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면 변방의 무사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위화도회군)
1. 이성계가 태어난 곳은?
이성계는 고려인이었지만 놀랍게도 고려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1335년, 원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성계의 고향은 왜 원나라였을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고려의 상황과 이성계 가문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성계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인 1231년, 고려는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골에 결사항전했지만 몽골 제국에 차례로 영토를 빼앗기게 됩니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당시 고려가 몽골 제국에 빼앗긴 땅입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가족이 살 던 곳은 몽골에 빼앗겼던 붉은색 지역 오늘날의 함경남도 영흥인 '동북면'이었던 것이고 이곳은 훗날 이성계의 출생지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주 이 씨 가문 출신이었던 이성계 집안이 왜 북쪽으로 간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4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합니다.
이성계의 4대 조가 '이안사'라는 사람인데 그는 당시 전주의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이안사는 당시 전주 지방 관리와 큰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전주 지방 관리가 조정에 까지 이 사실을 보고를 하려고 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전주에 머물 수가 없었고 이에 이안사는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전주 지방 관리가 다시 강원도 지역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가족들을 이끌고 북쪽인 동북면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고려는 동북면을 몽골제국에 빼앗기게 되고 1271년, 몽골 제국이 원나라로 개명을 하면서 이안사는 원나라의 관리가 된 것입니다.
이성계의 4대 조인 이안사 일가는 오늘날로 치면 해외 망명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국적도 자연스럽게 고려에서 원나라로 바뀌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W4KDGdJLx4
2. 이성계, 고려 공민왕의 동북면 탈환하며 다시 고려인이 되다
그러던 1356년,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에 백성으로 살아가던 이성계 집안이 다시 고향인 고려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고려가 몽골 제국에 빼앗긴 동북면을 되찾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당시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재위 기간: 1351년 10월 6일~1374년 9월 22일)은 원나라의 내정 간섭과 수탈에 대항하여 강력한 반원 자주정책을 전개합니다.
공민왕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고려를 외세에 꿇리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로 만들고 싶어 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했었던 일 중에 하나가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동북면을 되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나라는 당시 동북면을 관리하기 위해서 '쌍성총관부'라는 기관을 두었습니다.
쌍성총관부란 1258년 원나라가 빼앗은 고려 땅인 통북면에 설치한 통치기구입니다.
1356년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합니다.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의 이 계획에 힘을 보태줍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쌍성총관부를 공격했고 100여 년 만에 끝내 동북면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성계 일가도 다시 고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자춘은 공을 인정받고 고려의 관리가 되어서 동북면을 지키게 됩니다.
3. 이성계의 강철 사병 부대 '가별초'
이자춘 옆에는 장성한 아들 청년 '이성계'가 있었고 21세의 청년 이성계는 동북면 탈환에 아버지와 함께 하며 공을 세웁니다.
이로서 무장 이성계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를 도와준 특별한 존재가 있었으니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강철부대 '가별초'였습니다.
'가별초'는 이성계 집안 대대로 이어온 사병 집단으로 전투력, 병력, 충성심까지 당대 최강의 사병 부대였습니다.
당시 가별초 병사는 무려 1천~3천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다른 부대와 가별초는 어떤 다른 점이 있었던 걸까요?
첫 번째 특징은 말타기에 익숙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기마부대'였습니다.
전쟁에서 막강한 위력을 내는 기마부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강의 기마병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동북면 지역 이성계의 가별초는 평상시에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사냥을 일삼다 보니 산악지형에서 하는 전투에서 굉장히 유리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가별초는 돌격하기 직전에 거대한 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인 '대라'를 불었습니다.
대라 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 소리만으로도 적군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등장만으로도 적을 벌벌 떨게 만든 이성계와 가별초는 고려시대 강철부대였던 것입니다.
4. 이성계, 홍건적을 물리치며 고려로부터 공식 공신 훈장을 받다
그러던 어느 날 가별초와 함께 동북면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던 이성계의 앞에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이었습니다.
홍건적의 난은 14세기 원나라 말기 정치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반원 운동입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홍건적이 오히려 원나라에게 밀리고 밀리고 밀리다가 압록강이 언 틈을 타서 1359년 고려를 침공하게 되었고 그들의 약탈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에서 1361년 11월, 홍건적에 의해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20만 홍건적에 의해서 함락당한 것입니다.
결국 공민왕은 성을 버리고 개경을 떠나 안동으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홍건적은 도망치지 못한 힘없는 고려 백성들을 잡아들여 마구 죽입니다.
당시 끔찍했던 상황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날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고려사절요 33>
이렇게 고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그 순간 나타난 영웅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의 가별초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대라 소라가 울립니다.
이성계는 2천여 명의 가별초를 이끌고 개경에 진입해서 홍건적 총사령관을 목을 칩니다.
이성계와 가별초의 활약으로 지옥으로 변했던 개경을 홍건적이 침입한 지 3개월 만에 빼앗긴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개경을 되찾는 공을 세운 이성계는 '경성 수복 1등 공신'이라는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홍건적 토벌을 통해 공신 훈장을 받은 것은 동북면 출신들이 고려로부터 인정받게 됐다는 것을 공식 확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에 동북면 출신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홍건적 토벌은 이성계의 인생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성계는 홍건적 토벌로 고려 사회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며 이제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꿈꿉니다.
5. 고려 후기 부패의 온상 권문세족(權門勢族), 이성계의 고려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가로막다
이때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꿈꾸던 이성계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정치 세력이자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권문세족(權門勢族)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당시 고려의 최상위 계층이었습니다.
권문세족을 비롯한 고려의 기득권 층들이 이성계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인데 자신들이 누리던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를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에게 나눠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성계가 오랫동안 원나라 땅이었던 동북면 출신이라는 점과 이성계 집안이 원나라의 관리로 일했던 과거사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권문세족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을 수탈하면서 고려 말에는 그들의 횡포가 극에 달합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땅을 강탈하고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좋은 땅을 보면 땅 주인을 때려서라도 땅을 빼앗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권문세족의 횡포 때문에 나라가 부패하고 망국의 기운이 보이니 고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하기까지 합니다.
국지불국(國之不國) 즉 '나라이되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로 요즘 말로 하면 '이게 나라냐!'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6. 이성계, 고려의 개혁을 꿈꾼 신진사대부 정몽주와 만나다
권문세족의 수탈에 백성의 시름은 깊어 가고 피폐한 고려 말 막막해진 백성들 앞에 개혁을 바라는 세력들이 나타납니다.
권문세족이 원나라의 힘을 업고 횡포를 부릴 때 공민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힘을 키워 나갔던 신흥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권문세족과 떼려야 뗼 수 없는 세력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들로 권문세족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한 정치 세력입니다.
신진사대부의 중심에는 누구보다 고려의 개혁을 바라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몽주(1337~1392)입니다.
당시 정몽주가 참모로 있던 고려군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달아 패배하고 있는 고려군을 구하기 위해서 1천 명의 가별초를 끌고 이성계가 등장하여 여진족을 무찔러 줍니다.
여진족을 물리친 이성계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정몽주는 시를 짓습니다.
'풍모가 호걸 같으니 꽃동산의 송골매로구나. 지략이 깊고 웅대하니 남양의 용이로다. 서책에서 옛사람의 행적을 찾아봐도 그대와 같은 이는 드물구나'
<포은집>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의 전투에 종종 참모로 종군했고 이성계에게 학자들을 소개해주면서 활발히 교류합니다.
이성계도 신진사대부의 여러 학자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신진사대부 정몽주와 신흥 무신 이성계의 만남은 앞으로 개혁을 향한 불길을 만드는 심지가 됩니다.
7. 개혁을 꿈꾼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권문세족의 일인자 '이인임'의 횡포가 극에 달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원나라 다음에 명나라로 교체되는 '원명교체기'였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이때야 말로 권문세족도 청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민왕과 신진사대부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374년 9월, 개혁의 주체였던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공민왕의 어린 아들 10살의 '우왕'이 즉위하고 그 옆에는 권문세족의 실세였던 이인임(1312~1388)과 최영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인임은 우왕 옆에서 신진사대부를 탄압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는데 그 부정부패의 심각한 내용이 담긴 기록이 있습니다.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자는 어진 인재가 되고 절조와 염치를 갖춘 사람은 불초한 자가 되었으며 그가 한 번 웃으면 공신이 탄생하고 그가 한 번 찡그리면 사람이 처형당했습니다'
<고려사 권 126 간신 열전 권제 39. 이인임>
8. 왜구의 끔찍한 만행으로 고려 백성들 고통을 받다
당시 고려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권문세족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려를 가장 많이 그리고 집요하게 괴롭혔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왜구'였습니다.
위 그림의 빨간 점은 고려 말 왜구가 침입한 지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려말 169년 동안 역사상 기록된 왜구의 침입 횟수는 무려 520여 회가 넘습니다.
꾸준히 침략하던 왜구가 1380년에 무려 500척의 배로 고려를 침략합니다.
왜구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들쑤시면서 약탈하거나 마을에 방화를 일삼습니다.
그 과정에서 왜구는 포로로 잡은 아이들을 죽였는데 그 시체가 산을 이뤘다고 할 정도로 왜구가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됩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왜구를 피해 강에 몸을 던진 세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쟁에 나간 장군의 집에 있는 아내와 딸을 죽이는 왜구에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도둑들이 두세 살 된 계집아이를 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가르고 난 뒤에 깨끗이 씻어서 쌀과 술을 함께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왜구들은 어린아이를 잡아 죽여 제사의 제물로 쓰는 끔찍한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9. 이성계가 고려의 명장으로 발돋움했던 '황산전투'
고려군은 왜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동북면을 다스리고 있던 이성계를 부릅니다.
이성계가 고려의 충신, 국가적 영웅으로 발돋움한 전투인 '황산전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산전투는 고려 우왕 6년, 1380년 이성계가 지리산 '황산'에서 벌인 왜구와의 전투입니다.
황산전투는 고려 역사상 왜구와 벌인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습니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와 가별초는 산봉우리에 올라서 왜구의 동태를 살핀 후에 필승 전법을 세웁니다.
이성계는 적에게 50여 개의 화살을 쏴서 모듀 명중시켰다고 알려졌을 만큼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자랑했습니다.
'이성계가 쏘아 죽인 대다수가 왼쪽 눈에 활을 맞고 죽었다'
실제로 태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궁과 관련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1377년, 서해 해주전투를 치를 때에 17발의 화살을 쏜 이성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들의 왼쪽 눈을 맞히겠다'
전투가 모두 끝난 후에 살펴보니 실제로 왜구의 왼쪽 눈에 17발의 화살이 모두 명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이성계의 활약으로 고려군의 기세가 살아나게 됩니다.
두 번째 필승 전법은 적의 매복과 방어가 예상되는 지점을 크게 돌아가지고 왜구의 방어력을 분산시켜 빈틈을 노리는 전략을 취합니다.
마치 초원지대의 유목민이 몰이사냥을 하듯 원하는 곳에 왜구를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성계와 가별초가 적군 대장을 물리치면서 왜구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됩니다.
고려군사보다 10배는 많았던 왜구는 이성계의 필승전법으로 겨우 70여 명밖에 생존하지 못합니다.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만 마리 소의 울음소리와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 피바위가 바로 이성계가 왜구를 대량 학살했던 황산대첩의 흔적입니다.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붉게 물든 남원 바위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바위는 일반 바위보다 철분이 9%가량이 많은 피바위입니다.
오랜 시간 물과 닿다 보니 철분이 물에 산화되어서 붉은빛이 돌면 나타나는 자연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현장으로 여전히 '왜구의 피 때문에 붉다'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음을 의미하는 이야기입니다.
황산전투의 승리로 이성계는 동북면의 명장이 아니라 백전무패의 명장이자 고려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0. 이성계, 정도전을 만난 이후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을 꿈꾸다
한 남자가 여진족과 전투 중이던 이성계를 찾아옵니다.
고려의 개혁을 바라던 신진사대부의 두 번째 핵심 인물 바로 '정도전(1342-1398)'입니다.
정도전은 유배 생활 중에 전국을 배회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며 고려의 한계를 느꼈고 고려 개혁을 넘어 '새로운 나라'를 꿈꿉니다.
그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친구 사이였고 정도전의 오랜 벗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묻습니다.
'자네 답답하지? 이 사람 한번 만나 보겠나?'
'누군가?'
'이성계!'
정몽주의 소개로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러 함흥으로 가게 됩니다.
함흥에 도착한 정도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오합지졸 고려 군대만 보다가 가별초를 보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게다가 가별초를 지휘하는 이성계의 지휘력과 통솔력을 보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담아 이성계에게 한마디 건넵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정도전의 말에 숨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군대로 혁명을 일으켜서 고려를 다시 살려 보겠다는 의미를 넘어 새로운 세상 즉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꿈꿔 보자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을 만난 이후에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쟁터를 누비던 무사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만나 정치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11.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이인임을 처형을 원했지만 최영의 만류로 무산되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고려의 청사진을 그려가던 중 부패의 온상인 권문세족의 몸통을 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고려 최대의 정치 스캔들, 그 사건의 중심에는 권문세족 일인자 이인임이 있었습니다.
이인임의 최측근이었던 '염흥방'이 사고를 친 것인데 염흥방의 노비가 고위관료였던 '조반'이라는 사람의 땅을 빼앗고 매질까지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조반은 영흥방의 노비를 죽이고 관청에 자수하면서 권문세족의 횡포를 고발합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를 더는 봐줄 수가 없다고 생각한 우왕은 염흥방과 그 가족들을 참수하라고 명합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권문세족의 재산은 몰수하고 권문세족의 처와 자식, 친인척 및 그의 노비까지 모두 사로잡아 죽였는데 그 수가 대략 1,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염흥방뿐만 아니라 이인임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당시 실세였던 최영이 이인임을 죽이는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라며 만류합니다.
최영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인임은 고향으로 가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최영을 비난했습니다.
'강직하고 정직한 최영이 결국 늙은 도적을 살려줬다'
이인임과 최영이 당시 일인자의 권문세족이었고 그들은 한때 연합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최영은 오랫동안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권력의 한복판에 있었다 보니 권문세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최영이 이인임을 살려준 것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영은 그 인물됨에 있어서 후세에 그 강직함이 널리 알려져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라는 책을 보면 고려 시대에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을 열전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영은 이성계의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일반 열전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12. 우왕과 최영, 명나라에 대항하여 '요동 정벌'의 의지를 보이다
이인임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혼란한 고려 상황에 더 큰 혼란을 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제까지는 원나라 때문에 매우 큰 혼란 겪었었는데 이제는 원나라에 이어 중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명나라가 고려에 어처구니없는 통보를 한 것입니다.
1380년대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한 명나라는 요동을 차지하고 고려와 국경을 맞대게 되니 예전에 원나라가 가지고 있었던 땅인 청령이북지역을 다시 내놓으라고 고려에 요구합니다.
고려는 공민왕 때 가까스로 되찾은 땅을 쉽게 돌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이 기회에 명나라의 야심도 꺾고 고구려의 옛 영토까지 되찾자면서 요동, 만주지역까지도 가져오겠다며 '요동 정벌'을 주장하게 됩니다.
여전히 원과 명은 전쟁 중이었고 두 나라가 전쟁 중일 때가 기회이니 명나라를 공격하자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정몽주였습니다.
정몽주는 친명 파였기도 했거니와 명나라 세력이 커지고 있으니 군사적으로 해결하면 안 되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왕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대신을 죽이기까지 하며 그 의지가 확실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를 부릅니다.
13. 이성계,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요동정벌에 반대하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이성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이성계는 사불가론(네 가지 안 되는 이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첫째, 작은 나라 고려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
셋째, 군대가 북쪽으로 가면 남쪽의 왜구가 공격할 수 있어 불가하다.
넷째, 곧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서 활이 약해지고, 군산들이 전염병을 앓게 될 확률이 높으니 불가하다.
우왕도 반박할 수 없었던 이유들이었기 때문에 이에 수긍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우왕은 하루아침에 의견을 바꿔서 요동 정벌을 명령합니다.
우왕의 생각이 하룻밤 사이에 뒤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불가론을 이야기한 그날 밤, 최영은 우왕은 찾아가 말합니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하건대 다른 말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우왕이 이성계를 불러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요동 정벌)을 중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 33>
이에 이성계도 물러서지 않고 여름이 아닌 가을에 출병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이때 우왕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우왕은 전에 요동 정벌 반대파를 죽이기까지 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반대할 거라면 이성계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전합니다.
이성계는 답답하고 참담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본 부하가 깜짝 놀라 왜 우느냐는 물으니 이성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들의 재앙과 근심이 이제 시작되는구나...'
이성계는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왕명을 거스를 수 없어 음력 1388년 5월, 요동정벌을 위해 출전합니다.
북쪽을 향하여 진군한 이성계는 결국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합니다.
14. 이성계,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9exZKFluBM
위화도는 압록강 중간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지리적으로 강을 넘어서면 요동 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계 앞에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여름철이라 장마 때문에 강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마에 불어난 물에 빠져서 죽은 병사만 수백 명에 달했습니다.
군량은 장맛비에 상해서 썩어가고 비에 젖은 갑옷은 무거워서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결국 도망가는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가족 같은 군사들을 잃고 위화도에서 고뇌에 빠집니다.
결국 이성계는 최영에게 군사들의 상황을 알리고 다시 '사불가론'을 내세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이성계에게 편지를 받은 최영은 오히려 재물을 보내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힘내서 나가 싸우라고 독려합니다.
최영은 요동까지만 가면 이길 것이라고 상했던 것입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은 보름 가까이 지나고 이성계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외화도에 계속 있자니 병력 손실이 클 것이고 고려로 다시 돌아가자니 왕명을 거역한 역적으로 몰려 가족까지 죽게 될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때 위화도에서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동북면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성계가 떠날까 군사들은 불안에 떨고 이때 함께 정벌을 떠났던 지휘관이 울면서 이성계를 찾아와 말합니다.
'(장수) 조민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가시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이성계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
<고려사절요 권 33>
이성계는 긴 고민 끝에 본인의 결정 때문에 가족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요동 정벌은 하지 않겠다고 결정합니다.
이때 이성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살피지 않고 최영도 늙어 혼란한지 듣지 않았다. 우리 함께 왕을 찾아가 화가 되고 복이 되는 일이 뭔지를 말해서 임금 측근인 악인을 제거해 백성을 편안케 하지 않겠나'
이성계의 회군 결정에 다른 동료 지휘관들도 동의합니다.
결국 요동정벌을 떠났던 군사들은 음력 1388년 5월 22일,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고 개경으로 향합니다.
'개경으로 회군한다. 모두 나를 따르라!'
이성계의 회군 소식은 이틀 뒤 고려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고려에 돌아온 고려의 반역자 이성계가 개경에 도착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예상과는 달리 소규모의 전투로 아주 쉽게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돌아온 이성계에게 도성의 백성들이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 이성계가 숭인문으로 들어가서 좌군과 나아가니,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 33>
15. 이성계, 최영을 처형하고 고려의 군사권을 완벽히 장악하다
이성계의 군대가 당당하게 성문을 돌파하고 들어오니 우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숨게 되지만 바로 붙잡히게 됩니다.
극적으로 고려 말 난세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최영과 이성계가 서로 적이 되어 만납니다.
이성계와 최영은 고려의 최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였기에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때 이성계가 최영에게 남긴 한마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려는 일은 대의를 거스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고되게 하여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이성계는 오랜 동료 최영을 떠나보내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향년 73세의 나이에 유배지에서 처형이 된 최영은 담담하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평생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탐욕이 없었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최영의 무덤은 지금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산 중턱에 자리를 지키고 남아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고 벌거숭이였고 붉은 흙으로 덮여 있어서 '적분(赤墳)'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변방의 무사로 20여 년 간 고려만을 위해 싸웠던 충신이었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군사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게 됩니다.
※ 참고: 위화도 회군에 얽힌 두 가지 가설
고려의 운명을 뒤바꾼 위화도 회군을 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설은 요동정벌이 이성계를 죽이기 위한 최영의 함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최영의 함정이라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연려실기술 기록에 따르면 최영은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실패한다면 그 책임을 물어 제거할 수 있었고 설령 요동 정벌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전투 과정에서 이성계의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 그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최영이라는 사람의 성품으로 봤을 때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가설은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예정된 계획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위화도 회군이 요동 정벌 전부터 이성계가 고려를 장악하기 위해 철저히 미리 계획한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 대에는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이성계와 그 소식을 듣고 동북면에서 출발한 가별초의 개경 집결 시점을 통해 추론된 것입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고 개경 근처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듣고 개경 근처에서 동북면의 가별초가 합류합니다.
동북면에 있던 천여 명의 가별초가 이동해서 개경 근처에서 이성계와 합류한 날이 6월 2일입니다.
가별초가 개경으로 넘어오려면 험한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는데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동북면에 소식을 전하고 이때 가별초가 출발했다면 시간상으로 도저히 6.1일까지는 개성에 집결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이전부터 미리 이성계와 가별초가 반역 계획을 철저히 공유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고뇌하며 흘린 눈물까지 모두 이성계의 계획인 셈이 됩니다.
가설일 뿐이지만 역사의 공백들 속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또 다른 묘미가 됩니다.
16. 변방의 무사였던 이성계,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다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개혁을 간절히 바라던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의 정치파트너가 됩니다.
이들은 제일 먼저 권문세족에 빼앗겼던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고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도 해방해 줍니다.
결국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부정부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려 왕실과 권문세족으로부터 떠났던 민심을 다시 돌려받은 것입니다.
이후에 명나라에 새로운 나라인 조선의 건국과 이성계의 즉위를 알립니다.
그렇게 음력 1393년 2월 15일, 옛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새로운 나라가 건국합니다.
앞으로 500년을 이어갈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이성계에 의해서 이렇게 탄생하게 됩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SBS Catch/KBS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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