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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1(만남부터 사랑에 빠지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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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1(만남부터 사랑에 빠지기까지)

1. 개혁군주 고려 공민왕은 왜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졌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보통 영정이 한 사람의 모습만을 담고 있는 반면 위 그림에 보이는 영정은 부부가 사이좋게 한 폭의 영정에 담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과 그의 부인 노국공주는 이렇듯 영정에 함께 그릴만큼 아주 각별했던 사이였습니다.

공민왕은 원간섭기에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려의 재건을 꿈꾼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때문에 이런 공민왕이 가장 견제했던 것은 원나라와 친원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원을 배척한 공민왕의 부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의 공주였던 것입니다.

고려인이 아닌 원나라인이었던 공민왕의 아내 노국공주,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만나서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요?

오늘은 '고려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조국을 떠난 고려의 왕자 

1330년 5월 6일, 공민왕은 제27대 왕 '충숙왕'과 '명덕태후' 사이에서 위로는 형을 둔 둘째 왕자로 태어납니다. 공민왕의 형인 '충혜왕'이 1339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인 1341년 12살이 된 고려의 왕자 공민왕은 원나라로 떠나야 했습니다.

바로 '케식'이라는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케식이란 우리말로는 숙위(잘 숙, 지킬 위)와 비슷한 개념으로 원나라의 지배자를 지키던 친위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의 친위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원나라로 불려 갔던 것입니다.

 

고려 왕자 공민왕이 왜 원나라 황실의 친위대가 돼야 했던 것일까요?

고려에서 일어난 가장 긴 정쟁은 바로 여몽전쟁(1231~1259년)이었습니다. 

이는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몽골과 고려 간 약 30년간 치른 전쟁입니다. 

당시 몽골족은 대제국을 건설해 나가면서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 즉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황실친위대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왕실 역시 30여 년간 지속된 여몽전쟁에서 패한 이후 무조건 케직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역만리 타지에서 지내게 된 공민왕은 머나먼 원나라의 낯선 문화와 언어, 사람에게 아직 어린 나이라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3. 공민왕, '대원자'의 칭호로 불리다.

원나라에서 케식 생활을 하던 공민왕을 고려 조정에서는 의외로 '대원자(大元子)'라고 부릅니다.

원자는 '아직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을 뜻합니다.

그런 원자라는 단어 앞에 큰 대자를 넣어 높여 부른 것은 공민왕을 차기 세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공민왕은 고려왕의 동생일 뿐 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원자라고 불릴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려 국왕이 되는 데에는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기인합니다. 당시 고려왕실이 캐식에 참여하게 된 공민왕을 대원자라고 불렀던 것은 원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되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단한 케식 생활이었지만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과의 인맥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강력한 왕위 후보가 된 것입니다. 

4. 공민왕의 형이자 고려의 28대 왕이었던 충혜왕, 폐위되다

그렇게 공민왕이 원나라 생활을 한 지 3년째 접어들던 1343년 당시 고려의 28대 왕이었던 충혜왕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충혜왕의 폐위에는 놀라운 사실도 숨겨 있었습니다.

평소 사치와 향락, 사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충혜왕이 고려의 국정을 망치고 있다고 하면서 원나라가 충혜왕을 왕위에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고려의 국왕까지 바꿀 만큼 엄청났던 원나라의 위세가 느껴지는 대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자'라고까지 불렸던 강력한 차기 왕위 후보 공민왕에게 까지 이 형 충혜왕의 폐위소식이 전해집니다.

이것은 왕의 자리가 비었다는 것이고 공민왕은 비어 있는 왕의 자리에 대한 기대가 내심 있었을 터였습니다. 역사적 기록상 공민왕이 왕이 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이 되어야 할 이유는 있었습니다.

공민왕이 케시에 참여하기 위해서 원나라에 갈 때 그를 따라갔던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공민왕 개인의 욕망도 있었겠지만 자신을 따르고 지지하는 신하들의 이해관계와 기대 때문이라도 왕이 돼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공민왕이 케식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갈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바로 왕이 되는 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원나라에서의 타지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형의 뒤를 이어 반드시 왕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5. 고려 제29대 왕 '충목왕', 제30대 왕 '충정왕', 공민왕의 조카들에게 왕위에서 밀리다. 

하지만 원나라가 책봉한 고려 제29대 왕은 충혜왕의 아들이자 공민왕의 조카였던 8살밖에 안된 '충목왕'이었습니다. 

원나라는 도대체 왜 쫓아낸 왕의 아들을 또다시 왕위에 세운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출신 때문이었습니다.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던 명덕태후였습니다.

그런데 충목왕의 어머니는 원나라 공주 출신의 덕녕공주였던 것입니다.

원나라 황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냐에 따라 고려 안에서의 정치적 위상이 달라지던 이때 원나라 공주를 어머니로 둔 충목왕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4년 뒤 고려에서는 또 한 번의 비보가 들려옵니다. 

조카 충목왕이 즉위한 지 불과 4년 만인 12살의 나이로 요절을 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바람과는 달리 다음 왕위에는 충목왕의 배다른 동생 12살 된 고려 30대 왕 '충정왕'이었습니다.  

공민왕이 또 한 번 조카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충정왕의 어머니는 원나라 공주가 아니었습니다.

충정왕이 왕이 된 이유는 그의 외가를 비롯한 지지자들 중 친원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고려의 국왕의 자리에 공민왕은 고려 조정 내 원나라 세력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6. 공민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결심하다.

공민왕은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째 왕위를 뺏긴 지 불과 5개월 만인 1349년 10월, 스무 살의 공민왕은 원나라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신부는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혜종과 육촌 관계였던 원나라 황실의 공주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보탑실리'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녀의 이름은 '노국대장공주'입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공민왕은 10년의 캐식 생활동안 노국공주의 집안과 교류를 했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노국공주와 만났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공민왕의 왕위 계승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정략결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공민왕은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그리고 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정략결혼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결혼으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면서 한순간에 원나라의 든든한 뒷배를 얻게 됩니다.

7.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드디어 고려의 왕으로 즉위하다.

1351년 고려의 왕이 다시 한번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원나라가 또다시 충정왕을 왕위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당시 14살밖에 안 됐던 충정왕이 폐위된 이유는 기록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왕위 교체를 명하는 원 황제의 문서나 특별한 설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충정왕의 폐위는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입니다. 

 

충정왕 이후 고려 제31대 왕으로 드디어 공민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원나라가 공민왕을 왕으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노국공주와의 결혼이었습니다. 

8. 노국공주, 고려왕과의 혼인관계를 걱정하다.

공민왕은 케식생활을 한지 무려 10년 만에 고려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렇게 귀국길에 오른 공민왕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을 터였습니다.

반면 노국공주는 낯선 이국생활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공민왕과의 관계에 확신 또한 없었습니다.

 

 '왕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하여 또 욕지거리를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

<동국통감>

 

이 기록은 원나라 공주와 최초로 결혼한 고려 25대 왕 충렬왕의 이야기이며 원나라 공주가 남편 충렬왕을 때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충렬왕과 그의 부인 원나라 공주는 불교 사찰에 행차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 도착한 남편 충렬왕이 아내인 원나라 공주를 기다리지 않고 절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화가 잔뜩 난 원나라 공주가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화는 충렬왕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민왕 이전에 결혼한 대부분의 고려왕과 원나라 공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노국공주는 자신 역시 공민왕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까 봐 불안했을 것입니다. 

9. 노국공주의 염려와 달리 공민왕의 사이좋은 부부가 되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선대의 커플과는 달리 금슬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올 때 일용 기물과 간 책(책의 일종)과 서화(글과 그림을 이르는 말) 등의 물건을 배에 싣고 왔다'

<용천담적기>

 

이는 노국대장공주가 많은 책과 그림에 능통하며 조애가 깊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섬세한 그림이 참으로 천인(하늘의 사람)의 필치였다'

<앙엽기>

 

이는 공민왕 역시 노국공주 못지않게 풍부한 예술적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취향이 잘 맞고 나밖에 모르는 남편이었던 공민왕의 모습에 마음을 놓은 노국공주는 고려생활을 마음 편히 즐기게 됩니다. 

10. 공민왕,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재건을 꿈꾸다.

고려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민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는 그 앞에서 갑자기 원의 호복을 벗고 고려의 왕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는 몽골식 머리 모양인 '변발'도 과감하게 폐지합니다. 

100여 년간 이어지던 풍습을 바로잡고 고려의 전통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위 직후에 공민왕이 '변발과 호복을 벗어버리겠다'라고 한 것은 고려의 신료들에게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남편인 공민왕이 자신의 조국인 원나라를 배반하는듯한 행동을 보이는 것에 노국공주는 예상과는 달리 묵묵히 남편 공민왕의 뜻을 따릅니다. 

모국 원나라에 맞선 공민왕을 노국공주는 전적으로 믿어줍니다. 

 

공민왕 즉위 6년째 되는 해인 1356년 5월 18일, 공민왕은 연회를 베푼다며 고위관리들을 궁으로 초대했습니다. 

공민왕의 초대를 받고 신하들은 하나둘 궁궐에 모여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숨어있던 군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신하들을 철퇴로 내려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궁안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서도 공민왕은 너무나 태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군사들을 매복시켜 입궐한 신하들을 죽이도록 명령한 사람이 바로 공민왕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공민왕이 제거하려던 세력은 친원세력이었던 것입니다. 

11.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동북면을 되찾고  '쌍성총관부'를 함락하다.

동북면 쌍성총관부
동북면 쌍성총관부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민왕은 여몽전쟁 때 빼앗겼던 '동북면'을 되찾으려 하고 원나라가 동북면을 관리하려고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해서 마침내 함락시킵니다. 

이로써 여몽전쟁 이후 약 100년 동안 원나라에 빼앗겨 고려가 잃어버렸던 동북면 땅을 드디어 되찾은 것입니다.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민왕이 꺼내든 개혁의 칼날이 기세를 드높임에도 불구하고 원은 고려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원나라는 혼란스러운 내부사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당시 붉은 두건을 쓰고 봉기한 농민 봉기인 '홍건적의 난'을 비롯해서 원나라에 불만을 가진 내부 반발 세력이 여기저기 들끓고 있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나라는 공민왕이 이전 왕들과 다른 길을 가려한다는 것은 정확히 알고 예의주시했을 것입니다. 

12.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배신한 노국공주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원나라의 공주가 아닌 고려의 왕비로서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렇게 요청할 당시는 앞서 공민왕이 변발과 호복을 폐지했을 때와는 다르게 원과 고려의 당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노국공주는 모국 원나라와 남편 공민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데 결국 노국공주는 사랑하는 남편 공민왕을 선택합니다. 

노국공주는 원의 공주가 아닌 고려의 왕비로서 원나라에 반기를 드는 남편 공민왕의 행보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민왕 역시 자신을 선택해 준 노국공주에게 애틋함이 더해갔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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