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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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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1. 정조, 10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조선 22대 왕 정조
조선 22대 왕 정조

원래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두고 왜 수원에 계획도시를 만든 것일까요?

오늘 시간은 정조가 수원에 계획도시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에 들어간 그 순간. 그때 정조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습니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고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왕(정조)은 슬픔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나 지나쳐 시중드는 사람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조실록>

당시 정조의 나이가 고작 10살이었고 어린 정조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인생최대의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어린 정조가 슬픔만큼이나 감당하기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죄책감입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조는 만약 자신 태어나지 않았다면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던  아버지 사도세자는 죽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태어남으로 인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것이라 여기며 아버지의 죽음마저도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10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정조의 이 슬픔과 죄책감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가슴 깊이 흔적을 남깁니다.

2. 정조, 왕세손에 지위에서 쫓겨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의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궁에 살았던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와 함께 궁밖으로 나가 살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 영조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세자 지위를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폐위되어 더 이상 세자가 아닌 것이었고 그의 아들인 정조 또한 신분이 박탈될 위기에 놓인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한순간 조선왕실의 귀한 왕세손에서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 장례식의 상주는 당연히 아들인 정조가 되어야 했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정조에게 상주로 서지도 말고 상복을 입지도 말라고 명합니다.

영조는 손자 정조를 궁에서 내쫓은 것도 모자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발인에 오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정조는 자신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장례식에서 마지막 인사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3. 정조, 할아버지 영조의 어명으로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되어 궁으로 다시 돌아오다

며칠 후 할아버지 영조의 갑작스러운 어명이 정조에게 도착됩니다.

'세손을 동궁(왕위 후계자)으로 칭하라'

영조가 사도세자를 다시 세자로 복권시키고 정조를 차기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 영조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정조보다 후계자로 걸맞은 인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차기 왕 후계자로 돌아온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의고 겨우 2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너를 살펴보겠다'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할아버지 영조의 말을 들은 정조는 자칫하면 아버지처럼 내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품에서 철저한 감시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정조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할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4. 세간에 정조가 죄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떠돌다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 곁에서 한걸음 한걸음 후계자로서 단계를 밟아가고 있던 중에 세간에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 이후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듣게 됩니다.

'세손은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정조)이라 왕통을 이을 수 없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아니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조의 왕위 계승 정통성 확보를 위한 사전준비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도세자가 사형에 처했을 경우 그는 영락없이 죄를 지은 '죄인'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 정조를 위해서라도 이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죽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조는 정조를 보호하려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죽이기 위해 뒤주에 가뒀던 것입니다.

영조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이렇게 사도세자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정조를 죄인의 아들이라고 쑥덕였던 것입니다.

 

대체 누가 정조를 죄인의 아들이라고 한 것일까요?

바로 영조의 곁에서 사도세자의 흉을 보면서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끝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신하들 즉, 정조가 왕이 될 경우 불리한 신하들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히 큰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하들이 조선 조정 곳곳에서 정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영조, 손자 정조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미 죽은 또 다른 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정조의 호적을 바꾸다

정조를 둘러싼 뒷말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정조가 열두 살이 됐을 때 정조의 삶을 바꾸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에 영조는 왕위계승 '정통성'을 명분으로 정조의 호적을 바꿔버립니다.

바뀐 정조의 새아버지는 영조의 또 다른 아들 효장세자로  그 또한 세상에 없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영조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조는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이미 죽은 큰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사실 정조를 사도세자의 장례에서 상주로 세우지 않았던 것 역시 정조에게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끊어내기 위한 영조의 큰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또 다른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이 뒤에 만일 다시 이 일을 들추어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역신인 것이다'

영조는 만일 이 이후에도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임금에게 반역을 꾀하는 신하 곧 역신이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6. 영조,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 것을 약속받다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선조를 왕을 추대하는 것을 '추숭'이라고 합니다.

영조는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하지 말라'라고 못을 박습니다.

사도세자를 언급할 때마다 정조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계속해서 들고일어나게 하는 명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끝까지 할아버지 영조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7. 세손 정조, 반대세력에 위협받는 일상을 살다

시간은 흘러 12살이었던 정조는 장성하여 23살이 됩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보호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훌륭하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세손 정조는 차마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정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습니다.

어떤 날에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정조의 거처에서 문에 귀를 대고 이야기를 엿듣다가 도망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정조가 써놓은 글을 훔쳐보기까지 합니다.

정적들의 사주를 받고 정조를 감시하는 이들이 득실득실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왕이 될 후계자인 정조를 이렇게 염탐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궁녀와 내시들이었습니다.

궁안 어디에나 존재하는 궁녀와 내시가 정조의 적들에게 사주를 받고 정조를 감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위협과 협박에 시달리던 당시 정조는 이런 심경을 토로합니다.

'저들이 나를 손 안의 물건으로 여긴 지 오래되었다. 내가 두렵고 겁이 나고 의심스럽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였지만 조선 조정에서 정조의 정치적 입지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기회를 기다리면서 그 설움과 수모를 꾹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8. 영조,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다

그런데 1775년 겨울, 정적들의 감시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정조에게 전세를 뒤집을 완벽한 기회가 드디어 찾아옵니다.

할아버지 영조가 정조에게 정식으로 대리청을 맡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조선조정을 뒤집어 놓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동궁(정조)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영조실록>

한마디로 말해서 영조가 내린 대리청정의 명을 절대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영조와 차기 왕이 될 정조 앞에서 대놓고 반대한 것입니다.

영조는 이런 반응도 무시한 채, 승정원의 승지에게  인사와 군사에 대한 문제를 정조에게 결제받으라며 대리청정을 밀어붙입니다.

그만큼 할아버지 영조는 정조에게 강한 힘을 실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조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제치고 비서실이었던 승지에게 대리청정을 결정하라고 명을 받아 적게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한 신하가 왕의 명을 받아쓰는 승지의 앞을 막아섭니다.

영조는 왜 이렇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로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벌하지 못한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영조가 치매증상으로 인해 신하들의 선을 넘는 행동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정조의 대리청정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때보다 못한 한 신하가 목숨을 걸고 영조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 영조가 기억하지 못한 어전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고합니다.

영조는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는지 다시 한번 정조의 대리청정을 명령합니다.

정적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시작된 정조의 대리청정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됩니다.

9. 대리청정 후 정조가 한 첫 번째 일,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록을 지우는 '세초'작업을 하다

대리청정을 맡은 정조가 조석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벌입니다.

https://youtu.be/pdZSVfTmpBM?si=g5ohurl56_Xyb0DK

홍제천 계곡에 위치한 '차일암'에서 계곡의 물에 사관들이 무엇인가 적힌 종이를 씻어내고 있습니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 실록을 쓸 때 사용되는 기록이나 초고를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을 지우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록이 편찬되기도 전에 사도세자의 기록을 지우는 세초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역사에 기록되기 전에 내용을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대리청정 중인 정조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776년 2월, 정조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채 2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습니다.

정조가 뙤약볕 아래 바짝 몸을 엎드린 채 할아버지 영조에게 눈물을 흘리며 읍소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을 외치니 가엾이 여겨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정조는 승정원일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록이 너무 끔찍하고 마음이 아프니 아버지의 죽음이 담긴 1762년 그해의 기록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을 통째로 지워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정조가 초강수를 띄웁니다.

'만약 나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대리청정과 후계자의 지위도 거두어 주십시오'

정조가 이렇게 강력하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록을 지우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죄가 언급될수록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 앞에 당당해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할아버지 영조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록을 지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게 된 대에는 사도세자의 잘못 보다 일부 간악한 신하들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슬픈 기록을 지우는 세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기 위한 정조의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정조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지는 운명의 날이 찾아옵니다.

바로 할아버지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10. 왕이 된 정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외치며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5일 뒤인 1776년 3월 10일, 영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바로 영조의 손자 24살 된 '정조'였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날, 단상에 올라 신하들을 보며 정식으로 첫 한마디를 던집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이 한마디를 들은 신하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대혼란에 빠집니다.

정조가 즉위 첫날 이 말을 한 이유는 앞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부로서 예우하겠다는 뜻이 담겼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응당한 첫발을 내릴 수도 있다는 취지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정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의 존호인 '사도(思悼)'에 '자전 장, 들은 헌' 자를 써서 '장헌(莊獻)'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추가로 붙여서 부르게 합니다. 

장헌은 무예를 즐겼던 아버지 세도세자를 기려 '무인의 기질을 지닌 총명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조의 이와 같은 파격행보에 두려움을 느낄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도세자를 죽게 하도록 방치했던 일부 신하들이었습니다.

정조는 그동안 억눌러 왔던 일들을 시작합니다.

정조는 10살 때부터 무려 14년 간 칼을 갈아왔던 원수가 있음을 밝힙니다.

'내가 마음에 새기며 뼈를 썩혀온 것이 단지 김상로 하나만이 아니고 문성국에게 있다'

<정조실록>

김상로와 문성국 이 두 사람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할아버지 영조사이를 오가며 서로를 이간질하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습니다.

10살 어린 정조에게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려줬던 것인데 바로 할아버지 '영조'였습니다.

영조는 10살이었던 어린 손자 정조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상로는 너의 원수다'

김상로는 할아버지 영조가 콕 집어서 정조에게 '너의 원수'라고 칭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김상로에게 복수를 하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상로가 이미 죽었던 것입니다.

이에 정조는 김상로의 아들과 조카까지 외딴섬에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정조에게 '문성국'이라는 이에 대한 분노는 김상로보다도 더 컸습니다.

'저 문성국은 천한 복예(僕隸)로서 살무사 같은 성질을 지녔는데... 천 번 살점을 발라내고 만 번을 죽인다 하더라도 어찌 줄줄이 꿰어진 죄악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겠는가'

<홍재전서>

정조는 문성국을 만 번 죽여도 그 한을 풀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하며 문성국의 관직을 빼앗고 다시는 관직을 얻을 수 없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모두 노비로 만듭니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서 이와 같은 처절한 복수를 하면서도 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형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왕들과 정조의 차별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부 반역자 외에는 유배를 보내거나 노비로 만드는 데에 그칩니다.

그런데 14년간 품어온 정조의 이 매서운 보복은 바로 부메랑이 되어서 정조의 목을 죕니다.

11. 정조, 즉위 이후에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하다

정조가 즉위한 다음 해에 두 차례의 암살 시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연 암살자는 혼자 일을 계획한 것일까요?

암살자의 배후에는 정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험담을 전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던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었습니다.

정조는 암살범과 홍상범을 대질 신문시킵니다.

그러자 홍삼범이 점쟁이를 동원해서 정조를 저주하고 죽이려 했던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뿐 아니라 정조 시해 이후에 정조의 이복형제였던 은전군을 새로운 왕위에 추대하려고 했다는 계획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정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12. 정조, 왕권강화를 위해 '규장각'을 짓고 친위부대 '장용영'을 설치하다

정조는 즉위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와중에 자신을 지지해 주고 믿을 수 있는 측근세력을 키우려 합니다.

정조는 이런 측근세력들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을까요?

정조는 즉위한 해에 특별한 건물을 짓습니다.

규장각
규장각

지금의 창덕궁 안에 위치한 왕실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던 '규장각'입니다.

이 규장각에서 정조의 측근세력을 키웁니다.

지금의 규장각은 화재로 인해 1776년 정조가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는 이렇게 다시 세운 규장각에서 정책들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조는 왜 학문을 연구하는 규장각에서 측근세력을 키우 것일까요?

바로 똑똑한 인재를 직접 뽑아 자신을 도울 신하로 키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중에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약용'입니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정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정조는 이처럼 신하들을 양성하는 일에 의욕이 넘쳤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뽑은 신하들에게 불시에 시험문제를 출제하였고 이에 틀린 신하들은 궁 안 부용지 연못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으로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는 유배를 보내는 등 정조의 인품과 위트가 돋보이는 벌칙을 주었습니다.

또한 정조는 연이은 살해위협과 암살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듭니다.

이렇게 정조는 자신을 믿고 따를 측근세력을 차근차근 키워나가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0여 년간 꾸준히 일궈낸 왕권강화정책으로 정조의 왕권은 튼튼한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3. 정조, 나라를 위해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명분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다

1789년 7월 11일, 조정의 대신들이 당황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정조가 한 신하의 상소를 읽더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경들의 아룀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 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정조실록>

정조는 상소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하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상소의 내용은 '사도세자의 무덤 자리가 좋지 않으니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소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37세였던 정조가 아직까지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 아들이 없었는데, 신하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정조에게 후사가 없는 것이라며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무덤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야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는 완벽한 명분을 실어 상소를 올린 것이니 정조로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어마어마한 반전이 있습니다.

사실 이 신하의 상소내용과 상소를 올린 시기는 모두 정조의 계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에 불만족을 느꼈고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싶어 했습니다.

정조는 자신과 친인척관계였던 신하와 이 고민을 나눕니다.

그리고는 정조는 신하와 비밀 편지인 '밀찰' 주고받으며 말을 맞춥니다.

'신하가 상소를 준비하고 이를 본 정조가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정조의 각본이었던 것입니다.

14.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곳으로 풍수지리상 명당인 수원을 선정하다

과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어디로 옮겼을까요?

정조는 이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왜 정조는 조선 팔도의 많은 지역 중에 수원을 콕 집어 택한 것일까요?

지금의 화성인 수원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선택한 명당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터로 여주, 강릉, 용인 등 많은 곳이 후보에 있었지만 다 맘에 들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습니다

그리고는 전국 명당 중 최고의 명당이라는 수원을 선택합니다.

정조의 계획은 예상대로 잘 진행됐을까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이 들어설 명당 위에 이미 터를 잡고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이에 백성들의 토지를 후한 값에 사고 그들의  이주까지 도와줍니다.

정조는 조선 제일 명당에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지난날 다하지 못한 효를 다하기 위해 아버지를 이토록 정성껏 모십니다.

정조는 이렇듯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나갑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하지 않기로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은 세자의 격식에 맞는 무덤으로 꾸며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의 무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39;현무 백호 주작 청룡&#39;의 사신수 그림
'현무 백호 주작 청룡'의 사신수 그림

그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관에 왕의 관에만 허락됐던  '현무 백호 주작 청룡'의 사신수 그림을 새깁니다.

사도세자 무덤의 &#39;병풍석&#39;
사도세자 무덤의 '병풍석'

그리고 세자의 무덤에는 잘 두르지 않는 '병풍석'도 두릅니다.

사도세자 무덤의 &#39;문인석&#39;과 &#39;무인석&#39;
사도세자 무덤의 '문인석'과 '무인석'

그 앞에 '문인석'과 함께 왕과 왕비의 릉에만 허락된 '무인석'도 세웁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무덤은 일반 왕실의 무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사도세자무덤 현륭원
사도세자무덤 현륭원

바로 다른 왕의 무덤과는 달리 정자각의 방향이 틀어져 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했고 무덤에서 만이라도 아버지가 갑갑하지 않도록 무덤 앞이 시원하게 뚫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자각 방향을 틀어지게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정조는 화려하게 무덤을 꾸며 사도세자의 명예를 높이려 합니다.

정조의 정성에 하늘도 감복한 것인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난 후 정조는 정말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15.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묘를 보호하기 위해 '수원화성'을 짓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전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다음 계획을 실행해 옮깁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지역을 보호하기 해서 성을 짓기로 결심하고 이후 지어진 것이 '수원화성'입니다.

수원화성
수원화성

1794년 첫 삽을 떴고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를 사용해서 약 3년여 만에 빠르게 완공됩니다.

그리고 성 안에는 마을과 시장이 들어섰고 수원은 어느새 조선의 제2의 도시로 크게 성장합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입니다.

16. 정조, 아들 순조가 왕으로 즉위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할 계획을 세우다

정조의 최종목표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정조의 아들 순조가 왕이 되어서 사도세자를 왕으로 올리는 방법을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정조는 영조와 약속은 지키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숭 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정조는 아들이 15살이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하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정조는 이처럼 아버지 사도세자를 끝까지 왕으로 추숭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조는 이런 모든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1800년 6월 28일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정조는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옆에 묻힙니다.

이렇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곁에서 불꽃같은 생을 마무리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꿈을 담아 만든 도시 수원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정조의 꿈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효자였고 아주 영리한 군주였습니다.

정조의 죽음 이후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선대왕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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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옛드:MBC 레전드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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