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을 뛰어넘는 도전정신과 뛰어난 인품으로 해상왕이 된 장보고
1. 장보고, 무예와 활쏘기에 뛰어난 청소년으로 자라다
해상왕이라고 불리는 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이 다스리던 780년대 후반 무렵 서남해 쪽의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바다 섬 마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보고는 씩씩하고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청소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때 장보고에게는 열 살 어린 동네 친구 정년과 친형제처럼 지냅니다.
둘은 친형제처럼 어울리면서 바다를 뛰어다니면 놀곤 했는데 이때 두 사람이 푹 빠져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장보고와 정년) 모두 싸움을 잘하였다. 날래고 씩씩함을 겨루면 장보고가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경쟁하며 서로 아래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장보고와 정년은 기질이 비슷했는데 둘 다 무예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정년이 더 날래고 빨라서 장보고가 질 때가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장보고가 불리할 때마다 들이민 것이 바로 나이였고 정년은 이에 장보고 보다 무예에 뛰어나다며 서로 지려고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처럼 무예에 흥미를 느끼고 열심이었던 장보고가 특히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것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보고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활궁, 복 복)이었고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활보'이며 활보는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장보고는 활쏘기와 무예에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3SQ51hwXzA
2. 성인이 된 장보고, 기회의 땅 '당나라'에 가서 크게 성공할 것을 꿈꾸다
이렇게 출중한 무예실력을 자랑했던 장보고가 스무 살이 됐을 무렵인 약 800년, 성인이 된 장보고에게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바다 건너로 가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신라인들에게 마치 꿈의 나라처럼 여겨졌던 곳이 바로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도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기회의 땅'이라는 소문이 펴져있었던 것입니다.
당나라는 신라와는 달리 굉장히 개방적인 사회였습니다.
중원을 통일하고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민족을 배척하지 않고 관리로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다른 방면으로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개방적인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으로 장보고는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당나라로 갈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3. 골품제 때문에 평민 출신 장보고는 신라 군대에서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장보고는 신라군대에서는 출세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골품제' 때문입니다.
신라는 혈통에 따라서 골과 두품을 나누어 차별을 두고 있었습니다.
장보고는 골품제 자체에 속해있지 않은 두품이 없던 '평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 장보고가 무예를 아무리 잘한 들 평민 출신인 그가 신라에서는 출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장보고,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 가 서주 '무령군'에 입대하고 이름을 '장보고'로 바꾸다
장보고는 고심 끝에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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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당나라에 도착한 청년 장보고와 정년, 둘은 당나라에서도 '서주'라는 도시가 있는 지역으로 갑니다.
그것에서 돈도 벌고 출세할 수 있는 곳인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는데 두 사람이 입대한 곳은 무령군(武寧軍)이라는 부대였습니다.
무령군은 서주 일대를 다스리던 절도사가 지휘하던 주력 군대였고 장보고는 서주 최정예부대 무령군에 입대한 것입니다.
장보고가 당나라 부대 중에 무령군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무령군에는 바로 신라인등 외국인 출신의 용병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이어도 공을 세우면 고위 관직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활짝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일하기 위해서 큰 결심을 합니다.
'궁복'이라는 이름 대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활 궁(弓) 자가 들어간 베풀 장(張)을 성으로 쓰고 '복'에 음을 두 자로 늘려서 '보고'를 이름으로 쓴 것입니다.
4. 장보고, 무령군에서 이사도세력을 토벌하는데 앞장서다
당나라에 이주한 지 5년 후인 815년, 20대 중반이 된 장보고가 드디어 능력을 발휘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당나라땅이었던 '산둥반도'라 불리는 지역을 다스리던 이사도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이사도 세력은 산둥반도를 넘어서 내륙인 '청주'와 '치주'까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3대에 걸쳐서 이 지역의 군사권은 물론이고 행정권까지 장악하고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사도세력이 야심을 가지고 당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주변지역을 맹공격하기 시작한 것인데 일종의 '반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려 50년이 넘게 당나라 조정의 골칫거리였던 이사도세력을 무찌를 토벌군의 선봉대에 선 부대가 바로 무령군이었습니다.
무령군의 일원으로 용맹한 신라 출신의 두 청년 장보고와 정년이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맞붙은 당나라 토벌군과 이사도 세력은 무려 4년 동안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819년, 마침내 무령군이 속한 당나라 군대의 승리로 이 전쟁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당시 무령군에서 장보고의 활약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말을 타고 창을 쓰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삼국사기>
남다른 기마능력으로 바람과 같이 적진으로 돌진한 장보고가 독보적인 활약을 하며 이사도 세력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도 세력을 토벌하고 얼마 후, 장보고와 정년은 평로치청군 토벌에 지대한 공을 인정받고 무령군 '군중 소장'에 임명됩니다.
치열했던 전쟁이 끝난 후 보훈을 따지는 과정에서 장보고와 정년이 무령군 소장이라는 직책에 임명이 된 것입니다.
장보고는 무려 천명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인데 특유의 승부욕과 배짱 그리고 무예실력을 발휘하며 전장에서 싸우며 9년간 흘린 피땀눈물이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꿈만 안고 신라에서 당나라로 건너온 청년 장보고는 타지에서 출세의 꿈을 이룬 것에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5. 장보고, '신라방'의 해상무역을 보고 '국제무역상'이 되기로 결심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ukijDRqfZ0
그렇게 바라던 출세의 꿈을 이룬 장보고는 821년, 갑자기 승승장구하던 무령군을 박차고 나옵니다.
이사도의 난을 토벌하면서 장보고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신라방(新羅坊)'이었습니다.
신라방이란 요즘으로 치면 코리아타운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당나라에 있던 신라인의 집단거주지로 당나라 드림을 꿈꾸고 온 많은 신라인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신라방은 당나라 해안 일대 곳곳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했던 '산둥반도'에 특히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신라방 신라인들은 당나라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면서 먹고살았을까요?
바로 바닷길을 통한 '해상무역'이었습니다.
산둥반도는 지리적으로 당나라, 발해,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그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신라나 일본 쪽으로 가서 물건을 사 와서 당나라에 파는 해상무역을 통해 신라방 사람들은 생계를 꾸렸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육지 혹은 바다의 무역로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신라, 일본뿐만 아니라 동서양 각국의 배가 드나들던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고 진귀한 고가의 물건을 사기 위해 당나라 수도 장안과 곳곳의 항구는 늘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장보고의 마음속에 욕망 하나가 불쑥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장보고는 뱃길을 통해 신라와 일본, 당나라를 잇는 교역을 하는 '국제무역상'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아마도 장보고도 아무리 개방적이었던 당나라였지만 그 이상의 출세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성공한 신라인을 많이 관찰한 결과 그 신라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것이 무역업임을 알게 되었고 신라방의 재당 무역상들이 무역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장보고는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6. 장보고, '적산법화원'을 세워 재당 신라인들과 교류하다
장보고 역시 산둥반도 신라방 내에 자리를 잡고 무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라인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경험과 부를 차곡차곡 쌓아나간 것입니다.
이때 일종의 '재당무역상인조합'을 구축하고 장보고 본인이 수장이 되어 해상무역을 크게 이끌어보겠다고 야심을 품게 됩니다.
그렇게 무역상인들을 조직화해서 해상무역을 확장하려고 했던 장보고는 823년 무렵에 자신이 활동할 거점이자 무역상인들을 하나로 모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보고는 그동안 모은 돈을 투자해서 산둥반도 적산포라는 곳에 절을 세웁니다.
당시 신라인들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타지에 있는 신라인들이 불교 숭상을 위해 하나로 모일 장소를 마련한 것입니다.
장보고가 신라인들을 위해 세 절이 바로 '적산법화원'입니다.
위 사진은 당나라 때 한번 파손된 후에 중건한 모습입니다.
적산법화원에는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현재도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적산법화원에서는 주로 재당 신라인들과 무역 상인들을 위한 법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절의 법회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당나라에 있는 절이었지만 신라 승려를 데리고 와서 고향 언어인 신라어로 법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신라인들은 고향생각도 나고 타국생활 중에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산법화원은 신라인들의 입소문을 타고 성황을 이루게 되었고 매년 정월 15일에는 200명이 넘는 신라인들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재당신라인들에게 이 적산법화원은 만남의 장소이자 정체성을 확인하고 신라인으로써 하나로 뭉치는 공간이었습니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고맙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지지와 신뢰를 얻었습니다.
적산법화원은 단순하게 종교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산둥반도를 지나가는 외교관리나 무역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기능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통해 무역에 대한 정보나 자본을 확보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동아시아 무역의 판을 키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보고는 적산법화원을 통해서 해상무역을 하는데 꼭 필요한 탄탄한 인맥과 정보를 얻었습니다.
7. 장보고, 일본과의 무역도 시작하다
그리고 이때 장보고는 또 다른 나라와 인연을 맺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장보고는 일본 국제무역항이었던 하카타항으로 직접 가서 직접 유통망을 뚫기도 하고 무역에 필요한 통역사를 구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 무역상인들과 교류하면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장보고는 신라방에서도 일본에서도 무역상으로서 입지를 키워나가게 됩니다.
8. 장보고, 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로 향하기로 결심하다
해상무역에 뛰어든 지 8년째 되던 828년, 해상무역가로 승승장구하던 장보고는 또 한 번 깜짝 놀랄만한 행보를 합니다.
18년 전 떠나온 고향 신라로 돌아간다고 한 것입니다.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려고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장보고의 앞길을 막던 존재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이었습니다.
동아시아 해상에는 무역 선단을 갈취하려던 해적들이 득실득실했습니다.
장보고와 상인들이 무역선을 띄울 때마다 해적들이 배를 급습해서 무역품들을 약탈하니 손해가 막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나라도 방관만 하고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타국인 당나라에서 장보고가 무력을 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보고는 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로 향하기로 결심한 것인데 그렇게 배에 올라탄 장보고는 신라에 도착해서 곧바로 수도 경주로 향합니다.
그리고 당시 신라를 다스리던 제42대 왕 '흥덕왕'을 찾아가 왕에게 회심의 한마디를 던집니다.
'중국을 두루 다녀 보니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부디 청해(淸海)에 진을 설치하여 적도(해적)들이 사람들을 중국으로 잡아갈 수 없게 하십시오'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는 당시 흥덕왕의 골칫거리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입니다.
당시 신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도 바다에 출몰하는 해적이었습니다.
신라는 해상 군진세력도 약해 해적을 소탕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청해진을 세우는 것과 군사를 거느리는 것을 허락하면 장보고 자신이 신라인들을 당나라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게 해적을 소탕해 주겠다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흥덕왕의 입장에서는 신라에 평민출신의 장보고가 갑자기 나타나 당돌한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흥덕왕은 장보고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과인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명하고 군사 1만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제수하노라'
흥덕왕은 장보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청해진 대사로 임명합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적산법화원을 세운 것을 신라가 몰랐을까요?
그리고 해양군사력이 약한 신라왕실로서는 무령군에서 활약하고 바다 상황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던 장보고는 충분히 쓸모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흥덕왕은 파격적인 혜택인 청해진 대사 자리까지 내린 것입니다.
원래 신라직제에서는 '대사'라는 관직은 없습니다.
특히 골품제 속에서 평민인 장보고가 가질 수 있는 관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왕은 평민인 장보고에게 관직을 줄 수 없자 특별직으로 대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파격적으로 그를 임명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라왕실이 장보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한 것입니다.
이로서 장보고는 신라조정에 유력인사로 급부상합니다.
9. 장보고, 고향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다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는 자신이 구상한 청해진을 만들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서 미리 구상해 놓은 최적의 입지로 이동합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겠다고 한 '청해'는 바로 신라 서남해인에 위치한 장보고의 고향 '완도'였습니다.
완도는 지리적으로 당과 일본 두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해진은 동아시아 삼각 무역 기지로서 완벽한 입지였던 것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흙과 돌로 성을 쌓고 곳곳에 부두를 만들어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무역항만시설을 만듭니다.
그리고 완도로 온 2번째 이유가 있었으니 삼면이 확 트인 섬에서는 먼바다의 해적선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용이하다는 점입니다.
완도는 장보고가 꿈을 펼칠 수 있고 야심의 정점을 찍을 최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완도에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 신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퍼집니다.
'바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파는 사람이 없었다'
<삼국사기>
군사를 거느린 장보고는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해서 신라 앞바다의 해적들을 몽땅 소탕합니다.
장보고 덕에 신라의 바다는 오랜만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0. 청해진,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되다
어느 날, 장보고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친구 정년이 청해진에 찾아옵니다.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을 나올 때 정년은 그곳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정년도 신라로 귀국하고 고향 완도로 온 것입니다.
당나라에서 무예로 장보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정년까지 합세하니 장보고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장보고는 구상한 계획을 펼칩니다.
본격적으로 청해진을 무역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보고는 신라인과 재당신라인 등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대형무역선단을 조직해서 활발하게 삼각 무역을 펼칩니다.
장보고 선단을 더 멀리 더 활발하게 움직여서 신기하고 희귀한 물건들을 가져와 팔기도 합니다.
특히 돈이 많은 왕실과 귀족들이 혹할 만한 '사치품'에 주력합니다.
그렇다면 장보고 선단의 배에는 어떤 희귀한 물건들이 실렸을까요?
지금부터 9세기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주목을 받았던 핫템을 구경해 보도록 합시다.
애완용이 아닌 물총새의 털인 '비취모'를 거래했는데 이 털을 어디에 사용했을까요?
당나라 왕실이나 귀족들은 비취모로 모자나 장신구를 만들었고 신라귀족들은 목도리나 허리띠를 만들곤 했었습니다.
다음은 '대모 머리빗'으로 '대모'는 거북목 바다거북이과에 속하는 동물의 등딱지로 빗의 손잡이 부분을 대모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장보고 선단이 확보한 사치품들은 신라 귀족들이 모여사는 서라벌은 물론이고 부유한 세력이 있는 지방에까지 팔리게 됩니다.
장보고 선단의 물건들이 인기가 높아질수록 무역상으로서 장보고의 명성과 입지 또한 드높아집니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장보고의 청해진은 날이 갈수록 성황을 이룹니다.
당나라와 일본을 향하는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들은 바쁘게 청해진을 드나들었고 청해진은 단숨에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11. 장보고, 뛰어난 인품으로 동아시아에서까지 이름을 드높이다
그렇게 장보고가 명실상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이끄는 주인공이 됩니다.
무역왕 장보고가 유명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장보고는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이 있으니 그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번천문집>
장보고가 만일 이익을 좇아가기만 했다면 국제적으로 대규모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의리, 신뢰, 정의감과 같은 장보고의 품성들이 한중일 삼국의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신라를 넘어 해외에서도 무역상으로서의 재능과 인품까지 겸비하여 장보고의 청해진은 성공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2. 장보고, '김우징'의 제안에 본의 아니게 신라왕실에 반역을 꾀하게 되다
837년 5월의 어느 날, 장보고가 청해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던 청해진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청해진에 찾아온 이는 흥덕왕 옆에서 국무총리급인 시중을 지낸 '김우징'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청해진에 들어선 김우징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이는 신라왕실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덕왕이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신라왕실에서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통일신라 말기는 귀족들의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죽으면 귀족들이 서로 왕위에 올라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들고일어나곤 했습니다.
게다가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은 후 다음 왕위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서 살벌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흥덕왕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였던 김우징의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만 것입니다.
왕위를 노린 흥덕왕의 조카가 범인이었습니다.
이후 흥덕왕의 조카는 신라 43대 왕 '희강왕'으로 즉위합니다.
장보고가 신라에 다시 돌아와 흥덕왕을 처음 만났을 때 김우징이 당시 시중이었기 때문에 과거 장보고와 흥덕왕의 만남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도 장보고가 청해진을 만들 때에도 김우징이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보고의 올바른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김우징이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김우징은 자신 또한 목숨의 위협을 받자 장보고가 지키는 안전한 청해진으로 몸을 피한 것입니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찾아왔을 때 장보고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김우징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새롭게 즉위한 희강왕 세력과는 척을 지게 되는 것으로 장보고는 밤새 어마어마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많은 고민 끝에 숨겨달라는 김우진의 부탁에 장보고는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김우징을 숨겨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2년가량 청해진에서 지낸 김우징은 그 사이 신라왕실은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어서 2년 새 또다시 왕이 바뀌게 됩니다.
이번에는 김우징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또 다른 귀족이 왕이 되는데 신라 제44대 왕 '민애왕'입니다.
김우징은 그동안 꾹꾹 억누르고 있었던 울분과 분노를 쏟아냅니다.
김우징은 이때 마음에 담아 둔 은밀한 계획을 장보고에게 털어놓습니다.
장보고가 가진 군사를 빌려서 왕실을 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보고가 군사를 내어준다는 것은 김우징을 단순히 숨겨준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왕을 바꾸는 역모에 돕는다면 장보고가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의(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勇)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
<삼국사기>
장보고는 군사를 내어달라는 김우징에게 그러하겠노라고 답합니다.
청해진의 군사 중 무려 5천여 명의 군사를 지원해 주며 장보고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부하 정년에게 지휘를 맡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돕는 장보고를 보고 김우징은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장보고의 딸과 김우징의 아들을 결혼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김우징이 왕이 된다면 딸이 왕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되었고 장보고 집안의 신분이 바뀌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왕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장보고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장보고와 김우징은 그렇게 거사를 성공시키고 사돈이 되기로 약속합니다.
장보고는 이로서 본의 아니게 반역을 주도하는 입장이 됩니다.
정년과 청해진 군대를 필두로 김우징의 장군들도 함께 수도 경주로 출격합니다.
장보고는 정년을 굳게 믿고 이 거사가 성공하기를 기원하면서 정년에게 꼭 이기고 돌아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왕실에서도 김우징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군대를 출격시킵니다.
그렇게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맞붙게 된 두 세력은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장보고에게 그 전투의 결과가 들려옵니다.
바로 김우징과 장보고의 군대가 승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3. 장보고, '신무왕'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신라 최고 중앙귀족에 버금가는 지위와 재산을 누리게 되다
그렇게 경주의 궁궐에 입성한 김우징은 신라 45대 왕 '신무왕'으로 즉위합니다.
신무왕은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보고를 경주로 불러드립니다.
그리고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 2,000호를 주었다'
<삼국사기>
신무왕은 장보고를 지금 기준 군 최고사령관에 준하는 '감의군사'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왕족이나 공신이 받는 토지인 '식읍(食邑)'을 2,000호나 내려줍니다.
이 토지에서 국가를 대리해 신하가 조세 수취가 가능했습니다.
신라 삼국통일의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김유신이 받은 식읍이 500호였으니 이것과 비교해 보아도 어마어마한 포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장보고는 신라 최고 중앙귀족에 버금가는 지위와 재산을 누리게 됩니다.
14. 장보고,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신라왕실의 일원이 되지 못하다
이런 장보고의 영광을 탐탁지 않게 바라본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라 중앙 귀족들이었습니다.
감히 평민 출신 장보고가 왕의 총애를 받고 기세등등해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장보고 또한 그런 귀족들의 분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장보고는 귀족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 하고자 청해진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장보고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839년 7월, 장보고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장보고가 도와 왕위에 올랐던 신무왕이 즉위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에 오른 이는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었습니다.
문성왕은 즉위 후 깜짝 놀랄만한 선언을 합니다.
'장보고 대사의 딸을 아내로 맞을 생각이오!'
아버지 김우징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과 결혼해 왕비로 삼겠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 대신들은 조정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말합니다.
'궁복(장보고)은 바다의 섬사람이거늘 그 딸을 어찌 왕실에 짝지을 수 있겠습니까?'
<삼국사기>
고작 섬출신 장보고의 딸을 어떻게 왕실에 들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장보고가 아무리 국제무역상이 되고 귀족에 버금가는 많은 재산과 지위를 누려도 장보고는 결국 '평민'이라는 것이고 근본 없는 장보고가 왕실일원이 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문성왕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요?
문성왕은 귀족 세력의 반대를 꺽지 못하고 결국 장보고의 딸과 결혼을 포기하고 맙니다.
장보고는 사실 이번 참에 귀족들이 토 달지 못하는 신분으로 올라서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보고는 결국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해상왕 장보고의 위세는 여전히 건재했고 장보고는 당당히 최고로 군림할 수 있는 청해진에서 다시금 무역에 집중합니다.
15. 장보고, 옛 동료 '염장'에 의해 허무하게 암살당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해진에 있던 장보고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옵니다.
김우징의 부하 장수이자 한때 동료였던 '염장'이었는데 장보고가 한때 장보고의 부하 장수였던 염장의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염장은 김우징을 왕으로 세울 때 장보고의 군대와 함께 움직였던 장보고와 뜻을 함께했던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돌연 장보고를 암살한 것입니다.
대체 염장은 왜 장보고를 암살한 것일까요?
'궁복(장보고)이 왕이 딸을 (차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
당시 장보고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청해진의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수도 경주에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수도 경주에 있는 왕실과 장보고를 견제하고 있던 중앙귀족들은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마침 염장이 왕실로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염장이 와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한병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삼국사기>
염장장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켜서 경주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직접 청해진에 가서 장보고를 죽이고 오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장보고의 무시무시한 군사력이 무서웠던 문성왕은 염장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왕실의 동의하에 청해진으로 달려온 염장은 청해진에서 일하겠다는 말로 장보고의 환심을 산 뒤, 기습적으로 장보고를 찌른 것입니다.
장보고는 염장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음 놓고 있다가 이렇다 할 대처도 못해보고 그만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너무도 허무하고도 허무한 최후였습니다.
16. 그렇다면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킬 시도를 하긴 했을까요?
기록상으로는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와있지만 실제 반란을 일으켰거나 일으킬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장보고의 사망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846년으로 나오는데 '소일본후기'에는 841년으로 나와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속일본후기의 기록 841년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중입니다.
이렇게 삼국사기 기록 자체에 의문점이 남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장보고의 반란 역시 사실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이 내세운 명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 청해진,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이 차지하지만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결국 폐쇄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은 장보고를 죽인 염장이 차지하게 됩니다.
염장이 차지하고 난 이후 청해진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염장을 수장으로 인정하지 못한 청해진의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와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결국 851년, 장보고와 장보고를 따르던 사람들이 떠난 청해진은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폐쇄되고 맙니다.
청해진이 세워진지 불과 23년 만에 일입니다.
그렇게 동아시아 무역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장보고가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청해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해서 신라에 많은 부를 가져다준 것을 신라 귀족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라 귀족들이 장보고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옹졸하고 편협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이고 결국 신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징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장보고는 꿈을 가질 수조차 없었던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도전을 통해 결국 바다의 신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그의 도전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후에 궁예, 견훤, 왕건과 같은 호족들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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