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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예종, 성종 3명의 왕을 만들어 낸 조선 최고의 킹메이커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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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예종, 성종 3명의 왕을 만들어 낸 조선 최고의 킹메이커 한명회

1. 한명회, '살생부'를 이용해서 왕을 만들다

 

'살생부(殺生簿)'란 '죽을 사, 살 생 자'를 써 말 그대로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둔 명부를 의미합니다.

조선 초기 살생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어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살생부를 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 남자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 최고의 킹메이커 '한명회'입니다.

한명회는 조선 전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인물로 뛰어난 책략가이기도 했습니다.

한명회는 살생부를 만들어 궁궐을 피로 물들이고 자신의 계획대로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들어낸 킹메이커입니다.

한명회가 조선의 왕으로 만드는 킹메이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생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대체 한명회는 어떻게 이 살생부를 이용해서 왕을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킹메이커 한명회가 어떻게 조선의 왕을 바꿨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한명회, 어린 시절부터  공부능력은 부족했어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지략과 처세술, 실행력만큼은 최고였다 

한명회의 어린 시절을 보면 어떻게 킹메이커가 되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한명회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그만의 장점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의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시험'입니다.

한명회의 경우 뛰어난 지략능력등으로 보건대 과거시험을 빨리 합격했을 것 같지만 평생 단 한 번도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합니다.

한명회는 어린 시절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다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한명회를 조선의 킹메이커로 만든 뛰어난 '능력'은 바로 이것입니다.

'문장과 도덕은 내가 참으로 그대만 못하나 사업을 경륜함에 이르러는 내가 어찌 크게 뒤지겠는가'

<한명회 선생 신도비명>

사실 이것은 한명회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 '권람'이라는 사람에게 한명회가 직접 했던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륜'이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공부능력은 부족했어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지략과 처세술, 실행력만큼은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재밌게도 한명회는 위의 문장처럼 공부 빼고는 다 잘했던 인물입니다.

그것은 이후에 한명회가 여러 가지 보여주었던 실제 모습을 통해서도 증명될 수 있습니다.

3. 공부 빼고 다 잘했던 한명회, 음서(蔭敍)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다

 

당시 뛰어난 말솜씨에 지략까지 갖췄다는 한명회는 과거시험에 매번 낙방합니다.

그런데 이때 한명회에게 자신의 처지를 바꿀 아주 특별한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관직에 오른 것입니다.

과거시험에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한 한명회는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요?

바로 음서제도입니다.

'음서'란 공신이나 높은 벼슬을 지낸 고위관직을 지낸 사람의 자식이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입니다.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던 한명회는 음서를 통해 38살의 나이로 관직에 오릅니다.

그렇게 한명회가 오른 관직은 개성 경덕궁을 지키고 관리하는 종 9품 말단 관리직 '궁지기'였습니다.

음서를 통해 드디어 관직에 오른 한명회는 이마저도 낮은 직급으로 궁내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4. 위기에 몰린 수양대군, 한명회를 찾아오다 

한명회의 친구 권람(1416~1465)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훗날 한명회와 세조를 왕으로 세운 일등 공신 중 한 명이며 한명회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명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왕실가의 사람이 한명회를 은밀하게 만나자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수양대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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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사람인 수양대군이 왜 말단 궁지기 한명회를 만나고 싶어 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수양대군이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의 아버지는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세종 가계도
세종 가계도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왕인 단종의 삼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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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종을 둘러싸고 있었던 인물들이 수양대군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실제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욕망과 정치적 야심 또한 큰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린 단종의 삼촌으로 세종의 아들 중에서 최연장자였던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이 컸던 탓에 대신들의 견제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5. 김종서, 12살에 즉위한 어린 단종을 둘러싸고 왕을 보위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다

이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좌의정 '김종서'입니다.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인물로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원로 대신이었습니다.

문종의 이른 사망으로 단종이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김종서는 이 어린 왕을 둘러싸고 왕을 보위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정치에서 누군가를 관직에 임명하는 인사권은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당연히 왕이 중심이 되어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단종은 자기 뜻대로 낙점(관직 임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한 사람의 이름 밑에 노란색 딱지가 붙여져 올라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종서 대감이 황색 표식을 붙이기만 하면 무조건 등용을 시킨다고 해서 황표정사라 비웃고들 있소'

황표정사
황표정사

'황표정사'란 대신들이 후보자들 이름 위에 황표(黃票)를 붙이면 왕이 그대로 낙점하는 인사형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 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김종서를 필두로 한 대신들과 수양대군의 대립양상이 벌어집니다.

6. 책사를 찾던 수양대군, 한명회의 손을 잡다

그런데 이때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습니다.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의 편을 들지 않고 왜 김종서의 편에 선 것일까요?

수양대군과 1살 터울의 동생이었던 안평대군은 수양대군과는 달리 조정 대신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냅니다.

이런 안평대군이 단종을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김종서와 연합을 것입니다.

수양대군은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을 확실한 계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밀히 자신의 계획을 실현해 줄 '책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대립을 지켜보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명회'입니다.

한명회는 현재 복잡한 정치상황과 수양대군의 위기가 자신에게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명회의 친한 친구 권람이 마침 수양대군과 인연이 있었고 한명회는 권람에게 수양대군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수양대군이 한명회에게 만남을 제안한 것입니다.

7. 한명회, 수양대군에게 거사를 제안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한명회를 본 수양대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손을 덥석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이제야 만났단 말이가!'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첫 만남부터 그를 친근하게 대합니다.

사실 이미 수양대군은 한명회 친구 권람으로부터 한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습니다.

권람은 한명회가 어릴 때부터 기개가 범상치 않았고 특히 일을 처리하는 능력 또한 뛰어난 친구라면서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믿었고 한명회를 보자 이런 말을 넌지시 합니다.

'내 형세가 외롭고 약하니 어찌하겠는가?'

한마디로 수양대군은 조정의 견제를 받아 자신의 처지가 빈약한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한명회에게 계책을 물은 것입니다.

이날 한명회의 이 한마디가 이후 조선의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종실의 후손으로서 사직을 위하여 난적을 토벌하는 것인 만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니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한명회 선생 신도비명>

수양대군이 왕실의 후손으로서 나라를 위해 도적 무리 즉 김종서 세력을 처단하는 것은 명분이 바른 일이니 거사를 일으킨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고 무조건 성공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한명회입장에서는 수양대군 앞에서 거사를 논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수양대군이 한명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자칫 역모의 죄로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자신에게 찾아온 그 절체절명의 기회를 잡기 위해 소신껏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조마조마하게 수양대군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던 한명회에게 수양대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내가 마음을 정하였다'

<한명회 선생 신도비명>

수양대군은 자기 마음을 정하고 있지 못하던 차에 한명회의 이 말 한마디로 거사를 일으킬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8. 한명회가 내민 첫 번째 전략, '훈련관'에 나가 무사들과 친분을 쌓아라 

이제 한명회와 수양대군이 의기투합했으니 실천해 옮길 일 만 남았습니다.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목표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김종서 세력을 처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명회가 내민 첫 번 쨰 전략은 이러하였습니다.

'세상이 변동이 있으면 문인으로서 대우를 받음은 쓸모가 없으니 나리는 모름지기 무사와 결탁하여 두소서'

<연려실기술>

수양대군 역시 훗날 거사를 도모하려면 군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종서 세력의 압박 속에서 대놓고 병사를 모을 수는 없었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모죄로 위기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무사들을 모을 방법이 있습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무사들을 모을 방법이 있다며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병사들의 무예 연습을 관장하는 '훈련관'이라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활쏘기 연습이라는 명분을 대고 훈련관에 나가서 무사들을 만나 훈련이 끝난 후 무사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면서 그들과 친분을 형성하라고 조언합니다. 

한명회는 거사를 성공시키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그 우선순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말에 따라서 무사들과 두루두루 사귈 수 있게 됩니다.

9. 한명회가 내민 두 번째 전략, 거사 중에 도성 출입을 통제해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라 

그리고 한명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사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있다면서 한 사람을 수양대군에게 추천합니다.

바로 '홍달손'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한양 도성의 야간 순찰을 담당하던 무장이었습니다.

즉 한양도성문을 여닫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거사과정에서 도성출입을 통제함으로써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상대편의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수양대군, 김종서를 제거하는 것으로 거사를 시작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마침내 수양대군은 드디어 거사를 치르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거사일인 이 날은 마침 홍달손이 도성 출입을 감독하던 날이었습니다.

이때 칼을 뽑은 수양대군이 가는 곳은 어디였을까요?

이번 거사의 최대 목표 김종서의 집이었습니다.

1453년 10월 10일 운명의 거사일, 한밤중에 만난 앙숙 수양대군과 김종서 그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김종서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고 수양대군에게 방으로 들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때 수양대군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뜻밖의 부탁을 합니다.

'이 편지를 먼저 읽어주시지요'

김종서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편지를 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순,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김종서가 쓰러집니다.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시종이 김종서에게 철퇴를 내려친 것입니다.

김종서는 예상치 못한 일격에 그대로 쓰러지고 맙니다.

 결국 이 일로부터  수양대군의 거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11. 수양대군, 단종을 찾아가 김종서를 처단한 이유를 밝히다

그 후 수양대군은 다음 작전에 돌입하는데 김종서를 쓰러뜨린 후 수양대군은 다음으로 누구를 찾아갔을까요?

수양대군의 조카이자 왕인 단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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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갑자기 들이닥친 숙부 수양대군은 떨고 있는 단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하, 제가 지금 김종서를 처단하고 오는 길입니다'

갑자기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는 측근 세력인 김종서를 처단했다는 소리를 들은 단종은 당황해했고 그런 단종에게 수양대군은 왜 자신이 김종서를 공격했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작당해서 전하를 죽이려는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13살의 단종은 수양대군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삼촌, 살려주세요'

어리고 힘없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살려달라는 말뿐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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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명회,  '살생부'라는 완벽히 계획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대신들을 죽이다(계유정난)

그렇다면 김종서를 죽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만나고 있을 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한명회 바로 궁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대신들이 한 명씩 차례로 궁궐에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거짓 왕명으로 고위 관료들을 궁궐로 불러드립니다.

갑자기 왕명이라는 소리에 한밤중에 입궐한 조정 대신들은 함께 온 하인들은 궁궐에 들일 수 없다는 제지를 당하게 됩니다.

대신들은 이상했지만 모두 그 명을 따르고 결국 홀로 궁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명회가 살생부를 가지고 대신들을 한 명씩 죽여 나간 것입니다.

거사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핵심전략은 이러했습니다.

일단 대신들이 첫 번째 문에 들어오면 하인들의 저항이 있을 수 있으니 하인들을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조정대신들이 혼자 문을 통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여 살생부와 대조합니다.

당시 죽여야 할 대신들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편에 선 쪽이었습니다.

살생부와 대조하여 죽여야 할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말합니다.

'죽여라'

거사 직전에 최소한의 적은 숫자로 살생부를 통해 죽일 대신들만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명회의 집요한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살명부에 올랐으나 궁으로 못 온 대신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명회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군사들을 보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가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살생부는 단순히 제거하려는 사람의 명부가 아니고 사전에 그들의 제거 방법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기록에는 이 날 죽은 이가 수십여 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한낱 궁지기에 불과했던 한명회의 살생부 하나에 조정 고위 대신들이 목숨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입니다.

정난은 '진정시킬 정, 어려울 난' 자를 써서 '어려운 상황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 세력이 단종을 없애려 한 난'을 수양대군이 진압했다는 의미입니다.

한낱 궁지기였던 한명회가 이제는 엄청난 특권을 받는 1등 공신에 책봉됩니다.

훗날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난의 일은 한명회가 했고, 나(수양대군)는 한 일이 없다'

<세조실록>

한명회가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사실상 정변의 설계자였고 그것을 수양대군이 인정한 것입니다.

사실 한명회 입장에서는 책사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왕위를 넘겨받고 드디어 왕이 됩니다.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탄생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명회는 조선의 새로운 왕을 만든 킹메이커가 됩니다.

13. 대신들,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일으키려 하나 한명회의 눈치 빠른 판단으로 실패하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어린 조카 단종의 자리를 차지한 세조의 모습을 보고 조정의 일부 신하들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조에게는 명분, 정당성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게 폐위되자 이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긴 신하들은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올릴 계획을 세우며 이 계획에 참여한 신하들이 수십여 명에 달했습니다.

1456년 6월, 드디어 신하들에게 세조를 없앨 기회가 옵니다.

그 시작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장에서였습니다.

이 연회장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암살계획이 세워진 것입니다.

세조 암살을 위한 계획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회가 열리기 전 아침, 뜻밖의 인물이 연회장에 찾아옵니다.

세조를 암살하기로 한 바로 그날, 갑자기 한명회가 느닷없이 연회장을 방문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하! 연회장이 좁고 무더우니 칼을 찬 호위병을 들이지 마시옵소서'

사실 조선에서는 큰 연회나 행사가 있을 때 유능한 무사들이 호위를 하게 합니다.

그런데 행사당일 연회장을 호위하는 무사 중에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데 가담한 무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 눈치가 빠르고 정세를 한눈에 읽을 줄 알았던 한명회는 호위무사 명단에 세조를 반대하는 세력이 포함되니 그것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한명회는 눈치 빠른 판단으로 이 날 세조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14. 세조, 사육신(死六臣)에 이어 단종까지 죽이다 

그런데 더 큰 사건이 그 뒤에 일어납니다.

연회장에서의 거사가 실패하니 거사를 계획했던 신하들 중 한 명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암살계획을 알린 것입니다.

세조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일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합니다.

이렇게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 죽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6명의 신하를 사육신이라고 합니다.

사육신은 단종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다 죽은 6명의 신하입니다.

사육신을 향한 세조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단종복위운동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바로 조카 단종의 존재 그 싹을 잘라버리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의 뜻을 눈치챈 한명회를 비롯한 신하들은 단종을 없애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결국 세조는 단종을 멀고 먼 강원도 영월땅으로 유배 보내 버리고 단종은 17살 나이에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칩니다.

15. 세조, 한명회를 통해서 지방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령들을 통제하면서 반란을 막으려 '도체찰사'로 지방에 파견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찬탈한 권력이라며 끊임없이 세조를 공격하려는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렇게 정국이 불안해지니 세조는 가장 믿는 인물이자 자신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 한명회에게 더욱더 의지하게 됩니다.

위기에 빠진 세조가  한명회에게 맡긴 임무는 무엇일까요?

세조는 한명회를 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최고 관직인 도체찰사로 지방에 파견합니다.

그러면서 지방의 민심파악과 함께 군사와 행정에 대한 장악을 확실히 해나갑니다.

한마디로 세조는 한명회를 통해서 지방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령들을 통제하면서 반란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조의 신임을 얻은 한명회는 이후 세조 재위 14년 동안 무려 총 14번에 걸쳐 도체찰사로 파견됩니다.

16. 한명회, 권력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왕인 세조와 사돈을 맺다

그러면서 세조는 한명회를 향해 이런 말까지 남겼다고 합니다.

'경의 이목이 곧 나의 이목이다'

한마디로 한명회가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이고 한명회의 마음이 세조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조의 이런 찬사까지 들은 한명회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 없었습니다.

이러면서 한명회는 세조의 막강한 지지 속에 더욱더 승승장구합니다.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 1466년 마침내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최고 관직 영의정의 자리에 오릅니다.

한명회는 경덕궁 궁지기에서 14년 만에 최고 권력에 오른 것이며 한마디로 인생 역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말까지 있었습니다.

'천하가 한명회가 손안에 있다'

그런데 한명회의 욕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권력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왕인 세조와 사돈을 맺습니다.

한명회는 총 1남 4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셋째 딸을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과 혼인시킵니다.

한명회와 세조가 사돈을 맺은 것입니다.

한명회는 부와 권력 그리고 왕자의 장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조선의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됩니다.

조정에서의 한명회의 위상과 권력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됩니다.

17. 킹메이커 한명회, 세조 가문과 혼인으로 사위 '예종'과 '성종'을 모두 왕으로 만들다

그런데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누렸던 한명회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한명회의 뒷배인 세조의 병환이 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1468년, 결국 세조는 눈을 감고 맙니다.

세조의 사망으로 한명회의 시대는 저무는 것일까요?

그런데 뜻밖의 상황에서 한명회의 위기가 해결이 됩니다.

세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세조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죽자 바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조선 제8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가 바로 예종이며 예종은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와 결혼한 한명회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이로서 한명회는 왕의 장인으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예종의 장인으로서 다시 부활했던 한명회는 예종이 즉위하고 15개월 만에 사망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 다시금 위기에 처합니다.

혼란에 빠진 조정에서 한명회는 모시던 왕이 연달아 죽자 비장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한명회가 다시 한번 킹메이커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종에 뒤를 이어 왕이 된 '성종', 그가 왕이 되는 데 한명회가 도움을 준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도움을 줬을까요?

한명회 가계도
한명회 가계도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이 다름 아닌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였던 것입니다.

한명회가 미래를 내다봤던 것인지 철저히 대비했던 것인지 왕이 되기 전 이미 사가에서 두 사람이  혼인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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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넷째 딸을 모두 세조 가문과 혼인시켰던 것이며 성종 또한 한명회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한명회는 세조, 예종에 이어 성종까지 3대를 걸쳐 왕을 만든 킹메이커로 당대 최고 실세로 군림하게 됩니다.

18. 성종, 수렴청정을 거부하는 한명회에 분노하고 한명회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다 

13세에 왕이 된 성종은 어느덧 성년이 되었고 어린 성종 대신 그동안 수렴청정을 했던 세조의 아내이자 성종의 할머니였던 '정희왕후'는 대신들에게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철렴'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때 성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가 정희왕후의 뜻에 반대를 합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성종이 힘을 갖게 되면 한명회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렴청정 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희왕후의 몫이었는데 아무리 한명회가 왕의 장인이라도 신하로서 선을 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성종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런데 다만 이 말로써 살펴본다면 여러 정승들이 나를 믿지 못한 것이 없겠는가?'

성종은 한명회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의 발언을 하자 이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왕으로 통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인가?'

성종은 선을 넘는 한명회의 모습을 보면서 이 표현을 통해 분노를 표시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노의 신호를 눈치챈 신하들은 이렇게 상소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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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부터 중종까지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에 몰두했던 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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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한명회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례하게 굴었으니 그 죄를 처벌해야 합니다'

신하들은  한명회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화가 난 성종은 이런 상소가 올라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일단은 꾹 참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상소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계속되는 한명회와 신하들의 대립에 결국 사건이 점점 커지게 되자 한명회는 성종에게 찾아가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전하, 신의 병난 발이 오래도록 낫지 아니하니 직임을 해임하여 주십시오'

결국 한명회는 대신들의 반발에 자신의 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어느덧 62세가 된 한명회는 더 이상 막강한 권력을 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비로소 권좌에서 내려옵니다.

압구정(狎鷗亭)

조정대신들의 유례없는 공격에 정치를 그만둔 한명회는 결국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곳을 선택합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한명회의 정자
겸재 정선이 그린 한명회의 정자

위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한명회의 정자입니다.

정자가 있는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이곳은 바로 '압구정'입니다.

'친할 압, 갈매기 구'자를 써서 압구정은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의 한명회의 호를 따 만든 정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압구정동의 지명이 한명회의 호에서 유례가 된 것인데 정세 판단에 탁월했던 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 가운데 하나인 압구정에 정사를 짓고 그것에서 여생을 보내며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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