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3(옥지화 사건부터 죽음까지)
10. 장녹수가 연산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잘 읽었는지 보여주는 사건
어느 날 연산군은 조정 신료들과 그들의 부인까지 함께 참석하는 부부동반 연회를 열었습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그때 연산군은 연회장을 쓰윽 둘어보고는 장녹수에게 속삭입니다.
"내 오늘은 저 여인이 마음에 든다"
연산군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을 자신의 하룻밤 상대로 지목한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더라도 신하의 면전에서 신하의 부인을 침전으로 부른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장녹수에게 대신 불러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의중을 간파한 장녹수는 곧바로 연산군이 지목한 부인의 머리단장이 잘못됐다며 머리단장을 고쳐야 한다는 핑계로 부인들을 연회장 밖으로 불러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기다리는 방으로 부인들을 데리고 갑니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기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산군은 조정관료들과 부인들을 연회에 초청했을 때 누가 누구의 부인인지 구별하기 위해 이런 방법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연회에 사대부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였다'
<중종실록>
연산군은 이 이름표를 보고 '우의정의 부인이 마음에 든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장녹수에게 전달합니다.
그렇게 주선자가 되어준 장녹수 덕분에 마음에 쏙 드는 조정신료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비윤리적인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연산군에게 더 큰 총애를 받았던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상식밖의 행동일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몰두했습니다.
한마디로 장녹수는 연산군이 예뻐할 수밖에 없는 행동만 골라서 한 것입니다.
입궁한 후 장녹수는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무려 4년 동안 왕의 총애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것입니다.
11.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죄로 참수당한 운평 '옥지화' 사건
그러던 1505년 11월, 연산군은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의 잘린 머리를 궁궐의 운평과 흥청들에게 돌려서 보라고 한 것입니다.
연산군은 왜 이런 잔인한 어명을 내린 것일까요?
머리가 잘린 사람이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머리를 잘라 돌려보게 했을까요?
처형된 사람이 저지른 대역죄는 충격적 이게도 바로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내리고 그 머리를 잘라 운평과 흥청들에게 돌려보게 했던 것입니다.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사람은 '옥지화'라고 하는 운평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사실 예전부터 옥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연산군이 관심을 가졌던 여인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옥지화에게 향한 연산군의 관심에 위기감을 느꼈을 장녹수는 옥지화가 조그만 잘못이라도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 운평이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것입니다.
장녹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운평이 한 실수를 일러바친 것입니다.
장녹수의 치맛폭에 푹 빠져있던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실수한 운평의 목을 베서 다른 이들의 본보기로 삼게 하는 기행을 저지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평상시에 치마를 밟는 그런 실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연산군이 총애하는 장녹수의 치마를 함부로 밟았으니 연산군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능상죄를 적용한 것입니다.
연산군이 장녹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옷을 밟은 것은 곧 임금인 자신의 곤룡포를 밟는 것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노비 출신의 후궁이 왕과 동일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장녹수는 자신이 후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연산군이 다스리는 이 나라가 곧 나의 나라라는 착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점점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조정신료들은 또 어떤 어명이 내려올지 살얼음판을 걷듯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12. 연산군, 신언패(愼言牌)로 신료들의 입을 틀어막다
연산군이 만든 목걸이의 이름은 삼갈 신, 말씀 언 자를 써서 '신언패'라고 합니다.
연산군은 궁궐의 모든 환관들과 신료들에게 이 신언패를 걸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 신언패에 담긴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
<연산군일기>
쉽게 말해서 궁궐에서 본 왕의 모습을 함부로 밖에서 떠들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연산군은 이렇게 신언패로 신료들의 입을 대놓고 틀어막은 것입니다.
13. 연산군, 조정 신료들에게 '충성'이 쓰인 사모를 쓰고 다니게 하다
1506년 5월, 연산군은 다시 한번 신료들을 기겁하게 만든 명령을 내립니다.
연산군은 조정신료들에게 '충성'이라고 적힌 사모를 강제로 쓰고 다니게 한 것입니다.
당시 신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썼던 모자인 '사모'의 앞쪽에는 충(忠, 충성할 충), 뒤쪽에는 성(誠, 정성 성)이라고 적게 하고 이를 쓰고 다니라고 한 것입니다.
목에는 신언패를 달고 머리에는 충성 모자를 쓰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궁궐 안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하의 충성을 받으려면 신하를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야 자연스럽게 충성하는 마음이 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하에 강압적으로 굴욕과 모욕을 주더라도 신료들이 눈앞에서 복종하는 것을 보는 것이 곧 강한 왕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간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매일 사치와 향락을 즐깁니다.
궁궐연회에는 흥청들의 춤과 노래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이른 1506년 흥청의 수는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인사고과를 평가하는데 흥청을 조정에 얼마나 바치느냐가 반영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14. 성균관까지 연회장으로 만들다
'성균관을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 만들고 흥청의 음탕한 놀이 장소로 변하였다'
<열려실기술>
연산군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성균관까지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성균관을 떠난 일부 유생들을 자신의 가마꾼으로까지 이용합니다.
15. 중종반정에 의한 장녹수의 최후
그러던 1506년 9월 2일, 동이 트기도 전인 캄캄한 새벽에 장녹수의 처소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평소의 장녹수였다면 소란을 피우는 이에게 호통을 쳤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주색에 빠져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조선의 성리학 이념까지 뒤엎은 연산군 때문에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신하들이 드디어 마지막 패를 꺼내 듭니다.
미치광이 왕 연산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새로운 임금을 세우는 조선 최초의 반정이라는 카드였습니다.
'거사하기 하루 전날 마사와 건장한 장수들이 호응하여 운집하였고 군민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
<중종실록>
반정을 주도한 신하들은 군사를 끌고 궁궐로 달려갑니다.
겁먹은 신료와 환관들은 황급히 궁궐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 역시 담을 넘어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궁궐을 장악한 반정세력이 코 앞에 닥친 순간 과연 장녹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모두가 연산군을 버리고 도망칠 때 장녹수는 5년간 동고동락한 연산군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기로 합니다.
하늘을 찌르던 권세도 여기 까지는구나 하며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을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던 연산군의 권력도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중종반정을 통해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때 반정세력에 의해서 끌려간 장녹수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개처형된 이후 장녹수의 시신은 길바닥에 버려집니다.
잠시 후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분노한 백성들이
"나라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
라고 외치면서 장녹수의 음부를 향해서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녹수의 음탕함이 연산군의 폭정을 불러왔다는 원망이었습니다.
장녹수에게 던진 돌멩이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잠깐사이에 돌무덤을 이룰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한때 연산군의 마음을 얻어 온갖 권세를 누린 장족수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16. 중종반정에 의한 연산군의 최후
이 반정을 끄는 신하들과 군대를 도와준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유자광'이었습니다.
한때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간신 유자광이 연산군의 몰락에 도움을 주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간신들에게마저 배신당하는 연산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기 위해 궁에 찾아온 반정군에 의해 연산군은 왕위를 내려놓고 옥쇄를 내놓습니다.
기본적으로 반정에 성공하려면 임금의 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임금의 옥새'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옥새를 확보한 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폐한 뒤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웁니다.
반정세력이 반정에 성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하루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폭군 연산군의 그야말로 허무한 최후였습니다.
연산군은 강화군 교동도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벌을 받습니다.
즉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벌을 받고 초라한 방 한 칸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유배생활 2개월 만인 중종 1년 11월에 역질(전염병)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 연산군의 나이가 31세였습니다.
17. 초라하게 남아있는 연산군의 무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자리 잡고 있는 연산군묘입니다.
왕의 묘는 '릉'이라 불렸지만 연산군은 대군이기에 '묘'로 불렸습니다.
또한 왕릉과는 달리 왕의 예우를 위한 구조물도 없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묘가 있음에도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지 않을 만큼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연산군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독선적인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는 폭정을 한 왕이었습니다.
이는 반면교사(反面敎師, 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 삼아야 할 역사의 기록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죽음까지) (tistory.com)
'스터디 위드 돈벌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뺨 한 대로 시작한 무신들의 쿠데타! 무신정변 2(무신정변 계획부터 성공까지) (1) | 2023.10.12 |
---|---|
고려 무신들의 분노 폭발, 무신정변 1(양반의 의미부터 수염사건, 삭발 사건 등 무신들의 분노가 쌓여 가는 과정) (2) | 2023.10.11 |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죽음까지) (1) | 2023.10.09 |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1 (1) | 2023.10.09 |
피의 쿠데타로 고구려 최고 관직에 오른 고구려 최고 장수 연개소문 2(2차 여당전쟁, 평양성 전투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1) | 2023.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