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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건국한 견훤(2) 후삼국시대 도래와 고려의 건국 후 공산전투 승리, 고창전투 패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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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건국한 견훤(2) 후삼국시대 도래와 고려의 건국 후 공산전투 승리, 고창전투 패배까지

1. 궁예의 후고구려의 등장으로 후삼국시대 도래

1901년 (후) 백제와 신라 두 나라로 쪼개진 한반도가 다시 세 나라로 쪼개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궁예가 고구려 부흥을 내세워 후고구려를 건국합니다. 

후삼국시대 지도
후삼국시대 지도

225년 만에 다시 한번 한반도에 새로운 삼국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를 후삼국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2. 금성(나주)이 후고구려에 투항한 사실에 분개하는 견훤

삼국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던 910년에 견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 후고구려의 수군이 후백제의 땅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때 쳐들어온 후고구려의 장군이 그 유명한 '왕건'입니다. 

왕건(877년~943년)은 당시 후고구려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송악의 호족출신의 명장이었습니다.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내려와 금성(나주) 일대의 서남해안 지역을 점령합니다. 

후백제는 나주를 빼앗긴 뒤 위로는 후고구려, 아래로는 신라에게 협공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일대는 토지가 비옥한 곡창지대여서 곡물의 작황이 좋은 곳입니다. 

일종의 곡물창고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절대 나주를 빼앗겨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충지인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후고구려에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 버렸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합니다.

'견훤은 금성(나주)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노했다'<삼국사기>

왕건의 출신지였던 송악 호족들과 나주 호족들은 예로부터 서로 협력하면서 해상 무역을 하는 관계였습니다.

예전부터 이렇듯 막강한 인연의 끈이 있었고 게다가 막강한 군사력을 이끌고 왕건이 점령을 하러 오니 나주 호족들은 그에게 적극협조를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나주 일대는 견훤의 의지와 상관없이 후고구려에 빼앗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견훤은 나주를 되찾기 위해 후백제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나주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수천 명의 후고구려 군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됩니다. 

견훤과 왕건을 열흘 동안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습니다. 

전투의 결과는 왕건의 승리였습니다. 

전투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견훤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막강했던 왕건의 군사력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존심을 구긴 견훤은 왕건에게 바득바득 이를 갈 정도로 분해했습니다.

3. 왕건의 고려 건국 소식을 듣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몇 년이 흐른 뒤, 918년 6월 견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왕으로 추대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궁예의 폭정에 시달리던 신하와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왕건을 후고구려의 새로운 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후고구려의 장군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환호를 받으며 새로운 왕조 '고려'를 건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앞선 왕건과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봤던 견훤은 이제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추대된 왕건과 왕대왕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 당시 신라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명맥만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4. 상주 호족 아버지 아자개의 고려 귀부 소식을 듣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같은 해에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가 고려로 귀부(스스로 가서 복종함)를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마디로 견훤의 아버지가 아들을 배신하고 아들의 맞수였던 왕건에게 항복을 한 것입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운 후 아버지를 홀대합니다.

반면 왕건은 상주 장악을 위해서 상주 호족 아자개를 적극적으로 회유합니다. 

이런 여러 이유들이 겹쳐 결국 아자개가 아들을 배신하고 고려로 귀부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와 같이 상주 땅도 고려에 빼앗기게 됩니다.

당시 호족이 귀부를 하면 그를 따르던 군사, 재산, 지역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따라서 상주 호족 아자개의 귀부는 상주를 통째로 고려에 갖다 바친 거나 다름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아자개처럼 고려에 투항한 호족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건은 견훤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바로 '친 신라 정책'이었습니다.

견훤은 주적인 신라를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반면 왕건은 전쟁으로 인한 신라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 신라의 정통성을 받들어 섣불리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신라인들의 마음을 샀던 것입니다.

군사권,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호족들이 경상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신라 호족들을 통합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겠다는 큰 그림을 왕건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신라 점령 후 신라의 경애왕 자결시킴

견훤은 왕건보다 18년이나 일찍 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조건과 탄탄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견훤은 왕건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후백제와 비등해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겠다고 의지를 다집니다.

견훤은 고려를 공격하기 전인, 927년 10월 먼저 노린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 신라였습니다.

견훤은 고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를 끊기 위해서 약한 고리인 신라부터 꺾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벼락같은 기습 공격에 신라의 방어막은 속수무책으로 뚫리게 됩니다.

견훤의 후백제군은 단숨에 신라의 수도 금성(경주)까지 진격합니다.

이때 신라의 경애왕과 조정 신료들은 '포석정'에 있었습니다.

포석정은 신라의 수도 경주의 남산에 위치한 곳으로 제사 및 연회를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신라의 경애왕은 조정 신료들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기면서 종이 되기를 구걸하였으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삼국사기>

신라의 조정 신료들은 이렇게 살기를 구걸하였으나 후백제군들에게 처참히 목숨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경애왕은 귀족들과 함께 도망치다 후백제군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견훤 앞으로 끌려옵니다.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고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다그침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견훤은 신라의 왕을 자결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경애왕의 왕비를 강제로 범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후백제의 장수들은 경애왕의 후궁들을 겁탈하기까지 합니다.

견훤이 신라를 장악해 신라왕을 죽였다는 소문을 삼국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상 신라가 후백제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라 경애왕 승하 후 왕이 없는 신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견훤은 경애왕의 친척이었던 경순왕을 신라의 다음 왕으로 세웁니다.

견훤은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새로운 왕을 세워서 신라의 명맥을 이어가게 합니다.

만일, 견훤이 무력으로 신라를 멸망시키면 친 신라계의 호족들의 반발을 사기 때문에 한 결정이었습니다.

친 신라계 호족들이 고려 왕건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설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6. 공산전투에서 왕건에 압승

견훤의 군대는 신라에서 목표를 이룬 후 후백제로의 회군을 시작합니다.

금성(경주)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대구 팔공산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팔공산에 매복해 있던 왕건과 고려군들이 견훤의 군사들을 둘러쌉니다.

공산전투
공산전투

견훤이 신라왕실을 장악한 것을 넘어 신라왕을 죽였다는 소식에 왕건이 한달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만약 신라왕실을 장악한 견훤이 그대로 후백제로 무사히 돌아간다면 신라가 견훤의 손아귀에 쥐어진 것은 물론이고 삼국통일의 판세가 완전히 견훤에게 기울 거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왕건은 지금이 견훤의 목을 노릴 절호의 타이밍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견훤이 지나가는 경로를 파악해 팔공산 일대에 군사들을 매복시켰습니다.

그렇게 매복하고 있는 왕건의 고려군과 맞닥뜨리게 된 견훤은 벼랑 끝 승부를 펼치게 됩니다.

견훤은 왕건의 5천 군사를 전멸시키는 압승을 거둡니다.

왕건 또한 죽을 뻔한 위기까지 넘기게 됩니다.

견훤은 왕건의 공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왕건은 궁예의 폭정으로 노한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상대적으로 후백제만큼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에는 소홀함이 있었습니다.

반면 후백제 군사들은 신라를 장악 한 뒤 값진 보물들을 약탈해서 귀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견훤의 나이 61세, 왕건의 나이 51세였습니다.

7. 물거품이 된 견훤의 꿈(고창 전투 패배) 

930년 견훤은 또다시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견훤은 고려를 직접 치기 전에 노린 땅이 있었습니다. 

바로 현재 안동지역인 '고창'입니다. 

고창전투
고창전투

이쪽이 고려의 편도, 백제의 편도 아닌 신라 호족이 다스리던 완충지대로 남아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고창을 정복하면 이곳 호족세력도 자연스럽게 경제, 군사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견훤은 이곳부터 보란 듯이 점령해 나가기로 합니다. 

견훤의 진격소식을 들은 왕건은 견훤과의 정면승부를 위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창에 진영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930년 1월, 견훤과 왕건은 견훤이 승리한 '공산 전투' 이후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견훤은 군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싸웠습니다. 

 

'싸우다가 저녁이 되자 견훤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죽은 자가 8,000여 인이었다. <고려사> 

 

예상과는 달리 고창전투의 결과는 견훤의 참혹한 대패로 끝납니다. 

기세가 좋던 견훤이 왜 이런 대패를 한 것일까요? 

바로 고창 호족들이 왕건에게 투항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고창 호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한 이후 군사까지 지원해 줍니다.

고려군과 고창 호족 연합에 견훤은 무참히 패배한 것입니다. 

고창 호족들은 견훤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과거 견훤이 저질렀던 만행 때문이었습니다.

신라 왕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왕비까지 겁탈했던 것입니다.

견훤의 잔혹한 행동에 신로호족들이 완전히 견훤에게서 돌아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창 호족들 역시 견훤이 아닌 왕건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삼국통일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리던 견훤은 고창전투 패배로 급브레이크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1) 출생부터 후백제 건국하기까지 (tistory.com)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1) 출생부터 후백제 건국하기까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1) 출생부터 후백제 건국하기까지 1. 태생부터 비범했던 견훤 우리가 견훤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견훤이 태어났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견훤은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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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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