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금지옥엽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한 삶 1(탄생부터 혼인, 유배까지)
1. 세종의 손녀 경혜공주
경혜공주(1435년~1473년)는 조선 4대 왕 세종의 손녀, 5대 왕 문종의 딸이자 6대 왕 단종의 누이입니다.
경혜공주는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조선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공주 중 한 명입니다.
이렇게 조선 왕실의 금지옥엽이었던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을 능지처참으로 잃고 속세에 두 명의 아들을 남긴 채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은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에 대해서 다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경혜공주가 '옹주'가 아닌 '공주'가 된 사연
조선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은 공주 중 한 명이었다는 경혜공주는 사실은 공주가 될 운명조차 아니었다고 합니다.
경혜공주의 어머니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경혜공주의 어머니는 '후궁 권 씨'였고 당시 왕이었던 세종의 아들 세자 문종의 후궁이었습니다.
문종과 후궁 권 씨 사이의 딸이 바로 경혜공주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공주'라는 호칭은 오로지 '왕과 중전의 딸'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후궁의 딸인 경혜공주는 원래는 '옹주' 신분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후궁의 딸인 경혜공주는 아버지가 왕이 되더라도 공주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종의 첫 번째 부인 '휘빈 김 씨'는 압승술이라는 주술에 집착해서 궁에서 쫓겨났고 두 번째 부인이었던 순빈 봉 씨는 동성애 스캔들을 일으켜 폐위됩니다.
문종의 아내 두 명이 연달아 아버지 세종에 의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세 번째 며느리 선택에 고심이 깊었던 세종의 눈에 띈 후궁 중 한 명이 바로 후궁 권 씨였던 것입니다.
세종은 파격적으로 새로운 간택절차를 거치지 않고 후궁이었던 권 씨를 세자빈의 자리에 올려버립니다.
간택절차 없이 후궁 권 씨를 세자빈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권 씨는 이미 딸을 낳았으니 그러므로 의리상 마땅히 세자빈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
<세종실록>
이런 선택을 한 세종에게는 큰 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은 권 씨가 이미 딸을 낳았으니 아들도 낳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경혜공주의 탄생이 바로 후궁 권 씨를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세종의 손녀이자 세자였던 문종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경혜공주는 조선왕실의 금지옥엽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3. 후궁 권 씨가 아들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다
경혜공주가 7살이 되던 해인 1441년, 문종과 후궁 권 씨 사이에서 문종의 대를 이을 훗날 단종이 되는 아들 '이홍위'가 태어납니다.
경혜공주도 6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겨 기뻤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후궁 권 씨는 단종이 태어난 다음 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경혜공주는 한참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7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된 것입니다.
원래 문종과 후궁 권 씨 사이는 경혜공주에 앞서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돌도 되기 전에 일찍 사망합니다.
그 이후 다시 얻은 딸이 바로 경혜공주로 문종은 7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된 딸을 애잔한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습니다.
또한 어머니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난 단종과 경혜공주는 각별하고 애틋한 남매 사이였습니다.
4. 경혜공주, 남편 '정종'과 혼인하다
그리고 경혜공주는 9년 후인 1450년 16살이 되던 해에 혼인을 하게 됩니다.
왕실에서 고르고 고른 경혜공주의 남편은 바로 '정종'이었습니다.
정종의 '해주 정 씨'가 두 번이나 왕실과 사돈을 맺은 명문가 집안이었습니다.
경혜공주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명문가 자제 정종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이 고른 당대 최고의 명문가 자제 정종과 경혜공주가 혼인을 하게 됩니다.
5. 경혜공주, 할아버지 세종 승하 후 아버지 문종 즉위 후 정식으로 공주가 되다
경혜공주가 혼인을 하고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 그토록 경혜공주를 아꼈던 할아버지 세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 뒤를 이어 세자였던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후 경혜공주는 정식으로 공주가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혜공주라는 이름을 바로 이때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6. 아버지 문종의 경혜공주를 위한 마지막 신혼집 선물
할아버지 세종의 죽음 이후에 경혜공주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아버지 문종의 건강이 더욱더 악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세종이 죽은 이후 상을 치르면서 몸상태가 더욱더 악화되고 만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451년 4월 1일, 쇠약해진 문종은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철거시키도록 명하신 양덕방의 인가가 30여구에 이른다'
<문종실록>
'양덕방'은 현재 경복궁 근처 북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종이 머물던 경복궁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이 양덕방 일대의 인가 30여구를 모두 철거하도록 명한 이유는 바로 경혜공주와 정종의 신혼집을 마련해주려 했던 문종의 뜻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경혜공주부부는 혼인 1년 후 궁궐을 나가서 정종의 집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문종은 정종의 집이 썩 들지 않았고 사랑하는 딸을 위해 으리으리한 신혼집을 지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허물면 원망을 살 것이니 청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라며 문종의 철거명령에 신하들은 강력하게 반대를 합니다.
문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신혼집 짓기를 강행합니다.
결혼 이후에도 아버지 문종의 경혜공주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7. 아버지 문종 승하, 동생 단종 즉위하다
경혜공주가 결혼 후 2년이 지난 1452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 문종이 승하하고 맙니다.
문종이 왕으로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시 경혜공주의 나이 18살, 남동생 단종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습니다.
그렇게 열두 살의 단종이 아버지 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머니,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마저 연이어 잃은 경혜공주와 단종은 서로를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창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릴 12살의 나이에 왕이 되고 궁궐에 홀로 남겨진 단종은 외롭고 쓸쓸했을 터였습니다.
그래서 단종은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왕이 된 이후에도 누이와 매형이 있는 경혜공주의 집에 자주 들르게 됩니다.
8. 삼촌 수양대군, 계유정난을 일으키다
어린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10월 10일 단종과 경혜공주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보좌 세력인 김종서를 살해하고 조카 단종의 왕위를 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계유정난'이라고 일컫습니다.
계유정난의 밤 수양대군은 궁궐이 아닌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집으로 향합니다.
당시 13살이 된 단종은 궁궐을 떠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은 경혜공주의 집으로 쳐들어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역적 김종서를 처단하고 오는 길인지라, 피치 못하게 군사를 대동하였나이다. 역모에 가담한 잔당들입니다. 명패를 내어주시지요"
'명패'란 조선시대의 왕이 3품 이상 대신들을 소집할 때 사용하던 '패'입니다.
수양대군은 왕명으로 고위관료들을 소집해야 했고 적대적인 대신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단종의 명패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수양대군의 요구대로 단종은 왕의 명패를 수양대군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 순간을 야사인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기록하고 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놀라 일어나며 "삼촌, 나를 살려주세요"했다. 수양대군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처리하겠습니다." 하고는 곧 명패를 내어 여러 재신들을 불렀다.'
< 연려실기술>
군사를 이끌고 온 수양대군의 발언에 잠에서 깬 단종은 벌벌 떨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열세 살 약관의 나이였던 단종에게 당시 상황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는 왕인 것조차 잊고 "삼촌,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한 부분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종의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었던 김종서까지 죽임을 당하여 궁궐에는 단종과 경혜공주의 편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피바람이 몰고 지난 간 계유정난의 그날 밤 경혜공주의 집 안에서 경혜공주는 단종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할 따름이었습니다.
문종의 사랑이 담긴 신혼집이 끔찍한 비극의 무대가 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조선 왕실을 완벽하게 제압합니다.
때문에 경혜공주 남매는 그날 밤 이후 하루하루를 불안함에 떨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9.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유배당하다
그리고 2년 후 1455년 6월,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왕위까지 노리고 있었던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반대파가 '금성대군'이었습니다.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또 다른 삼촌이었던 것입니다.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이런 식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이에 수양대군은 동생 금성대군에게 평소에 권력을 남용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바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바로 이 금성대군의 일에 경혜공주의 남편이 같이 엮인 것입니다.
평소 금성대군과 정종은 자주 어울렸던 사이이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정종 또한 금성대군과 엮어서 처벌을 내린 것입니다.
정종 역시 영월로 유배를 가라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이 금성대군과 평소 가깝게 지냈던 것은 맞지만 그보다 단종의 매형이었던 정종이 반대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사전에 차단하는 차원에서 미리 유배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 세조, 계유정난 이후 2년 만에 왕위에 오르다
경혜공주 남편이 유배 간 그날, 단종은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들이 모두 유배를 가버리니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렇게 단종은 모든 힘을 잃은 채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단종은 물론 단종을 추종하는 세력까지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입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2년 만에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됩니다.
경혜공주는 계유정난 이후 남편이 유배를 떠나는 모습에서부터 동생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모습까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11. 경혜공주, 세조에게 '아프다는 것'을 알리는 전략으로 유배당한 남편을 구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에게 경혜공주가 병석에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실 아프다는 것은 세조를 압박하기 위한 경혜공주의 전략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혜공주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카인 내가 앓아누웠으니 유배 간 남편을 돌려보내달라고 하는 의지표명이었던 것입니다.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남편이 유배를 간 것으로 인해 앓아누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심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혜공주는 그런 점들을 고려해서 민심에 예민한 세조를 겨냥한 전략을 짠 것입니다.
이에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약과 어의를 보내주고 남편 정종도 유배에서 풀어주어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명합니다.
결국 경혜공주의 아프다는 이 시위가 제대로 적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종이 한양으로 돌아오자 경혜공주는 바로 건강을 되찾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12. 경혜공주, 다시 유배를 가게 된 남편 정종을 따라 같이 유배생활을 결심하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정종은 경혜공주가 아프다고 하여 잠깐 한양으로 왔던 것이지 죄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이라며 다시 정종을 유배지로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결국 세조는 대신등의 등살에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을 다시 수원으로 유배를 보내고 맙니다.
그렇게 두 달 만에 정종의 한양귀환은 해프닝으로 끝나버립니다.
이 같은 대신들의 요청은 어찌 보면 대신들의 입을 빌었지만 세조의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혜공주는 정종이 유배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면 남편을 따라 함께 유배를 가겠다고 세조에게 청합니다.
당시 유배지에 죄인이 아닌 부인이 함께 간다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세조는 이를 허락합니다.
죄인이 아니었던 경혜공주를 위해 세조는 수원 유배지로 이동할 때 경혜공주를 위해 가마와 노비, 유배지에서 먹을 음식들까지 제공해 줍니다.
그런데 조정 대신들이 수원으로 유배 보내는 것은 처벌이 약하다며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합니다.
결국 경혜공주와 정종은 수원을 떠나 한양에서 조금 더 먼 김포지역의 통진으로 이동합니다.
비록 유배지였지만 경혜공주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잘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양에서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일을 봐줄 노비도 있었고 어느 정도의 체면을 지켜면서 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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