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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건국한 견훤(3) 신검의 난부터 일리천전투까지 후삼국 시대의 최후와 견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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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건국한 견훤(3) 신검의 난부터 일리천전투까지 후삼국 시대의 최후와 견훤의 죽음

1. 아들 금강에게 왕위 계승하려 하다.

견훤은 고창전투 패배 후 전세를 뒤집기 위해 줄곧 미뤄두었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금강은 몸이 크고 지략이 많았다. 견훤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자신의 아들 금강을 왕위 후계자로 공표한 것입니다.

금강은 풍채도 좋았던 데다 타고난 머리까 지 좋았습니다.

견훤의 기백을 쏙 빼닮은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견훤은 왜 이리 다급히 후계자를 정한 것일까요?

견훤은 젊고 뛰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서 왕건을 꺾으려 한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함을 물론이고 기울어가고 있는 후백제를 다시 일으킬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35년 3월 그런 견훤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견훤의 아들들
견훤의 아들들

사실 금강은 견훤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장남 신검이 넷째 금강을 반대한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금강이 위의 형들과 배다른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신검은 배다른 형제 금강을 치기 위해 세력을 모아 군사를 일으킵니다.

거사 당일 금강을 죽여버립니다.

신검의 반란에는 이방원의 왕자의 난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견훤을 전부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라는 절에 유폐시켜 버립니다.

견훤이 유폐된 신검은 '제멋대로' 후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합니다.

2. 견훤, 라이벌인 왕건의 고려에 귀부 하다

견훤은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신검 반란 3개월 후인 935년 6월,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과 하인들은 감시하고 있던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그 틈을 타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스스로 적국인 고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라이벌이었던 왕건에게 투항합니다.

나라를 버리 고려에 투항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컸던 것입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각축을 벌였던 견훤과 왕건은 이렇게 역사의 승패가 갈리게 됩니다. 

견훤은 유폐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혹시 아들에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망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에 신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 선택지는 고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왕건은 투항하는 세력을 포용하고 대우해 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견훤 또한 라이벌 관계였지만 왕건에게 귀부 하면 잘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왕건에게 견훤은 삼국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언제든 고려를 공격할 수 있는 맹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존재였던 견훤이 스스로 왕건의 품에 안긴 것이었기 때문에 왕건 입장에서는 큰 걱정거리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견훤 또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기에 서로에게 상생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3. 천 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다. 신라 멸망

그리고 얼마 후 견훤이 귀부 한 고려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소식하나 가 전해집니다.

바로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투항한 것입니다.

신라는 찬란했던 천 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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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고려에 흡수되면서 고려는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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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견훤,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켜 달라고 왕건에게 요청하다

고려 왕건의 마지막 상대는 견훤을 내쫓고 후백제의 왕이 된 신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견훤은 왕건을 은밀히 찾아갑니다.

견훤은 왕건에게 '아들을 벌해달라, 그리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달라!'는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제안을 합니다.

아들에 대한 뼈에 사무치게 깊었던 원한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멸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936년 9월 견훤의 요청에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이때 출정한 고려군은 무려 10만 대군입니다.

고려의 왕건의 옆에는 70세가 된 노장군이자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있었습니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킬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입니다.

고려군의 출정소식에 화들짝 놀란 후백제의 신검도 군사를 일으킵니다.

5.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일리천 전투'

견훤과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과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경북 구미시 일리천'이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립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결국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기도 직전에'

'갑옷을 벗고 창을 던져 견훤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니 이에 적병이 기세를 잃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고려사>

전장에서 견훤과 마주하자 후백제의 장군들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던 것입니다.

후백제의 위대한 왕이자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이기도 했던 견훤에게 후백제 장군들은 감히 칼을 겨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검은 물론이고 후백제군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기가 크게 꺾이게 됩니다.

결국 견훤과 왕건의 완벽한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전쟁에서 패배한 신검은 왕건에게 투항을 선언합니다.

견훤이 일생을 바쳐 세웠던 나라 후백제가 멸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후백제가 멸망한 그 해 견훤은 세상을 떠납니다.

견훤은 산라에서 성장해 후백제라는 나라를 건국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나라가 아닌 고려 땅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업적만 조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견훤같이 치열한 삶을 살아간 인물도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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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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