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2(2차 여당전쟁, 평양성 전투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8. 연개소문, 태대대로(太大大盧) 관직을 새로 만들다
기존에 고구려 관직 중 가장 높았던 것은 '대대로'였습니다.
연개소문은 '대대로'보다 더 높은 관직이라는 뜻으로 '태대대로'라는 관직을 새로 만듭니다.
대대로 와 태대대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임기입니다.
태대대로는 임기 없이 최고권력을 누릴 수 있는 무기한 종신직이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직접 오를 수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왕이 된 다는 것은 전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왕조를 만든 다는 것입니다.
전 왕조를 없애려면 뭔가 큰 하자가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 왕실에는 흠결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즉 연개소문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태대대로 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태대대로에 임명하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실권 장악에만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9. 연개소문, 세 아들에게 권력의 대물림 시작하다
하지만 연개소문 여기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 권력을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결국 불같은 연개소문의 욕망이 빚어낸 권력의 대물림이 시작됩니다.
연개소문은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큰 아들 연남생에게 막강한 권력을 줍니다.
왕의 최측근 관직,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급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중리대형'을 부여합니다.
이때 연남생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후 연남생이 23살이 됐을 때는 최고 귀족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연남생은 몇 년 뒤에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급에 해당하는 '대장군'까지 겸임하게 됩니다.
연남생 외에 다른 두 아들에게도 역시 좋은 관직을 줍니다.
그야말로 연개소문과 그 집안이 고구려를 장악한 모습입니다.
10.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
그런 고구려의 상황을 지켜보던 당 태종은 고구려를 포기하지 않고 고구려 침공을 고민합니다.
그때 당 태종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신라 김춘추입니다.
648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고구려의 또 다른 적이었던 신라의 김춘추와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위로는 당나라 아래로는 신라, 이렇게 고구려의 위아래를 둘러싸고 있는 두 나라의 연합은 연개소문이 지배하는 고구려에 또 하나의 큰 위기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당연합을 맺은 다음 해인 649년, 김춘추와 약속을 했던 당 태종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됩니다.
당 태종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깁니다.
'요동에 가는 일을 모두 중지하라'
이 유언의 의미는 당시 요동땅을 지배했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잠시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당 태종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고구려를 잊지 못한 것입니다.
정복군주의 대명사였던 당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당연합의 전쟁준비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당 태종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당 고종이 당나라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11. 신라 무열왕 김춘추와 당 고종의 나당연합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다
당 태종이 죽고 끝난 줄 알았던 나당연합이 신라와 당 태종의 아들 당 고종과 연합을 맺음으로써 다시 부활합니다.
그 후 신라 무열왕 김춘추와 당나라의 당 고종은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순식간에 공격하여 멸망케 한 것입니다.
12. 나당연합에 의한 2차 여당전쟁으로 고구려 위기에 처하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다음으로 노리는 나라는 다름 아닌 고구려였습니다.
1차 여당전쟁 때까지만 해도 요동 쪽으로만 고구려를 노렸던 당나라가 나당연합을 통해서 육로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해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세가 오른 당나라는 곧바로 고구려를 침공할 군대를 편성하기 시작합니다.
661년, 당나라는 2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구려는 1차 여당전쟁 이후 16년 만에 당나라와 맞붙게 됩니다.
당나라는 우선 바다를 건너서 평양성을 공격하고
두 번째는 전통적인 루트였던 압록강을 통해서 육로로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나라는 이렇게 해로워 육로 두 갈래로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남쪽에서는 신라군도 합세할 예정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이 공격을 막지 못하면 무너질 위기에 처합니다.
13.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 압록강 전투에서 대패하다
연개소문은 먼저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그쪽으로 군사를 보냅니다.
661년,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맞붙게 됩니다.
이때 압록강의 고구려군을 총지휘한 장수는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그가 가장 믿는 장남 연남생에게 압록강 방어를 위해 3만의 군대를 맡기게 됩니다.
연개소문의 기대와는 달리 연남생은 당나라와의 압록강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맙니다.
연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그야말로 처참히 대패합니다.
압록강 전투에서 무려 3만의 고구려군이 전멸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압록강이 뚫려버린 압록강 전투 패배의 원인은 바로 총지휘관이었던 연남생에게 있었습니다.
바로 연남생이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연남생은 그 와중에 군대를 다 잃고 혼자 도망쳐 나옵니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구려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4. 연개소문, 직접 평양성 전투 나서 승리로 이끌다
게다가 이때 당나라군은 평양성 앞까지 상륙해 있었습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 합니다.
661년 8월, 당나라군은 무서운 기세로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고대 전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바로 겨울의 추위입니다.
연개소문은 겨울까지 전쟁을 장기전으로 끄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애초에 당군은 속전속결 전략을 채택합니다.
이때 당나라가 갖고 있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보급'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자 고구려 군은 평양성 안에서 추위를 버틸 수 있었지만 당나라군은 보급은 부족하고 날씨는 추워지자 견디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게다가 남쪽에서 신라군의 지원도 백제 잔존 세력 때문에 막혀서 무산이 되고 맙니다.
연개소문의 장기전 전략은 당시 당나라군 방어에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662년 음력 1월, 날이 풀리자 마침내 연개소문은 지칠 대로 지쳐있는 당나라군에 총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평양성안에서 버티기만 했던 고구려군은 처음으로 평양성을 나와 당나라군을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연개소문은 이때 당나라의 장수와 그의 아들 13명까지 전부 죽입니다.
'(당나라 장수) 방효태가 사수(대동강 인근의 지류)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워 전군이 죽고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평양성 밖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승자는 고구려였습니다.
그야말로 연개소문의 전략이 완벽히 통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평양성 전투'입니다.
사실 안시성 전투보다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양성전투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투 중 하나입니다.
평양성 전투를 정점으로 기필코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찾아왔던 2차 여당 전쟁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이후 당나라 최대 종교 행사 '태산봉선이'라는 중요한 행사에 고구려를 초대합니다.
태산봉선은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던 행사로서 하늘의 뜻을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정치적, 종교적 의례행위였습니다.
중국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당나라는 중요한 행사인 만큼 초청할 나라를 꼼꼼히 선별했습니다.
그런 게 여기에 불과 몇 년 전까지 적대관계였던 고구려 역시 초대된 것입니다.
당나라는 구구려와의 연이은 전쟁 패배 후 무력정복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계속되는 당과의 전쟁을 할 수는 없었던 상황에서 두 나라 간 외교적 타협을 본 것입니다. 당나라는 명분을 얻고 고구려는 실제적인 외교 관계를 통해서 양국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해 나가려는 취지로 보입니다.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에도 그렇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15.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의 사망 그리고 아들들 사이의 분열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한 가지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형제가 고기와 물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권력을 다투지 마라. 만약 서로 싸우게 되면 주변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연개소문이 쌓아놓았던 권력은 누구한테 돌아갔을까요?
바로 아버지 뒤를 이어 큰아들 연남생이 고구려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유언과는 달리 연남생과 두 동생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집니다.
원래 사이가 좋았던 삼 형제였는데 연개소문이 죽은 후 주변에서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했고 그 이간질에 넘어가 서로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결정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연남생이 다른 성을 순찰하기 위해 평양성을 비운 사이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하던 신하들이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 연남생이 두 분을 죽일 것입니다'
결국 두 동생들은 이간질에 넘어가 군대를 보내 연남생을 공격하고 수도인 평양성을 장악하게 됩니다.
연남생은 믿었던 동생들의 습격에 황급히 몸을 피하여 평양성을 떠나 압록강 너머에 있는 국내성까지 도망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관직까지 동생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결국 연남생은 한순간 고구려 최고 권력자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16. 고구려, 연개소문의 큰 아들 연남생의 배신으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다
666년, 당나라가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다시 시작된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으로 연개소문이 굳건히 지켜내었던 평양성이 함락되고 맙니다.
그동안 당나라의 어떤 공격에도 꿋꿋이 버텼던 고구려의 성들이 이상할 만큼 쉽게 뚫려 버린 것입니다.
바로 당나라의 숨겨진 조력자 때문이었습니다.
그 조력자는 충격적 이게도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 최고권력자였던 연남생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를 도운 것입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3개월 전인 666년 6월, 연남생은 돌연 당나라로 가서 항복을 선언합니다.
당나라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구려의 배신자 연남생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연남생은 당나라군의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들을 당나라에 고스란히 바치게 됩니다.
이렇게 연남생은 고구려 멸망의 단초가 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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