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들의 분노 폭발, 무신정변 1(양반의 의미부터 수염사건, 삭발 사건 등 무신들의 분노가 쌓여 가는 과정)
1. '양반(兩班/두 양, 나눌 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양반'은 조선시대에 생긴 말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양반은 고려 시대에 처음 생긴 개념입니다.
양반은 바로 '무반과 문반을 합쳐서 '양쪽에 있는 반'이라고 하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군인, 경찰등과 같은 일을 하는 무신이 속한 곳을 '무반'이라고 하고 공무원, 법관, 국회의원등의 일을 하는 문신이 속한 곳을 '문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만 해도 무신과 문신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추후 명확하게 무반과 문반으로 나누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고려가 점점 발전하여 비대해지다 보니 나라의 정치를 맡을 문신과 군사를 이끌 무신으로 분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2. 무신이 오르지 못할 벼슬이 있다?
중요한 것은 문신과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당시 양반들의 서열을 나열한 '품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품계 | |
정 | 1품 |
종 | |
정 | 2품 |
종 | |
정 | 3품 |
종 | |
- | |
- | |
- | |
정 | 9품 |
종 |
제일 아래 9품에서 3품 까지는 문신과 무신이 모두 가능한 직책입니다.
반면 최상위 등급인 1품과 2품은 문신만 오를 수 있었습니다.
3. 오직 고위 문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1, 2품들만 가능했던 '재추'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재추는 고려시대 왕을 제외한 제일 높은 직책으로 왕과 함께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돕는 역할을 합니다.
재추회의는 재추들이 국가 중대사안을 논의하는 최고 의사 결정기구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 주최의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 2품은 문신만 가능했기 때문에 문신들만 재추회의에 참여가능했던 것입니다.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무신들이 제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무신들의 불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무신들은 문반 관직을 가져서 차라리 재추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것이 '문무의 분업'이었기 때문에 이것 자체는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무신은 '차별'이 아닌 '차이'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는 자연스럽게 높은 위치에서 정책을 결정하다 보니 '무' 보다는 '문'을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4. 무신, 평생의 원한을 품다(정중부의 수염사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문신과 무신들 사이에 금이 가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무신 '정중부' (1106~1179)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정중부는 무신정변의 핵심인물입니다.
'그의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나며 눈동자가 네모나고 이마가 넓었다. 살결이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이 7척이나 되어 그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는 외모부터 눈에 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웠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정중부는 뛰어난 신체 조건뿐 아니라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추정됩니다.
이런 무신 정중부는 당시 무슨 일을 했을까요?
'견룡균'( 牽龍軍/ 이글견, 용 룡, 군사 군)은 용을 이끄는 군대라는 뜻입니다.
용은 왕을 상징하므로 고려 시대 왕을 호위했던 부대였습니다.
오늘날 청와대 경호처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중부는 이 견룡군의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1144년 음력, 섣달그믐밤 38세 정중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중부가 이를 갈면서 평생 잊지 못할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섣달그믐 새해 복을 비는 행사가 한창인 궁궐 안, 모든 신하들이 자유롭게 즐기는 연회 현장에서 한 문신이 촛불을 들고 와서 왕을 호위 중이었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것입니다.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이는 문신 김돈중(미상~1170)이었습니다.
역사서에도 기록될 만큼 아름다웠던 정중부의 수염을 갓 조정에 입문한 새내기 문신 김돈중이 촛불로 태워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왕은 수염을 태운 김돈중이 아니라 오히려 수염이 불태워진 정중부에게 벌을 주려고 까지 합니다.
김돈중의 아버지가 당고 고려 무소불위의 권력자였기 때문입니다.
김돈중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고전 역사서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스테디셀러인 '삼국사기'를 왕의 명으로 엮은 '김부식(1075~1151)'이었던 것입니다.
김부식은 지금의 국무총리급의 고려 문신 중 최고위직이었던 '문하시중'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문신의 품계 중 가장 높은 품계인 종1품에 해당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김돈중은 최고위직 문하시중 아버지를 뒷배로 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직책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내시'였습니다.
김돈중은 과거에 2등으로 합격했는데 왕이 김부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1등으로 올리고 곧장 내시로 임명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환관과 내시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환관과 내시가 완전히 다른 직책이었습니다.
환관은 어린 시절 남성 구실을 못 하게 된 사람을 환관이라고 불렀는데 대다수가 천민, 노예 출신이었으며 궁 내 잡일을 담당했습니다.
반면 내시는 과거나 음서를 통해 선발된 문신 즉 왕명 전달, 호위, 왕실 창고 감독 등 왕 가까이에서 일하는 정치적 출세가 보장된 문신들의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아버지는 문신의 최고봉이었던 문하시중, 아들은 엘리트 새내기 문신 내시로 부자 모두 '문신'이었던 것입니다.
김돈중에게 수염이 태워진 정중부는 당시 화가 치밀어 올라 고함을 지른 후 김돈중에게 주먹을 휘두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부식은 곧바로 왕에게 달려갑니다.
김부식의 머릿속에는 아들의 잘못은 상관없었습니다.
오로지 아들을 때린 정중부를 엄벌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합니다.
문하시중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김부식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왕은 정중부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고 뒤로는 정중부가 벌을 받지 않도록 정중부를 피신시킵니다.
정중부는 어린 문신에게 수염이 태워진 후에 오히려 벌을 받을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역사서에 당시 정중부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중부는 이 일로 김돈중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정중부는 김돈중에게 받은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문신 김돈중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이 사건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큰 분노를 품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5. 의종, 무신들의 분노를 키우다
수염사건 당시 고려의 왕은 '인종'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의종'이 새롭게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의종이 무신들의 분노를 폭발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아버지 인종의 적장자로 태어난 아들 의종은 사실 왕의 자질을 갖기 위한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아버지 인종은 의종이 왕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더 사랑해서 첫째인 의종이 아닌 의종의 동생을 다음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의종은 부모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한 후계자였습니다.
'처음 태후가 둘째 아들을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왕이 원망하였다'
의종은 어머니가 동생을 더 사랑해서 자신이 아닌 동생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니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의종의 스승이자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하 정습명이 다행히도 의종의 편을 들어줍니다.
정습명은 자신이 의종을 잘 보살필테니 왕으로 임명해 달라고 인종에게 요청합니다.
결국 의종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이후 의종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왕이 된 후 언제든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본능적인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곁에서 힘이 돼주고 지지해 줄 측근 세력을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의종의 첫 번째 측근 세력이 왕의 친위군인 '견룡군'이었습니다.
의종은 잦은 훈련을 통해서 견룡군을 강한 부대로 만들었고 친위부대의 세력을 키워서 왕권 강화를 시도합니다.
두 번째 측근 세력은 '환관과 내시'였습니다.
의종은 환관 및 내시에게 관직을 주는 등 힘을 실어주어 궁궐 내에 든든한 지지기반을 다지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환관은 조정 내 신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의종에게는 꼭 필요한 세력이었습니다.
6. 무신의 또 다른 설움, 철저히 소외당한 무신들 (하급 무신 아내의 삭발 사건)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왕과 문신들과는 달리 수준 낮은 처우에 무신들의 분노는 쌓여만 갔습니다.
왕의 호위임무를 수행했던 견룡군은 물론이고 상장군, 대장군처럼 고위 무신조차 연회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호위 업무만 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에서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경비를 서야 했습니다.
게다가 연회를 좋아하는 의종은 경치 좋은 곳에 연회를 위한 정자, 연못등을 만듭니다.
이때 동원된 인력에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군인인 무신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중비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의 일입니다.
공사에 동원된 군인들에게는 식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자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 한 군인이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을 챙기지 못합니다.
이를 본 다른 군인들이 십시일반 주린 배를 채우도록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군인의 아내가 후에 일터로 찾아와 귀한 음식들을 함께 먹으라면서 펼쳐 놓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런 음식들을 내오자 군인이 부인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추궁합니다.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음식을 마련했소? 혹시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해서 얻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쳤는가?"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고 말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습니다.
그 아내의 고왔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을 팔아 돈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급 군인들과 그 가족을 의 이야기까지 공공연히 전해질 정도로 소외와 멸시로 차곡차곡 무신들의 분노는 쌓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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