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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1) 출생부터 고려를 건국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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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1) 출생부터 고려를 건국하기까지 

1. 한쪽 눈을 잃은 궁예 출생의 비밀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의 외모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한쪽 눈을 가리는 안대를 쓴 모습일 것입니다. 

궁예
궁예

궁예가 안대를 쓰게 된대에는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깊습니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한 남자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남자는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 궁예를 데리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아래로 던져버립니다.

지붕아래에 있던 궁예의 유모가 받아내서 목숨은 건지지만 받는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예는 왜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의 아버지가 47대 헌안왕 혹은 48대 경문왕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왕실계보
신라 왕실계보

후궁의 아들이었던 궁예는 궁궐 밖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궁예의 탄생 소식은 곧장 궁궐로 전해집니다.

궁궐에서 천문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일관'이 궁예탄생을 풀이했는데 '불길한 운을 타고난 아이'로 '나라에 해가 될 아이'라고 나온 것입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五) 자가 거듭(5월 5일) 들어 있는 날에 태어났고 나면서 치아가 있으며 또한 무지갯빛이 이상하였으니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당시 숫자 5는 '양'의 기운이 있는 수로 5월 5일은 양(5)과 양(5)이 겹치기 때문에 양기가 센 날로 그런 날 아이가 태어나면 불길하다는 생각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졌었습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궁예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유모는 궁예에게 왕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의 아들처럼 키웁니다.

궁예와 유모가 도망친 지 10여 년이 지납니다.

궁예는 말썽꾸러기로 자라나게 되고 그 장난이 도를 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유모는 궁예를 붙잡고 울면서 고백합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두고 보지 못하고 오늘까지 몰래 너를 키워놨다. 그러나 그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다가는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을 수도 있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결국 유모는 궁예 나이 10세에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게 됩니다. 

 

'궁예가 울며 말하길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떠나겠습니다"라고 하며 세달사, 지금의 흥교사로 향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2. 출생의 비밀을 알고 절로 들어간 궁예

절로 간 궁예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속세의 이름도 버린 채 '선종'이라 법명을 짓고 절에서 지내게 됩니다.

궁예가 있었던 흥교사는 현재의 강원도 영월 근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흥교사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기와
흥교사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기와

궁예는 승려 생활을 계속하고 수행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헌칠하고 담력이 있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정 시점에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다른 뜻을 펼치려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승려생활을 하던 궁예는 어느 날 식사를 하기 위해  승려들의 그릇인 발우를 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늘을 날고 있던 까마귀가 발우 안으로 무엇인가를 떨어뜨립니다. 

바로 '첨대'였습니다.

침대는 대나무 조각으로 책갈피로도 쓰였으나 주로 점괘를 적어둔 뒤 이를 뽑아 길흉을 판단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39;왕(王)&#39;자가 씌여져 있던 첨대
'왕( 王)'자가 쓰여 있던 '첨대'

그런데 이 침대의 뒷면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궁예가 왕이 된다는 것은 곧 이처럼 운명적 인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든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궁예가 세달사의 승려로 절에 머물 때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절에 머무를 때부터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이야기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절에서 생활하면서 정치적 포부를 키워가던 궁예는 결국 절을 나서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3. 대혼돈의 시대, 무너져가는 통일신라시대

궁예가 이렇게 절을 떠나는 계기가 된 것은 세상을 바꾸고 바로잡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궁예가 절을 떠나던 시점은 사실 통일신라 말기였습니다.

당시 왕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고 백성들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를 바닥냈습니다. 

그러던 와중 일부 귀족들은 노비를 무려 3,000명을 거느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귀족들 사이에 '금입택(金入宅)'이라고 '금을 입힌 집'을 짓는 사치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입택은 금을 입혀 만든 진골 귀족의 호화 저택으로 수도 서라벌에 총 35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입택 상상도
금입택 상상도

당시 지배계층의 방탕함에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나라 안의 모든 주와 군에서 곡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삼국사기 진성왕>

 

전국에서 백성들의 크고 작은 봉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왕실은 이런 사태를 진압할 능력조차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신라왕실은 점점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해 갑니다. 

4.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

이런 신라의 혼란한 상황들은 궁예의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기폭제가 됩니다. 

궁예는 자신이 세력을 모으면 신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궁예는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얻으며 신라 동북부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궁예는 싸우기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거침없는 기세로 황해도 일대까지 단숨에 평정하게 됩니다. 

궁예가 왕이 되기까지
궁예가 왕이 되기까지

동쪽지역을 차지한 궁예는 서쪽 지역까지 쭉쭉 진출하게 됩니다. 

패서 지역
패서 지역

지금의 황해도 일대인 '패서'지역의 송악에는 '왕륭'이라고 하는 호족이 있었습니다. 

왕륭은 대대로 무역으로 거부가 된 해상 호족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선박 제조 및 해상전투능력이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궁예의 막강한 기세에 눌려 패서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궁예에게 패서 호족들은 스스로 궁예의 부하가 되겠다고 줄줄이 항복합니다. 

 

'조족,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격파하니 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패스의 호족들 중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5. 송악 호족 출신 '왕건'을 만나다

서쪽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 중 궁예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훗날 궁예의 심복이자 태봉국 최고의 장수 '왕건'입니다.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왕건의 외모는 어땠을까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용과 같은 얼굴에 이마 한가운데 뼈가 도드라졌으며 턱은 네모나고 이마는 널찍하였다. 기세가 힘차고 깊었으며 말소리는 넓고도 컸다.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만한 도량이 있었다'

<고려사>

 

궁예가 왕건에게 맡긴 첫 임무는 궁예가 세울 나라의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왕건은 궁예의 첫 명령을 아주 훌륭하게 해냅니다.

 

6. 중부권 장악을 위한 마지막 관문 '한강유역'을 점령하라

한강유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비옥한 토지와 수운을 가지고 있어 이곳을 장악해야 나라의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곳만 차지한다고 한다면 육로와 해로 어디로든 사방팔방으로 진출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한때 궁예를 거두어 주었던 북원(원주) 대호족 '양길'이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양길은 궁예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한 군사로 그를 습격하였다. 하지만 궁예는 이를 이미 알고 먼저 공격하여 양길을 크게 패배시켰다'

 

마침내 양길을 몰아내고 한강 중상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궁예는 기세를 몰아서 900년에 왕건에게 경기도 남부, 충청도까지 진군을 명령하였고 왕건은 궁예의 뜻대로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7. 새로운 나라 '고려'(후고구려)를 세우다

이렇게 중부지역까지 장악한 궁예는 드디어 자신의 나라를 세웁니다.

901년 궁예는 국호를 '고려' 정하고 대외적으로 건국을 선포합니다.

흔히들 '후고구려'라고 알고 있지만 왕건이 고려(918년)를 세우 기 전 궁예가 세운 나라 이름도 '고려'입니다.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기원전 37년 건국된 '고구려'의 이름도 사실은 '고려'입니다. 

건국 당시는 '고구려'였으나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이후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습니다.

옛 고구려의 이름도, 궁예가 세운 나라도, 왕건이 세운 나라도 모두 '고려'인 것입니다.

궁예는 고려를 잇는 나라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고려'라는 이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는 궁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中>

 

궁예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복수를 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신라 왕자 출신이었지만 궁예가 나라를 세우는 데 근거지 역할을 했던 '패서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판단으로 보입니다. 

패서지역은 옛 고구려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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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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