮춰 강원도로 보내려 한 것입니다.

당시 세종 즉위 후 무려 3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강원도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는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허위 기록만 가지고 회계하다가 구황할 때에 이르러 창고에 저축된 것이 없으니, 그들이 국가를 기만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세종실록>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힘들 때 곡식을 꿔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구휼제도인  '환곡'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나무꾼에서 조선의 왕이 된 철종 (tistory.com)

 

나무꾼에서 조선의 왕이 된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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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원도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환자곡을 빌려주고 돌려받지도 못했는데 돌려받았다고 장부를 조작했던 것입니다.

환자곡을 제대로 걷지 못한 관리에게는 파직이나 유배라는 큰 벌을 줬었기 때문입니다.

흉년을 계속되고 관리들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자는 생각에 환자곡을 받았다고 거짓장부를 쓴 것입니다.

이 악순환으로 결국 강원도의 곡식 창고가 텅 비게 됩니다.

황희는 이런 상황에서 강원도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단번에 파악합니다.

그리고 황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부를 다시 쓰기 위해 가짜 장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파악합니다.

이를 위해 강원도의 인구수를 파악하고 기근으로 발생한 떠도는 백성의 수 그리고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의 크기까지 대대적인 조사를 시행합니다.

그리고 실제 현황에 맞게 이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장부에 적어 장부를 새롭게 만듭니다.

그렇게 세종은 황희의 정확한 보고서를 받고서야 강원도 실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세종은 문제가 빨리 해결되도록 강원도로 바로 쌀을 보내줍니다.

그 결과 3년간 굶주림에 허덕이던 강원도 백성들의 삶이 점차 안정이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태종에 이어 세종 또한 황희의 능력을 인정하고 무한신뢰를 하게 됩니다.

1426년, 세종은 황희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그 뒤 불과 1년 후에 좌의정으로 승진시킵니다.

12. 황희, 사위 서달의 살인사건비리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히다

좌의정이 된 그해 황희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좌의정 황희를 의금부에 가두거라!'

황희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입니다.

황희가 연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황희가 좌의정에 승진하기 전입니다.

고위 관직자의 아들 '서달'이라는 선비가 고향으로 가기 위해 지금의 청주지역이던 '신창현'이라는 마을을 지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서달은 길을 걷다 신창현 마을의 관아에서 일하는 아전과 마주칩니다.

그런데 서달이 그 아전을 향해서 '감히 아전 주제에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가냐!'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황당하게도 아전과 서달은 그날 처음 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달은 아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갔다며 화를 낸 것입니다.

서달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종에게 인사하지 않은 그 아전을 잡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아전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달은 이에 자신의 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아전이 아니라 마을의 다른 아전이라도 잡아오라고 명하고 그렇게 잡혀온 엉뚱한 아전에게 서달은 화풀이를 합니다.

이때 길을 가던 또 다른 아전이 서달의 행패를 보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꾸짖습니다.

이에 화가 난 서달은 자신의 종에게 자신을 꾸짖은 아전을 두들겨 패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더 큰일이 벌어지는데 죄 없이 매질을 당한 아전이 그만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고위 관직자의 아들 서달은 신창현에서 살인용의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서달의 살인사건에 황희가 연루된 것일까요?

바로 살인을 저지른 서달이 '황희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사건을 알게 된 황희는 예상과는 달리 곧장 신창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창현 출신의 높은 관리를 찾아갑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아무리 고위 관료의 가족이라도 살인을 저지르면 중형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황희는 이에 관료를 찾아가서 피해자의 집안과 합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황희보다 더 이 사건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희의 사돈이자 당시 형조판서였던 살인을 저지른 서달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렇게 좌의정, 형조판서와 같은 고위관료들이 움직이자 신창현의 하위 관리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사건을 은폐하려 사건 조작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신창현 관리들이 서달 사건을 덮기 위해서 죽은 아전의 가족에게 뇌물을 주며 합의를 강요한 것입니다.

결국 죽은 아전의 아내는 관리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합의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합니다.

그리고 살인사건은 서달이 아닌 서달의 종이 벌인 짓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과연 서달의 살인 사건 비리는 어떻게 진실이 밝혀졌을까요?

사건의 보고서를 보던 세종이 사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등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세종은 서달 사건을 철저히 재조사하라고 의금부에 명령합니다.

결국 숨겨져 있던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 조선조정은 발칵 뒤집어집니다.

사건에 관련된 고위직 관리부터 내놓으라 하는 정승까지 전부 파면을 당합니다.

황희의 사위인 서달은 장형 100대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사건에 연루된 황희는 어떻게 됐을까요?

황희는 65세의 고령의 나이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야말로 황희 일생일대의 위기상황을 맞은 것입니다.

13. 세종, 황희를 복직시키다

그런데 황희가 감옥에 갇힌 다음날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세종이 황희를 하루 만에 감옥에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종은 비리 사건 연루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좌의정으로 복직시킵니다.

황희의 복직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거센 반대를 하지만 세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황희를 복직시킵니다.

황희가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 세종이 재위에 오른 지 3년밖에 안 됐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세종의 많은 정책이 추진되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세종은 수많은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 경험 많은 신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 빠르게 황희를 석방하고 고위직에 복귀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만큼 세종에게 황희는 살인 사건에 면죄부를 줄 정도로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신하였던 것입니다.

14. 황희, 어머니 삼년상을 계기로 사직을 요청하지만 세종은 단칼에 거부하다

그런데 황희가 좌의정으로 복직하고 11일 만에 황희에게 가슴 아픈 일이 생깁니다.

황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예법에 자식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관직에서 물러나서 3년간 무덤을 지키는 여막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황희 또한 세종에게 삼년상을 위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종은 신하들의 거센 반말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힘들게 복귀시켰건만 다시 황희와 일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세종은 상을 치르고 있는 황희를 불과 3개월 만에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세종의 부름을 받은 황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조정에 있는 것은 풍속에 누가 될 것이고 거룩한 정치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오며 귀도 먹고 눈도 어두워 억지로 벼슬에 종사하는 것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세종실록>

세종은 이런 황희의 사직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며 황희를 붙잡기 위해서 '고기'까지 선물로 보냅니다.

부모님 상중에는 술과 고기를 금기시했던 것이 당시 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총애하는 나이가 많은 신하들은 건강을 위해서 왕이 고기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세종이 황희에게 고기를 내려준 것은  고령의 황희가 고기를 먹고 열심히 일하라는 일종의 복귀를 독려하는 의도가 담긴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이 직접 하사한 고기를 받은 황희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세종은 계속해서 황희에게 고기를 보냅니다.

황희의 거절과 세종의 권유가 계속해서 이어지던 상황에서 황희는 또다시 고기를 보낸 세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늙어서 병이 날까 가엾게 여기셔서 고기 먹으라고 명하시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다'

<세종실록>

결국 황희는 세종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황희는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황희는 삼년상 기간임에도 세종의 부름을 받고 65세의 나이로 좌의정으로 복귀합니다.

15. 70대의 황희, 세종에게 수시로 은퇴를 요구하지만 번번이 거부당하다

조정으로 돌아온 황희는 세종을 도와서 외교, 경제,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맹활약합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황희 나이 69세가 됐을 때, 황희는 세종으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명령을 받게 됩니다.

'황희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세종실록>

당시 문무백관 중 가장 높은 관직이었던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정승'이라고 불렀습니다.

황희가 '삼정승'을 이로서 모두 역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의정이 되고 바로 다음 해 황희 나이 70세 때, 황희는 세종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직위의 해면을 허락하소서'

궤장
궤장

황희의 사직 요구를 받은 세종은 황희에게 지팡이와 의자 즉 '궤장(几杖)'을 내립니다.

세종이 연로한 황희에게 일을 계속해서 하라는 의미에서 궤장을 하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하고 노후를 즐길 나이였지만 세종은 황희에게 궤장까지 선물하면서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궤장은 받은 황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합니다.

황희나이 71세가 된 1433년에는 실록에 영의정 황희의 이름이 50번 넘게 언급될 정도로 조정 내에서 활약합니다.

황희는 궤장을 받고 2년 후인 73세 때, 세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따르지 못하여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러지곤 하니 이는 대개 원기가 쇠약함에 따라 백 병이 마구 침범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세종실록>

이런 황희의 요구에 세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90살도 안 됐잖소!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되지 않은가!'

이렇게 또 1년이 넘어가 황희 나이 74세에 황희는 귀가 안 들린다는 이유로 또다시 사직을 올립니다.

세종이 불가하다면서 받아주지 않자 황희는 76세가 되었을 때는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종기로 피가 나고 어지럽습니다.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세종이 이를 거부하자 , 황희는 한 겨울 천둥과 번개가 심하게 치니 이렇게 말합니다.

'영의정인 제가 부족해서 그러니 저를 파면시켜 주십시오'

이에 세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날씨가 좋지 않음은 자네가 아니라 내 잘못이니 그러니 사면하지 말고 더더욱 열심히 일하라'

세종은 일을 너무 잘했고 마음에 쏙 드는 신하였기 때문에  황희를 놔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세종은 선물을 내려주면서  여러 차례 사직을 반려한 것이며 이는 그만큼 대단했던 황희의 능력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황희는 요즘 말로 '조선판 프로일잘러' 였던 것입니다.

황희의 사직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습니다.

1439년 황희나이 77세가 되었을 때, 황희는 다시 사직을 올립니다.

'이제는 하혈을 합니다'

세종은 걱정된 마음에 신하에게 황희의 문병을 가보라고 명령합니다.

세종은 문병 다녀온 신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땠는가?'

세종이 황희의 상태를 묻자 신하는 이렇게 답합니다.

'황희의 귀가 어두운 건 사실이오나 정신은 온전합니다'

신하의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황희에게 재택근무를 명합니다.

16. 87세 황희, 드디어 은퇴하다

이러면서 어느덧 황희는 80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87세의 황희는 또다시 사직서를 올리지만 여전히 사직을 불허합니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세종은 황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황희를 영의정 부사로 그대로 치사한다'

<세종실록>

'영의정 부사'는 계속일을 시키겠다는 것이 아닌 일종의 '명예직'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 업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황희는 14살 고려의 말단관리로 시작된 관직생활 70여 년이 지난 87세가 되어서야 긴 관직생활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은퇴 후, 황희는 1452년 세는나이로 90세라는 당시 사람으로서는 드문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출처: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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