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생 김만덕 정조를 사로잡다
1. 김만덕이 자라온 섬 '제주' 조선시대에는 일평생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김만덕은 제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요즘에 제주도 하면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상상하면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휴양지를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제주도는 지금의 이미지와는 180도 달랐습니다.
일평생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제주였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왜 가기 싫은 섬이었을까요?
화산섬이었던 제주땅은 당시에는 너무 척박해 쌀농사를 짓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또한 제주도를 수시로 침략하는 왜구들의 약탈에 시달리기까지 합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절대 살고 싶지 않은 험지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제주도의 이미지가 나빴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였기 때문입니다.
중죄를 지었거나 역모를 꾀었거나 왕족 중에 폐위된 자 등 그야말로 중죄인들이 제주로 유배를 보내졌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광해군'을 들 수 있습니다.
2. 김만덕, 제주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다
조선의 험지, 사방이 바다인 척박한 섬 제주에서 김만덕 가족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1739년, 김만덕은 양인 부모님 아래 2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납니다.
김만덕의 아버지는 육지를 오가면서 장사를 하던 제주 상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제주산 물건을 육지에 나가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 와서 되팔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김만덕은 어릴 때부터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육지를 오가던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배를 타고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때때로 어린 김만덕은 바다 건너 세상을 상상하던 천진난만한 제주 소녀였습니다.
3. 삼 남매, 차례로 부모를 여의고 뿔뿔이 흩어져 결국 김만덕 홀로 남게 되다
그런데 김만덕이 11살이던 1750년 가을, 어린 김만덕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나주에서 제주도로 오는 배를 타고 오던 아버지가 그만 거대한 풍랑을 맞닥뜨리고 파도에 휩쓸려 그대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약 1년 뒤, 12살 김만덕에게 또 하나의 비극이 연이어 찾아옵니다.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은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김만덕의 어머니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쓰러진 후 시름시름 앓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김만덕 삼 남매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척박한 제주섬의 고아로 덩그러니 남겨지고 만 것입니다.
고아가 된 삼 남매는 얼마 뒤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남자 형제 둘은 일손이 되기 때문에 허드렛일을 도우라고 각각 친척들이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홀로 남겨진 어린 김만덕은 어떻게 됐을까요?
안타깝게도 여자아이다 보니 일손에 도움이 안 된다며 친척 모두에게 외면당합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12살의 김만덕은 앞으로 날들이 너무나도 막막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SwNzeRzBSE
4. 홀로 남겨진 김만덕, 제주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천민'으로 전락하다
그런데 이때 홀로 남겨진 김만덕에게 누군가 손을 내밉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돌아가서 의탁할 곳이 없어서 기생의 집에 의탁하여 살았다'
<번암집>
부모를 잃고 어디에도 갈 때가 없었던 김만덕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바로 제주 기생이었습니다.
그 기생은 나이가 들어서 일이 거의 없는 늙은 기생인 '퇴기'였습니다.
늙은 기생이 김만덕에게 손을 내민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관청소속인 기생들의 경우, 일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누군가를 대신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대신해서 기생이 되어줄 수양딸을 찾던 늙은 기생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부모를 잃고 갈 곳도 없는 김만덕이었습니다.
만일 김만덕이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 먹고 살길은 해결할 수 있겠지만 퇴기의 뒤를 이어서 기생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김만덕이 기생이 될 경우 지금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분'이었습니다.
원래 김만덕의 신분은 부모님을 따라 '양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 어머니 신분을 물려받는 법에 따라서 천민으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한번 천민이 되면 천민 신분 자체가 대대손손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피할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본인이 원해서 천민의 삶을 선택할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김만덕은 기생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만덕은 천민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5. 김만덕, 조선의 예능인 '관기'가 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김만덕의 나이가 1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김만덕은 또 한 번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라는 화첩에 실린 그림 중 하나입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고을을 사찰하는 모습을 기록한 화첩입니다.
바로 그림 속 여인들의 정체를 통해 김만덕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의 정체는 관청의 기생 '관기(官妓)'입니다.
김만덕이 그림 속 기생처럼 관기로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모든 기생은 거주지 관청에 등록되기 때문에 관청의 기생명단인 '기적'에 올랐고 김만덕 역시 제주 관청에 등록되어서 제주에서 기생활동을 하게 됩니다.
사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생은 지금으로 치면 '예능인'이었습니다.
현재의 인식과 달랐던 조선시대 기생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일단 기생은 노래, 춤,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한 기예를 두루 익히고 양반문화인 글과 시 짓기 등을 두루 익혀 양반 문화까지 섭렵해 수준 높은 교양을 지녔다고 합니다.
조선 관기들은 신분 자체는 천대받는 천민이었지만 수준 높은 재능을 뽐내며 사랑받고 주목받던 조선의 예능인이었습니다.
김만덕은 주로 제주 관청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해서 춤, 노래, 기예 등의 예능적 재능을 뽐내고 관리들의 말벗을 하는 것이 일을 했습니다.
당시 김만덕의 모습을 기록한 기록이 있습니다.
'자색이 있어 부(府)에 속한 기생으로 뽑혔고 기예를 배울 때 무엇이나 다 잘했다'
<감은편>
'자색이 있다'는 뜻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김만덕은 악기나 춤 등을 능수능란하게 배우고 다 잘했던 것 같습니다.
기생 김만덕에게 또 다른 비범한 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격이 활달하여 대장부의 기상이 있었다'
<감은편>
김만덕은 활달한 성격으로 남들과 잘 어울리면서 남다른 기상이 돋보이는 당찬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최재복의 <만덕전>에 보면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생 노릇을 하였으나 그 자신은 기생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김만덕은 생계 때문에 비록 천한 기생이 되었지만 남들에게 휘둘리며 살지 않고 줏대 있고 당찬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6. 김만덕, 인기 기생으로 부와 명성을 동시 쌓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주 있고 성격이 활달한 기생 김만덕의 인기는 어땠을까요?
제주 관리들 사이에서 금세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었습니다.
인기를 얻은 기생 김만덕에게 따라오는 것은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당시 기생들은 인기에 따라서 상여금을 받았기 때문에 인기 많은 김만덕은 그야말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됩니다.
7. 김만덕, 평생 혼자 살기로 결심하다
시간이 흘러 관기 중에서도 제법 서열이 높아진 김만덕의 나이는 어느덧 스무 살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김만덕의 인생이 또 한 번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김만덕의 의지만으로 선택한 일 때문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당시 조선의 상식을 완전히 깨트리는 충격적인 행보였습니다.
'김만덕은... 탐라의 사내들을 머슴으로 거느리기는 했으나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았다'
<번암집>
김만덕이 평생 혼자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비혼결심을 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혼기가 차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며 가족을 꾸리는 것이 당연했던 문화였습니다.
그렇다면 기생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기생의 경우에는 결혼할 나이쯤 되면 양반이나 유력 인물의 '첩'이 되곤 했습니다.
신분상 첩이 될 수밖에 없었고 편안한 노후를 위해 첩이 되는 것을 대부분의 기생들이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김만덕은 그런 조선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으로 배우자 없이 자발적으로 홀로 서겠다고 당찬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김만덕이 사는 곳이 김만덕의 비혼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만덕이 살았던 제주는 오래전부터 '삼다(三多)'의 섬으로 유명합니다.
제주는 세 가지가 많다는 것인데 바로 '바람, 물, 여자'입니다.
이 중 제주에는 예전부터 여자가 많았는데 남자들이 뱃일을 하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가 죽는 일이 많아 홀로 강인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김만덕에게도 그런 제주 여인들의 독립적이고 억척스럽고 당차고 씩씩한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만덕은 여자고 천민이고 이런 것과 상관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8. 김만덕, 장사를 하기로 결심하다
그리고 이때 김만덕은 오랫동안 하던 관기일 '밖'으로 서서히 눈을 돌립니다.
나이가 들면 입지가 좁아지는 기생일과는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김만덕은 고심 끝에 본격적으로 장사일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타의로 선택한 기생의 삶이 아닌 자신이 직접 선택한 상인으로서의 삶에 남은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관에 속했던 관기가 장사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관기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다 보니 관기로 적을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관리들이 용인해 주는 한도에서 남는 시간에는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기생 김만덕, 왜 하필 장사를 결심한 것일까요?
바로 관기로 일할 때 김만덕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습니다.
김만덕이 들은 것은 여러 가지 제주도 밖의 이야기들이었고 김만덕은 아마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에 대해서 육지에서 온 관리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김만덕이 살던 18세기 당시 조선은 상업이 굉장히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는 큰 시장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물건을 팔아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김만덕이 들은 그런 이야기들 속에는 자연히 제주도의 어떤 물건이 육지에서 불티나게 팔리더라 혹은 어떤 상인이 장사로 떼돈을 벌어 돈방석에 앉았다고 하더라 하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김만덕은 장사로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직감이 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김만덕에게 장사는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만덕의 아버지가 상인으로 장사를 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듯이 자신도 장사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직감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자로 그것도 관기의 신분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김만덕 본인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만덕은 호기롭고 당차게 장사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9. 김만덕, 상인들을 위해 숙식, 장사까지 모두 한꺼번에 가능한 원스톱 점포를 만들다
김만덕이 장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장사를 할 물건을 찾던 그때 김만덕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주도로 오는 육지상인들과 육지로 나가는 제주 상인들이었습니다.
김만덕은 오고 가는 그 상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김만덕은 관기로 악착같이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해서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할 수 있는 장소 즉 상거래를 할 수 있는 '점포'를 하나 세웁니다.
이것은 오고 가는 상인들이 쉽게 들를 수 있게 교통의 요지인 포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만덕은 이곳에서 상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먹을거리를 판 것입니다.
김만덕의 점포는 단순히 숙식만 해결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오는 상인과 상인들이 서로 거래할 수 있도록 연결도 해줍니다.
상인들이 김만덕의 점포에 오면 잠자리는 물론이거니와 먹을거리, 장사까지 상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만덕은 점포를 통해 일종에 원스톱 거래 시스템을 구축한 것입니다.
이렇게 김만덕은 점포에서의 인맥과 정보를 통해서 육지상인들과 직접 거래까지 하게 됩니다.
점포에서 만든 관계로 육지에 거래망까지 구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0. 김만덕, 수요공급에 맞춰 이윤을 극대화하여 장사하다
그렇다면 김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인 물건은 주로 무엇이었을까요?
김만덕이 선택한 주력상품은 바로 '쌀'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쌀이 너무 귀했습니다.
제주땅은 화산섬이라서 물이 지하로 잘 빠져나가다 보니 논에서 물을 가둬서 하는 쌀농사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김만덕은 바로 이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렇게 김만덕은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쌀을 사는 과정에서 김만덕 안에 내재되어 있던 상인 본능이 유감없이 발휘되게 됩니다.
'재화를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내어 팔거나 쌓아놓거나 했다'
<번암집>
김만덕은 재물을 늘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쌀값이 싼 풍년인 가을에 쌀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점포 창고에 저장해 놓은 후 쌀이 귀한 봄에 모아둔 쌀을 비싼 값으로 판매한 것입니다.
김만덕은 수요공급을 철저히 예측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했던 것입니다.
11. 김만덕, 양반의 '갓'에 주재료인 '말총'과 '양태'를 육지로 내다 팔며 사업을 키우다
이뿐 아니라 김만덕은 그렇게 쌀을 사들여 제주에 팔면서 한편으로는 제주도에서 나는 물건들을 육지 쪽으로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김만덕이 육지로 내다 판 대표적인 제주도 특산품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시대에 팔면 돈이 되는 제주도 아이템은 바로 조선 양반들의 필수품 양반의 '갓'입니다.
김만덕이 찾은 최고의 사업아이템 '갓'은 말의 갈기나 꼬리털인 말총이 주재료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제주산 말총은 질이 좋고 튼튼해 갓의 재료로는 최상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챙 부분은 양태(양대)라고 하는데 이 양태는 대나무로 만듭니다.
대나무를 명주실처럼 가늘게 뽑아서 넓적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파는 것이었습니다.
김만덕은 제주도의 솜씨 좋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이 양태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육지로 내다 팝니다.
그런데 이 갓이 뜨거운 인기였던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장사가 활발해지면서 떼돈을 버는 장사꾼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들은 돈으로 양반 신분까지 샀던 것입니다.
이렇게 양반 신분을 산 사람들이 너도나도 양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갓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조선의 유행바람을 타고 당대 최고 품질로 명성이 자자했던 제주 말총이나 양태의 가격은 수요의 폭발과 함께 급상승합니다.
제주산 말총과 양태가 한양으로 올라가면 가격이 무려 100배 가까이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말총과 양태를 실은 김만덕의 배가 전라도 포구에 도착하면 상인들이 서로 사겠다며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김만덕은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며 점차 제주 상권의 큰 손으로 입지를 다집니다.
김만덕은 남다른 장사 감각으로 제주도의 '거상'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 김만덕, 음해하는 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사를 이어가다
그런데 장사를 한 지 10여 년, 성공한 김만덕을 두고 뒤에서 이런 말도 흘러나옵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서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군(群)의 기생들조차도 침을 뱉고 욕하였다'
<효전산고>
김만덕이 남자들 돈을 빼앗고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김만덕이 관기일을 주업으로 하던 당시에 이렇게나 나쁜 사람이었다면서 음해하는 말들이 제주도 세간에 떠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난에 장사꾼이 된 김만덕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김만덕은 이런 말들에 아랑곳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만덕이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사 생활을 이어가 김만덕의 나이 어느덧 50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김만덕은 누가 뭐래도 명실상부 조선최초 제주도 여성 CEO 우뚝 서게 됩니다.
13. 김만덕, 제주도 흉년과 기근으로 장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다
거칠 것 없이 달려오던 김만덕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칩니다.
김만덕이 도저히 장사를 이어나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데 내년 봄이면 틀림없이 금년보다 배나 더 굶주림을 호소할 것입니다'
<정조실록>
이것은 현재 제주도 지사 격인 제주도 목사(사또)가 왕인 정조에게 긴급보고한 내용입니다.
정조 재위 14년째 되던 1790년부터 3년 넘게 이어진 대기근 시기에 기록된 보고입니다.
이 당시 조선에서 손꼽을 만큼 극심한 흉년과 기근이 제주도에 닥쳤던 것입니다.
흉년과 기근이 닥친 제주도에서 김만덕의 사업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시기 실록기록을 보면 기근 전인 1794년 제주도 전체 인구수가 6만 천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 불과 1년 사이에 1만 8천 명이 사망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옵니다.
백성의 1/4이 죽고 쑥대밭이 된 제주도, 김만덕이 장사를 그만둬야 할 만큼 제주도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 갔습니다.
14. 제주도로 보낸 구휼미를 실은 배가 파손되어 900석이 되는 곡식이 바다에 잠겨 못쓰게 되다
조정의 도움이 절실한 제주도의 상황을 전해 들은 정조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이 해에 구휼미를 보내야 할 곳이 사실 제주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전역이 흉년과 기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만 특별히 더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로서는 제주도만 특별히 배려하기 어려웠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제주도로 곡식을 보내라!'
제주도 기근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정조는 조선 조정과 지방 관아들이 보유한 곡식을 끌어모아서 제주도백성들을 살리려고 즉각 보내기로 합니다.
그렇게 1795년 2월, 간신히 끌어모은 곡식 1만 1천여 석이 수십 척의 배에 나눠 실립니다.
제주도의 생명줄인 구휼미를 실은 이 배가 제주도를 향해 힘차게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렵게 구한 구휼미를 보내고 며칠 후, 밤에 잠자리에 들려는 정조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 긴급한 보고가 날아듭니다.
'5척의 배가 파손되어 수백 포에 달하는 곡식이 못 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조실록>
이때 바다에 잠겨버린 곡식이 무려 900석 약 150톤이나 되는 양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나머지 배가 도착했지만 그 일부 곡식으로는 제주도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제주도는 정조의 노력에도 기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15. 김만덕, 전재산을 투자해서 제주도를 구할 쌀을 직접 사 오기로 결정하다
이 비보는 김만덕의 귀에도 들어갔고 침몰 소식을 접한 김만덕은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김만덕은 자신의 사비로 배를 띄어서 육지에서 직접 곡식을 사 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대담한 사업가인 김만덕에게도 어마어마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김만덕이 보낸 운반선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만덕이 육지에서 쌀을 사 오는 문제는 돈 문제를 넘어 자칫 풍랑의 위험 속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만덕은 이 쌀을 사는데 지난 30여 년 동안 장사해서 모은 전 재산을 투자하여 쌀 60 섬, 약 10톤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양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김만덕에게는 돈보다는 고향 제주도가 죽음의 섬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걸었던 김만덕의 결정에 대한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천만 다행히 도 김만덕이 구매한 쌀이 제주도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김만덕이 제주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기꺼이 구매해 온 쌀을 제주 관아에 내놓자 제주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눠 먹었습니다.
구휼미를 나눠줄 때 성인 남성 1명당 두 주먹(두 홉)씩 나눠준다면 무려 3만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양의쌀이었습니다.
이전에 김만덕을 모함하고 비방한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의 엄청난 선행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주 백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모두 만덕의 은혜를 찬송하여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네"라고 했다'
<번암집>
김만덕의 통 큰 기부로 제주도는 오랜 굶주림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김만덕은 진짜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입니다.
16. 정조, 제주목사에게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고 보고하라고 명하다
그렇게 제주도는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 목사가 김만덕을 급하게 불러드립니다.
제주 목사 앞으로 이런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경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준 뒤 보고하라'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였습니다.
정조가 김만덕이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고 이를 보고하라 제주목사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정조는 왜 이런 어명을 내렸던 것일까요?
제주도 구휼이 끝난 후인 1796년 6월, 정조는 구호물 배분 보고서를 받습니다.
제주도 백성들에게 구호물이 잘 나누어졌는지 보고서를 읽던 정조에게 보고서 속 한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백미 60 섬은 노기 만덕이 원납 한 것입니다'
<일성록>
김만덕이 60 섬의 백미를 기부했다는 내용이었으며 이를 본 정조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관리도 아니고 양반도 아닌 일개 천민인 기생이 전재산을 털어서 육지에서 직접 쌀을 사 와 기부했다는 사실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정조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글을 읽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덕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많은 쌀을 마련해 굶주리고 궁핍한 백성을 도와주는 것인가'
정조는 김만덕의 행동이 너무 기특하고 크게 감동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소원이든 말만 하면 들어주겠다는 이 상황에서 김만덕은 어떤 소원을 말했을까요?
신분회복이었을까요?
김만덕 소설 등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20대 초반에 양인으로 신분이 회복됐다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천민을 벗어난 신분 회복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다른 시선이 있습니다.
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공식 기록을 보면 김만덕은 면천이 되지도 본인이 면천을 원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어서 양인으로의 신분회복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7. 정조, 제주의 '출륙금지령'때문에 고민에 빠지다
이때 김만덕은 제주 백성으로서 꿈으로만 그렸던 바로 그것, 금지된 소원을 용기 내서 말합니다.
심지어 김만덕의 소원을 들은 제주 목사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주 목사를 깜짝 놀라게 했던 김만덕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만 한번 서울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번암집>
김만덕의 첫 번째 소원은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밟아본 땅인 서울, 즉 한양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만덕의 두 번째 소원은 명산 중에 명산으로 손꼽히는 조선 제일의 명산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소원을 듣자마자 정조는 고민에 빠집니다.
김만덕은 절대 제주도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도 백성 모두의 발을 묶었던 '출륙금지령'이라는 법 때문이었습니다.
이 법은 김만덕이 태어나기 110년 전 인조 때 만들어진 법인데 제주도 백성은 남녀노소 그 누구도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관아의 허락을 받은 일부 남성들, 일부 극소수의 상인들만이 육지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여성이었던 김만덕은 어떠한 이유로라도 절대 육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출륙 금지령은 왜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조선 백성들은 살기 힘든 제주도를 떠나 너도나도 육지로 도망을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제주도에서도 어쨌든 세금을 받아야 되고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인 전복이나 귤, 말 등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제주도 백성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김만덕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육지로 나갈 수 없는 것이 한이 되어 금은보화 다 필요 없고 꿈에나 그리던 육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김만덕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려면 국법인 출륙금지령을 깨야만 했던 것입니다.
고심 끝에 정조는 결정을 내립니다.
18. 제주도 거상 김만덕 한양 땅을 밟다
정조는 고심 끝에 김만덕이 제주도를 나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정조는 이례적으로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명을 내려 출륙금지령을 깨트린 것이었습니다.
'김만덕이 여행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라!'
정조는 김만덕이 여행을 하는 동안 머물 곳과 경비 등 필요한 것은 모조리 지원하라는 어명마저 내립니다.
그렇게 한양 도성으로 가서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던 김만덕은 제주도와 천지차이인 화려하고 북적북적한 한양 풍경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19. 정조, 김만덕이 입궁할 수 있게 하려 '의녀 반수'라는 벼슬까지 내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어느 날, 한양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만덕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못 한 일을 마주합니다.
한양에 온 김만덕을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정조가 김만덕에게 특별한 선물을 내린 것입니다.
'(김만덕으로 하여금) 내의원 의녀를 삼아서 모든 의녀의 반수(어떤 무리의 우두머리)에 두었다'
<번암집>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 우두머리인 의녀 반수라는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천민 여성이 받을 수 있는 벼슬 중에서도 최고의 벼슬이었습니다.
천민 여성이 왕에게 직접 의녀 반수라는 벼슬을 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정조는 왜 갑자기 김만덕에게 관직을 내렸을까요?
당시 조선 궁궐 법도상 기녀 신분 김만덕은 궁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서 김만덕은 조선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제주 기생에서 천민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오르게 됨으로써 그야말로 인생역전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20. 김만덕, 정조와 만나다
의녀 반수를 하사 받은 다음 날, 김만덕은 가마를 타고 창덕궁으로 향합니다.
드디어 조선의 왕, 하늘 같은 정조는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조는 김만덕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천한 기생 출신 김만덕이 정조까지 만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21. 정조, '초계문신'의 시험문제로 '만덕'을 제시하고 '만덕 전' 편찬을 명하다
김만덕을 향한 정조의 예우와 칭송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자 아주 파격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정조는 김만덕이 한양에 올라와있던 그때 초계문신들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제시어 '만덕'이라는 두 글자를 떡 하니 내놓았던 것입니다.
초계문신들은 정조가 자신을 보필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특별히 선발해서 직접 육성하던 문신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문신 중 한 명이 다산 정약용이었고 직접 육성하다 보니 초계문신들에 대한 정조의 애정 또한 각별했습니다.
이런 초계문신의 시험 문제로 김만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김만덕을 만난 후 정조는 좌의정 '채제공'에게 김만덕을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로 '만덕전'을 편찬하라고 명을 내려 김만덕의 일생을 전기로 남깁니다.
김만덕의 경우에는 정조입장에서는 양반이나 조정 대신들에게 김만덕이 기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렇게 어려울 때 그들도 헌신하라는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조는 관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김만덕을 알려 본받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김만덕은 한양에서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22. 김만덕,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유람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7년 3월, 따뜻한 봄기운이 번지던 어느 날, 김만덕은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드디어 김만덕이 금강산의 절경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우뚝 솟은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초록으로 물들어가던 아름다운 봄의 금강산의 모습은 마치 화폭처럼 절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만덕은 왜 금강산에 가고 싶었을까요?
사실 조선시대는 유람자체를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여행이 하고 싶은 선비들조차 방에 누워 상상여행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조선시대 선비들이 꼭 한번 여행하고 싶은 곳 1위가 바로 '금강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것은 특권이자 로망이었던 것입니다.
조선 선비들조차 꿈만 꿨던 금강산을 제주 기생출신 김만덕이 직접 다녀온 것입니다.
번암 채제공은 한라산과 금강산까지 본 김만덕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수많은 사내 중 (김만덕만 한)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겠는가!'
채제공은 이렇게 말하며 김만덕을 치켜세웁니다.
김만덕은 평생의 소원 두 가지를 모두 이루었으니 말로 다하지 못할 벅참과 뭉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23. 김만덕, 조선제일의 셀럽으로 등극하다
그렇게 평생의 소원을 이룬 김만덕은 정조에게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한양에 돌아온 김만덕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수군대는 것이었습니다.
'만덕의 이름이 서울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한 번 만덕의 얼굴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 없었다'
<번암집>
벼슬 높은 자들과 선비들이 김만덕의 얼굴 한 번 보려고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김만덕이 금강산에 간 사이 정조의 총애를 받는 김만덕의 이야기가 궁궐 담을 넘어서 한양 전체에 퍼진 것입니다.
김만덕이 한양을 들썩이게 한 이른바 조선 제일의 셀럽이 된 것입니다.
김만덕이 제주도에서 한양에 왔을 때 이런 순간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조선시대라는 배경에서 김만덕은 여성이자 기생인 천민으로서 자신이 모은 모든 재산을 내놓은 점이 정말 특별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장사도하고 이룬 모든 것을 기부까지 한 것에 대해서 정조의 의도대로 백성들 사이에 칭송이 자자해 그들의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간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낸 김만덕은 제주도로 금의환향합니다.
24. 거상 김만덕, 이룬 것을 어려운 이를 위해 내어 준 누구보다 '큰 사람 (巨人)'이었다
제주도로 돌아온 김만덕은 계속해서 장사를 했고 그렇게 15년이란 시간이 더 흘러 1812년 10월 22일, 김만덕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만덕은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유언을 남깁니다.
'나의 전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하겠습니다'
김만덕은 양아들의 몫을 떼고 전재산을 제주도 빈민들을 위해 내놓습니다.
제주라는 척박한 섬에서 태어나 천민인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김만덕은 신분을 초월해 피땀눈물로 일군 평생 모은 재산을 기꺼이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귀감으로 떠오릅니다.
김만덕은 진정한 거상이 되어 이룬 것을 모두 내준 누구보다 '큰 사람(巨人)'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0WHuDQWbM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KBS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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