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
1. 후고구려 왕 궁예, 왕건에게 나주를 점령하라고 명하다
때는 900년 경으로 한반도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로 쪼개진 후삼국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 나라가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왕건은 궁예아래에서 후고구려의 대표장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903년, 삼국 간의 견제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궁예가 부하장수 왕건을 급하게 불러들여 말합니다.
'나주로 가라'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2) 왕권 강화책부터 폭군이 되어 가는 과정과 죽음까지 (tistory.com)
왕건은 궁예에게 나주 일대를 점령하라는 특별 임무를 받게 됩니다.
지금의 전라도 지역인 광주, 전주, 나주 지역에서는 당시 후백제의 왕 견훤의 세력이 급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고구려왕 궁예는 이 중 나주를 차지해서 견훤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주는 한반도 내에서의 무역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해서 크게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나주만 차지한다면 후고구려로서는 외교적, 경제적 요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왕건, 나주로 가는 서쪽지역 출구인 '정주'지역의 한 여인에게 한눈에 반하다
후삼국의 패권을 쥘 수 있는 주요 지역인 나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왕건이 나주지역을 점령하러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야 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당시 후고구려의 수도였던 송악에서 서쪽 바다로 나주로 가기 위해서는 '정주'라는 지역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습니다.
즉 정주는 서쪽바다로 나가는 출구였던 것입니다.
왕건은 해상전투에 강한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주에 도착합니다.
정주에 도착한 왕건은 나주로 가는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잠시 나무 밑에서 쉬어가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왕건의 인생이 180도 바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나무밑에서 쉬다가 우연히 근처 시냇가를 바라보던 왕건은 그곳에 서 있던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고는 그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다가가 한마디 건넵니다.
'그대는 어느 집 딸이오?'
그러자 여인은 수줍은 듯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고을 장자 집 딸입니다'
여기서 '장자'는 큰 부자이면서 덕망이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 여인의 아버지 '유천궁'은 정주지역의 거부이면서도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장자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왕건이 첫눈에 반한 여인은 정주지역의 유력자였던 유 씨 집안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첫눈에 반한 여인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는지 왕건은 홀린 듯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녀의 아버지 유천궁을 만나게 됩니다.
유천궁은 처음 본 왕건을 아주 반갑게 맞이하고 극진한 대접을 해줍니다.
심지어 왕건뿐 아니라 왕건의 군사들에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마구 제공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날 밤 유 씨의 아버지 유천궁이 은밀하게 왕건을 찾아와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유천궁이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보내 동침할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사실 유천궁에게는 속내가 있었습니다.
유천궁은 후고구려에서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천궁은 자신의 딸과 왕건을 맺어준 다음 왕건을 통해 중앙 정계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침하라는 제안을 받은 왕건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왕건은 유천궁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유 씨 여인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런데 왕건도 이렇게 행동한 속내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왕건 또한 유 씨 집안의 내력을 알고는 나름대로 계산을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건은 서쪽 바다로의 출구 정주 지역을 드나들 때 유력자 유천궁으로부터 무기와 식량 등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왕건 역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도움이 되는 유 씨와 혼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만나 혼인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왕건의 나이가 26살로 혼인에 늦은 나이였던 만큼 왕건에게 소중했을 인연이었기도 했습니다.
왕건은 늦게 사랑을 시작한 만큼 첫눈에 반한 유 씨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3. 왕건, 궁예의 견제로 정주 유 씨 부인과의 혼례를 미루다
그런데 첫사랑인 유 씨와 보낸 단꿈 같은 시간은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왕건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정주에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왕건은 나주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나주로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고 그대로 나주로 떠나버립니다.
왕건이 떠난 후에 유 씨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왕건을 홀로 애타게 기다립니다.
몇 해가 지나도록 아무리 기다려도 왕건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왕건만 기다리다가 점점 혼기가 차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 유천궁의 속 또한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왕건을 기다린 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유 씨는 모두가 놀랄만한 깜짝 놀랄만한 선택을 합니다.
떠난 왕건을 기다리던 유 씨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유 씨는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왕건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계속 왕건을 기다리기 위해서 유 씨가 엄청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건은 사랑하는 유 씨 부인에게 왜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일까요?
왕건은 유 씨에게 전쟁 중이라 연락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궁예는 자신의 부하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보면서 혹시 그들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주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유천궁과 왕건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궁예가 더욱더 심하게 견제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이런 견제상황 속에서 궁예는 905년에는 왕건의 근거지인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궁예는 본인이 호족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워나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건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 왕건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겠다고 의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건은 유 씨와의 혼례를 조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왕건, 나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마침내 미뤄두었던 유 씨 부인과의 혼례를 치르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909년, 나주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접전을 계속해나갔던 나주 뿐 아니라 상주 지역의 정벌을 위해서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 씨가 있던 정주를 떠나 전쟁을 시작하고 무려 6년의 시간이 흐른 후, 후고구려의 장군 왕건은 나주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 결과 나주지역을 완전히 빼앗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임무를 달성하게 된 왕건은 나주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단단히 방어한 뒤, 후고구려의 수도인 철원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철원으로 돌아간 왕건은 자신의 혼인준비에 돌입합니다.
왕건은 전쟁 중에도 자신의 첫사랑 유 씨를 잊지 못하였고 나주를 점령하고 정주를 지나 귀환하면서 유 씨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은 전쟁과 정치적 상황 때문에 유 씨를 데려오는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유 씨가 자신을 기다리며 비구니까지 됐다는 소식에 왕건은 더 이상 유 씨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왕건은 유 씨와 처음 만난 지 6년 만인 909년, 혼례를 치게 됩니다.
5. 왕건, 나주 지역 출신의 오 씨와 두 번째 혼인을 치르다
이렇게 6년 만의 신혼생활을 즐기게 된 왕건과 유 씨는 혼인 후 얼마뒤 왕건이 새로운 식구라면서 어떤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게 됩니다.
대체 누구였을까요?
'오 씨는 나주 사람이다... 태주가 불러 사랑하였다'
<고려사>
왕건이 유 씨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주지역 출신의 오 씨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심지어 왕건은 나주에서 온 오 씨와 정식으로 혼례까지 치릅니다.
도대체 왜 왕건은 자신을 기다려준 첫째 부인을 두고 또 다른 부인을 맞이한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오 씨와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가보겠습니다.
왕건은 나주를 점령한 후 다시 철원에 돌아와서도 자신의 군사들이 있는 나주에 자주 오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에 들른 왕건이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왕건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바로 저 멀리서 오색구름이 자욱한 것을 보고 왕건이 신기해 그곳으로 홀린 듯이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간 우물가에서 선녀같이 아름다운 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이 여인이 바로 오 씨였던 것입니다.
마침 목이 탔던 왕건은 오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마른데 물 한 바가지만 주시겠소!'
그러자 오 씨는 물을 한 바가지 뜨더니 왕건이 깜짝 놀랄 행동을 합니다.
오 씨가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넣어서 왕건에게 건네준 것입니다.
의아해진 왕건은 묻습니다.
'왜 나뭇잎을 띄워서 주셨소?'
라고 묻자 오 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실까 천천히 마시도록 버들잎을 뛰운 것입니다'
왕건은 오 씨 여인의 그 깊은 마음과 지혜로움에 완전히 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됩니다.
그날 밤 왕건은 오 씨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렇게 만난 오 씨를 왕건은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은 것입니다.
왕건과 오 씨 두 사람의 만남은 지금까지 전남 나주 지역에서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에 빠지고 감동받을 수 있다고 해도 왕건은 첫사랑인 유 씨를 두고 어떻게 혼인을 할 수 있었을까요?
왕건이 오 씨와 결혼한 대에는 사랑뿐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도 나주 지역은 후백제 배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가치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왕건의 입장에서는 나주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나주 지역 호족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왕건은 왕을 꿈꾸는 야망 있는 인물이었고 자신의 힘을 키워줄 호족들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오 씨 여인과의 혼인으로 끈끈한 자신의 편을 만드는 일을 통해 나주 호족세력과 결합해서 또다시 자신의 세력을 키운 것입니다.
6. 나주 오 씨 부인, 왕건의 첫째 아들 '왕무'를 낳다
왕건이 첫 번 부인을 두고 두 번 부인을 들인 상황에서 두 부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한 명의 남편을 두고 부인끼리 눈치를 보며 서로 견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를 견제한 것은 부인들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결혼은 집안과 집안간의 결합이었습니다.
정주지역 유 씨의 아버지와 나주 지역 오 씨의 아버지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왕건이 두 명의 부인을 데리고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912년, 왕건의 첫아들이 탄생합니다.
왕건의 첫아들을 낳은 것은 둘째 부인 오 씨였습니다.
오 씨는 첫째 부인 유 씨보다 혼인은 늦었지만 먼저 아들을 낳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출산에는 아주 충격적인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왕건은 사실 오 씨가 아이를 낳는 것을 원치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오씨에게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충격적인 발언까지 합니다.
왕건은 왜 이런 충격적인 발언을 했던 것일까요?
'왕후의 집안이 측미(惻微, 가난하고 출신이 변변치 않다 )하므로 임신시키지 않고자 하였다'
<고려사>
즉 오 씨 집안이 변변치 않아 왕건이 오 씨를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오 씨 부인도 나주 지역의 부유한 토호 세력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둘째 부인인 오 씨보다는 첫째 부인인 유 씨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유 씨의 집안이 세력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왕건이 오 씨의 임신을 막은 것은 부인들의 집안에 세력이나 재산 등 여러 상황을 치밀하게 고려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둘째 부인 오 씨는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이를 갖고 싶었던 오 씨가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낳은 왕건의 첫아들의 이름은 '왕무'였습니다.
왕건 본인의 뜻과는 달리 오 씨가 낳은 아이였지만 왕건은 자신의 맏아들인 왕무를 아끼고 예뻐합니다.
첫아들을 낳고 아버지가 된 왕건은 그의 장수로서의 삶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승승장구해 갑니다.
왕건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든든한 경제력과 군사들을 가진 두 부인들의 집안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왕건은 지금의 국무총리급으로 아주 높은 관직인 '시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왕건이 명실상부한 고구려의 이인자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7. 왕건, 후고구려의 왕 궁예를 치고 새나라 '고려'의 왕이 되다
그러던 중 918년 6월 15일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집니다.
때는 인적이 드문 캄캄한 밤, 왕건의 집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집안에 있던 왕건은 깊은 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대문을 열어보는데 문 앞에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후고구려의 핵심 신료가 서 있었습니다.
신료들은 대뜸 무릎을 꿇더니 왕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를 구하는 혁명의 수장이 되어 주시옵소서!'
당시 후고구려의 왕 궁예는 주변을 의심하는 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궁예는 죄 없는 승려를 때려죽이고 자신의 부인이 바람피우는 것을 관심법으로 봤다면서 그녀의 음부를 쇠방망이로 찔러 죽이는 등 끔찍한 만행을 마구 저지르는 폭군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궁예의 만행을 견디다 못한 신료들이 뛰어난 능력과 포용력까지 갖춘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포악해도 충심을 가져야 할 신하가 군주를 칠 수는 없소!'
왕건의 신료들의 요에 정색하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때 예상밖의 인물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왕건 앞에 등장합니다.
'이 갑옷을 입고 백성들의 여명을 풀어주는 혁명의 수장이 되십시오!'
왕건의 첫째 부인 유 씨가 왕건을 설득하려 나선 것입니다.
유 씨는 고민하고 있는 왕건에게 갑옷까지 입혀 줍니다.
그리고 신료들의 말대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확신에 찬 부인 유 씨의 표정을 보고 왕건은 드디어 결정을 내립니다.
'그대들의 뜻대로 새로운 왕이 되겠소!'
신료들의 설득에는 절대로 거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했던 왕건은 첫째 유 씨의 설득으로 마음을 굳힌 것입니다.
마침내 왕건은 부하들을 이끌고 궁궐로 향하는데 이때 왕건을 지지해 따른 백성들이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지지 아래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왕건은 하루아침에 왕으로 즉위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첫째 부인 유 씨는 '신혜왕후', 둘째 부인 오 씨는 '장화왕후'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고려의 시작에 왕건의 두 부인들도 함께 하게 됩니다.
8. 왕건, 고려 건국 초기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충성할 부하가 절실히 필요하다
왕건이 즉위하고 불과 4일째 되는 날, 왕건은 궁궐에서 조정 신료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건이 한창 신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조정 신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환선길이 부하 50여 인과 함께 무장하고는... 곧장 태조를 해치려 하였다'
<고려사>
환선길은 궁궐 수비를 담당하던 고려 장수였습니다.
태조 왕건의 호위를 담당하던 환설길이 자신의 부하 50여 명을 무장시키고는 태조 왕건을 죽이겠다면서 습격한 것입니다.
심지어 왕건은 무방비상태였고 환선길은 왕건에게 칼을 겨누면서 위협적으로 다가갑니다.
과연 왕건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때 왕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너무나 태연하게 환선길을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환선길과 수십여 명의 암살자들에게 크게 호통을 칩니다.
'짐이 비록 신하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환선길은 왕건이 절체정명의 순간에도 당당하니까 순식간에 당황하며 생각합니다.
'혹시 매복한 군사들이 숨어 있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자 깜짝 놀란 환선길은 부하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도망가 버립니다.
왕건은 매복한 군사 없이 침착하게 기세만으로 위기상황에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도망쳤던 환선길은 얼마 후 왕건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붙잡혀 처형됩니다.
고려건국 초기 궁궐의 안전을 담당하는 장군까지 반란을 일으켰을 만큼 당시 왕건의 왕권은 불안정하고 약한 상태였습니다.
왕건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충성할 이들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9. 왕건, 왕권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새 부인을 들이기로 하다
이에 왕건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특단의 대책을 내놓습니다.
왕건은 기존 제1 비 신혜왕후, 제2 비 장화왕후에 이어 제3 비 신명순성왕태후, 제4 비 신정왕태후 이렇데 두 명의 부인과 새로 혼인을 하며 총 네 명의 부인을 두게 됩니다.
그런데 왕건은 왜 또다시 부인들을 맞이한 걸까요?
왕건의 새로운 부인들 역시 지방 유력 호족의 딸이었습니다.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한 배를 탄다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왕건이 지방 호족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정략혼인'이었던 것입니다.
제3비인 신명순성왕태후는 어떤 집안의 딸이었을까요?
신명순성왕태후의 출신 지역을 보면 이 결혼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충주' 지역 출신의 호족의 딸이었습니다.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로 이어지는 교통상의 요충지였습니다.
게다가 충주는 남한강을 끼고 있어서 수로를 이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충주는 철이 생산되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철은 전쟁과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나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료였기 때문에 고려에게는 정말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대단한 지역의 딸이 바로 '신명순성왕태후'였습니다.
그녀와 혼인한 이후 그녀는 이런 이유들로 왕건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제4 비 신정왕태후는 어땠을까요?
'신정왕태후'는 황해도에 있는 '황주' 지역 호족의 딸이었습니다.
황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북쪽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를 상주시켰던 아주 중요한 지역입니다.
게다가 수도 개경과 가까워 왕건이 고려 남쪽에 있는 후백제와 맞서 싸울 때 황주지역이 만일 후백제와 손을 잡거나 반란을 일으킨다면 개경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에게는 황주 호족의 딸인 신정왕태후와의 혼인 또한 꼭 필요했습니다.
왕건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중요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의 호족집안의 딸과는 반드시 결혼하는 정략결혼의 방식을 채택합니다.
10. 왕건, 고려 최초의 후계자 정윤 선택에 기로에서 서다
왕건의 두 명의 부인을 연달아 들인 시기 즈음에 또다시 왕건의 가족관계가 바뀌는 일이 발생합니다.
왕건은 제5 비 '정덕왕후'를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정덕왕후는 특이하게도 왕건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 들인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정덕왕후는 놀랍게도 첫째 부인인 신혜왕후와 같은 정주 유 씨 집안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신혜왕후가 있음에도 같은 집안의 부인을 들인 걸까요?
왕건과 신혜왕후가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둘 사이에 자식소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정주 유 씨 집안은 정덕왕후를 뽑아서 왕건의 부인으로 들이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게다가 신혜왕후 집안에서 정덕왕후를 들이면서까지 후사 문제를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왕건이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로 이미 40대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왕건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해야 할 시기가 임박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고려 최초의 후계자 문제로 고심에 빠지게 됩니다.
고려 초기에는 왕위 계승권자를 '바를 정', '혈통 윤'을 써서 '정윤'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두가 주목하는 이 자리 '정윤(正胤)'은 조선시대의 세자와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왕실에서는 누가 정윤의 자리를 차지하는지가 초유의 관심사였습니다.
현재까지 왕건의 유일한 자식은 둘째 부인 장화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무'가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때문에 정주, 충주, 황주 등 다른 호족 집안들이 나주 오 씨 장화왕후를 견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그래서 선뜻 왕무를 정윤으로 선택하기 조심스러웠습니다.
11. 왕건, 최측근 박술희를 앞세워 정윤을 맏아들 '왕무'로 결정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려 왕실의 후계 구도에 판도를 바꿀일이 벌어집니다.
왕실 내 부인들이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됩니다.
'신명왕태후 유 씨는 태자 왕태를... 낳았다'
<고려사>
신명왕태후는 왕건의 제3 비였던 신명순성왕태후를 말합니다.
신명순성왕태후가 다른 부인들을 제치고 둘째 아들 '왕태' 출산한 것입니다.
신명순성왕태후는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는 충주출신의 아내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상대적으로 집안의 힘이 약했던 장화왕후를 밀어내고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이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맏아들 왕무와 둘째 아들 왕태의 이파전이 계속되던 어느 날, 호족과 신료들의 눈치를 살피던 왕건은 신료들과 정윤의 자리를 놓고 열띤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인 첫째 왕무가 적합합니다'
'아닙니다. 가문이 출중한 둘째 왕태가 되어야 합니다'
신료들이 나뉘어 치열하게 논의를 하던 바로 그때, 고려에서 용맹하기로 이름난 장군 '박술희'가 왕건의 앞으로 나옵니다.
박술희는 당시 고려에서 관료가 받을 수 있는 최고 품계인 '대광'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자 왕건이 깊게 신뢰하는 최측근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박술희는 누군가를 정윤으로 정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선 박술희가 말합니다.
'이제는 폐하께서 두 분 태자마마 중에서 정윤을 정하셔야 하옵니다. 맏아들인 왕무를 정윤으로 삼으시옵소서!'
신료들은 왕무를 향한 박술희의 갑작스러운 지지에 깜짝 놀랍니다.
그렇다면 박술희는 왜 갑자기 왕무를 뜬금없이 지지하고 나선 것일까요?
정윤의 자리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둘째 분인 장화왕후가 비밀스럽게 박술희 부릅니다.
장화왕후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무언가를 건네며 말합니다.
'폐하께서 제게 이걸 직접 주셨습니다'
장화왕후가 건넨 물건을 보고 박술희는 화들짝 놀랍니다.
왕건이 선물한 물건의 정체는 고려 초기 왕실에서 임금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던 '자황포(柘黃袍)'였습니다.
왕건이 왕만이 입을 수 있는 자황포를 장화왕후에게 선물한 것은 장화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 왕무를 후계자로 밀어주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박술희는 그런 왕건의 속내를 바로 이해하고 조정에서 왕건의 마음을 대변해서 왕무를 지지하는 의견을 냈던 것입니다.
만약 왕건이 대놓고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하겠다고 했다면 나주 호족 집안의 왕무를 편애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분란이 날 것이 뻔했습니다.
이에 왕건은 그런 오해를 피하고자 박술희를 앞세워서 정윤의 책봉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왕건은 맏아들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한 이후에 드디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생겼다는 생각에 든든해졌을 것입니다.
12. 왕건, 29명의 부인을 들이면서 계속해서 호족을 포섭해 나가다
왕건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며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신혜왕후부터 마지막 부인까지 무려 29명에 이르도록 늘어나는 부인들만큼 계속해서 호족을 포섭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왕건에게는 총 29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신혜왕후가 장화왕후를 제외하고는 혼인의 순서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왕건과 후대 왕들의 부인수는 얼마나 차이가 난 걸까요?
왕건을 제외하고 역대 고려 왕들의 평균 부인 수는 3.2명이었으니 왕건의 부인수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왕건이 혼맥을 넓혀가던 중 너무나도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왕건이 지금의 평양인 서경으로 행차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서경에 도착한 왕건에게 누군가 쫓아옵니다.
그는 왕건의 서경 행차 소식을 알게 된 김 씨 성을 가진 호족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김 씨 호족은 왕건을 급하게 쫓아온 것일까요?
그는 왕건을 향해서 간절히 말합니다.
'폐하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김 씨는 왕건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러 줄 것을 청한 것입니다.
왕건은 김 씨의 간절한 청에 그의 집에서 이틀을 머물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김 씨는 왕건이 소스라치게 놀랄 일을 벌입니다.
'태조가 이틀 밤을 머무는 동안 두 딸을 각각 하룻밤씩 모시게 하였다'
<고려사>
충격적 이게도 김 씨 호족이 자신의 두 딸에게 각각 하루씩 왕건을 모시며 동침토록 했던 것입니다.
자매가 함께 왕건을 남편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자매가 바로 왕건의 29명의 부인 중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매는 왕건과 함께 궁궐로 가게 될까요?
왕건은 혼례를 치른 부인들을 모두 궁궐로 데려갈 수는 없었기에 자매를 부인으로 삼아 혼례까지 치르지만 서경에서 계속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왕건이 수도로 돌아가고 얼마 후, 서경에 머물고 있었던 자매가 함께 뜻밖의 돌발행동을 합니다.
'두 딸은 모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고려사>
자매의 아버지 김 씨 호족은 두 딸이 비구니가 되어 왕건에 대한 마음을 지킨다면 신혜왕후 때처럼 감동한 왕건이 자매를 궁궐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매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소식이 왕건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 왕건은 자매를 궁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이때 왕건은 자매에게 예상밖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대들이 이미 출가했으니 그 뜻을 뺏을 수 없네. 부인들이 지낼 절을 짓도록 하라!'
왕건은 자매를 이렇게 돌려보낸 후 서경에 대서원, 소서원이라는 절을 짓게 합니다.
그리고 자매는 절의 이름을 따라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혼인정책의 성공으로 왕건은 평생 동안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얻습니다.
이처럼 왕건이 적극적으로 펼친 혼인 정책의 성공으로 즉위 초 불안정했던 고려 내부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13. 왕건, 견훤의 후백제와의 '공산전투'에서 대패하다
그런데 927년 10월, 고려 전체가 경악에 빠지는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후백제의 왕 견훤이 기습적으로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한 것입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견훤3
경주를 점령한 견훤은 신라의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직접 새로운 허수아비왕을 세워 신라왕실을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이런 판세라면 후백제가 먼저 삼국통일을 이룰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왕건은 견훤의 기세를 어떻게든 꺾어야만 했습니다.
왕건은 견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판을 뒤엎을 전략을 세웁니다.
'태조는 정예의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아래에서 기다렸다'
<삼국사기>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혼란에 빠뜨린 뒤 지금의 대구 팔공산을 거쳐 다시 후백제로 돌아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왕건은 견훤이 돌아가는 길에 들르는 팔공산에서 기습을 하기 위한 매복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견훤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공산에서 왕건의 고려군이 돌아가는 견훤의 후백제군에 기습공격합니다.
전투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공산전투 결과 후백제군에 맞선 고려군이 전멸하고 맙니다.
왕건은 견훤에게 완벽한 대패를 한 것입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은 충신들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가까스로 고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견훤에게 비참하게 패배한 후 왕건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립니다.
심지어 기세가 한껏 오른 견훤에게 나주땅까지 다시 빼앗기고 맙니다.
14. 왕건, 견훤의 고려 귀부 결정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왕건은 이렇게 삼국통일의 판세가 완전히 견훤에게 기우는 것인가 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건의 입장이 180도 바뀔 엄청난 사건이 다시 벌어집니다.
어느 날, 왕건에게 누군가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정체는 바로 견훤이었습니다.
935년 왕건의 최대라이벌 견훤이 고려로 귀부 하고 싶다는 파격적인 요청을 해온 것입니다.
견훤이 후계자로 넷째 아들 금강을 지목하자 큰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폐위시키고 그를 유폐까지 한 것입니다.
견훤은 그렇게 한순간에 후백제에서 모든 실권을 잃고 간신히 도망쳐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상보(尙父, 견훤을 높여 부른 호칭)! 잘 오셨습니다!'
왕건은 고려로 귀부해 온 견훤을 궁에서 극진히 모십니다.
15. 왕건, 견훤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해 견훤 집안사람과 혼인을 결심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견훤이 마음을 바꿔 왕건을 배신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견훤을 완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계책을 세웁니다.
왕건이 견훤의 집안사람과 혼인을 결심한 것입니다.
왕건은 견훤의 외손녀인 '동산원부인'과 정략혼인을 하게 됩니다.
왕건이 견훤의 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두 왕실이 한 가족으로 단단히 묶이게 된 것입니다.
왕건의 혼인 정책으로 후백제인을 차별하지 않고 환대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16. 935년, 신라가 고려에 투항하다
그러던 935년 견훤이 투항하고 6개월 뒤, 왕건에게 믿기지 않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신라의 왕이 왕건에게 통째로 신라를 바치면서 고려에 투항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어 멸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7. 왕건, 멸망한 신라와 후백제의 백성을 분란 없이 흡수하기 위해 각 나라 왕실과 사돈을 맺다
그렇게 신라가 멸망하고 얼마 후, 고려 조정이 한바탕 시끌벅적해집니다.
왕건이 새로운 부인과 또 한 번의 혼례를 올린 것입니다.
왕건의 이번 혼례상대는 신성왕태후 김 씨로 신라 경순왕의 사촌이었습니다.
29번의 혼인 중에서도 신라왕실과의 혼인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의 사촌과 결혼함으로써 신라 왕실에 혼맥이 생겨 신라인들의 반감을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혼인정책을 통해서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계승함을 보여주어 신라 왕실과 백성 모두를 포섭합니다.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의 백성을 분란 없이 흡수하기 위해서 왕건이 각 나라의 왕실과 사돈을 맺었던 것으로 이는 훗날 삼국통일을 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18. 936년, 후백제가 투항하면서 즉위 18년 만에 삼국통일을 이뤄내다
936년, 신라가 고려에 흡수된 지 불과 1년 뒤, 견훤을 배신한 큰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가 마침내 백기를 들고 왕건의 고려에게 투항합니다.
왕건이 드디어 즉위 18년 만에 간절히 꿈꾸던 삼국통일을 이뤄냅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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