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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그 이후 3(무신정변 3인방의 분열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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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그 이후 3(무신정변 3인방의 분열과 최후)

13. 정변 그 후 무신의 시대가 열리다

1170년 8월, 궁궐을 뒤흔든 분노에 찬 외침 

'문신의 씨를 말려 버려라'

고려 무신들은 오랜 멸시와 차별을 갚아 주려는 듯 무자비한 칼부림 아래 문신들의 피로 붉게 물듭니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중심인물 종 3품 대장군 정중부였지만 처음 무신정변을 계획한 것은 정 8품 견룡군 소속의 젊은 무인 이의방과 이고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핵심이 되어 무신정변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무신정변 이후 무신세력이 고려의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 시기를 '무신정권'이라고 부릅니다.

차별과 멸시를 받던 무신이 고려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1171년 1월 , 정권을 주도할 힘을 쥐게 된 세 사람, 이후 뜻을 모아서 벌인 일이 바로 자신이 모셨던 왕 의종(고려 18대 왕: 재위 1146~1170년)을 폐위하고 멀리 거제도로 유배를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무신정변 주역 3인방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의종의 동생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데 바로 고려 19대 왕 명종(재위 1170~1197)입니다.

14. 무신정변 3인방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

무신정변이라는 큰 목표를 달성한 이후 무신정변 3인방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고는 비밀스럽게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고는 정변 성공 직후부터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고는 고려의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바로 고려의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오직 태조 왕건의 후손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고려에서 이고가 그 왕좌를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고는 무신정변처럼 피비린내 나는 난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던 것입니다.

1171년 1월, 이고에게 드디어 기회의 날이 찾아옵니다.

무신들이 추대했던 왕 명종이 아들 태자의 성인식을 열기로 합니다.

왕과 왕실의 사람은 물론이고 주요 관직에 앉은 신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이고는 태자의 성인식 날을 거사를 일으킬 운명의 날로 정합니다. 

그리고 태자의 성인식이 있었던 그날 이고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궁궐 담장뒤에 숨어 신호를 기다리라는 명령 합니다.

그런데 이고가 행동 개시를 위해 궁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고 앞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있었습니다.

바로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이의방이었습니다.

이의방은 이고를 만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둘러서 이고를 내리쳐 그 자리에서 죽여버립니다.

분명이고는 몰래 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의방은 어떻게 이고의 계획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이의방은 앞뒤 가리지 않는 이고의 불같은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이고와 나머지 두 사람의 의견이 부딪칠 때가 많았습니다.

'여러 무신들이 중방에 모여 문신 가운데 살아남은 자를 모두 불렀는데 이고가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정중부가 저지하였다'

<고려사절요>

게다가 이고는 폐위된 왕 의종까지 살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의방은 이고를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예의주시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의방이 그의 부하로부터 이고가 남몰래 거사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고 연회장에 찾아온 것입니다.

이의방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이고를 철퇴로 내리쳐서 죽여버립니다.

함께 뜻을 모아 무신정변을 성공시켰던 무신정변의 3인방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정변 성공 후 겨우 4개월여 만에 서로의 생각이 극명하게 달랐던 것이  바로 이고의 죽음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15.이고의 죽음 이후 이의방이 무신정권의 강력한 실권자가 되다

무신정변 핵심 3인방 중 이제 정중부와 이의방 단 둘만 남은 상황이 됩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고려의 군사력은 이의방에게 집중되었고 이의방은 무신정권의 강력한 실권자가 됩니다.

반면 정중부는 자신 역시 이의방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불안감에 사로잡혀 집에서 두문분출하게 됩니다.

물론 정중부가 이의방보다 지위가 높았으나 지휘관이었던 정중부와는 달리 이의방은 정변 때 군사들과 함께 움직였었기 때문에 여러 무인들에게 더욱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의방은 하급 무인들의 지지가 많았습니다.

정중부는 이런 이의방의 거침없는 행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에 틀어 박힌 정중부는 자신의 관직을 내려놓을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정중부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이의방이 비장한 모습으로 직접 찾아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정중부의 예상과는 달리, 이의방은 정중부를 아버지로 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

과연 그 속내는 무엇일까요?

이의방은 정변을 일으킬 때부터 군사들과 현장에서 함께 했고 그것 때문에 하급 무신의 지지를 받아 집권 무신들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습니다. 

그렇지만 정변 자체를 총괄적으로 지휘했었던 정중부의 위상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의방의 입장에서 정중부를 안심시키고 그의 세력과 연합을 맺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중부와 이의방은 쿠데타의 중심축으로서 무신정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의방은 순조롭게 힘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16. 문신들의 반격 '김보당의 난'

정변 후 3년 후인 1173년 8월, 이의방의 목숨을 위협하는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잠잠했던 문신들이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력한 가문 출신의 문신인 김보당이 난을 일으킵니다.

무신들의 횡포를 더는 못 참겠다며 무신정권을 전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왕에게 올립니다.

게다가 김보당은 상소도 소용이 없자 대궐 앞에 엎드려서 이의방 세력을 파직 하라며 고합니다.

엎드려 왕에게 청하고 있는 김보당을  무신들이 와서 두들겨 패버립니다.

김보당은 이 혼란한 고려를 바로 세우려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무신들을 처단하고 무신정변 이전으로 고려를 되돌려 놔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김보당이 군사와 행정들을 움직일 수 있는 지방관인 동북면의 병마사가 됩니다.

김보당은 이제 때가 왔음을 적시하고 한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바로 거제도로 유배된 왕 의종이었습니다.

김보당은 무신들을 물리치는 일은 당연하고 무신들이 세웠던 왕인 명종을 끌어내리고 다시 의종을 왕으로 세워 과거의 고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부자관계를 맺은 이의방과 정중부가 처음으로 손을 잡고 공동의 적을 향해  싸우게 됩니다.

무신정권은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출병시킵니다.

결국 의종을 앞세운 문신들의 반격은 실패로 끝납니다. 

군사력을 앞세운 무신들 앞에서 무신들은 허무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 김보당의 난 실패 이후 무신 이의민, 의종을 죽이다

김보당의 난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반란의 실패로 김보당과 수많은 문신들이 처형당하게 됩니다.

여기에 이어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의민이 의종의 척추를 꺾어버렸는데 손을 놀리자 소리가 나니 이의민이 크게 웃었다'

<고려사>

김보당의 난에 함께 했던 의종을 시해한 것입니다.

의종은 죽인 자는 천민 출신의 장군 이의민이었습니다.

이의민은 힘이 아주 셌는데 맨손으로 의종의 허리를 부러뜨려 단숨에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의민은 왜 의종을 죽였을까요?

당시 기록을 보면 이의민의 배후에는 이의방 그리고 정중부가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폐위된 왕 의종이 살아 있는 한 또 다른 난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원천 차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이의방과 정중부는 의종을 시해하기로 한 것입니다.

의종의 죽음은 무엇보다 무신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의종이 죽었다는 것은 정변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정치적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다시는 무신정변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무신들의 세상을 위해서 무신들은 왕조차 잔혹하게 죽인 것입니다.

결국 반란군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의종은 이렇게 죽게 됩니다.

18. 선을 넘어버린 이의방의 욕망

1173년 이의방은  무신정권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의방은 원래의 무신 직책에 왕명을 전달하는 승선(承宣)까지 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의 정점에 선 이의방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명망 높은 가문이었습니다.

이의방은 고려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의 최상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문벌이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문벌이란 고려대에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말합니다.

고려 문신 최고의 관직인 재상을 대대손손 배출한 집안이어야만 문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의방은 원래 문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이제 막 승선에 올랐을 뿐이었습니다.

권력만으로는 명망 높은 문벌이 될 수 없었던 이의방의 현실이었습니다.

이의방 문벌이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와 혼인시켜 태자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신분세탁을 시작한 것이고 이의방은 결국  딸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문벌이 아닌 가문과 왕실이 혼인을 한 이 사건은 고려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이와 같은 혼인은 고려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태자의 혼인대상은 대게 왕실의 사람이나 거대한 문벌의 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의방이 군사력과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문벌이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실은 물론 많은 지배층의 경악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제멋대로 선을 넘으며 폭주하고 있었던 이의방은 이 태자비 사건으로 이후 수많은 적을 만드는 결정적 사건이 됩니다.

19. 무신정권의 대위기, 조위총의 난

그런데 이때 무신정권의 횡포와 만행을 더는 못 참겠다며 또 난이 일어납니다.

조위총의 난은 1174년 서경 관리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난입니다. 

조위총의 난은 이전에 김보당의 난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습니다.

조위총의 난
조위총의 난

서경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서 수많은 반란군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게다가 서경에서 수도인 개경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190km 정도로 멀지 않았습니다.

개경의 코앞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현재 고려의 최고 권력자인 이의방은 빠르게 진압군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반란군의 규모가 너무 컸습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진압군을 무찌르고 개경 근처까지 밀고 들어옵니다.

이때 이의방은 전쟁 중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입니다.

이의방이 중앙 정계의 무신과 문신을 죽인 후 그 목을 저잣거리에 걸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해 놓은 것입니다.

서경에서 시작된 반군이 개경까지 밀고 내려오니 불안해진 이의방은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해 반란지인 서경 출신의 무신과 문신을 모조리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개경으로 다가오며 반란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결국 이의방이 직접 칼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반란군을 대동강까지 몰아내는 데는 성공합니다.

이의방은 재차 전투를 준비 중이던 어느 날 성밖으로 나갑니다. 

이때 이의방은 어떤 남자의 손에 급습당하여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이의방의 살해를 사주한 사람은 놀랍게도 정중부였습니다.

이의방의 진압군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있었고 정중부는 아들과 함께 미리 이의방 암살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정중부는 왜 이의방을 배신한 것일까요?

정중부는 제멋대로 무력을 휘두르고 상식을 깨는 행동을 하는 이의방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의방은 딸을 태자비로 만들어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짓까지 서슴지 않고 벌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의방과 연합인 정중부를 이의방의 거듭된 만행들 때문에 세간의 사람들이 정중부 또한 그 한패로 보고 좋지 않게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이에 정중부의 정치적 입지까지 위태로워지자 결국 이의방을 향해 칼을 빼 든 것입니다.

20. 정중부 고려를 손아귀에 쥐다

정중부는 이의방을 죽인 후 곧바로 고려 최고의 관직이었던 '문하시중'에 오릅니다.

정중부는 이로서 이의방에 이어 명실상부 무신정권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정중부는 반드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직 끝나지 않은 조위총의 난을 수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의방은 죽었지만 아직 난은 진압되지 않았습니다.

정중부는 조위총의 난을 수습하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짐(명종)의 지극한 뜻을 알고서 다시 충성하기에 힘쓰라'

<고려사절요>

고려에서 신성한 존재로 여기던 왕의 권위를 이용해 조위총의 난을 마무리 짓고자 한 것입니다.

게다가 정중부는 죽은 의종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조위총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무신정권이 의종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도 또 다른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의종의 장례를 치르고 반란의 명분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의종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난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1년 뒤에 조위총이 죽은 후 난이 완전히 진압됩니다. 

정중부의 묘책이 실제로도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정중부는 왕실의 권위를 내세워 반란까지 진압하기에 이릅니다.

21. 망이, 망소이의 봉기

망이, 망소이는 봉기를 일으켰던 두 주역의 이름입니다.

이번에는 무신도 문신도 아닌 백성들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망이, 망소이는 당시 공주에 속해있었던 명학소(고려시대, 숯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이 살던 지역)라는 곳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지방 행정구역의 위계
고려 시대 지방 행정구역의 위계

당시 고려에는 지역별로 등급이 있었습니다.

망이, 망소이가 살던 '명학소'는 고려의 특수행정구인 향, 부곡, 소 중에 '소'에 속했습니다.

문제는 '향, 부곡, 소'의 주민들은 위에 있는 주현, 속현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면서도 특수행정구역이라는 이유로 천대까지 받았습니다. 

더해 정변 이후에 부패한 무신들이 지방관이 되어 특수행정구역을 침탈합니다.

망이, 망소이가 살던 명학소도 심하게 수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수행정구역이라 차별받고, 지방관의 수탈까지 당하던 명학소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망이, 망소이의 난은 시작되었고 성난 명학소 백성들은 놀라운 기세로 주현이었던 공주로 쳐들어가 마침내 공주를 점령합니다.

결국 중앙정권에서는 이 망이, 망소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무려 3,000여 명의 군사를 투입합니다.

난의 승리는 예상과는 달리 명학소 백성들이 거둡니다.

봉기한 백성들은 어떻게 3천 명의 군사들을 이겼을까요?

봉기 이전에 일어났던 조위총의 난이 있었고 이때 정규군은 굉장한 소모를 겪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급하게 모은 군사들로 거센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지 5개월 만에 봉기한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한 중앙정권의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습니다.

바로 명학소를 '소'에서 '현'인, '충순현'으로 승격을 시켜 준 것입니다.

그리고 명학소 주민들이 불법적인 수탈을 막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망이, 망소이는  이런 조치가 내려지자 항복의 뜻을 밝히고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명학소로 돌아간 망이, 망소이에게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고려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이 명학소 백성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망이, 망소이의 어머니와 아내까지 잡아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망이, 망소이는 2차 봉기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첫 봉기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진압군에 패배하게 됩니다.

망이, 망소이는 포위망을 좁혀오는 진압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되고 망이, 망소이는 결국 숨을 거둡니다.

명학소를 현으로 승격시켜 주고 불법 수탈을 막기 위한 지방관 파견 약속은 파기되고 다시 명학소로 강등되고 맙니다.

약 1년 6개월의 긴 싸움 끝에 1177년 7월 망이, 망소이의 난은 무신정권의 강력한 탄압으로 무참히 짓밟히게 됩니다.

22. 멈추지 않는 정중부 일가의 탐욕

끊임없이 일어나는 난과 봉기 때문이라도 정중부의 욕심과 횡포는 줄었을까요?

정중부의 위세와 탐욕은 좀체 줄어들지 않습니다.

1178년 73세가 된 정중부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에서 은퇴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중부는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그 힘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정중부의 욕심은 은퇴 이후에도 그칠 줄 모릅니다.

 

또한 탐욕스러운 정중부보다 더 탐욕스럽게 재물을 끌어모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었습니다.

'송유인은 일찍이 수덕궁을 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는데, 집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대개 신하가 살 곳이 아니었으며 부귀와 사치가 왕실에 비할 만하였다'

<고려사절요>

수덕궁은 고려 의종 때 건설 된 이궁의 하나였습니다.

일개 신하인 송유인이 감히 왕에게 수덕궁이라는 궁을 달라고 한 것이고 결국  궁을 받아냅니다.

신하가 왕의 궁궐을 받아낸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벌인일로 궁이 발칵 뒤집힙니다.

'정균이 은밀히 공주에게 장가들려고 꾸미자 왕 역시 이를 근심하였다'

<고려사>

앞서 보았듯 이의방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었다가 결국에 많은 적을 만들어 목숨까지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공주의 남편이 되는 것은 이의방의 딸이 태자비가 되는 것보다 더 큰일이었습니다.

고려 공주는 고려 왕실 외에는 결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왕실의 일족이 아닌 이상 고려 공주와의 결혼은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과연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요?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고려 공주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정중부의 권력으로도 성사하지 못하는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중부가 떠난 자리에 아들과 사위가 온갖 선을 넘는 짓들을 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마구 실추시키고 있었습니다.

문신과 무신들은 정중부 일가의 횡포에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상태가 됩니다.

23. 정중부, 정균 탐욕에 자멸하다

정중부 가족의 횡포가 계속해서 이어지던 1179년 9월, 궁궐에서 행사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아주 고요한 밤에 30여 명의 사람들이 대궐 담장을 일제히 뛰어넘습니다.

담을 넘은 이들에 의해서 정중부이 아들 정균이 살해당하게 됩니다.

대궐은 순식간에 치열한 전투 현장으로 변합니다.

궐에 난입한 의문의 무리를 이끄는 장군이 왕의 처소로 향하고 왕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들이 사직을 보호하려는 것이나, 청컨대 임금께서는 두려워 마십시오'

정중부정권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장군이 또 다른 정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정변의 주동자는 바로 26살의 젊은 장군이었던 '경대승'입니다.

경대승은 명종에게 정중부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연히 명종은 경대승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중부를 체포할 친위 군을 출동시킵니다.

결국 권력과 재산만 탐하던 정중부는 체포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됩니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지 9년 만에 정변의 주역이었던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 세 사람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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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 한 대로 시작한 무신들의 쿠데타! 무신정변 2(무신정변 계획부터 성공까지) 7. 무신들, 정변을 계획하다 무신정변을 처음 계획한 이들은 왕의 곁을 지키던 호의군이었던 '견룡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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