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2(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죽음을 넘는 사랑이야기)
13. 공민왕 새 부인을 맞이하다
1359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이가 얼어붙을 만한 사건이 터집니다.
'왕께서 즉위하신 지 9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태자를 두지 못하였으니 양가의 여자를 뽑아 후궁을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고려사>
결혼 후 10년간 후사가 없었던 공민왕 부부에게 기다리다 못한 신하들이 제발 다른 부인을 더 맞이하셔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누구보다 더 공민왕은 후사가 너무 중요했습니다.
자신과 대립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탄탄한 왕권의 기반이 되는 왕의 후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민왕에게 다른 부인을 들이라는 신하들의 요청에는 더 놀라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요청하는 대상은 공민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노국공주를 향한 신하들의 간청이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부탁을 해야 할 만큼 공민왕은 새로운 부인을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실에서 후사는 매우 종요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인 고려사회에서도 국왕들은 부인을 여러 명 두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처럼 특별한 정치적 이유도 없고, 후사도 없는데 결혼 후 10년간 부인을 한 명만 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임에는 분명합니다.
노국공주는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공민왕은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부인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공주도 다시 후회하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고려사>
노국공주는 막상 사랑하는 남편에게 또 다른 부인이 생기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만 것입니다.
공민왕은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얻지 못합니다.
새 부인을 들였으나 공민왕은 새 부인은 찾지 않고 노국공주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에 더 노국공주만 찾았던 것입니다.
14. 홍건적의 고려 침략
새로운 부인을 들이고 2년 후인 1361년 11월, 원나라 말기에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던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무려 10만 명 규모의 무장세력이 고려에 침략해 와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수도 개경을 떠나 급하게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공민왕부부가 피난을 떠난 후 약 한 달 만에 도착한 곳은 바로 '안동'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홍건적과 치열한 사투를 벌인 끝에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며 빼앗긴 개경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5. 흥왕사에서의 공민왕 시해시도
이때 공민왕은 곧바로 개경으로 돌아갈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전쟁으로 궁궐은 파괴되고 개경 역시 피폐해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홍건적이 언제 또다시 침략해 올지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 부부는 그래서 개경 복귀 전에 '흥왕사'라는 절에서 잠시 머물기로 합니다.
공민왕부부가 흥왕사에 머문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 어느 날 새벽 4시경 흥왕사 정문 앞에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깨 드립니다.
순식간에 호위병을 제압한 50여 명의 괴한들은 곧바로 공민왕이 머무는 침전으로 향합니다.
그러자 흥왕사를 지키던 군사들은 공민왕을 두고 혼비백산해서 모두 도망치고 맙니다.
공민왕은 습격을 알아차리고 밀실로 몸을 숨깁니다.
그리고는 노국공주도가 밀실 문 앞에서 온몸으로 괴한들을 막아섰습니다.
이런 노국공주의 모습에 괴한들은 당황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됩니다.
괴한들의 이러한 행동은 바로 이 공민왕 시해 시도의 배경을 통해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일어난 공민왕 시해 시도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민왕을 폐위하려던 원의 사주였거나, 다른 하나는 당시 고려의 알력 다툼에서 밀렸던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김용'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을 죽이고 원의비 호를 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둘 중 어떤 배경이건 간에 명분이 '원나라'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원나라의 노국공주를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반란 소식을 들은 고려군들이 흥왕사로 들이닥쳐 괴안들을 제압합니다.
말 그대로 노국공주가 온몸으로 공민왕을 지켜낸 것입니다.
공민왕이 고려에서 몰아내려고 했고 공민왕을 끝없이 위협했던 원나라, 그런 원나라에 맞선 공민왕이지만 자신을 구한 사람은 원나라 사람 노국공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괴한의 위협을 노국공주 덕분에 무사히 이겨내고 목숨을 부지 한채 공민왕은 무사히 수도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6. 원나라, 공민왕을 폐위시키려 하다.
그런데 겨우 돌아온 개경에서 공민왕은 더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바로 공민왕과 공민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이들과의 사이에서 또다시 전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원나라는 반원정책을 폈던 공민왕을 확실히 제거하이 위해서 새로운 왕과 함께 군대까지 함께 딸려 보낸 것입니다.
이때 원나라가 마음대로 세웠던 고려의 새로운 왕은 공민왕의 삼촌뻘이었던 고려 왕족 '덕흥군'이었습니다. 덕흥군은 원나라의 1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침략해 옵니다.
공민왕 역시 자신을 지지하는 군사들을 총동원해 원나라에 맞서 싸웁니다.
지금 물러난다면 곧 폐위 그리고 죽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덕흥군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와 공민왕이 이끄는 왕위를 둘러싼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려군의 뛰어난 전술과 기세에 원나라 군대는 거의 전멸을 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고려군의 활약덕에 다시 한번 간신히 원나라의 위협을 이겨내고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17. 노국공주의 임신과 난산 그리고 죽음
그렇게 원나라로부터 왕위를 빼앗길 절체정명의 위기를 극복한 공민왕은 드디어 이 모든 고단함을 씻어줄 노국공주의 임신소식을 듣게 됩니다.
결혼 15년 만에 드디어 노국공주의 첫 임신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노국공주가 아들을 낳는다면 든든한 후계자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국공주는 산달이 지나 드디어 진통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노국공주의 비명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노국공주의 지독한 난산이었던 것입니다.
'왕이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려사>
공민왕은 진통을 하는 노국공주의 곁에서 향을 태우고 조용히 앉아 잠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한 나라의 왕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노국공주가 무사히 출산하기를 빌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하늘도 야속하게도 공민왕과의 바람과는 달리 길고 길었던 산통 속에서 노국공주와 아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날이 될 줄 알았던 그날, 공민왕은 가장 소중한 존재를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원나라에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지지해 주었던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8. 공민왕, 어마 어머 한 규모의 노국공주의 무덤과 영전을 짓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이 백성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게 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춧돌 크기가 크기가 집채만 하였고 끄는 소리와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소가 우는 것 같았다. 눌리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고려사>
바로 노국공주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무덤과 영전을 짓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에 국고가 탕진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민왕은 그렇게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노국공주의 무덤을 지으며 특별한 당부까지 합니다.
바로 노국공주 옆에 공민왕 자신이 묻힐 무덤도 만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은 훗날 죽은 이후에도 노국공주와 함께 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노국공주의 묘인 '정릉' 옆에 나란히 높은 공민왕의 무덤 '현릉'의 모습입니다.
7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을 둘러보니 눈에 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덤 내부에 뚫려 있는 구멍입니다.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은 고려시대 무덤 중에서 유일한 쌍릉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두 개의 무덤을 연결하는 통로인 구멍도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덤 안 이 구멍은 노국공주를 너무나 사랑했던 공민왕이 사후에도 공주와의 사랑이 계속 이어지기를 염원했던 흔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듣는 무덤에 얽힌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는 불멸의 사랑을 꿈꾼 것입니다.
그런데 공민왕의 깊은 사랑은 고려 백성들 삶뿐만 아니라 공민왕 자신까지 망쳐가게 합니다.
19. 홀로 남은 공민왕 돌변하기 시작하다
어느 날 공민왕이 식사를 하던 모습을 본 신하들이 충격을 금치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노국공주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식사를 할 때 노국공주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며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때처럼 식사를 권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노국공주가 죽고 8년 뒤 1373년, 공민왕은 새로 들인 부인들도 멀리하며 여전히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 명덕태후가 왜 다른 부인들과 가까이하지 않는지 묻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국공주만 한 여인이 없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통해 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노국공주를 향한 그리움에 고려 재건의 꿈도 멀어진 듯했습니다.
20. '자제위' 설치
그렇게 모든 의욕을 잃은 듯했던 공민왕이 갑자기 '자제위(子弟衛)'라고 하는 기관을 하나 설치합니다.
자제위는 왕권을 강화하고 호위를 위해서 궁중에 설치한 기관입니다.
공민왕은 이를 통해 공신이나 고위관직자의 자제를 뽑아 경호집단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제위를 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숨겨진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예쁜 용모를 가지니 자들을 선발하여 (자제위) 여기에 속하게 하고 김흥경 및 홍륜 무리를 불러들여 난잡한 행위를 했다'
<고려사>
공민왕이 나이가 어리고 예쁘장한 미소년들을 자제위로 선발해서 그들과 함께 난잡한 행위들을 하며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돌변한 공민왕의 충격적인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민왕은 여장을 하며 자제위와 어울리기도 하고 자제위의 음란한 행동을 옆방에서 지켜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듯한 공민왕의 모습과 태도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1. 자제위 '홍륜'과의 관계를 통해 공민왕 아내 익비 임신하다
게다가 1374년 마흔다섯 살의 공민왕에게 아내 익비의 임신소식이 전해집니다.
공민왕은 이를 전한 대신에게 대뜸 아이의 아버지를 물었고 익비와 통한 남자가 공민왕이 아꼈던 자제위의 무사 홍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이 직접 자제위에게 자신의 아내들과 동침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왕이 홍륜 등에게 여러 비빈과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아 후사로 삼기를 기대하였는데...'
<고려사>
공민왕은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그 압박감 때문에 자신이 아닌 그 누구라도 자식을 낳아서 후사를 낳아주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보기에도 이러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혈통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시 고려 왕실에서 일어난 일로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22. 공민왕, 결국 자제위에게 시해당하다
공민왕은 익비가 홍륜과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자기 아이로 둔갑시키기로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기로 합니다.
그런데 1374년 9월 21일, 공민왕은 익비의 임신사실을 안 바로 그날 자신의 처소에서 잔인하게 시해를 당하게 됩니다.
공민왕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된 홍륜과 다른 자제위 무리가 먼저 공민왕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사 등의 사료에 나와있는 기록들입니다.
다만 알다시피 고려사는 조선 건국 후 만들어진 사료이기 때문에 공민왕이 정말 자제위를 통해 후사를 보려 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의아한 부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조금은 왜곡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공민왕에게 후사가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 그럼에도 후세에 대대로 기억되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고려를 다시 세우려던 공민왕을 훗날 조선의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 슬픔이 지나쳐 뜻을 잃어버렸다'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남편 공민왕과 항상 자신을 위협하는 원나라 출신의 아내 노국공주,
두 사람은 이해하고 보듬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두 사람의 사랑은 죽음으로도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비참하게만 기억하는 고려시대 원간섭기 그 치열한 역사 속에 이런 사랑이야기도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1(만남부터 사랑에 빠지기까지)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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