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부터 중종까지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에 몰두했던 유자광
1. 유자광, 어릴 때부터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인물이었다
때는 조선 초기 세종이 재위하던 1439년이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떡잎부터 남달랐던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 비해 유달리 총명했고 글도 잘 읽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말타기, 활쏘기 실력도 뛰어나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유자광'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유자광의 가족 중에는 남다른 인물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유자광의 아버지 '유규'였습니다.
유규는 지금의 재정경제부 차관에 해당하는 '정 3품 호조참의'까지 역임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니 유자광 또한 아버지처럼 탄탄대로 관직의 길을 걸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자광에게는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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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얼자(孼子)였던 유자광,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다
사실 유자광의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닌 집안의 '노비'였습니다.
유자광은 양반인 아버지 그리고 노비출신 첩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이 '서자'입니다.
서자는 양반인 아버지와 첩이지만 양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말합니다.
얼자는 양반인 아버지와 여종 혹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말합니다.
서자와 얼자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 있으니 바로 '서얼'입니다.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조선 시대에서 천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유자광은 서자보다도 더 낮은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해도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당시는 '정자'가 아닌 '서얼'에 대해서는 출세의 지름길인 문과 과거 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유리천장이 도처에 있어 서얼들은 높고 중요한 자리에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자광을 향한 차별은 사회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이어집니다.
얼자인 유자광이 어려서부터 너무 총명하기까지 하니 양반 이복형들이 유자광을 미워하면서 엄청난 견제를 했기 때문입니다.
첩의 자식이었던 유자광은 어려서부터 늘 눈칫밥 신세였던 것입니다.
3. 세조, '이시애의 난'으로 즉위 최대의 위기를 겪다
유자광은 성인이 되고 난 뒤 고향 남원을 떠나서 한양의 경복궁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얼자인 유자광은 출세의 지름길인 문과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는데 어떻게 한양 경복궁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유자광은 일반 양인이나 서얼도 볼 수 있었던 '취재'라는 간단한 무술 시험을 통과해서 경복궁 건축물을 지키는 갑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유자광이 과연 갑사 자리에 만족했을까요?
하지만 다른 관직을 가지고 싶어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자광이 29살이 되던 해인 1467년, 유자광에게 문지기를 벗어나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절호의 기회가 생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유자광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사건이었습니다.
도대체 조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함경도에서 당시 왕인 '세조'의 왕위를 위협하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시애의 난'입니다.
당시 조선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분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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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세조에 반기를 든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한반도의 북쪽지역이었던 함경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중 대표적인 인물인 이시애가 함경도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세조에게 불만을 품고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시애가 지휘하는 반란군의 기세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단순한 봉기 수준이 아니라 함경도 전역에서 수천 명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대규모의 반란이었습니다.
이시애의 난은 무려 3개월 동안 진압되지 못한 채 세조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함경도는 북방의 야인들과 만나는 접경지대로 이시애의 반군이 야인세력들과 연합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조 즉위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세조가 이시애의 난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야인과의 연합도 무서웠지만 이시애의 반란군과 도성에 있는 세조의 최측근인 한명회와 신숙주와 같은 공신들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세조 입장에서는 밤에 잠조차 편히 잘 수 없는 정권의 존망이 달린 위기였던 것입니다.
4. 유자광, 이시애의 머리를 가져다 바치겠다는 상소를 세조에게 올리다
그런데 바로 이때 세조의 위기상황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유자광입니다.
유자광은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1467년 6월 14일, 유자광은 한양에서 아주 파격적인 행동을 개시합니다.
'어찌 이제까지는 한 장사도 이시애의 머리를 참하여서 서울에 바치는 이가 없습니까? 신은 비록 비천하더라도 또한 한 모퉁이에 서서 스스로 싸움을 하여 쾌하게 이시애의 머리를 참하여 바치기를 원하옵니다'
<세조실록>
유자광이 직접 전투에 나가서 적장인 이시애의 머리를 가져오겠다는 상소를 세조에게 올린 것입니다.
일개 문지기인 유자광이 올린 상소가 세조에게 전달이 되었을까요?
예상외로 무사히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유자광의 상소를 읽은 세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유자광의 상소문을 본 후 세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글은 참으로 내 뜻에 부합한다. 유자광은 참으로 특별한 인재다. 내 장차 임용하여 그의 뜻을 펴게 하리라'
일개 갑사 신분인 유자광이 세조의 마음을 꿰뚫어 봤고 자신의 글솜씨를 백분 발휘한 상소문으로 세조의 눈에 들었던 것입니다.
상소에 감명받은 세조가 유자광을 직접 부릅니다.
얼자 출신 일개 갑사 출신 유자광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왕을 직접 대면하는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조는 자신의 최대 고민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제압할 방법이 있는지를 유자광에게 물었습니다.
유자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정병 300명을 주시면 이시애의 목을 베어, 대궐 아래에 대령하겠습니다'
사실 당시 유자광은 장수가 아니었기에 정병 300명을 절대 달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유자광은 일개 갑사 신분으로 왕에게 이런 대담한 요구를 합니다.
유자광의 대담한 요구를 들은 세조는 그 뜻이 기특하다며 유자광을 위한 연회까지 베풉니다.
상소문이 아닌 직접 만난 유자광 역시 세조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입니다.
5. 세조, 유자광을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호위부사인 '겸사복'으로 임명하다
세조와 대면한 다음 날, 유자광에게 또다시 궁궐에 입궁하라는 어명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궁궐로 들어간 유자광은 깜짝 놀랍니다.
바로 세조가 유자광을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호위부사인 '겸사복'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유자광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가 단 이틀 만에 대통령 바로 옆을 지키는 경호원이 되는 특급승진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후, 유자광은 조선 조정의 한가운데서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급기야는 이시애의 난의 평정을 의논하는 중신 회의에까지 참석하게 됩니다.
문지기로 궁궐 앞을 지키던 유자광이 어느새 궁궐의 핵심부에 떡하니 서게 된 것입니다.
6. 유자광, '별동대'를 지휘하며 이시애 반란군을 물리치는데 일조하다
며칠 후 세조는 다시 한번 유자광을 부릅니다.
세조가 유자광에게 어떤 작전을 위해 독자적으로 게릴라처럼 행동하는 부대인 '별동대'를 맡긴 것입니다.
별동대에는 5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 50명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명실상부 선봉장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얼자 출신의 말단 갑사가 '겸사복'으로 임명된 지 한 달 만에 직접 부하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이 된 것으로 당시 이런 행보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467년 8월 4일, 숨 막히는 전투 끝에 유자광의 별동대가 포함된 진압군의 압승으로 이시애의 반란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7. 유자광, 얼자출신으로는 조선 최초로 '정 5품 병조정랑'에 오르다
그 이후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운 유자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유자광은 바로 유규의 서자인데, 특별히 종군하는 데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갑자기 병조정랑에 임명하였다'
<세조실록>
유자광이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인사담당관에 해당하는 '정 5품 병조정랑'으로 초고속 승진한 것입니다.
얼자로서 정 5품 정랑이 된 사람은 유자광이 조선 최초입니다.
유자광은 신분의 유리천장을 완벽히 뛰어넘고 중앙의 요직을 당당하게 차지하게 됩니다.
8. 유자광, 병조정랑 자리를 차지하자 조정신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지만 세조가 지켜주다
그런데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기쁨은 잠시 후 끝나게 됩니다.
유자광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조정의 신료들이었고 그들이 유자
광의 병조랑랑 임명에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조정의 진료들은 왜 유자광의 병조정랑 승진에 반발한 것일까요?
공을 세운 데 대해서 포상을 하는 것은 신분에 맞는 벼슬을 내리면 되는데 유자광의 공로에 비해 병조정랑이라는 직책이 갖는 무게감과 중요성 때문에 너무 과하다 생각하여 조정 신료들 사이에 난리가 난 것입니다.
반대에 부딪친 유자광은 이대로 병조정랑의 자리에서 물러났을까요?
이 위기의 유자광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세조입니다.
세조는 능력 있는 사람을 세우는데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유자광의 관직을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9. 세조, '별시'를 열어 유자광이 문과 시험을 치르게 해 주고 '장원 급제' 하게 하다
그런데 이런 세조의 비호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얼자 출신에다가 문과 과거시험도 치르지 않은 유자광을 왜 병조정랑에 올리냐'는 신료들의 비판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던 것입니다.
1468년 2월, 30살이 된 유자광에게 신료들의 반대를 뒤엎을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유자광이 문과 과거시험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업자들은 신분상 절대 문과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지만 세조가 유자광을 위해서 별시를 열어준 것입니다.
세조는 유자광의 '얼자'라는 태생 자체를 바꿔줄 수는 없지만 문과 과거시험으로 신분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없애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이 쓴 답안지는 시험관들에게 선택되지 않고 불합격하게 됩니다.
곧이어 유자광에게 또 한 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 시험에서 떨어진 유자광이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세조가 유자광의 답안지를 1등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세조가 합격자 중에 유자광이 없자 낙방자들의 시험지를 가지고 오게 하여 살펴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자광의 대책문이 좋은 것 같은데 왜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그런 후 세조는 유자광을 문과 1등으로 올려버렸고 유자광이은세조의 도움으로 별시에서 장원 급제까지 하게 됩니다.
10. 세조, 유자광에 '정 3품 병조참지'로 임명하다
그리고 유자광이 과거에 합격한 뒤, 세조는 유자광에게 또다시 엄청난 관직을 내립니다.
바로 '정 3품 병조참지'로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인사담당 국장급입니다.
그렇게 종 9품 문지기 갑사였던 유자광이 상소문 하나로 시작해 정 3품 병조참지까지 초고속 승진하며 세조의 총애를 받는 젊은 신하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렇게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으로 인생 최고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11. 유자광, 자신을 총애하던 유일한 뒷배 세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를 맞다
그런데 이런 유자광에게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자광을 발탁하고 키워주었던 세조가 1468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유자광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조정 신료들은 유자광을 끌어내리기만을 호시탐탐 노렸었는데 세조라는 유일한 뒷배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유자광은 힘들게 오른 병조참지 자리에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12. 유자광, 신흥 무신 '남이'를 역모죄로 고발하여 처형당하게 하다
1468년 9월 7일, 세조의 뒤를 이어 세조의 아들 '예종'이 조선 제8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세조를 통해 꿀맛 같은 권력의 맛을 본 유자광은 세조에게 그랬듯 새로운 왕 예종에게도 눈에 들 기회를 노립니다.
그리고 예종이 즉위한 지 50여 일이 지난 1468년 10월 24일, 유자광은 자신이 야심 차게 준비한 사건을 터트립니다.
세조대의 신흥 무신이었던 '남이'가 반역을 일으켰다면서 유자광이 역모죄로 그를 고발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면서 20대에 1등 공신자리에 오르고 지금의 국방부장관인 '병조판서'의 관직에 임명받은 고위 무사였습니다.
유자광이 이렇게 대단한 인물을, 게다가 이시애 난을 진압했던 동료이기도 했던 남이를 역모죄로 고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유자광이 남이를 고발한 이유는 남이의 이 문제적 말 때문이었습니다.
'혜성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남이는 유자광에게 원래 혜성은 금방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데 사라져야 할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반역의 기운이다'
유자광은 이처럼 남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듣고 이것은 틀림없는 역모라면서 고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자광의 고발을 듣고 예종은 남이를 즉시 죄인으로 체포했고 국문까지 합니다.
이때 남이는 유자광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일 뿐 역모는 사실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후, 남이는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유자광의 고변 후 단 사흘 만에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남이가 극형에 처해지고 만 것입니다.
예종은 왜 유자광의 고발만으로 남이를 서둘러 처벌한 것일까요?
예종은 조선 조정의 기강을 잡고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고자 본보기로 왕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은 남이를 처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자출신의 갑자였던 유자광은 왕을 해치려는 역모를 막아내고 예종대에 무려 1등 공신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예종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유자광이 역모를 고발하면서 세조에 이어 예종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천한 신분으로 왕의 비위만 맞추는 사람이라면서 유자광을 보는 조정 신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지만 유자광은 조선 신료들의 싸늘한 시선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신료들의 반대를 거뜬히 이겨내고 지금까지 유자광을 지켜주고 자리를 올려 준 것은 오로지 왕의 총애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13. 유자광,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지만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성종에게 다가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그런데 1년 뒤, 유자광에게 또다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예종이 즉위 15개 월만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조선에 자기편 하나 없는 유자광이 믿을 사람은 오직 왕뿐이었는데 예종이 또다시 세상을 떠나자 유자광의 머리를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1469년 11월 28일, 유자광은 세조, 예종에 이어 또다시 새로운 왕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입니다.
유자광은 성종의 눈에 띌 기회만을 노리지만 이번에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성종은 왕이 되기 전에 13살까지 궁 밖에서 살았던 인물로 유자광과 성종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자광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종 대에 1등 공신에 올랐으니 이제는 아무리 조정 신료라 하더라도 유자광을 쉽게 끌어내리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유자광은 왜 이렇게 불안해했던 것일까요?
유자광이 물론 1등 공신이기는 하나 조정 신료들의 유자광에 대한 반대 의견이 워낙 컸기 때문에 입지가 위태로웠고 때문에 유자광은 성종의 총애가 절실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직접 정사를 돌보는 '친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조의 아내이자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유자광에게는 성종을 만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조차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얼자 출신 유자광은 자신을 비호하는 왕이 없으면 자신을 싫어하는 신료들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던 터라 그러니 하루빨리 새로운 왕 성종의 마음을 얻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유자광의 급한 마음과는 달리 성종에게 다가갈 기회는 무려 7년 동안이나 허락되지 않습니다.
14. 유자광, 성종의 의중을 간파하고 당대 최고 권력가 '한명회'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다
7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유자광은 작심한 듯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을 상소문 한 장을 올립니다.
'신이 듣건대, 농담으로 하는 말도 생각한 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한명회가 노매 해서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유자광은 세조대의 공신세력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가 한명회를 역모죄로 고발합니다.
당시 성종 즉위 후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성종이 친정을 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라고 하는 '철렴'선언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명회가 성종의 친정에 반대의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지켜본 유자광이 한명회가 신하로서 넘어서는 안 되는 큰 죄 즉 '불충죄'를 범했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유자광이 한명회를 고발하고 나선 대에는 더욱더 심오한 계산이 깔려있었습니다.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공신세력들의 권력이 세조 때부터 20년이 넘도록 너무 커져있었습니다.
성종은 이대로라면 자신이 친정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유자광은 이러한 판세를 정확하게 눈치채고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15. 유자광, 성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도총관'에 임명되다
성종은 이 사건에 대해 결국 이렇게까지 커질 문제가 아니라면서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지 않고 넘어갑니다.
유자광은 너무 강한 상대방을 만나서 상소의 의도대로 한명회를 몰아내는 데는 실패합니다.
하지만 유자광은 이번 고발로 성종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합니다.
유자광은 세조, 예종에 이어 왕의 마음을 읽어서 이번에는 성종을 사로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유자광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립니다.
'유자광을 도총관에 임명한다'
당시 궁궐을 지키는 부대의 사령관격인 '도총관'은 정 2품으로 무관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이런 유자광을 눈엣가시처럼 보았고 유자광은 그치지 않고 대신들이 유자광에게 완전히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인 상소를 하나 더 올립니다.
어느 날, 흙이 섞인 비가 한 달 동안 지속되자 조정 신료들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재앙이라며 성종왕에게 근신하라고 건의를 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솔선수범해서 근신하고 하늘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나라에 재앙이 닥치는 일이 발생하면 조정 신하들이 이러한 건의를 하게 마련이었습니다.
때문에 신하들의 말을 듣고 성종도 근신하려 했는데 이때 유자광이 성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잘하고 계십니다. 재앙은 전하 탓이 아니옵니다'
유자광은 왕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중신들이 사적으로 풍악을 울리고 술 마시고 사치를 하기 때문에 흙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고합니다.
성종의 눈에 들기 위한 이 상소를 계기로 유자광은 모든 조정 신료들을 적으로 돌렸던 것이며 결국 '간신'이라 낙인찍히게 됩니다.
16. 유자광, 붕당을 만든 혐의로 고발하는 상소 때문에 유배당하다
1478년, 정 2품의 관직을 얻고 유유자적 지내던 유자광의 집에 관군이 들이닥칩니다.
그리고는 관군들은 유자광을 포박해 의금부 감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합니다.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일까요?
'(유자광은) 붕당을 교결하여 조정을 문란케 한 죄이니, 참대시( 만물이 자라고 결실 맺는 시기를 피해 늦가을이나 겨울에 참형을 집행하던 방식 )하고 그 처자는 종으로 삼으며, 가산은 적몰해야 합니다'
<성종실록>
여기서 '붕당'이란 '같은 정치 뜻을 가진 신하들이 무리를 지어 집단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조선은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는 왕조 국가인데 그런 조선에서 왕을 배제하고 신료들끼리 붕당을 만든다는 것은 금기시된 일이어습니다.
그런데 유자광이 조선에서 금기시되는 붕당을 형성했다는 혐의로 조정 대신들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주로 상소문 쓰는 일을 많이 했던 유자광은 이번에는 상소로 고발당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사실 조정 신료들은 얼자라는 비천한 출신임에도 상소를 남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유자광이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간신배들과 어울린 유자광을 무리를 지어 결탁했다는 '붕당형성죄'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결국 조정 신료들의 빗발치는 유자광의 처벌 요구에 유자광은 어렵게 쟁취한 정 2품 관직과 1등 공신의 지위까지 모조리 박탈당하고 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자광은 조정에 진출한 지 11년 만에 모든 영광을 빼앗기고 조정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조정에서 내쫓긴 유자광이 유배를 간 곳은 지금의 부산 '동래'였습니다.
유자광은 이대로 유배지에서 성종에게 잊히면 어떻게 할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유자광은 이대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17. 유자광,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성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자신을 잊지 못하게 하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그때, 유자광은 자신의 존재를 성종에게 어필할 기발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지금 동래 수령들이 백성들에게서 공물을 과도하게 징수한다고 하옵니다'
비위를 고발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쓰고 동래의 시시콜콜한 사정을 상소문에 써서 끊임없이 조정에 올리기 시작합니다.
유자광은 유배지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는 모습을 성종에게도 각인시키려 갖가지 소재들을 긁어 상소문을 써 올린 것입니다.
유자광은 어떻게든 성종이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관심을 끌어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소문 한 장으로 출세길에 오른 유자광다운 처세술이었던 것입니다.
18. 유자광, 사냥을 좋아하는 성종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냥을 찬성하고 나서나 신료들의 반대로 실패하다
유자광이 유배간지 2년이 되던 해인 1480년 11월, 성종이 다시 유자광을 조정으로 불러들입니다.
신료들의 반발에도 성종이 유자광의 복귀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유자광은 죄인으로 전락하면서 빼앗겼던 공신의 칭호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왕에게 자문을 하는 관직인 '종1품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라는 관직에 임명되기까지 합니다.
유자광은 이번에도 늘 그래왔듯이 역시 왕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1481년 10월, 유자광이 성종에게 자신의 충심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 성종은 경기도에 있는 산으로 사냥을 나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성종의 사냥에는 신하들의 반대라는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무력보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나라였기 때문에 궁궐에서 학문을 닦고 정치에 힘쓰는 것이 신하들이 바라는 왕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냥은 무인들을 잔뜩 이끌고 어울리는 행사이다 보니 이상적인 왕의 모습과는 달라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유자광은 사냥을 반대하는 신하들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냅니다.
유자광은 성종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냥 가고자 하는 지역의 지형과 짐승을 잘 아는 농민들을 군사로 동원하고 전하를 위한 사냥을 성대하게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자광의 이 말을 들은 성종은 흡족한 듯 말합니다.
'유자광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종이 원하는 대로 사냥은 추진되지 않습니다.
' 유자광은 천얼로 그 구변을 늘어놓아 임금이 사냥을 좋아하도록 유도하였으니, 이것도 임금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다'
<성종실록>
또 한 번 조정 신료들이 천한 얼자 출신 유자광이 임금이 사냥을 좋아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왕의 마음을 공략하려고 아첨하는 간신의 짓을 한다면 비난하고 나섭니다.
이후에도 유자광은 신료들의 얼자출신이라는 신분 공격을 시도 때도 없이 받습니다.
19. 유자광, 어머니 삼년상 중에 성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상소를 올리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거절당하다
1494년 12월, 유자광에게 인생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는 시련이 닥칩니다.
그렇게 유자광이 겨우겨우 마음을 얻었던 왕 '성종'이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연산군'이 조선 제10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 모시게 된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늘 그래왔듯 유자광은 새로운 왕 연산군에게 냉큼 달려가 얼굴도장을 찍고 싶었을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연산군에게 얼굴을 비추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성종이 사망했을 당시, 고향 남원에서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라 꼼짝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자광은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연산군 눈에 띄어야겠다고 그 방도를 찾기 위해 생각을 거듭합니다.
그러던 차에 연산군의 눈에 띄기 적합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유자광은 한양에 올라가서 성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성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유자광이 삼년상 중 자신의 어머니 묘를 버려두고 가는 것은 자칫하면 효를 저버렸다고 역풍을 맞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자광은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상소문을 올립니다.
'상중이지만 성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겠습니다. 신하의 도리를 지키도록 해주시옵소서. 공자께서 부모 상중이라도 국상에 참여하는 게 옳다 하셨습니다 '
유자광은 구구절절 맞는 말로 간곡함이 담긴 상소문을 써서 올립니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충심을 가상하게 여겼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로 유자광의 상소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연산군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20. 유자광,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초를 제공하다
연산군이 즉위 한지 3년째가 되던 1497년, 유자광은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양으로 돌아옵니다.
조정으로 복귀한 유자광은 호시탐탐 연산군의 눈에 띌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자광은 눈이 번쩍 뜨일 엄청난 정보 하나를 입수합니다.
바로 '사초(史草)'입니다.
사초란 실록을 만들기 위해 사관들이 기록한 자료로 성종이 죽은 뒤 편찬될 성종실록의 사초에 연산군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내용이 있는 것을 유자광이 알게 된 것입니다.
사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된 유자광은 이것이면 연산군의 관심을 바로 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당시 조선의 왕들은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가장 먼저 사초의 문제점을 알리는 사람이 된다면 목숨이 걸린 일이긴 했지만 분명 연산군에게는 충신이 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유자광은 원로 대신들과 함께 연산군을 찾아가 사초에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합니다.
사초에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산군3
'세조가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산에 버려 짐승의 먹이게 되게 하였으며 또한 며느리뻘인 귀인 권 씨를 비롯해 여염의 여인들을 함부로 취하려 하였고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관을 파헤쳤다'
유자광을 통해서 연산군은 증조할아버지 세조에 대한 사초를 알게 됩니다.
연산군은 만약 이 내용들을 그냥 둔다면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세조의 문제적 행동들이 실록에 영원히 남게 될 상황이었던 것이라 이것은 조선 왕실에 대한 능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자광의 고변을 들은 연산군은 문제의 사초를 쓴 사관 '김일손'을 체포합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연산군은 김일손과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모질게 고문하라는 명령까지 합니다.
그 뒤로는 조선 조정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닥칩니다.
이때 사초가 발단이 되어서 연산군이 일으킨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무오사화'입니다.
무오사화는 무오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입니다.
한마디로 조선 최초 사화의 발단은 유자광으로부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연산군이 유자광의 말을 받아들여 무오사화를 일으킨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종을 죽이고 세조가 즉위했을 때 이를 '즉위가 아니라 찬탈이다'라고 보는 정서가 당시 상당히 편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연산군 또한 왕위를 찬탈한 자의 자손인 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조정 대신들과 갈등이 많았던 터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신하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것을 빌미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 했었던 것입니다.
유자광은 이런 정치적 흐름을 잘 꿰뚫어 보고 연산군에게 필요한 것을 제 손으로 찾아 직접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의 마음에 들기 위한 유자광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자광은 사초에서 문제가 될만한 내용을 또 찾아냅니다.
그 글의 제목은 바로 '조의제문(弔義帝文)'입니다.
'조의제문'은 신하였던 항우에게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중국 황제 '의제'를 추모하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은 흡사 세조와 단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자광은 바로 이 '조의제문'이 어린 왕을 죽인 중국의 항우에 빗대어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유자광은 또 한 번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연산군에게 보여줍니다.
이를 본 연산군은 문제의 사초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김일손을 포함한 5명을 거열형과 참형에 처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까지 '부관참시'하고 나서야 이 사달은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의 전말이며 이 무오사화의 중심에 바로 유자광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오사화의 최대의 공로자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그 충심을 인정받아 성종 때도 임명된 적 있는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유자광의 나이 60세였습니다.
또다시 유자광은 왕의 마음과 돌아가는 정치적 판세를 정확하게 읽어냈고 고발과 상소라는 유자광의 생존 기술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1. 유자광마저도 공포에 떨게 한 폐비 윤 씨 문제가 발단이 된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왕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던 유자광조차 공포에 떨게 하는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해지게 하는 '갑자사화'가 벌어집니다.
갑자사화는 갑자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 문제로 신하 100여 명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전하의 모후(폐비 윤 씨)께서는 결국에 사약을 받게 되셨나이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가 후궁들의 중상모략으로 폐비를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까지 듣게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폐비윤 씨를 중상모략한 성종의 후궁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젓갈을 담가버리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후 연산군의 손에 폐비 윤 씨와 관련된 신하들이 하나둘 죽어나갔습니다.
살육을 저지르는 연산군을 지켜보면서 유자광은 '잘못하면 자신도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혹시 화가 튈까 조용히 숨죽여 지냅니다.
이때도 처세술의 달인인 유자광은 연산군의 비위를 잘 맞추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이성적인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천하의 유자광도 연산군의 마음을 읽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갑자사화 기간 동안 유자광은 조용히 지냅니다.
유자광의 눈치로도 연산군의 마음은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폭군 그 자체가 됩니다.
정사는 뒷전이고 전국각지의 미녀들을 불러 모아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습니다.
간혹 바른말을 내뱉은 충신들은 연산군에게 무참히 살해됐고 조선 조정에는 간신들이 득실대기 시작했습니다.
22. 유자광,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반정군'에 속하다
1506년 9월 1일, 조선 왕실이 완전히 뒤집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옥새를 내놓고 동궁으로 옮기시지요'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고 왕위에서 내려오라고 요청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조선에서 신하들이 왕을 폐위한 최초의 사건 '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연산군의 광기 어린 행보에 참다못한 신하들이 칼을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반정을 일으킨 신하들은 단 하루 만에 연산군을 폐위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중종'이 조선 제11대 왕으로 즉위하며 그렇게 하루아침에 연산군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를 갔고 연산군 곁에서 아첨하던 간신들은 반정군의 손에 모조리 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중종반정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연산군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 왔던 유자광이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군 세력으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날 밤, 거사를 주도한 반정세력이 은밀히 유자광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유자광을 찾은 이유는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함께 몰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왜 반정세력이 유자광에게 도움을 청한 것일까요?
유자광이 도총관을 3번이나 했는데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경호원이면서 수도경비사령관을 3번이나 한 것이었습니다.
반정군이 각 부대를 편성해서 지휘관에게 맡기는 데 유자광이 도총관을 하면서 일단의 독립부대를 지휘했던 경험이 있었던 대다 비록 서얼출신이지만 뛰어난 지략으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을 배신하는 '중종반정'이 아이러니하게도 '조정 대신들과 유자광이 처음으로 합이 맞았던 날'이 된 것입니다.
중종반정이 끝난 후 유자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로운 일을 일으킨 공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었는데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를 1등으로 하였다'
<중종실록>
유자광이 새로운 왕 중종 시대에 당당히 1등 공신으로 책봉이 된 것입니다.
새롭게 즉위한 조선 제11대 왕 중종은 유자광이 모시게 된 무려 다섯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것도 당당히 1등 공신의 자리에 올랐으니 유자광은 또 탄탄대로를 걷지 않았을까요?
23. 유자광, 신료들의 상소문 총공격으로 유배 간 뒤 죽음을 맞이하다
그런데 새로운 왕 중종이 즉위한 지 불과 몇 개월 후, 유자광을 위협하는 일이 또다시 벌어집니다.
다름 아닌 셀 수 없이 올라오는 상소문 때문이었습니다.
' 유자광은 서얼 출신의 흉사하고 부정한 자입니다. 유자광은 음흉한 도적의 자질을 가지고 간교한 꾀를 품고 재주와 구변을 써서 간사한 술책을 부리는 자입니다. 무오년에 김일손의 일을 가지고 무죄한 사람을 모함하여 폐주(연산군)에게 함부로 죽이는 단서를 열어놓았습니다.'
세조시대부터 공격받은 출신문제는 물론이고 과거에 벌인 문제들까지 유자광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신료들이 총공격을 했고 유자광을 비난하는 상소들이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그동안 유자광이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한 모든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서 유자광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507년 5월, 유자광은 69세의 나이로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강원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512년, 7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유자광은 조선시대 서얼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성공을 꿈꾼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철저히 배척당한 유자광에게 유일한 출셋길은 왕에게 잘 보여 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조선사회가 서얼이라는 차별이 거두고 유자광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만 봤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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