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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1(연개소문 가문 부터 안시성 전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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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1(연개소문 가문부터 안시성 전투까지)

1. 연개소문 가문

고구려 최고 권력자인 연개소문집안이 고구려 멸망에 영향을 준 것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연개소문 가문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고구려 최고 관직, 지금으로 보자면 국무총리급인 '대대로'와 '막리지'를 역임했습니다.

대대로는 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관등이었고 막리지는 국사를 총괄한 관직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한마디로 당시 고구려의 유력 가문출신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던 것입니다. 

2. 연개소문의 세습을 반대하는 고구려 귀족세력들

고구려 최고 가문출신 연개소문이었지만 넘기 힘든 하나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아버지의 관직을 아들이 이어받는 세습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다른 귀족세력들이 연개소문이 최고 관직을 세습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마땅히 그 지위를 계승하고자 하였지만 국인(國人, 고구려의 주요 귀족세력)은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그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의 성격이 보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세습을 반대한 속내는 따로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집안에 너무 많은 권력이 몰리는 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가문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 강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연개소문은 "내가 잘못했소"라며 납작 엎드립니다.

연개소문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행동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일종의 연기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이렇게 사과를 한 후에야 결국 관직에 오를 수 있습니다. 

3. 연개소문, 고구려의 '영류왕'을 죽이다

겨우 관직에 오른 연개소문은 그 후 고구려에 엄청난 파장을 부를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642년 10월, 이날은 연개소문과 그 부하들이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열병식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을 포함한 고구려 주요 대신 및 수많은 이가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열병식을 하던 연개소문의 병사들이 칼을 들고 연회장에 뛰어듭니다. 

그리고는 고구려의 대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열병식장은 살육의 현장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연개소문 부하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대신들은 죽어갑니다. 

연개소문의 잔인한 살육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연개소문은 바로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영류왕이 있는 궁궐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연개소문은 순식간에 영류왕을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그 후에 일어납니다. 

'궁궐로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왕의 시신을 잘라 여러 토막으로 내고 도랑에 버렸다'

<삼국사기> 

이날의 행적들은 연개소문이 철저히 계획하고 실행한 쿠데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고구려 제28대 왕 보장왕(재위 642~668)이 즉위합니다. 

그런데 이 보장왕은 허수아비일 뿐 연개소문이 실질적인 고구려의 지배자였습니다. 

쿠데타 이후 고구려의 내부를 장악한 연개소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이 고구려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연개소문은 견제세력을 없애고 고구려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4. 신라  사신 김춘추, 백제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며 고구려로 연개소문을 찾아오다

당시 고구려를 위협하던 강력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중국의 당나라입니다.

중국의 나라들이 고구려를 노렸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당나라 이전에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수나라 역시 무려 1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한 적도 있습니다.

612년 중국 수나라의 군대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지금의 청천강 일대)에서 격퇴한 '살수대첩'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618년 수나라의 뒤를 이은 나라가 바로 당나라였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위로는 중국의 당나라가 아래로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연개소문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옵니다.

바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였습니다.

김춘추(재위 654~661)는 당시 신라의 실권자이자 훗날 신라 태종 무열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신라 김춘추는 연개소문을 찾아옵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수십여 개의 성이 함락되면서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을 나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삼국사기>

죽령
죽령

쉽게 말해서 고구려가 도와줄 테니 신라에게 죽령 땅을 요구한 것입니다. 

죽령은 경상북도 영주와 충청북도 단양 사이의 고개를 말합니다.

연개소문은 신라에게 한강 상류의 금싸라기 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이런 무리한 요구를 신라에게 한 대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연개소문은 고구려 내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지세력이 많지 않다 보니 김춘추를 압박해서 한강유역을 되찾게 된다면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제안을 받은 신라의 김춘추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왕께서는 이웃과 친선 하는 데에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줄 것만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삼국사기>

결국, 김춘추에게 연개소문의 제안은 죽을지언정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개소문은 크게 분노합니다.

결국 연개소문은 신라의 사신 김춘추를 가둬버립니다.

이후 포로로 잡힌 김춘추가 간신히 탈출해서 신라로 돌아갑니다. 

연개소문은 이렇게 단 한 번의 외교 협상으로 신라를 적으로 돌려버리고만 것입니다. 

이 외교적 선택은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5. 당태종, 고구려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정벌하겠다며 선전포고 하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뒤인 644년,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연개소문은 그 나라(고구려)의 군주를 시해하였고, 그 나라의 대신을 죽였고... 이러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임금과 대신들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정벌하겠노라고 고구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당 태종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
당 태종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

당시 당태종은 중국을 중심으로 천하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으며 이 모두 지배하고자 한 야욕이 있었던 군주였습니다. 

당은 동쪽에 있는 고구려도 당에 굴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를 침공하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으로 적절했던 것이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당태종 자신도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당태종이 명분으로 내세운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핑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6. 여당전쟁으로 고구려 철벽방어의 상징 '요동성'을 함락당하다

645년 4월, 당태종은 선전포고 후 일 년간의 준비 끝에 최신형 무기와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지휘하며 고구려로 쳐들어옵니다.

중국중심의 천하를 꿈꾸는 당태종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육군은 물론이고 수군까지 몰고 옵니다.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진격해 온 당나라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운 고구려군은 잘 막아냈지만 전략상 중요했던 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요동성
요동성

바로 고구려 최전방에 위치한 '요동성'입니다.

연개소문에게는 이 요동성이 함락당한 것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동성은 고구려 철벽방어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에 앞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던 곳이 바로 '요동성'이었던 것입니다. 

이 요동성을 당태종에게 빼앗겼으니 고구려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7. 고구려,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하다

요동성을 빼앗고 기세등등해진 당나라 군대는 수도인 평양성으로 가기 전에 꼭 점령해야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시성'입니다. 

645년 6월 20일, 당태종과 그의 군대는 안시성 앞을 가득 메웁니다.

그렇게 고구려와 당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됩니다.

당나라 20만 대군은 최신식 무기인 포차를 이용한 장거리 공격을 퍼붓습니다.

안시성은 험준한 산 능선을 이용해서 성벽을 축조했기 때문에 적의 입장에서 공격이 쉽지 않습니다.

안시성 성벽
안시성 성벽

게다가 안시성의 성벽은 흙과 돌을 쌓아 쌓아 만들어서 더욱 견고했습니다.

따라서 성벽을 부수는 포차 공격도 버텨낼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안시성전투는 점점 길어질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안시성 안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에게 이상한 장면이 포착됩니다.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 앞에 토산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시성의 성벽을 뚫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나라군은 안시성 성벽의 높이까지 토산을 높이 쌓은 후 그 토산을 올라 성벽을 넘어 안시성을 쉽게 공격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당태종과 그의 군대는 하루 8천 명 이상의 병사를 투입해서 무려 60여 일 동안 밤낮으로 토산을 쌓습니다. 

드디어 토산이 완성됩니다.

안시성의 운명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이때 우르르 쾅하는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60일 여일 넘게 쌓은 당나라의 토산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안시성과 토산
안시성과 토산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 성벽 한쪽이 부서지게 되면서 토산과 안시성 성벽이 살짝 연결이 됩니다.

이때 고구려군은 당황하지 않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고구려군은 빠르게 성이 무너진 곳을 통해 토산으로 올라 신속하게 나가서 당나라 군대와 싸웁니다. 

그리고는 우왕좌왕하는 당나라군을 향해 총공격을 퍼붓습니다.

결국 고구려군은 그 토산을 점령하며 안시성을 지켜냅니다.

그 뒤 3일 동안 당나라 대군은 토산을 빼앗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을 끝까지 막아냅니다.

결국 645년 9월 18일 당 태종은 당나라 군대의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나라군은 비참하게 패배한 후 쫓기듯 당나라로 돌아갑니다.

여당전쟁은 이렇게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결국 연개소문은 치열했던 여당전쟁에서 고구려를 승리로 이끕니다.

여당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내 귀족세력들은 쿠데타로 전권을 잡은 연개소문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연개소문은 여당전쟁을 총지휘하였고 당나라와의 험난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쿠데타 이후에 불안했던 연개소문의 권력이 더 튼튼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여당전쟁 승리 후 본격적인 연개소문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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