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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를 이룬 세종, 며느리 4명을 쫓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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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를 이룬 세종, 며느리 4명을 쫓아내다

1. 세종, 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적장자 왕위계승을 할 문종의 혼인에 발 벗고 나서다

1427년 4월 26일 문무백관을 거느린 세종이 예복(의식을 치르거나 특별히 예절을 차릴 때 입는 옷)을 갖춰 입고 경복궁의 중심, 근정전 앞에 나타납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은 임금이 주관하는 중대한 행사를 치르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세종의 맏아들이자 적장자인 조선 제5대 왕 '문종'으로 세자였던 문종이 혼인을 치르던 날이었습니다.

세종은 세자빈을 맞이하러 가는 문종에게 덕담과 훈계를 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는 세종은 당시에도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이었습니다.

세종의 적장자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나라의 경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결혼이 지닌 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까지 적장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 왕
조선 건국 초기 왕

조선을 건국한 1대 왕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가 나라를 세운 건국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2대 왕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이었고 3대 왕 태종은 정종과는 형제관계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었습니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 역시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폐위된 후 형 대신 왕위에 오른 삼남(三男)이었습니다.

조선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적장자에 의한 왕위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종은 조선건국 이래 첫 적장자인 세자였습니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해 처음으로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다면 유교적 가계 계승의 원칙 상 정통성 있는 적장자로 왕위 계승을 할 수 있는 종법이 지켜지는 그런 기회였던 것입니다.

유교이념을 따른 조선에서는 유교적 가치를 실현할 상직적인 의미가 있는 결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이 조선과 세종에게 굉장히 중요했던 이유입니다.

2. 세종, 3년간 심사숙고하여 조선의 엄친아 '문종'의 첫 번째 며느리 '휘빈 김 씨'를 간택하다

육예 천문 역상 성률 음운에 통달했던 문종
육예 천문 역상 성률 음운에 통달했던 문종

'육예, 천문, 역상, 성률, 음운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종실록>

육예(六藝)는 유학교육에서 다루는 여섯 가지 기초 교양, 즉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서예, 소학을 말합니다.

천문, 역상은 조선 시대 과학과 천문학이며 성률, 음운은 조선 시대 언어학입니다.

이 모든 학문에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하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문종은 공부부터 예체능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조선판  '엄친아'였습니다.

문종은 즉위 전에는 세종 곁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으며 세종에게는 귀하디 귀한 적장자 엄친아 왕세자였던 것입니다.

세종에게 이런 귀한 문종의 결혼 상대가 얼마나 중요했을까요?

그래서였을까 무려 3년 동안이나 며느리감을 고르고 고르고 또 고릅니다.

그렇게 심사숙고 끝에 세자빈을 간택한 문종의 배필은 군대 최고 지휘관인 정 3품 상호군 '김오'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자인 문종과 결혼해서 세자빈이 되었고 세종에게 '휘빈'이라는 호를 받아서 '휘빈 김 씨'라고 불리게 됩니다.

'김 씨를 왕세자의 휘빈(徽嬪)으로 봉하였다. 임금이 근정전에 거동하여 왕세자빈에게 책임을 주었다'

<세종실록>

3. 첫 번째 며느리 휘빈 김 씨와 문종, 2년여 만에 파탄 나다

그러나 문종과 휘빈 김 씨와의 결혼생활은 불과  2년여 만에 파탄 나고 맙니다.

문종과 휘빈 김 씨와의 결혼 생활은 초기부터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남편인 세자 문종이 아내인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는 무관심하면서도 몇몇 궁녀들과는 가까이 지냅니다.

문종과의 부부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빨리 자식을 낳았다면 아마도 휘빈 김 씨의 지위는 안정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휘빈 김 씨에게는 자식을 낳을 기회마저도 없었습니다.

당시 세자는 성년으로 간주하는 열다섯 살 봄에 합방이 가능했습니다.

휘빈 김 씨와 결혼할 당시 문종의 나이는 14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1년쯤 지났을 때인 문종 나이 15살 때, 휘빈 김 씨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교 예법에 따라서 휘빈 김 씨는 1년 동안 할아버지 상을 치러야 했고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합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결혼하고도 2년 동안이나 문종과 휘빈 김 씨는 합방을 할 수 없었습니다.

휘빈 김 씨는 문종이 여성으로서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고 세자빈으로서 자식을 낳을 기회도 없었던 것입니다.

휘빈 김 씨는 문종의 무관심에 극도의 불안함과 초조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은밀히 도움을 청합니다.

그녀가 도움을 청한 인물은 '호초'(양반가 첩의 딸)라고 하는 궁녀였습니다.

휘빈 김 씨가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세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비술이었습니다.

휘빈 김 씨는 어머니가 첩인 호초라면 민간에 떠도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할 '첩들의 비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비술을 '압승술(壓勝術/누를 압, 이길 승, 재주 술)'이라고 표현합니다.

압승술은 쉽게 말해 남편이 좋아하는 다른 여인의 기를 눌러 자신이 사랑싸움에서 이기는 술법입니다.

압승술을 써서 문종이 좋아했던 궁녀들의 기를 누르고 휘빈 김 씨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비책이었던 것입니다.

휘빈 김 씨는 이렇게 세자빈이 절대 하면 안 될 비술에 손대게 됩니다.

호초는 휘빈 김 씨에게 조용히 비술을 알려줍니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세종실록>

문종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태워서 그 재를 술에 타서 그 술을 세자에게 마시게 하면 세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휘빈 김 씨는 그 방법을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호초는 당시 문종이 가까이 지내던 두 궁녀 ' 효동과 덕금'을 콕 집어 두며 그 두 궁녀의 신발로 실행할 것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휘빈 김 씨가 문종에게 이 비술을 써보기 위해 틈틈이 기회를 엿봐 세 번이나 시도를 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이 비술이 실패하자 다시 휘빈 김 씨는 호초를 불러들여 또 다른 방법을 물어봅니다.

이때 호초는 이전보다 더 충격적인 방법을 알려줍니다.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실패로 끝난 첫 번째 비술보다도 훨씬 어렵고 실행에 옮기기 힘든 비책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휘빈 김 씨는 두 번째 비술에 솔깃해하며 실행에 옮기려 하지만 이 또한 실패합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실패하는 과정을 겪고 나니 궁궐에서 세자빈이 비술을 쓴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시아버지 세종의 귀에까지 흘러갑니다.

세종은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확인합니다.

'호초를 불러오라'

일개 궁녀인 호초가 나라님 세종 앞에서 벌벌 떨며 감히 거짓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동안의 일을 낱낱이 세종에게 고합니다.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 휘빈 김 씨도 변명하지 못하고 세종에게 모두 자백합니다.

이 며느리의 자백을 들은 시아버지 세종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슬프다, 세자를 정하고 그 배필을 간택한 것은 진실로 장차 종묘의 제사를 받들며 어머니로서의 규범이 되어 만세의 큰 복조를 연장하려고 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적장자의 혼사에 누구보다 기뻐했던 세종이었지만 비술에 빠진 며느리의 행동은 세종의 관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며느리 휘빈 김 씨의 일이 세종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바로 1434년 세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편찬한 교훈서입니다.

세종은 조선 초기에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왕이었습니다.

삼강행실도는 이를 위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 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그림으로 엮어만든 책이었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올바른 유교적 이념을 가르치기 위해서 전 국민배포용 교훈서까지 편찬했던 것입니다.

세종은 국가의 기반이 되는 유교 이념이 바로서야 진정한 국가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왕이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한 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왕조는 국가 유지의 기초인 집안을 잘 다스려야 나라도 잘 운영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교 국가조선은 이혼을 억제했습니다.

유교적 윤리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앞장섰던 세종은 당연히 이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버지 세종은 휘빈 김 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지금 김 씨가 세자빈이 되어 아직 두어 해도 못 되었는데 그 꾀하는 것이 감히 요망하고 사특함이 이미 이와 같기에 이르렀으니... 왕궁 안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니, 도리대로 마땅히 폐출시켜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그리고 감히 세자빈에게 비술을 가르쳤던 궁녀 호초는 목을 베는 참형에 처해집니다.

세종이 휘빈 김 씨 행동 얼마나 격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처벌 수위라 하겠습니다.

※ 참고: 예비 국모를 뽑는 과정인 '삼간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왕실의 일원이 될 사람을 뽑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왕실에서 '예비 국모를 뽑는 과정'을 '삼간택(三揀擇/석 삼, 분간할 간, 고를 )'이라고 합니다.

간택은 '가려고 고른다'라는 뜻이고 임금이나 세자(世子), 세손(世孫)등 왕실사람들이 혼인할 때 그 배우자를 세 번에 걸쳐 일정한 절차로 고르는 과정을 삼간택이라고 합니다.

삼간택
삼간택

삼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이렇게 세 번의 간택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종 때까지는 아직 세 번의 간택과정이 자리 잡았던 시대가 아니었고 이후 점점 형식을 갖춰 나가면서 삼간택의 형태가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삼간택에 앞서 전국에 국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금혼령'을 내립니다.

금혼령(禁婚令)이란 왕비나 세자빈을 간택할 때 백성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입니다.

왕실의 혼인 대상으로 좋은 배우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했던 조치였던 것입니다.

금혼 대상의 연령대는 국왕이나 왕세자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은 달랐지만 평균적으로 10~15세 안팎의 처녀였 해당 나이의 처녀를 둔 집안의 어른들은 일종의 지원서라고 할 수 있는 '간택단자'를 조정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간택단자'에는 어떤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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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고종 때 세자 순종의 결혼을 위해 받은 간택단자를 조정에서 정리해놓은 문서

위 그림은 1882년, 고종 때 세자 순종의 결혼을 위해 받은 간택단자를 조정에서 정리해 놓은 문서입니다.

처음 두 줄에 담긴 지원자의 정보는?

간택단자 첫 두 줄
간택단자 첫 두 줄

처자 홍 씨 년 십세(나), 계유 칠월 초삼일 육시(태어난 날), 본관 남양(집안의 본관)

첫째 줄에는 세자빈 지원자의 성과, 나이, 사주인 생년월일시 그리고 본관을 적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가문의 명성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가문의 명성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

그다음 줄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가문의 명성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간택단자의 내용중 붕당 표기
간택단자의 내용중 붕당 표기

흥미로운 점은 간택단자의 내용 중  '소론'이라고 적혀 있는 대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으로 본다면 일종의 소속정당으로 '붕당'의 한 정파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간택 후보를 뽑을 때 집안의 명성뿐 아니라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국에서 올라온 간택 단자 중에 집안과 사주를 살펴 후보자 30여 명 정도를 추리고 본격적인 삼간택이 돌입됩니다.

예비 국모 되기 첫 번째 관문 '초간택'

초간택에서는 걸음걸이, 절하기 등 기본예절을 평가했습니다.

초간택에 참여한 처녀들은 모두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었습니다.

처녀들이 같은 복장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면접을 볼  면접용 정장을 입듯이 초간택 때에도 형평성에 맞게 공정한 면접을 치른다는 의미에서 복장을 통일했던 것입니다.

초간택에 참여한 30여 명 중에 보통 5~7명 정도가 합격했습니다.

그렇게 뽑힌 합격자들에게는 두 번째 면접인 재간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비 국모 되기  두 번째 관문 '재간택'

재간택에서는 왕실 웃어른들과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는데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얼마나 교양 있게 행동하는지 등 식사 예절을 주로 봤습니다.

이렇게 식사예절을 보는 재간택을 통해서 최종 후보 3인 결정됩니다.

예비 국모 되기  세 번째 관문 '삼간택'

최종 후보 3인은 가장 긴장되는 삼간택에 참여하여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나 왕비, 종친을 면접관으로 둔 압박 면접을 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알아보려고 했던 것은 후보자의 성품과 현명함입니다.

영조 대에 실제 삼간택에서 나온 질문을 통해서 그 난이도를 알아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한 후보자가 먼저 대답합니다.

'산이 깊사옵니다'

또 다른 후보도 뒤이어 대답합니다.

'물이 깊사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후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사옵니다'

이렇게 대답한 처자에게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합니다.

'사물의 깊이는 자로 재서라도 헤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재기도 헤아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현명한 답을 한 15세의 소녀는 결국 삼간택을 통하여 최종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바로 1759년에 왕비로 책봉된 영조의 두 번째 아내 정순왕후(1745~1805)입니다.

왕비나 세자빈이 된 다는 것은 국모 또는 예비 국모를 뽑는 자리였던 만큼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삼간택이 매우 신중하게 치러질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4. 세종, 두 번째 며느리 용모가 뛰어난 '순빈 봉 씨'를 간택하다

세종은 첫 번째 며느리를 폐위시킨 이후 전국에 '금혼령'을 내립니다.

이 금혼령은 세종이 다시 며느리를 뽑겠다는 신호였습니다.

세종은 첫째 며느리 폐위 후 둘째 며느리 간택에 더욱더 공을 들이게 됩니다.

세종이 두 번째 며느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동궁(왕세자 문종)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겠다. 세계(가문)와 부덕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은 가문과 부덕은 원래부터 중요한 조건이었고 이에 못지않게 용모도 중요하다고 콕 집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신하가 세종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곳에 모여 가려 뽑는다면 덕을 보지 않고 오로지 얼굴만을 보고 뽑게 될 것입니다'

신하의 말에 세종이 답하길

'잠깐 봐서 덕을 어떻게 확인하겠느냐. 덕으로 뽑을 수 없다면 용모로 뽑을 수밖에 없다'

세종이 뜻을 굽히지 않고 고르고 골라 최종 간택된 두 번째 며느리는 집안과 부덕은 물론 용모까지 고려해 뽑은 '순빈 봉 씨'였습니다.

세종은 다시는 휘빈 김 씨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새 며느리  순빈 봉 씨가 입궁하자  순빈 봉 씨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건넵니다.

바로 '열녀전(列女傳)'입니다.

열녀전은 중국 명나라 때 모범이 될 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엮은 역사서입니다.

당시 여성들을 가르치던 훈육서 중 한 종류라고 보면 됩니다.

순빈 봉 씨가 어질고 모범적인 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시아버지 세종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에게 열녀전을 받은  순빈 봉 씨는 며칠 공부하는가 싶더니 어찌 이를 배우고 생활할 수 있겠냐며 뜰에 집어던져버립니다.

이런 행동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효를 다해야 하는 시아버지에게 불효하고 동시에 충을 다해야 하는 왕에게 불충한 것이니 엄청나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세종은 화가 났지만 따로 불러서 며느리의 행동을 혼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순빈 봉 씨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충격적인 일을 벌입니다.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며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며...'

<세종실록>

순빈 봉 씨가 궁궐에 술을 숨겨놓고 마시면서 취한 채로 돌아다니기까지 했다는 내용이 실록에까지 나옵니다.

이뿐 아니라  순빈 봉 씨는 질투 때문에 궁녀들을 구타하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궁녀가 하도 맞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순빈 봉 씨는 이렇듯 열녀전을 집어던지고 술에 취해 돌아다니고 궁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급기야 이런 기행이 시아버지 세종의 귀로 들어갑니다.

세종은 이번에도 참습니다.

세종은 며느리에 대한 불만보다 이 모든 것을 눈감아 주더라도 왕조를 이어갈 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빨리 봐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순빈 봉 씨와 재혼했을 무렵 세자인 문종의 나이가 16세였는데 아직까지도 아들을 보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 간절함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5. 세종, 세손을 낳을 명문가 출신 여성 3명 권 씨, 홍 씨, 정 씨를 세자의 소실로 간택해 들이다

순빈 봉 씨는 세자 문종과의 부부사이도 소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세종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세손을 낳을 명문가 출신 여성 3명 권 씨, 홍 씨, 정 씨를 세자의 소실로 간택해 들입니다.

세자의 첩을 부를 때는 보통 소실, 후실이라고 했으며 이는 왕의 후궁과 같은 개념입니다.

정통성 있는 왕실의 후계자는 세자빈에게서 태어나면 좋지만 만에 하나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소실을 들였던 것입니다.

과연 세종이 원하는 대로 됐을까요?

다행히도 3명 중 소실 권 씨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시아버지 세종이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된 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며 이는 나라의 경사이기도 하지만 세종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임신소식이 누군가에게는 분노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순빈 봉 씨는 질투와 원망, 분노를 쏟아내며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실 권 씨가 아들을 낳으면 나는 쫓겨나게 될 거야'

결국 세종은 아들인 문종을 불러들여 정처인 순빈 봉 씨에게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정처를 멀리해서는 안된다며 당부를 합니다.

모범생 세자 문종은 아버지의 당부를 받아들였던 것인지 드디어 순빈 봉 씨의 임신소식이 들려오고 세종과 소왕후는 몹시 기뻐합니다.

세종은 순빈 봉 씨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거처를 왕비전으로 옮겨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 달 후 순빈 봉 씨가 유산을 합니다.

이 소식도 청천벽력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순빈 봉 씨의 임신이 가짜였던 것입니다.

며느리 순빈 봉 씨는 열녀전을 집어던진데 이어 술로 문제를 일삼고 궁녀들을 폭행하는 데 이어 거짓 임신으로 세종을 속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이번에도 참습니다.

세자를 유혹하려는 비술을 써서 내쫓은 첫째 며느리 희빈 김 씨와는 달리 두 번째 며느리인 순빈 봉 씨에 대해서는 기행을 참고 또 참습니다.

세종의 이때의 심정을 담은 내용이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두 번이나 폐출을 행한다면 더욱 나라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할 것이므로, 나는 이를 매우 염려하여 처리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세종실록>

세종은 두 번이나 며느리를 쫓아낸다면 백성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할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세종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습니다.

6. 두 번째 며느리 순빈 봉 씨, 궁녀와 동성애 스캔들이 발각되어 결국 쫓겨나다

그런데 결국 세종의 인내심이 폭발한 사건이 터집니다.

순빈 봉 씨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행위를 합니다.

어느 날 궁궐 안에서 청소 중인 한 궁녀에게 세자인 문종이 은밀히 다가가 말을 겁니다.

'네가 정말 빈과 함께 자느냐?'

순빈 봉 씨와 한 궁녀가 궁내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문종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인데 문종은 직접 그 궁녀에게 가서 확인을 했던 것입니다.

그 궁녀의 이름은 '소쌍'이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만남은 길고 긴 겨울밤, 순빈 봉 씨가 궁녀 소쌍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이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궁녀들은 자신의 거처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소쌍에게 동침을 요구한 것입니다.

순빈 봉 씨는 소쌍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옷을 빼앗고 눕혀 희롱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순빈 봉 씨는 소쌍에게 집착하면서 소쌍을 잠시도 본인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비우면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면서 원망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소쌍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무섭다"하였다'

<세종실록>

마침내 세종은 며느리의 부정한 행실을 감싸느니 차라리 며느리를 두 번 내쫓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결국 1436년 10월, 문종이 재혼한 지 7년 만에 세종은 다시 한번 며느리를 쫓아냅니다.

'전에 김 씨를 폐했는데 또 봉 씨를 폐하게 되니, 이것은 나와 세자가 몸소 집안을 올바르게 거느리지 못한 소치이다. 내가 마지못하여 세자빈을 폐출하는 뜻을 알리기 바란다'

<세종실록>

세종은 일국의 왕이자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가장으로서 이 상황이 비통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세자빈의 잘못된 행동을 숨기지 않고 대신들에게 낱낱이 밝혔습니다.

세종은 세자빈에게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7. 세종, 2명의 며느리를 더 쫓아내다

세종이 쫓아낸 며느리는 이 둘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두 명의 며느리를 더 쫓아냅니다.

세종의 가계도
세종의 가계도

세종의 적자인 '임영대군과 영응대군'의 아내들이었습니다.

먼저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은 개국공신 남재의 증손녀인 '남 씨 부인'과 혼인했습니다.

혼인 2년 후 세종은 이 둘을 돌연 이혼을 시킵니다.

바로 병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남 씨 부인이 12세가 넘었는데 아직도 오줌을 싸고, 눈동자가 바르지 못하고 혀가 심히 짧고, 미친 듯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또 다른 아들을 이혼시키려는 세종의 결정을 이번에는 순종적인 아내인 소헌왕후마저 반대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세종은 세자가 아내를 버렸는데 또 임영대군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임영대군과 남 씨를 이혼시킵니다.

세종이 쫓아낸 또 다른 며느리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태어난 8명의 대군 중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아내였습니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임종이 다가오자 영응대군의 저택에서 지낼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영응대군이 열한 살이 되던 해, 그의 배필을 찾기 위해 세종은 직접 간택에까지 참여합니다.

그렇게 간택된 며느리 가는 고려시대 때부터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유서 깊은 집안의 송 씨라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렇게 어렵게 뽑은 며느리 역시 혼인한 지 5년 만에 쫓아내 버립니다.

이번에도 병이 있다는 이유였는데 영응대군의 이혼이 오로지 세종의 뜻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송 씨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하자, 염(영응대군)이 송 씨를 그리워하여 정시를 내쫓고 송 씨와 다시 합하여 살았다'

<세조실록>

영응대군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할 뜻이 없었지만 아버지 세종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8. 세종은 왜 며느리 넷을 쫓아냈을까?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돌봤던 세종이 왜 유독 며느리에게는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당시 세종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던 요소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임영대군과 영응대군의 부인들은 모두 병을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고치기 힘든 병을 의미하는 악질은 사실은 '칠거지악(七去之惡)'에서 나온 것입니다.

칠거지악이란 유교에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 가지 사항을 의미합니다.

①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③ 부정한 행위

④ 질투

⑤ 유전병 

⑥ 말이 많은 것

⑦ 훔치는 것

병을 의미하는 악질은 칠거지악 중 하나였습니다.

병이 있으면 자식을 낳고 제사를 받들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이란 만 가지 일을 친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모든 정사를 보살핀다는 말입니다.

세종은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알려져 있던 왕이었습니다.

식사를 할 때조차도 책을 좌우에 놓고 먹고 한 밤중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 왕이기도 합니다.

세종은 이 만기친람의 정신으로 정사만 돌본 것이 아니라 가정도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영역으로 생각하고 아들  부부의 문제 역시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요즘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9. 문종의 세 번째 아내, '세자빈 권 씨'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다

그렇다면 문종의 다음 부인이자 세종의 세 번째 며느리는 누구였을까요?

세종은 서둘러 세 번째 세자빈을 찾아 나섭니다.

명문가 규수 몇 사람을 찾아 길흉을 점치고 덕과 용모를 살펴봐도 세종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신들은 밖에서 찾지 말고 3명의 기존 소실 가운데 적임자를 뽑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의견을 냅니다.

세종도 이 의견에 동의를 했고 세 번째 세자빈의 자리는 1년 전 딸을 낳았던 소실 권 씨에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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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세자빈의 결정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권 양원과 홍 승휘 중에서 누가 적임자인가. 두 사람은 모두 세자와 우대하는 사람이며 우리 양궁이 돌보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홍 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지만 내 뜻은 권 씨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세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를 잇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이미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있는 권 씨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때 문종의 나이는 23세였는데 이때까지도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이는 세종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을 것입니다.

세자빈 권 씨는 책봉 5년 뒤에 아들을 출산하면서  바로 이 세종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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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고대하던 원손의 탄생에 몹시 기뻐하며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손자가 태어난 바로 다음 날, 세자빈 권 씨가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문종은 적장자 단종을 본 다음날, 갑자기 아내를 잃게 됩니다.

이후 세자 문종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문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이 승하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혼인하지 못하였고 세종의 상을 마칠 즈음 문종 또한 승하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 동안 왕비가 없었던 조선 유일의 왕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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