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1. 10세기 후반, 불패의 신화 최강 거란군을 무찌른 귀주대첩
서기 993년, 고려는 거란에 1차 침입을 받게 되고 이후 27년 간 총 3차례에 걸쳐 고려와 거란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10세기 후반, 거란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기마군단을 앞세워서 아시아 대륙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 契丹好音人血(거란호음인혈, 거란은 사람의 피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거란을 얼마나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악명 높았던 거란의 기마군단을 물리치고 27년간의 고려거란전쟁의 막을 내리게 한 것이 '귀주대첩'이었습니다.
과연 고려가 당대 최강의 거란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부터 이 역사 속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강감찬, 문과에 장권급제한 문신 출신이었다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낙성대'는 바로 강감찬 장군(인헌공, 948~1031)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강감찬 장군의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향인 '인헌제'가 열립니다.
위기에 몰린 고려를 구해낸 명장 강감찬은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략의지를 완전히 꺾어놨습니다.
강감찬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고 천리장성을 쌓는 등 고려의 북방에 대한 경계 강화를 위해 전생애를 바친 인물입니다.
경기도 광명시에는 강감찬의 후손 '금천 강 씨'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금천은 현재 광명시와 시흥, 서울의 관악구와 금천구 등을 지칭하는 옛 이름입니다.
강감찬의 대를 이어 후손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주대첩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현종이 귀주대첩 승전소식을 듣고 왕파역까지 친히 마중 나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고는 강감찬에게 말합니다.
'강장군이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이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을 뻔했소!'
이렇게 귀주대첩이 세간에 알려지다 보니 강감찬 '장군'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만 강감찬은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신(文臣)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금천 강 씨의 족보에는 강감찬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재상에 해당하는 '태사문하시중'에 오른 문신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강감찬은 '문국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신이었고 그 진가는 전장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3. 북쪽에 '거란', 남쪽에는 '송나라'로 양분되는 형국에서 키를 쥐고 있던 고려의 선택은?
당시 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한 마디로 삼각관계로 요약됩니다.
중국 대륙은 군소국가들이 난립하던 5대 10국 시대가 지나고 북쪽에 거란, 남쪽에는 송나라로 양분되는 형국이었습니다.
거란과 송나라 두 강대국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팽팽하게 세력다툼을 벌이던 두 나라가 교전을 벌일 때 배후에서 고려가 공격에 온다면 매우 심각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란과 송 두 나라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과연 고려는 이런 정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4. 거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동북아 일대를 석권하고 중원을 넘보는 대제국을 건설하다
중국 파림좌기 임동은 거란의 수도 '상경성'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 상점의 간판들은 한때 이곳이 거란의 수도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시가지에는 거란의 초대 황제 태조 '야율아보기'의 동상이 있습니다.
야율아보기는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통합하여 이곳에 거란국을 세우고 중원의 강자로 성장시킵니다.
한때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을 위협하던 거란족은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 자취를 찾기 어렵습니다.
요 상경 박물관에는 당시 거란인의 모습이 남겨져 있습니다.
거란인들은 많은 벽화를 남겼는데 벽화 속 거란인들의 모습은 매우 특이합니다.
머리카락을 일부만 남기고 밀어버리는 '손발' 때문입니다.
이런 기묘한 외모가 중국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말울음소리가 들리면 거란족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그들은 북방의 중원에서 바람처럼 나타나 중국대륙을 습격하고는 했습니다.
'그들이 오면 말이 울지 않고, 밤에도 창에 빛이 발했다. 거란인들은 잔혹하고 포악했으니 중국인들의 얼굴 껍질을 벗기고, 눈을 파내고, 머리털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
<신오대사 거란전>
강력하고 빠른 군대 그리고 잔혹함으로 인해 거란족은 중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란은 이런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동북아 일대를 석권하고 중원을 넘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5. 고려, 고구려 계승의지를 공유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적대관계를 형성하다
거란은 고려에 대해서만큼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거란 사신 30인을 귀양 보내고 낙타 50마리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였다'
<고려사>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 50마리를 만부교에서 굶겨 죽임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악연은 피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왕건은 왜 거란에 대해서 전쟁을 불사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일까요?
경상북도 경산시 송백리에는 태 씨 집성촌이 있고 이곳에는 100여 명의 태 씨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발해 대조영의 후손들입니다.
태 씨의 시조는 원래 '대중상'이고 그의 아들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입니다.
멸망한 발해의 마지막 왕의 세자였던 '광현'이 남은 발해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화해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에서도 발해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귀부 한 발해인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거란'이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918년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고려 정합니다.
'고려는 본래 고구려다'
<송사(宋史)>
이는 옛 고구려를 계승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고려는 발해와 같이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해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할 만큼 그들을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려를 멸망시켰으니 거란과 적대관계를 형성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입니다.
고려는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보이며 북진정책을 거듭해 거란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습니다.
6. 거란, 993년 10월 80만 대군을 이끌고 1차 고려 침입을 강행하다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인 991년, 거란은 압록강 부근에 몇 개의 성을 축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압록강을 건너 의주 주변에 내원성을 둠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넓혀갑니다.
이 지역은 유속이 느려 퇴적된 모레턱이 많아 강을 건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해 거란은 내원성에 군사를 배치하기 시작합니다.
993년 10월, 거란은 마침내 80만이라는 압도적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침입합니다.
동경을 출발한 거란군은 봉산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 첫 전투를 벌입니다.
'봉산군이 함락되고 고려 선봉군 대장이 포로가 되었다'
<고려사>
고려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성봉군 대장까지 포로가 되고 맙니다.
거란군은 이 여세를 몰아 안융진을 공격합니다.
'거란군이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중랑장 대도수가 맞서 싸워 이겼다'
<고려사>
거란군은 발해의 마지막 세자의 아들 '대도수'가 지휘하는 고려수비군에 패하며 기세가 꺾입니다.
7. 서희,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국교를 맺는 대가로 '강동 6주'를 획득하다
1차 전투가 끝나고 고려와 거란 양국은 추가 전투보다 담판에 들어갑니다.
'거란: 너희 나라는 신라땅이다. 고구려의 땅은 우리 소유다'
'고려: 무슨 소리오! 우리 고려야 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당시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었던 서희는 거란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잘 알고 있었고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국교를 맺는 대가로 강동 6주를 되찾아오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 강동 6주 중에는 '귀주'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300년이 지나서야 압록강은 우리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란은 왜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고려에 강동 6주를 넘겨주고 떠난 것일까요?
거란의 당시 침입 목적은 땅을 뺏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외교적 주종관계를 형성해서 배후 세력의 안정만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란의 최종 목표는 처음부터 중원의 송나라를 치는 것이었고 그전에 고려를 침입한 것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강동 6주를 내어주는 대신 고려와 국교를 맺은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8. 송나라를 무너뜨린 거란의 황제 '성종'
북경의 고량강 주변은 거란과 송나라가 30년에 걸쳐서 싸웠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북경 일대를 되찾으려는 송나라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침략해 온 곳인데 결국 거란은 송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킵니다.
송나라는 매년 은 10만 냥, 비단 20 만필을 거란에 바치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전연의 맹약'입니다.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거란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거란 황제 '성종(聖宗)'의 무덤이 있습니다.
거란의 무덤은 다른 유목민들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높은 봉분을 만들지 않습니다.
성종의 무덤은 유실만 해도 6개나 되는 거대한 무덤으로 발굴 조사 후 완전히 폐쇄했지만 능의 일부가 무너져내려 묘실을 외부로 노출됐습니다.
무덤 내부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크고 화려하며 다양한 벽화로 장식돼 있는 거대한 지하궁전입니다.
성종이 재위했을 때는 거란(요나라)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그가 재위했던 시기는 고려에 가장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을 뿐 아니라 중원지역에서는 남방민족과 북방민족의 대립이 최종적으로 해결되던 시기였습니다.
9. 거란 성종, 직접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2차 전쟁을 일으키다
대제국 거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성종은 송나라와 전연의 맹약을 맺어 남쪽이 안정되자 다시 고려를 넘보기 시작합니다.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2차 전쟁을 일으킵니다.
통주에서 고려의 주력부대 30만을 격파하고 1011년 1월 1, 개경에 입성합니다.
이미 나주로 피난한 현종이 직접 거란에 들어와 조공을 한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거란군에 의해 고려의 왕궁과 도성이 불타고 참혹한 약탈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수많은 인질을 포로로 끌고 가던 중 이미 정복했던 성들이 연쇄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퇴각하는 거란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거란군은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난 후에야 압록강을 다시 건널 수 있었고 고려 현종은 끝내 친조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10. 거란 성종, 2차 전쟁까지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최후의 전쟁을 계획하다
유목민족에서 출발한 거란은 사냥과 기마에 익숙해 별도의 훈련 없이 바로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국민전체가 군사집단이었습니다.
기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투에 참가할 때는 병사가 3마리의 말을 끌고 나왔습니다.
활 4개, 화살 400개 그리고 창과 도끼 등을 개인적으로 갖추도록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전투병 1인당 한 명씩 배치된 '타초곡'인데 이들은 별도의 보급 없이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하는 거란군의 특성상 식량이나 장비의 현지 조달을 담당하는 거란군의 약탈 전문 병사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거란제국 최고의 황제였고 성종 치세 당시 거란제국은 세계 최강이라 할 만큼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친정했던 2차 전쟁에서도 고려를 완전히 굴복하지 못하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절치부심 끝에 거란 성종은 고려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격파할 비책을 숨긴 채 최후의 공격을 감행해 오게 됩니다.
과연 거란의 전략은 무었으며 고려는 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1018년 고려와 거란, 최후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거란은 1018년 9월 전국의 말을 징발했으며 10월에는 정식으로 고려에 선전포고합니다.
고려왕이 친조 하지 않자 다시 한번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이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그간의 실패를 경험으로 고려군의 허점을 찔러 속전속결로 개경까지 점령한 후 고려 국왕을 잡을 계획이었습니다.
중간에 있는 고려군 성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개경으로 직진하는 대담한 작전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보급로를 포기하고 모두 현지조달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굉장히 과감하면서도 위험한 방법이었습니다.
11. 1018년 12월 '소배압'의 10만 대군에 의해 3차 전쟁을 일으키다(거란의 개경 직공작전 실패)
이를 위해 병력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 최정예인 황제 친위군을 주축으로 10만 명을 편성합니다.
그러자 고려는 강감찬을 최고 사령관인 상원수에 임명하고 군사 20만 8000여 명을 국경에 배치합니다.
'강감찬, 기병 1만 2천을 계곡에 매복시켰다'
<고려사>
모두가 거란의 3차 침략을 산성을 이용한 전술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강감찬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강감찬은 기병만 이천을 뽑아 흥진성 동쪽 '삼교천' 주변에 매복시킵니다.
이것은 그간 내원성에 집결한 거란군이 제일 먼저 공격하는 대상이 '흥화진'이라는 공식을 완전히 깬 것이었습니다.
강감찬은 일반적인 전술을 세우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엉뚱한 곳에 군대를 매복시켜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2월 10일 내원성에서 남하를 시작한 거란군은 흥화진을 뒤로하고 고려의 매복조가 있는 곳으로 기동 합니다.
강감찬은 개경 직공이라는 거란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 밧줄로 소가죽을 엮어 성 동쪽의 큰 강을 막았다'
<고려사>
거란군의 대열이 도하를 시작하자 미리 준비한 대로 소가죽으로 만든 둑을 터트렸습니다.
뜻밖의 공격에 전열이 흐트러진 거란군의 모습을 보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복해 있던 12,000명의 기병들이 벼락처럼 거란군을 덮칩니다.
거란군은 그동안의 침입에서 항상 제일 먼저 공격했던 흥화진성마저 공격하지 않고 바로 통과해 버린 것인데
그런데 고려는 오히려 이 계획을 알아채고 삽교천에서 거란군을 공격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거란군 소배압의 작전은 시간과 병력을 최대한 절약해서 개경으로 직진하는 것이었는데 흥화진에서 오히려 고려군의 역습을 당해서 상당한 병력을 잃게 되고 모든 계획이 처음부터 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백전노장의 거란군 사령관 소배압은 원래 계획대로 곧바로 병력을 강동 6주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고려의 방어군을 뚫고 개경을 바로 칩니다.
강감찬의 대응은 두 개 부대의 출격이었습니다.
먼저 만여 명의 김종현 부대를 수도 방어를 위해 개경에 급파합니다.
또한 강민첨 부대를 보내 거란군을 추격하며 교전을 유도하고 거란군의 진격속도를 최대한 늦추려고 합니다.
'강민첨이 추격해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다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조원이 또 마탄에서 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고려사>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고려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거란군은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고 개경 부근까지 진출합니다.
그러나 무혈입성했던 2차 전쟁과는 달리 현종은 성문을 닫으며 굳은 항전의지를 보입니다.
1019년 1월, 금교역에서 거란군은 고려군의 기습을 당하며 척후대가 전멸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맙니다.
2차 침공 때만 해도 현종은 거란군의 침략에 싸우지 않고 개경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3차 침공에서는 현종이 개경을 포기하지 않고 사수를 결심합니다.
결국 왕이 도망가지 않고 왕과 군사가 일치단결해서 사수를 결심하고 뒤쪽에서는 고려군의 추격이 계속되고 잇따른 패배로 거란군의 전의는 점점 상실되어 가자 결국 퇴각을 결정합니다.
과감하던 소배압도 마지막 단계에서 개경공격을 결정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이렇게 개경직공이라는 거란의 작전을 실패로 돌아갑니다.
12. 강감찬, 고려의 주력부대를 귀주로 이동시키고 협동작전을 통해 거란군을 그곳으로 유인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강감찬은 고려의 주력부대를 귀주로 이동시키며 마지막 승부수를 띄웁니다.
공교롭게도 고려군의 맹추격에 쫓기던 거란군이 선택한 퇴로 역시 '귀주'였습니다.
현재 평안북도 구성군에 세워져 있던 귀주성은 서희의 담판을 통해 새로 쌓은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27년 후 이곳은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현장이 됐습니다.
강감찬은 성을 버리고 벌판 한가운데서 거란군을 맞이하는 전혀 새로운 전술을 선택합니다.
고려군과 거란군은 우연히 귀주 벌판 한가운데서 마주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강감찬의 전체적인 작전 지휘 속에서 고려군의 협동 작전을 통해 거란군을 귀주로 유인해서 잡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처럼 무선도 없고 통신수단도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군대가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한쪽에서 몰아오고 한쪽에서 막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한 지휘력과 군인들의 노력 그리고 강감찬의 판단력이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13. 강감찬, 귀주 벌판을 전장으로 선택하다
1019년 2월 2일 귀주, 27년 간이나 지속됐던 고려와 거란의 싸움을 총 결산하는 한판승부가 귀주벌판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10만 대군이 귀주 벌판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느 한 편이 죽어야 끝나는 최후의 전투 현장이었습니다.
귀주벌판의 한가운데서 황제의 10만 친위군과 마주 선 강감찬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는 귀주벌판을 최후의 승부처로 택했습니다.
헌데 그는 왜 성에 의지하지 않고 벌판을 승부처로 택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강감찬의 눈부신 지략이 숨어있었습니다.
쫓기듯 밀려온 거란군과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한 듯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고려군.
종착력으로 치닫고 있던 27년간의 전쟁은 이제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승패를 가르게 됩니다.
강감찬에게 남겨진 마지막 승부수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러설 수도 물러날 때도 없는 전투로 고려와 거란 두 나라 모두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고 양군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승부는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승부가 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 그러나 모든 것은 상원수 강감찬의 계획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남쪽에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고려사>
갑자기 깃이 북쪽 거란군을 향해 나부꼈습니다.
남풍을 타고 강한 비도 적진으로 퍼부었습니다.
맞바람에 동요하기 시작한 거란군의 모습을 보고 틈을 놓치지 않고 고려군은 맹렬한 기세로 활을 쐈고 화살은 비에 섞여 거란군에게 쏟아졌습니다.
'김종현이 부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고려사>
거란군을 귀주방향으로 몰아오던 김종현의 기병 부대가 도착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김종현의 기병부대가 거란군의 후미를 강타하자 거란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그렇게 고려군의 한 맺힌 복수가 시작됩니다.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는 셀 수가 없었다'
<고려사>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기마군단 거란은 귀주벌판에서 그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역사는 거란군 10만이 쳐들어왔지만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 강감찬, 날씨를 활용한 지략으로 귀주대첩을 승리하다
전쟁 전체의 승리조건이라고 한다면 '천혜(자연의 은혜), 지리, 인화(여러 사람이 서로 화합함)'이 세 가지를 대개 꼽습니다.
귀주대첩은 이 세 가지 승리조건 모두가 가장 잘 맞아떨어진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감찬과 여러 장수들의 지휘 아래 여러 군대들이 효과적인 협공을 함으로써 고려거란전쟁에서 대단원을 대승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불어 온 남풍은 과연 신의 축복이기만 했을까요?
전쟁에서 승부를 가르는 요소는 장군의 리더십, 병력수, 무기체계, 전술, 전략, 보급의 유무 등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날씨, 기상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짓는 사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적벽대전의 경우 제갈공명과 주유연합군이 화공전략으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칩니다.
이때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남동풍'이었습니다.
한반도의 경우 겨울철에는 주로 북풍이 붑니다.
그렇다면 귀주대첩의 남풍은 과연 사실일까요?
기압골이 북동진으로 나갈 경우 온난전선이 통과하고 한냉전선이 들어오면서 바람이 급격하게 변하며 남풍계열로 바뀌게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바람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비가 오는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오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고려사절요>
온난전산과 한랭전선이 통과할 때, 바람의 변화와 비가 동시에 내리는 경우는 많이 나타나는 사례는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바람도 급변하고 강하게 불면서 비도 동시에 내리는 배치가 분명히 한반도에 존재합니다.
이는 '활강형 한랜전선'과 유사합니다.
활강형 한랜전선이란 상공의 전선이 기상보다 앞쪽으로 가면서 발생합니다.
이때 스콜선이 만들어져 바람의 급변과 동시에 강수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전선보다 앞에서 강한 비구름이 만들어지면서 강한 경우 20m/s 이상의 돌풍이 남풍으로 급격하게 바뀌면서 강한 비가 내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20m/s 이상의 돌풍은 똑바로 서있기 조차 어려운 강풍입니다.
귀주대첩 당시에 불었던 바람의 세기는 대략 초속 20m로 천년 전 치열한 전투상황에서 이런 강풍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던 거란군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활을 쏘기도 칼을 휘두르기조차도 어려웠을 것이고 심지어 거란군은 고려군을 제대로 응시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렇다면 거란군을 귀주 벌판으로 유인했던 강간찬은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은 오랜 관찰을 통해 미꾸라지가 배를 뒤집어 보이면 올라오면은 그로부터 2,3일 내에 남동풍이 분다는 사실을 예측해 냅니다.
강감찬 또한 동물의 움직임, 바람의 움직임등을 오랫동안 관찰했다면 충분히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기상은 이처럼 군 작전에 있어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입니다.
최소의 노력의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현대전에서조차 모든 작전이 기상요소에 영향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정밀폭격을 수행하는 공군작전을 비롯해서 지상 및 해상 작전까지도 바람, 온도, 습도 등의 기상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당시의 기상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귀주대첩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강감찬은 방어하기 수월한 수성이 아닌 평지를 택해 기마군이 주력인 거란족과 맞섭니다.
강간찬은 이 전쟁을 준비하며 많은 연구를 통해서 귀주의 겨울철에는 기압골이 남쪽으로 통과하면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급격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 전세를 뒤집어 버린 귀주벌판의 남풍이 강강찬의 마지막 승부수가 아니었을까요?
이에 대해 우리 역사는 어떠한 명쾌한 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럽게 방향이 바뀐 초속 20m의 바람은 100만 대군보다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거란군을 귀주로 유인한 것도 기상변화를 미리 예측한 강강찬의 치밀한 계획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15. 고려, 귀주대첩 승리 후 송나라 수도에서 연회를 열다
거란의 성종은 귀주 대첩 패배 후 지휘자 소배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긴 다음 죽이리라!'
이러한 극언을 할 만큼 성종은 대단히 진노했다고 합니다.
27년간이나 이어진 고려거란전쟁의 승패는 이 두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특히 귀주대첩은 장기간에 걸쳐 치러진 고려 거란 전쟁을 마무리했던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겨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를 목격한 주변국들의 태도도 달라집니다.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되기를 청하였다'
만주지역의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 하기를 원하는 청을 올리기도 합니다.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다. 흑수의 추장 거울마두개가 오다'
연이어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의 추장이 직접 고려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소국으로 성장해 갑니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도 교류하고 거란과도 교류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입니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져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귀주대첩 승리 후 고려군은 거란에서 뺏은 전쟁물자를 가지고 고려에 귀부 한 동서여진족을 거느리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에 가서 승전 파티를 합니다.
송나라는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고려가 승리를 거두자 고려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16. 수많은 외침에서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에 대해 민중들은 무한한 애정과 기대감으로 신격화하다
고려의 백성들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강감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낙성대에 3층석탑을 세웁니다.
형태로 봐서는 13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에는 낙성대, 강감찬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강감찬의 출생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낙성대'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중국사신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 봤더니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고 그 아이에게 '장차 큰 인물이 되겠구나' 하는 예언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사내아이가 바로 강감찬입니다.
落星(떨어질 낙, 별 성) 자를 따서 '낙성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려사를 비롯한 많은 문헌에는 강감찬의 신비한 행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대체로 호랑이, 여우, 개구리 등 다양한 동물들을 신비한 힘으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는 비슷합니다.
강릉 범재에서는 호랑이가 도승으로 변해서 지나가 나그네들과 고누(한국의 전통 민속놀이. 땅바닥이나 널판에 놀이판을 그려놓고 말을 조종하면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를 둔다는 설화가 존재합니다.
강감찬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도승 하고 고누를 두어서 이기고 그 도승을 없앤 이후부터는 이 고개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형문화재 13호인 '강릉관노가면극'에서도 강감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가면극에 나오는 인물 중 칼자국과 곰보모양의 '시시딱딱이'가 강감찬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외침을 받은 우리 민족 역사상 이순신 장군처럼 대단한 승리를 거둔 장군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강감찬 장군 또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많은 외침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운 강감찬에 대해 민중들은 무한한 애정과 기대감을 가졌고 그를 신격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강감찬의 신격화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국으로 퍼진 것입니다.
17.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어떻게 됐을까요?
역사에서 완전히 실종됐던 거란족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중국 운남성 보산시에는 거란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마을의 사당 곳곳에 거란의 시조 '야율'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이 거란의 후예라면 왜 중국대륙의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도 야율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대제국 거란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는 이들은 지금도 대부분 족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족보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성은 거란 황족의 성인 '야율'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족의 후예라는 이유로 운남 지방 사람들의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장 씨 등 다른 성으로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마을에는 지금 말로는 '장관' 또는 '수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본래 거란 문자는 거란의 후예 중에서도 극히 드문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데 거란족이 민족 정보를 남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여진이 성장해 금나라를 세우면서 다시 중국으로 진출해 이들에 의해 거란은 멸망하고 맙니다.
거란이 멸망한 뒤 몽골의 용병이 돼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거란족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결국 거란이 고려와 벌인 귀주대첩에서의 패배가 장기적으로 보면 거란이 멸망하는 하나 원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주대첩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재편하고 역사의 줄기를 바꿔버린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18. 강감찬, 11세기 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바꿔버린 세기의 명장으로 길이 남다
한때 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 거란은 결국 이 작은 마을에서 실낱같은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 길이 기록될 세기에 전쟁 귀주대첩은 이처럼 고려와 거란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립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몽골의 칩입이 있기까지 약 200년간 평화의 시기를 구가했고 거란은 결국 국운이 쇠퇴해서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뛰어난 지략과 통찰력을 지녔고 그래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지 않았던 강감찬은 11세기 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바꿔버린 세기의 영웅이었습니다.
<출처: KBS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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