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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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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출신 공녀(貢女)에서 원나라 혜종을 사로잡아 황후가 된 기황후

1. 기황후는 누구인가?

 

오늘 알아볼 주인공 기황후는 기황후가 정식이름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기황후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온 원나라 궁녀 출신에서 원나라 황후까지 오른 그야말로 고려판 신데렐라 같은 인물입니다.

기황후가 원나라 역사서에 어떻게 등장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독 만질 아가 바쳐서 궁녀로 삼았다'

< 원사열전>

독 만질 아는 원나라 황실의 환관이었던 인물입니다.

독만질아라는 인물이 기황후를 원나라 황실의 궁녀로 데려 왔다는 것입니다.

대체 왜 고려의 여인을 원나라 황실의 궁녀로 바친 것일까요?

기황후는 고려에서 선발되어 원나라로 보내진 특별한 사람 중에 한 명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바로 고려에서 공물로 바친 여인을 칭하는 '공녀(貢女)'입니다.

고려는 원간섭기에 사사건건 원나라 눈치를 봐야 했고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나라가 고려를 복종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꾸준히 공녀를 고려에 요구했던 것입니다.

기황후가 공녀였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정황상 공녀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황후는 황후가 되기 전에 원황실에 궁녀로 활동을 했었고 당시 고려 공녀들이 대부분 황실 궁녀였다는 점이 추측의 근거입니다.

다만 원나라 황후가 된 인물이기 때문에 고려 측에서도 원나라 측에서도 굳이 기황후가 공녀였음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2. 고려출신 원나라 환관 '독 만질 아'

놀랍게도 원나라 환관 독 만질 아 역시 기황후와 같은 고려출신이었습니다.

왜 원나라 황실에 고려 출신의 환관까지 있었을까요?

사실 고려 출신 환관은 원나라 영입 대상 1순위였습니다.

고려 환관 특유의 뛰어난 업무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고려 출신환관들이 어찌나 일을 잘했던지 원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시중을 드는 업무 외에도 그들에게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막중한 업무까지 맡겼습니다.

또한 원나라 신임을 받는 독 만질 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황궁 각처에 적절한 인사를 배치하는 일까지 맡고 있었습니다.

3. 기황후, 원나라 황제 '혜종'의 차심부름을 하다 '혜종'의 눈에 띄다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진 독만질아의 눈에 띄는 인물이 바로 기황후였던 것입니다.

독만질아에게 뽑힌 기황후는 과연 어떤 일을 하게 되었을까요?

'차 심부름을 담당하며 순제를 섬겼다'

<원사열전>

여기서 말하는 '순제'는 바로 원나라 14대 황제 '혜종'입니다.

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열전은 원나라 시대가 아닌 명나라 시대에 편찬된 것입니다.

따라서 명나라식으로 혜종을 순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기황후는 황제 바로 옆에서 차심부름을 하는 궁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황후를 보는 원나라 황제 혜종의 눈빛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개 궁녀 기황후에게 혜종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혜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황후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살구 같은 눈, 복숭앗빛 뺨, 버드나무 같은 가는 허리'

<원궁사>

기황후에게는 이런 외모뿐 아니라 황제가 푹 빠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성품이 지혜롭고 영리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신외사>

기황후와 대화를 나눌수록 외모만 출중한 줄 알았던 궁녀가 성품도 훌륭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니 혜종은 이런 기황후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혜종은 이후 기황후의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고  황궁에서 만난 풋풋한 청춘 남녀인 혜종과 기황후는 서로 애틋한 마음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4. 기황후, 혜종의 아내 황후 '타나실리'의 질투에 매질당하다

고려에서 온 일개 궁녀가 원나라 최고 권력자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기황후의 앞날은 어땠을까요?

기황후가 황제의 눈에 든 이후에 원나라 황실 내명부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원나라 황제 혜종의 정실부인 황후 타나실리는 황후인 자신을 제쳐두고 일개 궁녀인 기황후에게 황제가 사랑을 쏟으니 질투에 눈이 멀어 기황후를 매질합니다.

'기 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불평하여... 그녀의 몸을 불로 지지기도 했다'

<경신외사>

황후인 타나실리는 황제인 혜종조차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아내였습니다.

황후 타나실리 집안은 당시 원나라를 쥐락펴락하던 막강한 권력을 지닌 권신의 집 있었습니다.

타나실리 아버지 엘테무르는 제 입맛대로 황제를 갈아치울 정도로 원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인물이었습니다.

혜종이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황후 타나시리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황후 타나실리의 오빠들과 엘테무르의 측근들이 황실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혜종은 매 맞는 기황후를 돕고 싶었어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황제 혜종의 총애를 받아 일개 궁녀에서 벗어나 꽃길을 걸을 줄만 알았을 기황후는 황후 타나실리의 모진 매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강한 힘과 높은 지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런 살벌한 원나라 황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5. 황후 타나실리, 오빠들의 역모가 들켜 함께 처형당하다

1335년, 지독하게 기황후를 괴롭히던 황후 타나실리의 매질이 거짓말처럼 그치게 됩니다.

황후 타나실리가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혜종은 황후 타나실리 가문의 위세가 너무 대단해지다 보니 이를 억누르기 위해서 다른 권신을 이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려서 견제하게 됩니다.

그러자 권신으로 막강한 힘을 휘두르던 황후 타나실리 오빠들이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서 혜종을 향해 역모를 꾸미게 된 것인데 역으로 타나실리의 오빠들이 혜종에게 처단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황후 타나실리의 오빠들이 역모를 일으킨 죄로 죽임을 당한 뒤, 황후 타나실리 역시 독살로 처형당합니다.

6.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다

황후 타나실리의 죽음 이후 기황후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립니다.

기황후가 궁녀의 신분에서 벗어나 원나라 황제의 정실부인인 황후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말이 들려온 것입니다.

혜종이 궁녀 기 씨를 원나라 황후 자리에 앉히겠다고 대놓고 선포를 한 것입니다.

고려 출신의 궁녀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종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인 기황후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을 내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혜종이 기황후를 황후로 맞이하려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타나실리처럼 강력한 권신집안의 여인이 황후가 되면 황제인 혜종의 권위에 방해가 될 수 있었지만 그에 비해 고려출신에 대단한 가문의 연줄도 없던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것은 혜종의 황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포섭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황후 역시 이런 황실의 분위기와 상황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었을 것이고, 이쯤 되면 기황후 또한 '황후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하며 황후 자리에 욕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7. 기황후, 새로운 권신 '바얀'의 반대로 황후에 오르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대로 기황후는 원나라 내명부의 정점인 원나라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쿵그라트씨 바얀쿠투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원사본기>

새로운 황후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황후가 아닌 쿵그라트족의 여인 '바얀쿠투'였습니다.

새로운 황후 바얀쿠투는 칭기즈칸 때부터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혈통을 자랑하는 고귀한 가문출신이었습니다.

이때 기황후가 황후에 오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원나라를 쥐락펴락했던 한 권신이 기황후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새로운 권신 '재상 바얀'이었습니다.

바얀이 기황후의 황후 책봉을 극구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바얀은 원나라의 황후는 반드시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을 맺어온 집안, 즉 명망 높은 가문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혜종은 결국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황후는 자신의 신분을 문제 삼는 권신과 위력가문의 위세 앞에 고려 출신 궁녀라는 신분의 한계를 절감했으며 이렇게 황후에 대한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나고 맙니다.

그리고 새로운 황후 바얀쿠투의 등장에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8. 기황후, 혜종의 아들을 낳다

그런데 새로운 황후 바얀쿠투가 황후에 오르고 약 1년이 지났을 무렵 원나라 황실에 경사가 일어납니다.

바로 혜종의 첫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이 태어난 것입니다.

혜종의 첫아들을 낳은 사람은 바로 기황후였습니다.

기적처럼 기황후가 혜종의 첫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새 황후를 들인 이후에도 황제 혜종의 마음은 여전히 기황후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생긴 뒤 혜종은 자신을 괴롭혀 오던 근심거리를 내려놓게 됩니다.

사실 혜종의 첫아들 아유르 시리다라가 태어나기 전 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는 이미 존재했습니다.

혜종의 후사가 없을 경우 혜종의 후계자로 다음 황제로 점쳐졌던 사람은 12대 황제 문종의 아들 즉 혜종의 사촌 '엘테구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원나라 조정에서 엘테구스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진다면 혜종은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아들이 없었던 혜종은 황권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기황후가 떡 하니 아들을 낳아 준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니 혜종은 사촌 '엘테구스'가 아닌 자신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혜종은 황제 자리를 위협하던 황태자 엘테구스를 조정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의 탄생으로 혜종은 원나라 황실의 후계자구도를 바꾸고 황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9. 기황후, 혜종의 제2황후가 되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1340년, 원나라 조정은 물론이고 고려까지 뒤흔드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원이 기 씨를 둘째 황후로 책봉하다'

<고려사>

약 3년 만에 기황후가 드디어 황제의 정실부인 황후가 된 것입니다.

원나라는 황후를 여러 명 둘 수 있었고 기황후를 황후로 책봉하기를 바랐던 혜종이 제1황후는 그대로 둔 채 기황후를 제2황후로 책봉한 것입니다.

혜종은 기황후를 후계자를 낳아주어 자신의 황권에 힘을 실어준 고마운 존재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황후는 그동안 가문과 신분 때문에 황후감이 아니라며 배척당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기황후를 강력히 반대하던 바얀을 혜종이 조정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권신 바얀을 혜종은 어떻게 내쫓을 수 있었을까요?

바얀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은 그가 혜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얀은 혜종이 집권한 이후에는 혜종을 오히려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만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연히 혜종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바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세력들을 모아서 바얀을 내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기황후는 원나라 황제의 정실부인이 됩니다.

10. 기황후, 혜종에게 황후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재정 관리 기구인 '자정원'을 선물 받다

그런데 혜종은 기황후에게 황후의 지위뿐 아니고 특별한 선물도 줍니다.

이 선물은 기황후에게 전에 없던  강력한 권력을 쥘 수단이 됩니다.

바로 황후가 개인의 재물을 모으고 관리할 수 있는 재정 관리 기구인 '자정원(資政院)'입니다.

당시 원나라 황후들은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여인들이었습니다.

황후가 되어 황궁에 들어올 때 자신의 시중을 들 사람과 재물들도 함께 챙겨 오게 됩니다.

따라서 황후들마다 그 재물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관리기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고려 출신인 기황후에게는 가지고 오거나 모아놓은 재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혜종은 당시 주인이 없었던 황태후의 재산을 통째로 기황후에게 선물합니다.

이러한 혜종의 지원 덕분에 기황후는 정통 몽골인인 제1황후 못지않게 큰 힘과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11. 기황후, '비(妃)'로 강등될 위기에 처하다

그런데 탄탄대로가 펼쳐질 줄 알았던 기황후 앞에 생각지도 못한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1348년, 신하들이 혜종에게 충격적인 상소를 올립니다.

'강등하여 (기황후를 ) '비(妃)'로 삼아... 재이(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가 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사본기>

기황후를 황후가 아닌 '비'로 강등시키라는 것입니다.

신하들은 당시 원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고 온 나라에 도적이 들끓는 것이 모두 기황후 때문이라 혜종에게 말합니다.

신하들은 왜 이때 기황후를 강등시키라는 글을 올렸을까요?

이대로 있다가는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여전히 기황후의 신분과 출신을 트집 잡고 반대하는 신하가 많았던 것입니다.

만약 기황후가 비(妃)나 빈(嬪)으로 강등되면 기황후의 아들 또한 지위가 떨어져 황태자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기황후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로 기황후가 제2황후가 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의 황태자 책봉은 하염없이 미뤄지고 있었습니다.

12. 기황후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 드디어 황태자로 책봉되다

1353년 6월, 원나라 조정에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출신 때문에 배척당했던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가 드디어 황태자로 책봉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머니 기황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습니다.

이는 출신 때문에 배척당했던 기황후의 황태자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였습니다.

기황후는 혜종이 기황후에게 준 특별한 선물인 '자정원'의 재물을 정치자금으로 활용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정치적 로비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황후는 자정원의 재산을 잘 운영해서 자금을 불렸고 이 돈으로 자신을 지지할 권신들을 포섭합니다.

13. 기황후, 오빠 기철과 일가족 모두가 고려 공민왕에게 숙청당한 사실을 알게 되다

기황후가 자정원의 재정적 기반으로 아들을 황태자에 올리는 데 성공한 3년 후인 1356년, 승승장구하던 기황후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기황후의 오빠이자 고려의 권신이었던 친원 세력 기철이 기황후의 모국 고려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의 어떤 이가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죽였을까요?

바로 고려 31대 왕 '공민왕'이었습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공민왕과 노국공주 2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2(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죽음을 넘는 사랑이야기)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2(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죽음을 넘는 사랑이야기) 13. 공민왕 새 부인을 맞이하다 1359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이가 얼어붙을 만한 사건이 터집니다. '왕

donbuller.tistory.com

공민왕은 원간섭기에 원나라에 맞서서 고려 재건을 꿈꾼 개혁 군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공민왕은 기철이 기황후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철을 처단한 대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철 등이 임금의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사>

기철이 임금처럼 행세하면서 고려의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기철은 공민왕과 함께 걸을 때 왕과 나란히 걷고 심지어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을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습니다.

기황후의 등장으로 고려에서 기 씨 집안의 힘은 점점 커졌고 기황후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겁 없이 날뛰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이대로 가만둘 수 없어 결국 기철을 시작으로 고려를 혼란케 하는 친원 세력을 싹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연회를 핑계로 공민왕은 기철 일당을 불러내서 즉각 처형하고 남은 기 씨 일가까지 불러내어 일가족 모두를 무자비하 숙청합니다.

원라나에서 오빠 기철과 가족들의 처형소식을 듣게 된 기황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결국 기황후는 당장 가족의 복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이 일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을 것입니다.

14. 기황후를 위협하는 제1황후 바얀쿠투, 아들을 낳다

당시 기황후 개인에게도 가족의 복수만큼 서둘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이때쯤 기황후가 절대 바라지 않았던 일이 벌어집니다.

혜종과 제1황후 바얀쿠투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기황후 아들 아유르 시리다는 이미 황태자이기 때문에 제1황후가 아들을 낳아도 신변에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기황후의 아들은 반쪽짜리 황태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기황후의 아들은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1년이 지나도록 정식 황태자로 공인받는 책봉식은 치러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황태자의 책봉식을 가로막은 강력한 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원나라 황실을 주름잡고 있던 권신 '재상 톡토'였습니다.

재상 톡토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뼈대 있는 가문의 여인 바얀쿠투가 낳은 아들이야말로 진정한 황태자감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바얀쿠투의 아들이 황태자가 된다면 기황후와 그의 아들은 1 황후와 정적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으로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황태자의 공식 책봉식은 기황후와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의 생존을 위해서 꼭 이뤄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15. 기황후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 드디어 공식 책봉식이 열리다

그러던 1355년 3월, 성대한 황태자 책봉식이 드디어 열리게 됩니다.

'황태자 아유르 시리다라에게 옥책은 수여하고 곤명복과 옥류관을 내린 뒤 태묘에 고하게 하였다'

<원사본기>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가 드디어 공식 황태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황후는 거센 권신들의 반대를 어떻게 이겨낸 것일까요?

혜종은 기황후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의 책봉식을 미루던 톡토를 단숨에 제거합니다.

사실 권신 톡토를 혜종이 경계하고 있었고 혜종은 이번에도 톡토를 반대하는 세력을 이용해서 톡토마저 제거합니다.

16. 기황후, 자신의 힘을 실어줄 원나라 조정의 권신들을 포섭하기로 하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라의 공식 책봉식날, 기황후는 아들의 성대한 책봉식을 보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들의 황태자 자리를 위협하는 제1황후 바얀쿠투와 그의 아들이 있는 한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안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을 무사히 황제로 올리기 위해서는 기황후에게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황후는 자신에게 힘을 줄 원나라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권신들을 포섭하기로 합니다.

기황후가 원나라 권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고려 여인을 내리는 방법을 활용합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고려에서 원나라에 공녀로 가는 것은 기피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원나라 권신 세력의 인맥을 얻기 위해 혹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딸을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황후가 등장하면서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녀로 온 고려의 여인들을 자정원을 통해 거두어 교육을 시키고 권신들에게 보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황후입장에서는 권력을 얻기 위해 이런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17. 기황후, 아들을 위해 혜종을 황제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세력의 뒷배가 되다

기황후가 그렇게 원나라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가던 1360년, 원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혜종이 한 신하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혜종이 황제를 하기에 늙었다면서 그만 황제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런 상소를 올렸을 때 혜종의 나이는 고작 41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4년 전에도 37살이었던 혜종에게 황태자에게 선위를 요구하며 황제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4년 전 선위를 요구한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두들겨 패 죽이거나 유배를 보냅니다.

또다시 혜종에게 물러나라고 상소하는 신하에게 혜종은 어떻게 했을까요?

혜종은 선위를 요구한 신하는 물론이고 그 형제와 가족들까지 전부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신하들 뒤에는 어마어마한 세력이 황제를 끌어내려는 공작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믿고 있던 강력한 뒷배의 정체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기황후입니다.

한낱 궁녀였던 기황후를 사랑으로 품어준 혜종이었는데 그런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배신당한 것입니다.

당시 제1황후의 첫째 아들은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1황후 바얀쿠투가 아직도 살아있는 상태였고 그녀가  또 아들을 낳는다면 기황후 모자에게는 늘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황후는 아들을 불안한 황태자에 두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안정적인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황후가 찾아낸 돌파구는 바로 남편 혜종을 몰아내고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혜종은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이 기황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혜종은 두 달 정도 기황후를 찾지 않을 뿐 따로 기황후에 처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결국 혜종에게도 대안은 기황후의 아들뿐이었던 것입니다.

18. 기황후, 고려의 왕을 '기 씨 가문'이 차지하기를 꿈꾸다

기황후가 세운 선위파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황후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아들에게 든든한 기반을 만들어줄 묘수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이 계획은 원나라에서 자신과 아들의 발목을 잡았던 가문과 출신의 한계를 뒤집을 계책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기황후가 고려를 손아귀에 쥔다면 어떻게 될까요?

원나라 황실의 인정도 받고 그녀의 위세 또한 높아질 계기가 될 것입니다.

'고려 국 백안첩목아를 폐하다'

<고려사>

'백안첩목아'는 바로 당시 고려왕 공민왕의 원나라식 이름입니다.

기황후가 혜종을 설득해서 고려의 왕 공민왕을 폐위시킨 것입니다

공민왕 다음으로 원나라가 책봉한 고려왕은 공민왕의 삼촌뻘이었던 '덕흥군'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기황후는 기 씨가문의 아이를 덕흥군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만일 덕흥군이 왕에서 물러나면 기 씨 가문의 후계자가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이제 고려 왕족은 '왕 씨'가 아닌 '기 씨'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 씨 가문은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고려의 왕족으로 탐 바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기황후와 아들의 목숨줄을 흔들었던 변변치 않은 가문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에 대한 기황후의 개인적인 원한도 이런 계획의 한 이유가 됩니다.

기황후는 단 한순간도 가족들이 숙청당한 순간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심지어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을 때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미 장성했는데 어찌 나를 위해 원수를 갚지 않느냐!'

기황후는 어린 아들을 원망할 정도로 7년 전 사건을 가슴속 깊게 응어리처럼 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한편 고려에 있던 공민왕은 원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왕좌에서 버티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고려의 왕좌를 두고 공민왕과 기황후의 맞대결이 시작된 것입니다.

19. 기황후, 모국인 고려를 침략하지만 '최영과 이성계' 두 장군의 철벽 방어로 대패하다

그렇게 1364년, 결국 기황후는 초강수를 둡니다.

자신의 모국인 고려를 침략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기황후는 원나라 군사 만여 명을 모아 고려로 출정명령을 내립니다.

기황후의 명령을 받은 원나라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무자비하게 고려를 공격합니다.

미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고려는 당황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나는지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나라 병사가) 겨우 17기만 살아 돌아오니 기황후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원사열전>

만여 명의 원나라 군사 중에서 17명의 기병만이 목숨을 건져서 원나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고려는 이 위기의 순간 어떻게 전세를 역전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고려에는 백전무패의 장군이 두 명이나 고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최영과 이성계'였습니다.

최영과 이성계의 놀라운 기백에 고려군사의 사기는 높아졌고 결국 고려군의 전술과 기세에 원나라 군대는 거의 전멸하고 맙니다.

이렇게 고려를 장악하겠다는 기황후의 욕망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집니다.

기황후의 욕심 때문에 원나라군대 만 명의 군사가 목숨을 잃게 되었고 그녀를 보는 원나라 황실의 시선은 아주 싸늘해졌을 것입니다.

원나라 조정에서 기황후에게 등을 돌리는 이가 점점 많아졌고 기황후의 권세 역시 이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20. 새로운 권신에 의해 장악된 원나라 황실, 기황후를 내쫓아내다

게다가 1364년 7월,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더 큰 위기가 닥칩니다.

누군가 군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군사를 이끌고 온 사람은 바로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새로운 권신인 '볼로르테무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원나라 조정은 이제 볼로르테무르에 의해서 장악됩니다.

그런데 군을 끌고 온 볼로르테무르는 혜종에게 충격적인 요구를 합니다.

'황제에게 마땅히 황후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아뢰었다'

<원사열전>

혜종에게 원나라 황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황후의 만행을 보다 못한 권신 볼로르테무르가  기황후를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목표는 기황후 단 한 사람이었을까요?

볼로르테무르의 또 다른 목표는 바로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라였습니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 시리다는 볼로르테무르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기황후를 두고 혼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떠나고 1365년 3월, 기황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기황후를 황실에서 쫓아낸 후 유폐하겠다!'

결국 원나라 조정에서 기황후가 쫓겨나게 됩니다.

21. 다시 황실로 돌아온 기황후, 제1황후로 책봉되다

벼랑 끝에선 황태자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지방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가 궁을 떠난 지 약 10개월 뒤, 황태자에게 아버지 혜종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합니다.

아버지 혜종이 보내준 상자를 연 황태자 아유르 시리다는 깜짝 놀랍니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황태자와 기황후를 위협했던 권신 볼로르테무르의 머리였습니다.

혜종은 어떻게 볼로르테무르를 처단할 수 있었을까요?

또 한 번 혜종은 볼로르테무르의 반대편 세력을 이용해서 그를 제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기황후와 그의 아들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황궁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황후의 두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제2황후 기 씨를 (제1) 황후로 세우고... 기 씨의 아버지 이상 3대 조상에 모두 왕 작을 수여 하였다'

<원사본기>

1365년 12월, 혜종은 약 32년간 자신의 곁을 지켜온 아내 기황후를 드디어 제1황후로 책봉합니다.

기존 제1황후였던 바얀쿠투는 기황후가 황실로 다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되면서 제1황후의 자리가 비게 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로서 기황후는 고려인 출신 궁녀라는 꼬리표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서 확실하게 인정받은 것입니다.

당시 기황후와 황태자를 위협했던 권신세력들은 모두 제거되고 원나라 황실에는 기황후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누구도 황태자의 어머니가 제1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황후, 홍건적을 피해 피난길을 떠났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기황후가 제1 황후에 오르고 2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인 1367년 7월, 어렵게 얻는 기황후의 꿈같은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주원장이 이끄는 20만 대군의 홍건적이 원나라의 수도로 쳐들어와 원나라의 수도는 끔찍한 비명과 피로 뒤덮입니다.

당시 원나라는 이에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기황후는 주원장의 추격을 피해 혜종과 아들 황태자와 함께 치욕적인 피난길에 나섭니다.

기황후는 피난길을 떠났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약 117년간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원나라 역시 주원장의 홍건적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난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기황후는 원나라 황실 내명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고려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주변국에서는 후대에 그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나라에서는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이국의 황후로, 고려에서는 고려사람이면서도 모국인 고려를 공격한 약녀 중의 악녀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기황후가 고려 궁녀출신이라는 출신의 한계를 딛고 혹독한 원나라 황실의 권력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강한 여인이라는 평가 또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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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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