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 한 대로 시작한 무신들의 쿠데타! 무신정변 2(무신정변 계획부터 성공까지)
7. 무신들, 정변을 계획하다
무신정변을 처음 계획한 이들은 왕의 곁을 지키던 호의군이었던 '견룡군'이었습니다.
정변을 처음 계획안 견룡군 안에는 '이의방과 이고'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무신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이의방과 이고는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하급 지휘관이었던 두 사람은 정변을 일으킬 만큼의 지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군사를 모으고 군사를 지휘할 고위 무신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찾아간 인물은 정 3품 상장군의 아들 '우학유'였습니다.
우학유는 굉장히 신념이 곧고 뜻이 큰 무신이었습니다.
우학유는 정변을 일으켜 보자는 이의방과 이고의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공들의 뜻이 크구나,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항상 나에게 말씀하시길 무관이 문관에게 굴욕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그 화가 우리에게도 미칠 거 것이니 삼가야 한다고 하셨다'
<고려사 열전 우학유편>
우학유는 무관이 문관들에게 굴욕 당하여 분한 마음은 크나 문신들의 힘이 강하므로 자칫 잘못하다가 무신들이 더 큰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의방과 이고가 여기서 포기했다면 어쩌면 정변은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이 둘은 정변에 힘을 보탤 인물을 찾아 나섭니다.
바로 문신들에게 이를 갈도록 오랜 원한이 있었던 '정중부'였습니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던 사건으로 굴욕을 겪은 지 26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정중부는 무신 가운데에는 가장 높은 지위인 종 3품 상장군에 올라있었습니다.
의종 24 1170년 4월 정중부, 이의방, 이고 세 사람이 왕의 연회날 처음 만나게 됩니다.
왕은 측근 문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서 호위를 하던 무신들은 배고픔에 지쳐 있었습니다.
이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은밀히 다가가 말합니다.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로하니 너깃을 어찌 참을 수 있습니까?'
<고려사절요>
이의방과 이고는 연회장에서 굶주림에 지쳐 있는 무신들과는 달리 배불리 먹고 즐기고 있는 무신들을 보고 있으면서 그 분함을 정중부에게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정중부의 머릿속에 수염사건 당시 모욕과 치욕을 당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와 함께 나라를 뒤집을 정변을 준비합니다.
8. 종 3품 무신 '이소응', 종 5품 문신 '한뢰'에 뺨을 맞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4개월 후인 1170년 8월, 세 사람에게 정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인 의종이 연회를 즐기기 위해 궁궐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들이 계획하고 그 나들이 후에는 '보현원'이라는 사찰로 가겠다고 합니다.
보현원은 사찰인 동시에 고려왕들이 자주 머물기도 했던 장소였고 의종 또한 연못을 만들고 놀이하고 몇 번이고 거처로 사용한 적이 있는 곳입니다.
나들이를 호위하는 사람들은 적은 수의 호위부대와 무신들 뿐이었습니다.
이때 호위부대가 바로 견룡군이었고 정변을 일으킬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나들이에 나선 의종과 문신을 따르는 견룡군은 정변 계획을 숨긴 채 왕과 문신들을 호위했습니다.
계획대로 의종은 나들이를 끝낸 이후 보현원으로 향했고 정중부, 이의방, 이고도 왕을 호위하면서 함께 갑니다.
그런데 이때 의종이 갑자기 예정에 없던 무예 행사를 열자고 제의합니다.
바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라는 무예입니다.
수박도란 고대부터 한반도에 전래된 맨손 격투기로 고려 시기에 크게 발달한 무술입니다.
오병수박희란 맨손으로 무술을 겨루는 무예로 수박도에서 파생된 무예입니다.
오병수박희에서 실력을 뽐내면 관직을 받거나 승진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수신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습니다.
의종도 무신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무예행사로 무신들의 정서를 달래고 노고를 위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병수박희 시합 중에 늙은 대장군 이소응과 한 장수가 맞붙습니다.
이소응은 야위고 힘이 약해 젊은 장수에게 압도당하여 지친 나머지 경기장 밖으로 도망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의종의 측근 문신이었던 '한뢰'가 벌떡 일어나 노장 이소응의 뺨을 때려버립니다.
얼마나 뺨을 세게 때렸는지 노장군 이소응이 계단 아래로 구르기까지 합니다.
당시 이소응의 지위는 종 3품 대장군이었고 한뢰는 종 5품 문신이었습니다.
이소응에 비해 한뢰는 지위, 나이도 한참 어린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린 것입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이 상황을 지켜보던 왕과 문신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뺨을 맞은 이소응을 보며 박장대소하고 비웃기까지 한 것입니다.
문신이 무신의 뺨을 때린 이 상황이 천대받던 무신들의 처지가 여실 없이 드러난 순간인 것입니다.
정중부는 이소응이 뺨을 맞는 순간 치를 떨며 분노하며 말합니다.
"이소응은 비록 무신이나 더 높은 관직인데 어찌 이리 심하게 욕보이는가"
라고 분노하며 함께 정변을 약속했던 이고가 칼집에 꽂힌 칼을 쥐고는 정중부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이고는 정중부가 허락만 하면 바로 칼을 뽑아 무신들을 해쳐 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었습니다.
정중부는 이고에게 눈짓을 보내며 이고를 막아섭니다.
당시 정중부가 이고를 막은 데 대해서 알아보자면 당시 의종이 행차를 하는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변 세력이 애초에 나눴던 계획은 보현원에 도착하여 난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개경에서 보현원으로 가던 도중에 무예 시합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래 정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했던 곳보다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진압군의 투입을 더디게 하기 위해서는 더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정변을 성공하기에 유리하다고 정중부는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약속한 장소가 아닌 이곳에서의 정변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계획과 달리 행동할 경우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봤던 것입니다.
정중부의 상장군 다운 전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9. 무신 정변의 최종 목적지, 보현원에 도착하다
결국 무신들은 분노를 누른 채 왕의 행차에 함께하며 최종 목적지 보현원으로 향합니다.
이의방과 이고는 의종의 대열을 앞질러 보현원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둘은 왕명이 없었음에도 왕명이 있었다면서 군사들을 모읍니다.
이의방과 이고가 앞을 앞서서 현장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견룡군과는 별개의 '순검군'이라고 하는 별개의 친위 군이 와 있었습니다.
친위 군은 견룡군의 장교였던 이의방과 이고가 지휘할 수 없는 부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의방과 이고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친위 군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무신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가 분명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의종은 유유히 보현원에 도착합니다.
의종이 보현원에 들어가자 정변을 일으키기로 했었던 무신들이 드디어 칼을 뽑습니다.
그리고는 문신들이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모두 칼로 베어버립니다.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해 버렸던 것입니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중대한 사건, 뺨 한 대로 일어난 무신정변의 시작입니다.
이 날이 바로 무신들이 권력을 잡는 100여 년의 역사가 시작되는 첫째 날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정중부와 이의방은 관모를 벗고 오른쪽 어깨를 내놓기로 약속을 합니다.
이 모습을 하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베어 죽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변에 불씨를 짚신 한뢰는 환관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왕의 침상 밑에 숨습니다.
무신들은 의종이 침소에 있었지만 억지로 불러내어 한뢰를 끌어낸 후 칼로 베어 죽입니다.
사건의 원흉이었던 한뢰를 죽인 후에도 무신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본격적인 대살육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정중부는 용감하고 날쌘 군인들을 뽑아서 이의방, 이고와 함께 개경으로 급파합니다.
10. 개경으로 옮겨간 정변의 피바람
개경의 궁궐에 도착한 이의방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무신정변을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명령이어습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관청의 하급 실무자)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죽여라'
아무리 낮은 직급이라도 문신이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야말로 문신의 씨를 말리겠다는 결심으로 무신들은 궁궐 안에 숙직하던 문신들을 가차 없이 죽여나갑니다.
군인들이 죽인 문신의 수는 기록에 따르면 50여 명입니다.
그러나 기록 이외에도 많은 문신이 이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신들의 반란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문신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정중부는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궁을 완전히 제압하고 난 후 의종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궁궐에 도착한 다음날, 정중부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궁궐에 있던 내시와 환관이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한 것입니다.
무신 중 가장 높은 직위였던 정중부는 무신정변의 상징과도 같은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정중부가 암살당하면 정변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이대로 끝날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합니다.
누군가 이 환관들의 계획을 정중부에게 몰래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당시 궁궐에서 이미 정중부에게 대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정중부는 계획에 가담한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여 명을 찾아내어 죽여버립니다.
그리고는 정변 4일째 되던 날 아예 의종을 멀리 거제도로 추방해 버립니다.
멀리 바다로 막힌 섬에 의종을 가두고 의종이 다시는 개경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1. 의종 폐위 후 누가 왕위에 올랐을까요?
정중부와 이의방은 인종의 셋째 아들을 새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가 바로 고려의 19대 왕 '명종'입니다.
왜 정변에 성공한 무신들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까요?
고려 시대에는 왕이 되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왕건의 가계도를 보면 왕건의 할아버지가 서해의 용왕 딸과 혼인을 했다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왕건의 후손들은 용의 후손이라 하여 용돈이라 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였던 사람들이 왕이 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12. 정중부, 수염사건의 장본인 '김돈중'을 죽이다
과연 무신정변은 여기서 막을 내리는 것일까요?
무신정변 당일 보현원에 수염사건의 장본인 김돈중은 의종과 동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변 상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김돈중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서둘러 도망을 간 것입니다.
정중부는 정말 오랫동안 참아왔던 만큼 김돈중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중부는 큰 현상금을 걸어 김돈중을 공개수배합니다.
결국 현상금이 탐났던 김돈중의 하인이 밀고하여 김돈중은 체포돼 살해됩니다.
그렇게 무신정변의 성공과 함께 정중부의 오랜 원한도 그제야 풀린 것입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개경에서 겨우 살아남은 문신들 어떻게 됐을까요?
이고는 정변이 끝난 후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아 죽이자는 의견을 내지만 정중부는 이를 막아섭니다.
문신들 중에는 무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신들만으로는 국정 운영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었던 하급 무신들의 분노를 쉽게 누르기 어려웠습니다.
하급문신들은 저항하는 문신을 죽인 후 그 시체를 물에 던져버리고 그 죽은 문신의 집을 헐어버리기까지 합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무신정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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