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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금지옥엽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한 삶 2(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의 죽음부터 비구니가 되어 죽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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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금지옥엽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한 삶 2(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의 죽음부터 비구니가 되어 죽기까지)

13. 단종복위운동

1456년, 세조에 반기를 든 세력이 본격적으로 저항을 나섭니다.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게 폐위되자 이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긴 수십 명의 조정관료들이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올릴 모의를 했던 것입니다. 

한양을 뒤흔든 이 사건을 '단종복위운동'이라고 합니다. 

단종복위운동의 중심세력은 '사육신'이었습니다. 

사육신은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여섯 명의 인물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역모 혐의로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단종복위운동은 사육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이 사건의 배후에 단종과 단종의 측근들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육신중 한 명인 성삼문이 '단종도 거사계획을 알고 있었다'라고 고한 것입니다.

이에 세조는 단종을 더욱더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14. 남편 정종, 전라도 광주로 유배 보내지다

그런데 이 단종복위운동의 불똥은 단종뿐 아니라 단종의 매형인 정종에게도 튀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세조는 정종을 전라도 광주까지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사실 정종이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거나 연루됐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조나 세조 측근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다시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킬 만한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금성대군과 정종 등의 사람들을 더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낸 것입니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경혜공주는 남평 정종을 따라 전라도 광주까지 유배를 함께 가는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광주에서의 유배생활은 그전까지의 유배지 생활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들이 광주로 갈 때 세조는 정종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노비까지 모두 지방의 관노로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정종의 모든 인맥과 재산을 모조리 끊어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루아침에 직접 집안일까지 경혜공주가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마침내 공주로서의 삶은 완전히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15. 동생 단종, 사약을 먹고 죽다

1457년 6월 21일, 경혜공주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 단종이 상왕의 자리에서까지 쫓겨나게 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1457년 10월 21일, 동생 단종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결국 죽게 됩니다.

이때 경혜공주의 나이는 불과 23살이었습니다. 

경혜공주는 고된 유배생활을 하던 와중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세조는 광주에 유배당해 있는 경혜공주 부부를 옴짝달싹 못하게 더욱더 삼엄한 감시를 명합니다.

경혜공주 부부 집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집 주변에 담장을 높게 둘러치고 집안에 우물을 설치하고 음식은 열흘에 한 번씩 넣어주도록 합니다.

심지어 바깥문을 자물쇠로 잠가 버립니다.

경혜공주는 남편과 단둘이 세상과 단절된 채 집안에서만 갇혀 사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16. 절망 속에 핀 희망, 경혜공주 부부 아들을 낳다. 

경혜공주부부에게 벼랑 끝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칩니다.

경혜공주가 유배생활 중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정미수'였습니다.

혼인한 지 9년이 지나도록 경혜공주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혼인한 지 한 달 즘 될 무렵이었던 1450년에는 할아버지 세종의 죽음으로 삼년상을 치르느라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인 1452년 아버지 문종이 죽음으로 또다시 삼년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삼촌 세조의 쿠데타에 동생 단종의 죽음까지 연이은 많은 사건들 때문에 아이를 갖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거쳐 9년 만에 생긴 아들은 절망 속에서 맞는 큰 기쁨과 희망 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고통스러운 삶을 기필코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자란 아들이 남편 정종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경혜공주에게 나름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7. 남편 정종, 능지처참 당하다

경혜공주의 아들이 3살이 되던 해인 1461년, 갑자기 남편 정종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려갑니다. 

 

'정종이 잡인(외부의 여러 사람)과 서로 통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명백하니, 죄악이 깊고 무겁습니다' 

<세조실록>

유배생활 중이었던 정종은 불교에 빠져있었습니다. 

유배생활 중인 정종은 외출과 외부인 접촉이 금지된 상태에서 승려와 몰래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만난 승려와 함께 반역을 꾸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남편 정종은 승려와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정종은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께 죄를 받았으니 어찌 아픔이 있으리오' 

남편 정종이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고 담담하게 벌을 받겠다고라고 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정종은 그동안 오랫동안 유배지를 전전하며 많은 핍박과 심적인 고통을 받았습니다.

정종은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1461년 10월 세조는 정종에게 '능지처참'이라는 참혹한 벌을 내리게 됩니다.

'능지처참'은 사지가 찢기는 끔찍한 형벌입니다.

사실 경혜공주가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지켜본 것은 아닙니다.

경혜공주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유배지에서 전해 듣게 됩니다.

이때 경혜공주에게 남은 것은 가슴속에 굳게 맺힌 한이었을 것입니다.

삼촌 세조에게 동생에 이어 남편까지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경혜공주의 나이는 고작 27살이었습니다.

경혜공주는 삼촌 세조에 의해 자신의 마지막 행복까지 산산조각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경혜공주는 남편이 죽은 충격에 길게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18. 경혜공주,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하다(실제가 아닌 야사일 가능성이 높음)

남편 정종이 능지처참 당했을 무렵 경혜공주의 아들은 고작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주 어린아이였습니다. 

게다가 경혜공주의 뱃속에는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경혜공주는 과거에는 30여 채의 집을 헐어 만든 대궐 같은 집에 살았지만 지금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고 집도 돈도 없는 가난한 처지였습니다. 

게다가 남편 정종은 대역죄인으로 죽었습니다. 

따라서 경혜경주와 아이들도 역적의 아내이자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힌 상황이었습니다. 

경혜공주까지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는 있습니다. 

경혜공주는 유배지 광주를 떠나서 광주보다 남쪽인 전남 순천으로 보내집니다. 

경혜공주는 순천에서 더 끔찍한 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신분이 공주에서 노비로 강등된 것입니다. 

한순간에 고귀한 공주의 신분에서 비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순천 관아에서 청소, 빨래등 허드렛일을 해야만 하는 신세가 됩니다. 

어느 날 순천 수령이 허드렛일을 시키기 위해 경혜공주를 부릅니다. 

그런데 경혜공주는 관아 대청에 당당히 올라가 수령의 자리에 앉아 수령에게 아랫사람 대하듯 바라보고는 수령에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공주다. 비록 죄를 지어 이곳에 왔지만 수령 따위가 어찌 감히 일을 시키려 하느냐?"

조선의 공주답게 강단 있게 말하는 경혜공주의 위세에 눌린 수령은 일을 시키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경혜공주가 관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1648년 조선시대 문신 윤근수가 쓴 월정집이라는 책에 기록된 야사입니다. 

당시 사실로 믿기 어려운 경혜공주 관련된 야사들이 이것을 포함해서 여럿입니다. 

방금 전의 경혜공주가 관노비가 되어 수령을 혼내준 이야기도 실제 당시의 정황과 맞추어 봤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사실로 볼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다만 이런 야사들이 전해지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경혜공주가 그렇게 시련을 겪은 그 처지를 상당히 불쌍히 여겼다는 방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원흉이 된 세조를 미워하는 민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19. 세조, 경혜공주와 아이를 한양으로 복귀시키고 연좌제의 죄를 묻지 않기로 하다

그렇다면 남편 정종이 죽은 후 경혜공주는 실제로 어떻게 됐을까요?

광주에 남겨진 경혜공주에게 세조가 환관을 보냅니다.

'환관을 광주에 보내어 정종의 아내를 데리고 오게 하였다'

<세조실록>

경혜공주는 세조의 부름에 뱃속에 아이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상경합니다.

경혜공주는 7년 만에 동생과 남편을 죽인 삼촌 세조와 재회를 하기 위해 궁궐로 향합니다.

경혜공주입장에서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세조와의 악연을 끊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정종의 아들과 아내가 입궐하여 알현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눈물을 뿌리셨다'

<예종실록>

이런 행동을 한 세조의 진의를 알 순 없습니다.

하지만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조는 경혜공주와 아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세조입장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동생과 남편까지 가족을 모두 잃은 경혜공주는 위협이 되는 인물아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온갖 풍파를 겪어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경혜공주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세조는 비록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살려둘 수 없었지만 자기 조카인 경혜공주는 안쓰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경혜공주와 세조가 재회하고 얼마 후에 세조는 경혜공주를 위해 명령을 내립니다.

'경혜공주와 그 자식들을 연좌하지 말라'

정종이 역적의 죄를 짓고 죽었기 때문에 대역죄인인 그 당사자뿐 아니라 자식과 손자들까지 줄줄이 출셋길이 막히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경혜공주와 자식들이 연루되지 않도록 이런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딸이며 죄가 없으니 집과 노비를 주고자 한다'

가진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집도, 부리던 노비도 없었던 경혜공주에게 세조는 경제적으로 지원까지 약속한 것입니다.

세조는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습니다.

때문에 경혜공주가 왕실로 돌아온 이상 그게 걸맞은 합당한 예우가 필요하가도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경혜공주는 세조의 지원 속에서 뱃속에 있던 딸을 출산하게 됩니다.

아들은 유배지에서 낳았지만 딸은 한양에서 낳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경혜공주는 세조의 도움으로 자식들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20. 경혜공주, 비구니가 되다

'공주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성종실록>

경혜공주는 겨우 3살 된 아들과 1살 된 딸을 남겨둔 채 절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경혜공주는 자식들을 위해 삼촌 세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가슴 깊이 풀리지 않는 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조를 볼 때마다 동생과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절로 들어갑니다. 

경혜공주가 절로 간 후 남겨진 아이들은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에게 맡겨집니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에게 고통받았던 경혜공주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경혜공주의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궁궐에서 돌봐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경혜공주는 원한과 슬픔을 내려놓고 절로 들어가 동생과 남편을 위한 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468년, 경혜공주와 끈질긴 악연이었던 삼촌 세조가 세상을 떠납니다.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심각한 피부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1468년 건강이 악화된 세조는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뒤 1473년 비구니가 되어 절로 떠난 경혜공주 또한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합니다.

경혜공주의 묘
경혜공주의 묘

경혜공주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묻힙니다.

경혜공주의 무덤에는 특이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경혜공주의 묘 옆 남편 정종의 가묘
경혜공주의 묘 옆 남편 정종의 가묘

경혜공주 무덤 왼쪽에 작은 무덤이 보이는데 바로 남편 정종의 '가묘'입니다.

남편 정종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무덤이 아닌 가묘를 경혜공주 무덤 옆에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경혜공주가 죽은 뒤 아들 정이수는 성종 즉위 후 관직에 올라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자식들만은 잘 살기를 바랐던 경혜공주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조선의 금지옥엽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한 삶1(탄생부터 혼인, 유배까지)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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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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