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2) 왕권 강화책부터 폭군이 되어 가는 과정과 죽음까지
8. 궁예의 왕권 강화책
8. 1. 철원 천도
궁예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면서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언합니다.
송악은 '패서 호족'들의 근거지였으며 특히 왕건의 직접적인 근거지였습니다.
송악에 있으면 궁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고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입니다.
궁예에게는 패서호족들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궁예가 왕권 강화를 위해 들고 온 첫 번째 묘책인 '철원 천도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철원으로 천도를 하게 되면 새로운 도성을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화려한 도성을 짓는데 들어간 막대한 돈과 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재력이 있는 호족들과 백성들이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농사짓기도 바쁜데 세금도 내야 되고 궁궐 공사 현장에 가서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불만이 커지게 됩니다.
호족들 또한 호화로운 궁궐을 짓는데 또 막대한 자금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8. 2. 국호를 '태봉'으로 변경
궁예는 901년 고려 건국 3년 만인 904년에 마진으로 국호를 변경했고 911년 태봉으로 두 번이나 국호를 바꿉니다.
바뀐 국호인 마진이나 태봉에서는 고구려의 색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즉 고구려 계승 의지를 지우려 국호를 변경한 것입니다.
궁예는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원성을 잠재우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게 됩니다.
8. 3. 신격화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미래에서 나타난 부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갈기와 꼬리를 비단으로 장식한 흰말을 타고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승려들이 입는 옷)를 걸쳤다.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깃발과 꽃을 들고 인도하게 하였고 비구니 2백여 명을 뒤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민심을 모으는 한편 호족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륵불'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궁예는 단순히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8. 4. 관심법
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자 했던 더 강력한 수단인 '관심법'을 들고 나옵니다.
관심법이란 觀(불 관)心(마음 심) 즉, 상대편의 몸가짐이나 표정으로 속마음을 알아내는 기술을 뜻합니다.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신하를 압박했던 궁예는 "나는 미륵 관심법을 쓸 수 있다. 그대들의 마음을 다 들여다볼 수 있지. 만약 나를 속이다가 내 관심법에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9. '관심법'의 폭주
궁예의 관심법에 관련한 최악의 폭주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9.1. 철퇴사건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여겼던 궁예는 20여 권의 불교 경전도 지었습니다.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차처하며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고 모두 도리에 맞지 않았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궁예의 폭정에 모두 떨며 누구도 앞에 나서지 못했던 가운데 당시 명망 높은 승려 '석총'이 용기를 내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궁예는 통제력을 잃고 철퇴로 석총을 내리쳐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9. 2. 부녀자 살해
또한 궁예는 부녀자들의 음탕함을 관심법으로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죄 없는 부녀자들을 마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번에는 궁예의 폭주가 자신의 백성들에게도 향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신격화한 궁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공포심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관심법은 다분히 의도된 행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10. 왕건, 태봉의 2인자가 되다.
궁예의 폭정을 막을 수 없었던 왕건은 지방 근무를 자처하고 후백제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금성(나주)으로 내려가게 되고 왕건은 903년 나주를 정복합니다.
왕건이 철원으로 돌아온 뒤 나주는 후백제의 공격을 받게 되고 왕건은 나주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나주로 향합니다.
그리고 '덕진포'라는 곳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이를 '덕진포 전투'라고 합니다.
이때 왕건은 적은 병사로 정면 돌파하면서 엄청난 수의 후백제 배를 불사른 후 대승을 거뒀습니다.
912년 그 중요한 나주를 후백제로부터 지켜내게 됩니다.
왕건은 이 소식에 기뻐하며 대승을 거둔 왕건을 수도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왕 바로 아래 직책이자 신하들의 우두머리인 '시중'에 임명하게 됩니다.
왕건은 이렇게 궁예가 아끼던 신하에서 명실상부한 태봉국의 이인자로 거듭납니다.
궁예가 가장 믿고 후사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건이었던 것입니다.
궁예는 이렇게 왕건을 믿었고, 왕건 또한 비록 폭정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왕인 궁예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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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태봉국 최고의 정치이슈 '아지태 사건'
사건은 '아지태'라는 이름의 한 간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지태는 아첨꾼에 남을 잘 속이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아지태는 궁예가 남의 잘못을 아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궁예의 마음에 들려고 야비한 짓을 저지릅니다.
거짓으로 같은 고향 출신을 모함하며 없는 죄를 만들어 고향사람들을 궁예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아지태의 모함으로 처벌당할 위기에 몰린 사람들을 이 위기로부터 구해준 사람이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은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은 후에 아지태를 잡아들여 추궁을 합니다.
결국 아지태에게 거짓으로 남의 죄를 고백했다는 자백을 받아냅니다.
왕건 덕분에 모함당했던 사람들이 풀려나게 됩니다.
이 아지태사건 이후에 궁예를 따랐던 호족들, 귀족들, 지략가 등 직책을 가리지 않고 궁예를 떠나 왕건 편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태봉의 정치세력은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게 됩니다.
아지태 사건을 합리적으로 잘 처리했기 때문에 왕건 편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친왕건파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지태 사건은 왕건의 급부상에 위기감을 느꼈을 궁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정치세력이 둘로 나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2. 궁예와 왕건의 사이를 가른 결정적인 사건(왕건을 향한 의심)
궁예가 자신의 최즉근인 왕건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궁예는 갑자기 왕건을 궁 안으로 부릅니다.
궁 안에는 처형당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이를 보고 있던 궁예는 갑자기 성난 눈을 하고 왕건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데 왜 그랬는가?"
당황한 왕건은 침착하게 대답합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궁예의 의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은 나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 지금부터 너의 마음을 읽겠다."며 관심법을 발동합니다.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진 채 관심법을 시작합니다.
생사가 걸린 이 절체절명의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엎드려 있던 왕건의 앞으로 붓 한 자루가 굴러옵니다.
궁예의 측근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최응은 떨어뜨린 붓을 줍기 위해서 왕건 곁으로 다가갑니다.
최응은 몸을 숙여 붓을 줍는 그때 왕건에게 아주 빠르게 한 마디를 속삭입니다.
"자복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빨리 자복하십시오"
이 말은 들은 왕건은 바로 궁예에게
"제가 반역을 꾀하였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자백합니다.
사실은 반역을 꾀한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왕건의 말을 들은 궁예는
"경은 참 정직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금과 은으로 만든 말안장과 고삐를 선물로 줍니다.
그러면서 "경은 이제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마시오"라고 말합니다.
왕건은 이렇게 궁예 측근 최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궁예 옆을 지키던 측근조차도 왕건의 편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준 사건인 것입니다.
13. 결국, 궁예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이다.
궁예의 폭정을 보다 못한 '부인 강 씨'가 궁예를 찾아와 울면서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하라며 간청을 합니다.
이 말은 들은 궁예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나는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피운 걸 알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결국 궁예는 관심법으로 부인마저 몰아세우게 됩니다.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는 부인 강 씨의 말을 믿지 못한 궁예는 추국장에서 추국을 하고 결국 아내를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기록에 의하면 불에 달군 쇠꼬챙이 부인의 음부를 찔러 죽였다고 나옵니다.
부인에 이어 두 아들까지 잔인하게 때려죽이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가족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을 보면서 신하와 백성들은 궁예를 폭군으로 각인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볼 때 궁예가 정신적으로 이상증이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정치적으로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인 강 씨는 유력한 호족의 딸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동안 궁예와 호족들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쌓여 낳은 비극적 결과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4. 왕건, 918년 고려건국을 선포하다.
궁예의 폭정이 계속되던 918년 6월 마침내 민심이 폭발하고 맙니다.
918년 6월 14일 늦은 밤 왕건의 집 문을 누군가 급하게 두드립니다.
왕건이 문을 여니 부하장수 4명이 서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왕건에게
"지금의 왕은 정사도 못 돌보고 형벌도 함부로 하며 처자를 살육하고 신하들을 죽이니 백성들이 그를 원수처럼 미워합니다. 바라건대 폭군을 물리쳐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합니다.
궁예를 쫓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짜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왕이 바로 왕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건은 "아무리 포악해도 충심을 가져야 할 신하가 군주를 칠 순 없소!"라고 하며 장수들의 청이 충심에 어긋난다며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때 왕건의 부인 유 씨가 갑옷을 들고 나와
"대의를 세우고 폭군을 갈아내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화가 나는데 어찌 대장부가 가만있으신 겁니까?"라고 말하며 왕건에게 갑옷을 입힙니다.
왕건은 그제야 장수들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이렇게 '왕건의 혁명'은 시작됐습니다.
궁 앞에서 왕건을 기다린 사람들이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예를 향한 민심이 떠난 상황을 극명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왕건은 결국 궁안으로 무혈입성하면서 너무 쉽게 혁명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철원성에서 '고려 건국을 선포'합니다.
15. 초라한 궁예의 죽음
왕건의 고려가 세워진 그 순간, 궁예는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침전에 누워 있었는데 나인이 왕건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에 궁예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초라한 행색으로 허둥지둥 궁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산에서 이틀간 피신을 하다 배가 너무 고파 보리를 훔쳐 먹다 주민들에게 발각됩니다.
결국 인근 주민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강원도 철원에 '궁예의 울음소리를 간직한 산'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로 '명성산'입니다.
죽기 전 궁예가 토한 울음소리가 퍼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산으로 오늘날에는 '울음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한탄강'은 '궁예가 운명이 다함을 한탄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비록 전설이지만 궁예의 마지막 숨결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궁예는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미륵불을 자처했지만 변변한 무덤하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궁예는 분명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장군이었고 큰 뜻을 품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야심 찬 개혁가의 면모가 있었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궁예를 지지하던 세력이 있었을 정도였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승자였던 고려도 '선각대사탑비'를 통해 '궁예를 전 왕조의 대왕'이라고 칭하며 기립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궁예를 폭군으로만 기억할까요?
역사적 기록상 궁예는 통치 전반과 후반이 전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통치 후반부는 왕건이 정변을 일으켜서 고려를 세울 즈음의 모습이라 왕건 정변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궁예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야 했던 것입니다.
궁예가 물론 폭군으로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그것이 더 과장되면서 폭군의 이미지가 더 강조된 것입니다. 역사는 늘 그렇지만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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