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여인천하' 모티브, 아들 '명종'을 왕으로 만들고 수렴청정했던 절대 권력자 '문정왕후'
1. 문정왕후 윤 씨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되다
위 그림은 중종의 왕비들만 나와있는 가계도입니다.
먼저 중종의 조강지처이자 첫 번째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 씨'는 중종이 즉위한 지 단 7일 만에 궁 밖으로 쫓겨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jKzdSC9TiM
바로 단경왕후 신 씨의 아버지가 중종반정을 반대한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것입니다.
쫓겨난 연산군과의 관계 때문에 단경왕후 신 씨는 폐비가 됩니다.
그래서 맞이한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 씨'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안타깝게도 25살의 나이에 출산 직후 산후병으로으로 왕비가 된 지 8년 만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렇게 두 명의 왕비를 잃은 중종은 장경왕후 사망 2년 만에 새 왕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는 당시 17살이었던 '문정왕후 윤 씨'였습니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된 문정왕후는 조선 역사상 왕비를 5명이나 배출한 명문가 '파평 윤 씨' 가문의 규수였습니다.
참고로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 씨 또한 '파평 윤 씨' 가문이었습니다.
2. 문정왕후,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을 지키는 임무를 받다
그렇게 궁으로 들어오게 된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된 뒤에 막중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중종의 두 번째 왕비가 낳은 아들 '인종'을 보살피는 일이었습니다.
문정왕후 입궁 당시 인종은 엄마를 잃은 세 살배기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원자 인종을 잘 돌보고 키워내는 것이 문정왕후의 임무였습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임무가 왜 중요했던 것일까요?
사실 당시 궁궐 내에는 인종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살배기 인종을 남기고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무렵에 당시 중종에게는 총애하는 후궁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https://youtu.be/MZtng7PpeJ8?si=jqHT-795s5C1E_S7
그 후궁 중에서도 중종이 특별히 총애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경빈 박 씨'였습니다.
경빈 박 씨는 중종의 첫 번째 아들을 낳은 후궁이었습니다.
중종의 사랑을 등에 업고 원자인 인종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은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런 경빈 박 씨가 호시탐탐 중전자리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경빈 박 씨가 중전이 되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란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대신들은 경빈 박 씨가 왕비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면서 중종에게 새로운 중전의 간택을 적극적으로 권유합니다.
문정왕후를 새 왕비로 들임으로써 경빈 박 씨가 왕비가 되는 것을 막고 어린 원자 인종이 큰 탈 없이 세자로 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3. 문정왕후, 나이는 어리지만 '센 캐릭터'였다
17살이었던 문정왕후는 어리다고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문정왕후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윤 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명종실록>
'강한 하다'는 거칠고 사납다는 뜻으로 문정왕후는 지금으로 치면 '센 캐, 센 언니' 였던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한마디로 기가 세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문정왕후의 센 캐릭터에 쐐기를 박았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여인들에게는 글을 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문정왕후는 글을 배워 똑똑하고 유교적 소양까지 갖췄던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궁 생활을 오래 한 기센 4명의 여인들 사이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결코 호락호락한 유약하고 순한 왕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4. 문정왕후, 세자 '인종'을 박대하다
문정왕후가 입궁한 지 4년 이 지난 1520년, 6살의 인종은 큰 이변 없이 세자로 책봉됩니다.
세자인 인종은 특히 중종의 마음을 꽉 사로잡습니다.
인종은 어릴 때부터 유독 공부를 좋아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려운 질문에도 곧잘 대답하곤 했으며 대신들도 성군이 될 것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세자인 인종은 차기 왕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모습으로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자 인종을 한없이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문정왕후였습니다.
'중전(中殿)이 동궁(東宮)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
<인종실록>
문정왕후가 세자 인종에게 인정 없이 모질게 대한 것입니다.
한 신하가 세자 인종을 대하는 문정왕후의 모습을 보고 남긴 말입니다.
문정왕후는 왜 이렇게 세자 인종을 박대했을까요?
문정왕후는 중종의 아내이자 왕비이니 내가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배다른 아들 인종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인종 다음 왕위를 내 아들이 이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와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5. 문정왕후, 34살에 드디어 아들 '경원대군'을 낳다
이런 문정왕후의 기대감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문정왕후가 입궁 17년 만인 34살의 나이에 아들을 품에 안은 것입니다.
문정왕후의 아들은 '경원대군'이라고 불렸습니다.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싹 날아갔을 테고 품 안에 경원대군이 혹여 왕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경원대군은 3년의 세월이 지나고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때 궁안에서는 경원대군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편에 줄을 섰던 신하들과 그 신하들의 꼭대기에 있었던 인물이 있었어 바로 좌의정 '김안로'가 있었습니다.
김안로는 세자 인종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한껏 키우고 중종의 신뢰 속에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대신이었습니다.
김안로는 살아있는 왕비 문정왕후가 낳은 아들 경원대군이 세자 인종을 밀어내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입니다.
한편 김안로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느꼈을 문정왕후는 어땠을까요?
문정왕후는 조정 실권자의 견제에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까딱하면 문정왕후와 아들 경원대군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6. 문정왕후, 세자 인종의 편에 선 '김안로'의 견제를 받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조선 조정에 날벼락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1537년 10월 21일, 대신들이 중종에게 우르르 몰려와서 고하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음흉하고 괘씸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정을 어지럽힙니다.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서울에 둘 수 없으니 당장 밖으로 내치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조선 조정을 문란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이들을 한양에서 내 쫒으라는 말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내치라고 지목한 인물은 바로 문정왕후의 남동생들이자 경원대군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윤원로, 윤원형' 형제입니다.
신하들은 문정왕후의 동생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나라를 혼란케 한다며 그들을 내치라고 한 것인데 이에 중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윤 씨 형제를 파직하고 유배 보내라!'
하지만 윤 씨 형제가 중전의 남동생들이었기에 죄를 묻기 전에 중종도 사실 여부를 따져보자고 합니다.
그때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을 가로막은 인물 또한 김안로였습니다.
사실 신하들을 통해서 윤 씨 형제가 죄가 있다고 가짜 뉴스를 만든 배후에는 김안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김안로의 계략은 본인은 이렇게 가짜 뉴스를 만들어 문정왕후의 남동생들도 유배 보낼 수 있는 파워가 있으니 문정왕후도 잠자코 있으라는 문정왕후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7. 중종, 계략을 꾸민 김안로에게 사약을 내리다
그날 밤 윤원로는 은밀하게 중종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김안로가 도리에 어긋나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하려는 계략도 있습니다 '
라고 하면서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알게 된 중종은 다음날 가차 없이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김안로를 유배 보내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중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3일 뒤 김안로에게 사약까지 내립니다.
사실 김안로는 세자 인종을 보호하고 사림이라고 하는 선비들을 재등용시킨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키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김안로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심지어 김안로가 문정왕후와 그 측근들과 갈등을 일으키자 중종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종은 김안로가 세자 인종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안로 제거는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결정한 중종의 정치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8. 대윤(大尹) VS 소윤(小尹), 두 개의 파벌로 조선 조정이 나뉘다
김안로 축출 이후 입지가 올라간 것은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두 동생 윤원로, 윤원형 형제였습니다.
문정왕후는 두 동생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아들 경원대군이 왕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김안로가 없어졌고 해서 문정왕후의 근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정왕후와 그 남동생들을 예의 주시한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안로 축출 이후 세자 인종의 보호자로서 세력을 형성한 '윤임'입니다.
윤임은 중종의 두 번째 왕비였던 장경왕후 윤 씨의 오빠이자 세자 인종의 외삼촌이었습니다.
윤임은 어떻게든 세자 인종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자 인종과 경원대군을 각각 앞세워 대립하는 두 개의 파벌로 조선 조정은 서서히 나뉘게 됩니다.
두 외척 세력은 모두 파평 윤 씨 가문출신이라 편의상 세자 인종 쪽 세력을 '큰 대'자를 써서 대윤이라 하고 경원대군 쪽을 '작을소' 자를 써서 소윤이라고 지칭했던 것입니다.
두 세력은 궁 안에서 서로를 모함하고 비난하고 헐뜯으면서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9. 세자 인종의 처소인 동궁에 불이나다
1543년 1월의 어느 깊은 밤, 경복궁 내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대 왜 동궁에 갑자기 불이 났을까요?
궁 안에 동궁 화재를 두고 퍼진 묘한 소문이 나돕니다.
'불 지른 자취가 현저하자 궁중 사람들이 모두 간신 윤원로의 소행이라고 지목했다'
<연려실기술>
사실 이 내용은 연려실기술이라는 야사에 적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사에 이렇게 적힐 정도이면 당시 세간에서는 이 화재 사건을 문정왕후와 소윤세력이 세자인 인종을 해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소윤 파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런 소문을 퍼뜨린 건 대윤 파다!'
라고 확신하며 노발대발 화를 냅니다.
이에 대한 대윤파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소윤파가 세자인 인종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방화다!'
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9. 대윤(大尹) VS 소윤(小尹)의
이러던 와중에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맙니다.
문정왕후와 소윤이 그토록 경계했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조선 제12대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문정왕후와 경원대군은 인종 즉위 후 대윤파의 실제적 위협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문정왕후에게 화살처럼 날아든 말이 있었습니다.
'윤임이 반드시 역사(力士)를 시켜 경원대군을 해치려 할 것이니 삼가 보호하여 화를 피함이 마땅합니다'
<명종실록>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은 대윤파가 혹시 경원대군을 죽이려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겨우 11살인 경원대군을 문정왕후는 어떻게든 지켜야 했습니다.
10. 인종, 문정왕후의 원망에도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문안인사를 올 때마다 인종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대윤 때문에 우리 모자는 죽을 겁니다. 살려주시오'
인종의 묘호에서 '인'자가 仁(어질 인) 자를 부여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인종은 문정왕후에게 이런 원망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매번 어머니 문정왕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인종은 문정왕후가 계속해서 다그치자 어머니가 불안한 것은 모두 제 탓이라며 뜨거운 햇볕 아래 오랫동안 엎드려서 문정왕후를 달랬다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 기록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종은 자신을 보호했던 대윤파가 깜짝 놀랄 어명을 내립니다.
바로 소윤 파였던 윤원형을 승진시킨 것입니다.
정 3품 도승지였던 윤원형은 종 2품 공조참판이 됩니다.
11. 인종, 죽기 전 경원대군을 다음왕으로 지목하다
그러던 중 인종이 즉위 2년 만인 1545년, 병환이 심해져 자리에 눕습니다.
다음 왕이 될 사람은 순서상 중종의 적자인 경원대군이었습니다.
대윤파 윤임은 경원대군 대신 중종의 다른 후궁의 아들 중에서 왕으로 세울 자를 물색합니다.
문정왕후는 혹시라도 대윤파 윤임이 아들 경원대군을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윤과 문정왕후가 목숨부지를 위해 날이 서있었던 이때 인종이 온 힘을 짜내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
인종은 경원대군을 다음 왕으로 세우라는 어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대윤의 희망은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12. 경원대군, 조선 제13대 왕 명종이 되고 어머니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시작하다
인종이 승하하고 5일 후인 1545년 7월 6일, 열두 살 경원대군이 조선 제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합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왕이 된 아들과 함께 조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문정왕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정사를 돌보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됩니다.
수렴은 '내릴 수, 발 렴' 자를 써 '발을 내린다'는 뜻이며 청정은 '관청 청, 정사 정' 자를 써 '왕을 대신해 국가 정무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게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수렴청정'의 유례가 된 발을 내리는 행위를 문정왕후가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이후 처음으로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적이 물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정희왕후가 직접 편전에 나오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서 중요한 사안을 보고 받고 결정을 하는 정무를 봤습니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이전과 개념이 다른 수렴청정을 펼친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조선 최초로 직접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에 직접 나가서 국정을 신하들과 함께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문정왕후는 경연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대신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국정운영을 주도합니다.
어린 명종은 좀처럼 존재감이 없어지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해가고 있었습니다.
13. 문정왕후, 윤임을 제거하려 하지만 절차상 문제로 대신들이 반대하다
그렇게 문정왕후가 조선조정을 장악한 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무렵 문정왕후는 마침내 이를 갈고 있던 작업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습니다.
1545년 8월 소윤파 신하들이 명종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윤임이 과거부터 지은 죄가 크니 이제 멀리 내치셔야 합니다'
소윤파들은 앞다투어서 윤임이 어떠한 죄를 지어왔는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그 죄가 크니 윤임과 대윤파를 유배 보내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문정왕후의 계획에 급제동을 겁니다.
왜냐하면 문정왕후가 벌주는 절차가 잘못됐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대신들이 물고 늘어진 잘못된 절차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윤임 등에게 실로 죄가 있다면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 직속의 비서기관)에 하교하시어 그 죄를 조사한 뒤에 벌을 줘야 합니다'
사실 문정왕후가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에게 사전에 몰래 밀지를 내려 윤임을 몰아낼 계획을 만들라고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에 조정대신들은 윤원형을 시켜 여론몰이로 처벌하려고 했으므로 절차상 윤임을 처벌할 수 없다면서 이를 반대합니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신하들에게 벼락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예전부터 윤임이 나와 명종을 죽이려 한 걸 알면서도 대신들은 아무도 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윤임이 위협이 되는 존재인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자신이 윤원형에게 시켜서 윤임의 죄를 공론화하라고 말했다고 대놓고 사전에 윤원형에게 밀지 내린 것을 인정합니다.
문정왕후는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도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합니다.
14.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대윤세력'을 제거하다(을사사화(乙巳士禍))
이때 윤임과 대윤파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이 상소로 올라옵니다.
'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는 몰래 권신과 결탁하여 불궤(不軌, 반역을 꾀함)를 도모했으니 그 정상을 추구해 보면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
<명종실록>
호시탐탐 문정왕후와 명종을 노리는 윤임이 대윤파와 힘을 합쳐서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상소였습니다.
대윤파의 수장 윤임은 어떻게 됐을까요?
윤임은 유배 보내져서 그곳에서 사사됩니다.
윤임과 함께 엮였던 대윤파 역시 모두 사사됩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문정왕후가 윤임과 대윤파 신하들의 목을 잘라서 3일 동안 거리에 전시해 놓도록 명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대윤세력을 제거한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합니다.
이때 윤임을 중심으로 대윤파의 대신들 그리고 대윤파와 뜻을 함께 한 젊은 관리들과 종친들이 대거 죽어나갑니다.
그리고 화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킨 신하들까지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문정왕후의 뜻에 반대했는 이유 때문이 이었습니다.
문정왕후는 권력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사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 문정왕후, 양재역 괴벽서에 분노해서 대윤과 관련된 이들을 다시 숙청하다(양재역 벽서 사건 혹은 정미사화 )
조선에 피바람을 몰고 온 을사사화가 있었던 2년 후인 1547년,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또 한 번 조선 조정을 뒤흔듭니다.
사건은 한 신하가 흉흉한 괴문서가 있다면서 문정왕후에게 바치면서 시작됩니다.
괴문서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당시 좌의정, 소윤파의 대표 인물)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명종실록>
이 벽서는 조선시대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에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 '역(驛)'은 여행자에게 말을 빌려주고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북적였습니다.
문정왕후는 이 벽서의 내용을 보고 어마어마하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윤원형과 소윤파들은 분노에 떨고 있었던 문정왕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괴벽서는 대윤파가 작성한 것이다. 그들을 모두 숙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에게 벽서를 대윤파들이 작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직도 대윤잔당이 남아 있어서 이런 사달이 났으니 또 한 번의 숙청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살벌한 숙청이 시작됩니다.
문정왕후는 대윤세력의 잔당 20여 명을 가차 없이 유배 보냅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윤세력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모조리 유배 보내거나 사사합니다.
이를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 부르고 혹은 '을사사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여 '정미사화(丁未史禍)'라 불립니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부터 시작해서 무려 5년이 넘는 동안 대윤파를 집요하게 숙청합니다.
대윤파의 핵심부는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 권력에 방해가 될만한 사람까지 무려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처벌한 어마어마한 숙청이었습니다.
조정의 어진사람들이 모두 유배 가거나 죽어서 당시 조정이 텅 비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습니다.
반면 문정왕후입장에서는 거듭된 숙청으로 조정 권력을 더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 윤원형 이조판서가 돼 문정왕후 입맛에 맞는 신하들로 조정을 채우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 이후 조선 조정을 완벽히 장악하게 되고 그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조정에 자기 세력을 심습니다.
문정왕후가 왕비였을 당시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은 정 2품 이조판서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이조판서는 관직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큰 권한이 있었습니다.
윤원형은 이후 조정의 모든 신하들을 문정왕후 입맛에 맞는 세력으로 꽉 채워 넣습니다.
조정은 문정왕후에게 아부하는 대신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17. 문정왕후, 조선시대 이단으로 취급받던 '불교 부흥'시키는 일에 힘쓰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한 지도 5년이 지났을 무렵인 1550년 12월, 문정왕후는 조선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 행보를 펼칩니다.
문정왕후가 불교를 부흥시키겠다고 나섰는데 이는 조선의 통치근간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끄는 이념은 유교였고 유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이단으로 취급했습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의 국가 시책인 숭유억불(崇儒抑佛)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통 왕실의 여성들은 암암리에 불교와 관련된 여러 행사들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시선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당시 조선의 분위기 속에서도 불교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문정왕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여주'라고 불릴 만큼 힘이 세고 권력이 강해서 그 강력한 권력으로 이단으로 취급되던 불교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킨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부흥시키는 일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일단 남편인 중종 때 폐지됐던 '승과'를 전격 부활시킵니다.
이는 승려들의 신분을 국가에서 공인해 주겠다는 선언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당시 왕릉을 지키던 권위 있는 사찰인 '봉은사'에 자신이 믿고 따르던 '보우'라는 승려를 주지로 임명합니다.
문정왕후는 이 측근 승려를 통해서 불교행사도 하고 불교를 더욱더 부흥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정왕후의 불교부흥 행보에 당시 사대부와 유생들은 끊임없이 반대합니다.
문정왕후가 불교 관련 제도들을 복구하라고 명한 이후 6개월 동안 올라온 반대 상소는 무려 400건 이상이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이렇게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도 까닥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교를 지원합니다.
문정왕후가 얼마나 불교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불화'인 '약사여래삼존'입니다.
'약사여래삼존도'는 문정왕후가 노년에 제작한 불화 중 하나인데 이 불화에 쓰인 재료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의 재료가 무려 '금가루'였습니다.
이것을 '금니화(金泥畵)'라고 부르는데 이는 검은 바탕이나 풀색 바탕에 금가루를 탄 '금물'만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문정왕후는 왕실 재정으로 이렇게 금으로 그린 불화 200여 점, 화려한 채색화 200여 점을 제작해서 전국 사찰에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문정왕후가 전국에 있는 사찰을 지원하고 이렇게 화려한 불화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 수탈한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련한 재정 대부분을 불교를 지원하는 데 사용한 것이니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입니다.
18. 윤원형, 이조판서 직에 있으면서 '매관매직'을 일삼다
문정왕후의 측근 중 한 명이 황당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윤원형이 이 직(이조판서)을 여러 번 하면서 벼슬을 팔고 뇌물을 받기를 마치 시장의 장사꾼같이 하였다'
<명종실록>
윤원형이 이조판서직에 있으면서 장사꾼처럼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높은 벼슬을 얻고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뇌물을 바쳐서 윤원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난리였습니다.
19. 문정왕후, 윤원형의 '첩' 정난정에게 정실부인만이 가능한 '정경부인'의 작호를 내리다
더 큰 문제는 문정왕후가 윤원형을 위해서 조선에서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이것까지 허락합니다.
조선 사대부가 경악을 금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경부인' 직첩은 당시 정1품에 해당하는 고위문무관의 '정실부인'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은 원래 관비(官婢)의 딸이었는데 윤원형 눈에 들어 윤원형의 첩이 된 인물입니다.
정경부인은 첩의 신분으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불가능한 작호였던 것입니다.
문정왕후가 직접 법도를 깨고 윤원형의 첩을 정경부인이라 작호를 내림으로서 정실부인으로 인정을 해준 것이었습니다.
20. 문정왕후,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다
이렇게 문정왕후는 조선의 근간과 법도를 흔들며 절대 권력을 자랑하던 중이었던 1553년 7월, 명종과 대신들을 긴급 소집합니다.
이 자리에서 모두가 깜짝 놀랄 선언을 합니다.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문정왕후가 8년간 해온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나이가 20살이 되던 해에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합니다.
수렴청정은 왕이 나이가 어려서 왕실의 큰 어른이 정사를 대신하는 것인데 명종의 나이가 찼으니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순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종료됩니다.
21. 명종,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비로소 명종은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명종의 꿈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조정 내에 문정왕후의 세력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을 통해서 조선 조정대신들을 움직였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명종을 직접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문정왕후는 물러난 뒤에도 끊임없이 간섭한 명종을 간섭하지만 명종도 마냥 어머니의 뜻대로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문정왕후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명종실록>
문정왕후가 이미 성인이 된 명종을 꾸짖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민가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는 모습과 같았다고 하는데 게다가 더 안타까운 것은 명종은 어머니에게 혼나고 울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철렴 이후에도 조선의 왕인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2. 문정왕후, 죽어서야 권력을 놓다
문정왕후는 이렇듯 정사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했지만, 완벽히 물러나지 않았고 결국 명종은 1559년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명종이 자기가 주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명종은 조정에 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키워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힘을 서서히 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종의 움직임을 본 문정왕후는 명종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명종)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다그치면서 호통을 친 것입니다.
이렇듯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견제 속에서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정왕후가 손에 쥐고 있던 권력을 놓게 됩니다.
1565년 4월, 병을 앓고 있던 문정왕후가 향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 것입니다.
문정왕후의 20년 권세가 이렇게 한순간 끝난 것입니다.
23. 문정왕후, 마지막 유언이었던 '중종릉' 옆에 묻히지 못하고 홀로 '태릉'에 묻히다
막대한 권력도 재물도 다 내려놓고 눈을 감아야만 했던 문정왕후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남편 중종 옆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결국 중종 옆이 아닌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됩니다.
중종이 묻힌 곳은 '정릉'이었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정릉 주위가 계속 물에 잠겼던 것입니다.
명종이 그런 자리에 어머니 문정왕후를 묻을 수 없다면서 다른 자리를 원했고 그곳이 바로 태릉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문정왕후는 정릉(중종릉)에서 약 10km 떨어진 태릉(문정왕후의 릉)에 홀로 묻히게 됩니다.
문정왕후의 막강했던 권세도 그렇게 역사 속으로 잠들게 됩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KBS drama/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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