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세조, 시동생 예종, 아들 성종 그리고 손자 연산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인수대비
1. 인수대비는 누구인가?
1437년, 인수대비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 '청주 한 씨' 집안의 2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납니다.
인수대비의 성은 '한 씨'로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시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인수대비 아버지 한확은 명나라 황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수대비의 고모 두 명이 공녀로 명나라에 간 이후에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인수대비 집안의 권력은 그만큼 높다라고 볼 수밖에 없는 반증이 됩니다.
인수대비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외교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2. 인수대비, 탁월한 언어능력을 가지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어릴 때부터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책을 많이 접합니다.
보통 조선 시대에는 남자와 여자의 철저한 역할 구별 속에서 여성에게는 글공부를 시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어려서부터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유교, 불교등과 관련된 정말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인수대비는 당시 한자는 기본이고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까지 가능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 경전이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어린 시절의 인수대비는 유교, 불교 할 것 없이 새로운 지식들을 많이 접했던 그야말로 당대 학식이 뛰어났던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3. 인수대비, 조선 왕실 가문의 '이장'과 혼인하다
좋은 집안에 총명한 규수였던 인수대비는 10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한 집안으로부터 혼사를 제안받습니다.
바로 왕실 가문의 후손 '이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수대비는 이장과 결혼해서 조선 왕실 가의 며느리가 된 것입니다.
4. 인수대비, 시아버지 '수양대군' 쿠데타를 일으키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수대비 인생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인수대비의 집안에 낯선 사람들이 은밀하게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칼을 찬 무사들까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바로 인수대비의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인수대비의 남편 이장이 수양대군의 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인수대비가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칼을 잡고 거사 '계유정난' 일으켰던 것입니다.
계유정난이란 1453년, 인수대비의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한명회와 함께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김종서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합니다.
계유정난 성공 이후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바로 조선 제7대 왕 '세조'입니다.
5. 남편 이장이 왕세자가 되었고 인수대비 또한 왕세자빈이 되다
그리고 인수대비와 그의 남편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장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고 한 씨를 왕세자빈으로 삼았다'
<세조실록>
이장은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인수대비 역시 세자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수대비의 궁궐생활은 시작됩니다.
6. 인수대비,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다
인수대비가 궁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수대비의 시부모님입니다.
특히 인수대비는 시아버지였던 세조와 시어머니였던 정희왕후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습니다.
어느 날은 인수대비가 궁녀들이 준비한 수라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시아버지 세조가 먹을 음식에는 혹시 문제가 없는지 정성스럽게 살핍니다.
이렇게 살뜰하게 시부모님을 살피니 시아버지인 세조는 며느리 인수대비가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당시 세조의 며느리 인수대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던지를 보여주는 선물이 있었습니다.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서 내렸다'
<연려실기술>
세조가 인수대비의 효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칭찬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세조는 며느리 인수대비를 국가사업에도 참여시킵니다.
세조는 언어능력이 뛰어난 며느리 인수대비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전 간행 사업'에 그녀를 참여시키기까지 합니다.
인수대비가 정확하게 어느 정도까지 참여했는지는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왕실 여성이 국가사업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인수대비의 학식과 불교에 대한 소양이 깊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임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인수대비는 세자빈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일인 왕실의 후계자 문제 역시 거뜬히 해냅니다.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한 명 낳았었고 궁궐에 들어온 이후에는 아들, 딸 한 명씩 또 낳았습니다.
세자빈이 된 이후 인수대비는 여러모로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을 조건을 모두 갖춘 백점 만점의 백점 짜리 며느리였습니다.
인수대비는 이때 왕비가 될 자신의 모습을 조심스레 상상했을 것입니다.
7. 인수대비, 입궁 2년 만에 남편 '의경세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그런데 1457년 9월, 인수대비의 운명을 요동치게 만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영원히 이별을 하였으니 슬픔을 어이 다 말할 수 있으랴. 천지도 반드시 그 심정을 알 것이다'
<성종실록>
입궐한 지 2년 만에 인수대비의 남편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느 날, 건강했던 의경세자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면서 쓰러진 뒤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충격에 빠진 세조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까지 모여서 하늘에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인수대비의 남편 의경세자는 병을 앓은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인수대비는 세조의 뒤를 이어 다음 왕이 될 의경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인수대비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습니다.
심지어 셋째 아이를 출산한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세 아이만 남겨두고 하루아침에 남편 의경세자를 먼저 떠나보낸 인수대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청천벽력,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8. 인수대비, 청상과부가 되어 세 아이들과 함께 궁밖으로 나가게 되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마냥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세자빈이었던 인수대비의 신분 때문에 다음 세자가 누가 될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시아버지 세조가 새로운 세자를 선택합니다.
세조는 의경세자의 아들인 손자가 아니라 세조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던 '해양대군'을 세자로 선택합니다.
세조는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을 이용해서 쿠데타를 통해서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 2(피부병에 걸려 결국 죽음까지) (tistory.com)
세조는 손자인 월산대군이나 자을산군 같은 어린아이에게 세자 자리를 주고 이들이 왕위에 오르게 됐을 경우 복잡한 쿠데타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런 것들까지 복합적으로 고민해서 내린 결정으로 보입니다.
어린 손자를 세자로 앉히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던 세조는 당시 8살이었던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선택합니다.
이로서 인수대비는 왕비가 될 기회도 잃었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들이 왕이 될 기회도 잃어버렸던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게 됩니다.
인수대비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내몰린 냉혹한 현실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인수대비가 세 아이를 데리고 궁궐을 떠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시 왕실의 법도상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은 궁에 기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9살에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21살에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어 궁에서 나가게 됩니다.
9. 세조, 며느리 인수대비와 손자들을 위해 궁 밖에 살 집을 지어주다
궁밖에 남겨진 며느리와 손자를 바라보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시아버지 세조는 며느리 인수대비와 손자를 위해 아주 특별한 것을 준비합니다.
세조는 인수대비와 손자들이 궁밖으로 나가면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 지금의 덕수궁 자리 손수 터를 잡아 그들이 살 집까지 지어줍니다.
인수대비는 시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게 됐지만 궁에서 나온 뒤에도 여전히 최고의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합니다.
10. 인수대비, 자식들의 교육에 특히 신경 쓰다
인수대비가 온 신경을 다 써서 정성을 쏟은 것이 있었으니 자식들의 교육문제였습니다.
인수대비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항상 공부와 책을 가까이하도록 가르쳤으며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덮어주지 않고 곧 얼굴빛을 바로 하고 경계하였으므로 시부모는 농담으로 폭빈(暴嬪)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인수대비는 '엄격한 어머니'임을 나타내는 '폭빈'이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굉장히 엄한 어머니였습니다.
실제로 인수대비도 공부를 잘했었었기도 했으며 그래서인지 교육에 진심인 편이었습니다.
특히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은 인수대비처럼 책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이들은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모두 효심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수대비는 시간이 흘러 세 자녀의 결혼식까지 모두 치러 냅니다.
인수대비는 이렇게 자식들의 교육에 결혼까지 궁을 떠난 뒤에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냅니다.
11. 시아버지 세조가 죽고 인수대비의 시동생 '예종'이 즉위하다
궁 밖 생활에 안정을 찾아갈 무렵 인수대비의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1468년 9월, 갑작스레 시아버지 세조가 병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세조의 위를 이어 인수대비의 시동생 해양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8대 왕 '예종'입니다.
그렇게 한때 세자빈이었던 인수대비는 궁밖에서 시동생이 왕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12. 예종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다
그러부터 1년 후인 1469년 11월, 인수대비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대군을 빨리 궁궐로 모셔 가야 합니다'
갑자기 인수대비의 아들 중 한 명을 궁궐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수대비의 시동새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5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조선 조정은 차기 왕을 정하는 문제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소환된 인물이 인수대비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을산군이 곧바로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곧 조선 제9대 왕 성종입니다.
당시 세자였던 해양대군과 안순왕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그가 겨우 4살에 불과해 너무 어려서 왕이 될 후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수대비의 첫째 아들인 월산대군이 아닌 둘째 자을산군이 왕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세조가 죽고 왕실의 최고 어르신이 된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의 선택이었습니다.
정희왕후가 자을산군을 강력히 지지했는데 이는 자을산군의 아내 공혜왕후가 계유정난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한명회'의 넷째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종과 공혜왕후는 왕이 되기 2년 전에 이미 결혼을 했었고 인수대비와 한명회는 사돈지간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정국은 예종이 세조에 이어 왕이 된 지 15개월 만에 사망해 왕권이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후견인과도 같았던 당대 최대 권력자 한명회라는 배경이 있었던 자을산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데에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3. 아들 '성종'이 왕이 되자 어머니 인수대비 다시 궁궐로 화려하게 복귀하다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의 지목으로 13살에 조선 9대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1469년 33살의 나이로 다시 궁궐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어릴 때부터 효심 깊었던 아들 성종과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시어머니 정희왕후까지 이제 드디어 인수대비의 행복한 궁궐생활이 시작됩니다.
14. 인수대비, 아들 성종의 후사문제로 고민하다
인수대비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며느리 문제였습니다.
왜 인수대비는 며느리 때문에 불안했을까요?
바로 11살에 결혼했던 성종이 17살이 될 때까지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인수대비 아내 공혜왕후는 평소에도 몸이 허약했습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후계자 문제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수대비와 그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성종의 후사를 위해 간택 후궁까지 들이게 됩니다.
그런데도 성종의 후사가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왕실이 안정이 되려면 아들과 며느리가 자식을 낳아야 했던 것입니다.
15. 인수대비, 두 번째 며느리를 찾기 위해 훈육서 '내훈'을 써서 조선왕실 최초의 여성 저술가가 되다
인수대비가 후계자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1474년, 궁궐에 있는 모든 사람이 크게 통곡하며 슬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인수대비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아니었던 공혜왕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인수대비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성종의 후사문제로 슬퍼할 겨를이 없었고 비어 있는 새 며느리 자리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수대비는 자신의 두 번째 며느리를 찾는 과정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인수대비는 자신이 원하는 며느리상을 담은 '내훈(內訓)'을 만들기로 합니다.
'내훈'이란 여성들을 위한 훈육서로 궁궐 내 여성들을 가르치려 인수대비가 지은 책입니다.
그리고 인수대비는 이 내훈을 쓰면서 조선왕실 '최초로' 책을 쓴 여성 저술가가 됩니다.
인수대비는 '내훈'의 서문에 자신이 원하는 며느리 상에 대한 힌트를 적습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 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내훈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효도하지 않으면 가르칠 것이고 가르치지 못할 지경에는 화를 낼 것이고 화내지도 못할 지경에는 매를 쳐야 할 것이고 매를 쳐도 고치지 않으면 내쳐야 할 것이다'
<내훈>
유교적 여성 상에 누구보다 충실하려다 보니 인수대비가 지은 내훈은 지금 시대의 가치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16. 깐깐한 '삼대비'가 '숙의 윤 씨'를 중전으로 선택한 이유는?
인수대비는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며느리 상이 있었던 것인데 이에 합당한 며느리로 간택한 이가 '숙의 윤 씨'였습니다.
중전 숙의 윤 씨에게는 모셔야 하는 시댁 어르신만 무려 세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깐깐한 시어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한 왕실의 '삼대비'가 숙의 윤 씨를 중전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윤 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 만하다'
<성종실록>
정숙하고 근면한 데다 몸가짐은 검소하였기 때문에 대비들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윤 씨가 중전이 된대에는 이것 말고도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숙의 윤 씨가 성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종은 즉위 후 7년 간 자식이 없었는데 성종의 첫 아이 소식이 숙의 윤 씨의 뱃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17. 새 중전 '숙의 윤 씨', 성종의 첫아들을 낳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숙의 윤 씨는 중전이 되었고 그 후 4개월 만인 1476년 11월 7일, 성종의 첫아들을 출산합니다.
성종은 성인이 되어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하였는데 그 시기에 첫 세자까지 탄생한 것이니 왕실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8. 중전 윤 씨, 중전 자리가 불안하여 자작극을 벌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개월 후, 인수대비의 며느리 중전 윤 씨에게 누군가가 깜짝 놀랄만한 말을 합니다.
'내가 당초에 사람을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성종실록>
1477년의 어느 날, 비밀 투서 하나가 날아듭니다.
편지의 내용은 바로 후궁 '소용 정 씨'와 '숙의 엄 씨'가 '중전 윤 씨'와 갓 태어난 원자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인수대비는 누가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질렀는지 당장 법인을 찾아내라 지시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사건을 조사하던 왕실 어르신들은 범인이 밝혀지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투서의 범인은 다름 아닌 '중전 윤 씨'였습니다.
중전 윤 씨가 자신의 중전 자리가 불안한 나머지 자작극을 벌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전 윤 씨가 아이를 출산하는 동안 성종은 다른 후궁들을 많이 아끼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궁 중 한 명이었던 소용 정 씨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중전 윤 씨는 성종이 아꼈던 후궁인 정 씨와 엄 씨를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중전 윤 씨가 준비한 계획이 바로 비밀 투서였던 것입니다.
19. 중전 윤 씨, 독약과 저주까지 하는 등 기행을 벌이다
중전 윤 씨는 후궁들에 대한 질투와 그로 인한 불안감으로 자작극까지 벌이게 되었고 중전 윤 씨의 충격적인 기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무렵 중전 윤 씨의 방에서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아주 충격적인 물건이 발견됩니다.
바로 독약의 일종인 '비상'을 넣은 주머니와 남에게 저주를 행하는 책인 주설서 '방양서'가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중전 윤 씨가 이런 충격적인 기행들을 벌인 이유는 성종의 다른 후궁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커져 가고 있었고 심지어 다른 후궁이 임신까지 하게 되니 혹시라도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인수대비는 중전 윤 씨가 벌인 전대미문의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르고 골라 며느리를 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며느리가 이런 대형 사고를 쳤으니 인수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르신들에게 중전 윤 씨는 눈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20. 정희왕후, 중전 윤 씨가 주최하는 '친잠례' 축하의례를 거절하다
사실 일각에서는 시어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르신들과 며느리였던 중전 윤 씨 사이가 그전에 이미 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중전 윤 씨가 비상과 방양서를 들키기 보름 전에 이미 왕실의 어르신들과 묘한 신경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477년 3월, 중전 윤 씨는 중전으로서 내명부를 이끌고 왕실의 위엄을 보일만한 행사인 '친잠례(親蠶禮)'에 참여하게 됩니다.
친잠례란 조선 시대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친잠례는 가정에서 부녀자들이 직물을 짜는 일을 권장하는 의미에서 중전이 국모의 자격으로 직접 양잠 의례를 거행하는 아주 큰 행사였습니다.
조선 조정의 대신들 역시 중전 윤 씨가 주최한 침잠례가 끝난 후 이를 기념하는 축하의례를 시행할 것을 왕실의 최고 어르신 정희왕후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제안을 정희왕후가 거절합니다.
이러자 결국 성종이 직접 나서 중전의 친잠례는 나라의 경사라면서 신하들에게 정희왕후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종까지 나서고서야 거절했던 대비전에서 그제야 연회를 허락합니다.
21. 중전 윤 씨, 시댁 어르신들에게 예의 없이 굴다
그렇다면 중전 윤 씨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댁 어르신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만일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이 명색이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성종실록>
인수대비는 '내훈'을 지을 정도로 효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어머니인데 자신의 며느리가 이런 태도를 보이자 당연히 인수대비는 며느리에 대해 화가 났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며느리 중전 윤 씨의 고부갈등으로 궁궐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긴장상태가 이어집니다.
22. 성종, 중전 윤 씨를 폐비하다
그런데 1479년, 갑자기 성종이 이런 명을 내립니다.
'윤 씨를 폐서 하겠다'
대체 중전 윤 씨의 폐비에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중전 윤 씨는 자신의 생일에 성종이 다른 후궁의 처소에 간 사실을 알게 되고 후궁의 처소로 쫓아가 그 후궁을 내쫓고 이후 성종과 다툼을 벌이던 중 성종의 용안(임금 얼굴)에 상처를 내버린 것이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중전 윤 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6월 2일, 성종은 신하들에게 중전 윤 씨를 폐비시키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성종의 결정을 들은 인수대비 외 왕실 어르신들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일찍이 화가 주상의 몸에 미칠까 두려웠는데 이제 내 마음이 편안하다'
<성종실록>
인수대비와 왕실 어르신들 또한 성종이 중전을 내쫓는 것을 찬성한 것입니다.
23. 성종, 폐비 윤 씨의 사사를 명하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482년, 성종이 또 다른 명령이 떨어집니다.
'쫓겨난 폐비 윤 씨를 사사하라'
한마디로 폐비 윤 씨를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성종은 폐비 후 3년이 지나 사사를 명령했을까요?
신하들이 폐비 후 3년이 지났지만 폐비 윤 씨에 대한 처우 개선을 계속해서 요청합니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폐비 윤 씨의 아들인 왕세자가 자라고 그 사이 신하들이 이 건의가 그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 폐비 윤 씨가 세자가 왕이 된 후 복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 고민 끝에 성종은 본인 대에 이를 끝맺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폐비 윤 씨의 사사를 결정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1482년 8월 16일, 폐비 윤 씨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동안 인수대비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며느리 윤 씨의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때가 인수대비의 나이 46살의 일입니다.
24. 인수대비, 손자 '연산군'에게 인생 최대의 치욕을 겪은 후 충격으로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인수대비를 괴롭히던 문제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요?
1494년, 인수대비의 아들 '성'종이 38살의 나이로 사망을 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성종의 아들이자 인수대비의 손자인 '연산군'이다음 왕위에 오르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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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즉위하고 10년의 세월이 흘러 인수대비의 나이도 어느덧 68세가 되는 해, 인수대비는 인생 최대의 치욕을 겪게 됩니다.
대체 무슨일이었을까요?
1504년 3월 20일 어두운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누군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인수대비의 처소 앞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합니다.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손자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가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였다며 거칠게 항의한 것입니다.
성종의 후궁들이 폐비 윤씨를 중상모략했고 그 중상모략에 할머니 인수대비가 동조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끝난줄만 알았던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의 악연이 윤씨의 아들 연산군에 의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심지어 야사에서는 이날, 연산군이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이후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하면서 충격을 받아 자리에 누웠다는 야사의 기록 또한 있습니다.
이후 인수대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인수대비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1504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 시동생 예종, 아들 성종 그리고 손자 연산군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25. 인수대비에 대한 후대의 엇갈린 평가
인수대비는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가 된 특이한 케이스로 며느리 폐비 윤씨와의 갈등으로 며느리를 내쫒아낸 험혹한 시어머니로 묘사되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유교 이념 속 여인의 한계를 넘어 '내훈'과 같은 책을 집필하는 등 많은 학식과 교양을 가진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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