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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돈벌러

저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저주로 결국 생을 마감한 조귀인(드라마 꽃들의 전쟁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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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저주로 결국 생을 마감한 조귀인(드라마 꽃들의 전쟁 모티브)

1. 인조의 후궁 조귀인,  그녀는 누구인가?

1637년 겨울, 적막했던 창경궁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기는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였습니다.

딸의 탄생 소식에 기뻐한 아버지는 다름 아닌 조선의 16대 왕 '인조'였습니다.

인조에게 이때 태어난 딸이 정말 특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인조의 나이가 44살로 늦둥이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딸은 이후에 '효명옹주'라고 불립니다.

인조는 늦둥이 효명옹주를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합니다.

그런데 인조가 효명옹주를 아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즈음에 인조에게 안팎으로 일생일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효명옹주가 태어나기 1년여 전인 1636년, 조선에 큰 위기인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조선이 오랑캐라고 부르던 청나라가 병자년(1636년)에 조선을 침략한 것입니다.

수세에 몰린 인조는 결국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하게 됩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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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가계도
인조 가계도

심지어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가 조선왕실에 볼모를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인조는 첫째 아들 소현세자 부부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셋째 아들 인평대군까지 아들 셋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27년을 함께 살았던 조강지처 인열왕후까지 병자호란 1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인조에게 '효명옹주'의 탄생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열왕후 사망 후 중전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던 상황에서 도대체 인조의 딸을 낳은 것은 누구였을까요?

중전이 낳은 딸은 '공주'라고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효명옹주를 낳은 후궁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오늘 다뤄볼 주인공 후궁 '조귀인'입니다.

조선시대 내명부 품계표
조선시대 내명부 품계표

여기서 귀인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궁궐에서 후궁에게 내렸던 품계 명칭 중 하나입니다.

'빈(嬪)'은 후궁 중 서열 1위인 정1품 후궁의 명칭입니다.

귀인은 '빈' 바로 아래인 서열 2위 종1품 후궁의 명칭입니다.

조귀인은 바로 조 씨 성을 가진 '귀인' 품계를 받은 후궁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귀인은 처음부터 후궁서열 2위였 귀인이었을까요?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조귀인의 신분은 놀랍게도 일개 궁녀였습니다.

조귀인이 궁에 입궁한 것은 1630년, 인조 즉위 8년째 되던 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조는 그 해 들어온 조귀인을 눈여겨보고 관심을 쏟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조귀인을 반기지 않습니다.

'조기의 딸이 제일 총애를 받는다 했다. 조기의 딸은 정백창이 진납(進納)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인조실록>

이것은 조귀인이 입궁한 후에 기록된 실록의 내용입니다.

'조기'는 조귀인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조기는 당시 경상우도의 육군을 지휘하던 종 2품 병마절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조귀인은 조기의 정실부인 아이가 아닌 첩의 자식이었습니다.

진납이란 '바치다'라는 뜻으로 정백창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조귀인을 궁에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조귀인은 정식절차를 밟지 않고 들어온 낙하산 궁녀였던 것이며 게다가 출신도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조귀인을 싫어한 것입니다.

신하들의 마음과는 달리 인조는 조귀인과 갈수록 가까워졌고 조귀인은 인조의 큰 총애를 받게 됩니다.

인조가 전쟁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겪을 때도 함께 했으며 입궁 8년 만에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까지 하면서 인조와 희로애락을 함께 합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귀인은 인조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2. 조귀인,  인조의 딸 '효명옹주'를 낳은 후 종 4품 '숙원'으로 책봉되며 정식후궁이 되다

그 후 인조는 조귀인에게 종 4품 '숙원' 첩지를 내립니다.

딸을 낳고 조귀인을 정식 후궁으로 품계를 올린 것이며 조귀인은 이로서 자신의 입지가 넓어지는 첫 단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내명부에는 중전과 대비가 모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귀인은 사망 한 인열왕후 외에 인조의 자식을 낳은 유일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유일한 내명부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조귀인은 그 입지를 계속 키우면서 지키려 했을 것입니다.

조귀인은 첩의 자식이라는 출신과 낙하산 입궁 과정 때문에 내심 불안한 상황에서 조귀인이 궁 안에서 의지할 사람은 오로지 인조밖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조귀인은 늘 인조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했습니다. 

3. 인조, 새 중전 '장렬왕후'와 재혼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귀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 "오늘부터 금혼하도록 경외에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임금이 명령을 내리다)하였다'

<승정원일기>

금혼령은 왕비나 세자빈을 간택할 때 결혼적령기의 남녀 혼인을 일시적으로 금하는 법을 말합니다.

인조의 중전 인열왕후가 사망한 후 중전의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다시 정실부인을 뽑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중전을 찾는다는 소식에 조귀인은 만약 새로운 중전에게 인조가 마음을 준다면 이후 본인의 안위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불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조귀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새 중전 찾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됩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결정된 인조의 새 중전은 장렬왕후 조 씨였습니다.

장렬왕후는 중전에 걸맞게 품위 있고 명망 있는 명문가 '양주 조 씨'집안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이렇게 15살의 장렬왕후 조 씨가 마흔 다섯 인조의 계비로 들어오게 됩니다.

20대의 후궁 조귀인은 15살의 중전을 모셔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첩의 자식이었던 조귀인과는 비교도 안 될 집안의 장렬왕후를 인조가 총애하지나 않을까 조귀인은 불안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조는 첫 번째 중전을 잃고 3년 만에 새 중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4. 조귀인, 중전 장렬왕후를 제치고 또다시 임신을 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궁궐에 누군가의 임신 소식이 들려옵니다.

재혼한 중전이 임신을 하지 못한 가운데 또다시 조귀인이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인조는 중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서 새로운 중전을 맞이했지만 문제는 인조는 이미 40대 중반의 격랑을 겪은 노회 한 정치가였고 15살 장렬왕후는 딸뻘의 소녀로 궁에 처음 온 15살의 왕비가 인조와 대화가 통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인조 입장에서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는 여전히 조귀인이었던 것입니다.

인조는 중전과는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실질적인 대화나 사랑은 조귀인에게 갔었던 것입니다.

5. 인조, 병세의 원인으로 '저주'를 지목하다

조귀인이 임신 7개월이 됐을 1639년 7월, 조귀인에게 아주 큰 걱정이 생깁니다.

조귀인의 절대적인 의지처인 인조의 건강이 악화되며 나타나는 증상들이 심상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몸에서 갑자기 열이 나고 추위에 떨며 어두운 낯빛에 푸르스름한 땀까지 흘립니다.

인조의 건강악화에 조귀인은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합니다.

'(의관이 말하길) 오늘 안색을 살펴보니 사수(祟, 제정신을 잃고 미치는 증세)의 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인조실록>

사수란 귀신의 사악한 기운이 들어서 생기는 병으로 인조는 부정한 기운이 깃들었다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이때 인조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세의 원인으로 짚은 것은 바로 '저주'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가 실제 효력이 있다고 믿었고 왕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인조입장에서 보면 즉위하자마자 반란, 전쟁, 삼전도 굴욕, 아들들의 볼모, 중전의 사망 등 혼란스러운 정국과 개인 신상 문제로 스트레스가 극심해 피해의식이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때 '사수의 기운이 있는 듯하다'는 의관의 말을 들었을 때 인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은 7년 전, 16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갑자기 인조에게 원인 모를 병증이 지금처럼 나타났습니다.

인조는 몸속에서는 열이 나는데 정작 온몸은 얼음처럼 차가운 증세가 반복이 되며 심지어는 오른쪽 팔에 마비증세까지 오게 됩니다.

그때 내의원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찾지 못했고 사악한 기운 때문에 병이 생긴 것 갔다는 진단이 내려집니다.

당시 인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무시를 합니다.

그런데 몸이 계속 아픈 상황에서 또다시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궁인 옥지 등 3, 4명이 밤중마다 문을 닫고 몰래 후미지고 으슥한 곳으로 가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였다고 자전(인목대비)의 초상에 이 일로써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인조실록>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를 당시 궁녀들이 왕실을 저주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것입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아내이자 광해군의 계모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즉위한 후 왕실 최고 어르신으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광해군의 공격으로 유폐되어 강제로 궁에 갇히는 고초를 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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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조는 인목대비의 유폐와 그녀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유교예법 상 패륜을 행하며 더불어 명나라를 사대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인물입니다.

이때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써 인조를 지지하며 인조의 정통성을 인정해 준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인목대비'였습니다.

인조로써는 자신의 정통성을 세워줬으니 인목대비 사망 후 그녀의 초상을 성대하고 정성껏 치러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목대비의 궁녀들이 초상을 치르는 중에 저주 행각을 벌였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더 끔찍한 것은 인목대비 궁녀들이 왕실을 저주하기 위해서 고양이 머리와 아기 머리를 궁궐에 묻어두기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궁녀들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인조는 혹시 인목대비가 살아있을 때 모종의 계획을 한 일인가 하면서 인목대비를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뿐 아니라 인조가 단순한 궁녀들의 잘못이 아닌 죽은 인목대비를 의심할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목대비가 숨을 거둔 직후 죽은 인목대비가 머문 곳에서 이상한 물건이 발견됩니다.

인목대비가 직접 쓴 글이 빼곡히 적힌 비단 세 폭이었고 그곳에 적힌 '임금을 폐한다'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비난에 적힌 내용은 역모에 해당하였고 비단에 적힌 그 글을 본 이후 인조는 큰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있던 중에 인목대비를 모시던 궁녀들의 저주사건까지 터진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저주와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한 명을 지목합니다.

'이 사태를 주도한 건 그 사람이 분명하다'

저주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사람은 인목대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죽기 몇  전부터 계속 병을 앓아서 사실상 역모를 꾸밀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조는 저주사건의 주동자로 인목대비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를 의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인조에게 정명공주를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반대합니다.

인조 쪽에서 볼 때는 인목대비는 할머니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딸인 정명공주는 인조에게는 항렬상 고모뻘이었습니다.

고모가 의심이 간다고 하여 인조가 정명공주를 핍박하는 것은 죽은 할머니 인목대비를 욕되게 하는 행위로 본 것입니다.

인조는 광해군에 비하면 그 강도는 덜 하겠지만 고모뻘을 심문하는 것은 자칫 광해군과 같은 패륜 행위를 하는 것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고 신하들의 그 말을 들은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는 정명공주를 처벌하고 싶은데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처벌할 수도 없고 저주라고 하는 불안감이 인조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되면 더욱더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6. 조귀인, 저주물을 찾는데 공헌해 인조의 신뢰를 받다

7년 전 저주 사건은 이렇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결국 미결로 남게 됩니다.

인조는 저주의 공포로부터 떨었던 때로부터 7년의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이유 모를 병이 생깁니다.

예전의 경험 때문에 인조는 또다시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인조의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한 사람이 조귀인이었습니다.

늘 인조가까이에 있었던 조귀인은 인조의 불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귀인은 인조의 저주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조귀인은 인조의 저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간에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무당 '앵무'를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저주문제를 용한 무당을 데려와서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조귀인은 무당 앵무에게 궁궐 곳곳에 있는 저주물을 찾아내라고 명령하고 무당은 이를 찾기 시작합니다.

당시 인조가 머물고 있던 창경궁
당시 인조가 머물고 있던 창경궁

인조는 당시 창경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무당은 인조가 지내는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수색합니다.

저주물이 묻힌 장소
저주물이 묻힌 장소

그 결과 위 사진의 빨간 점들 쪽에서 충격적인 저주물이 나옵니다.

임금이 지내던 침화당에서 14곳, 동궁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12곳 등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저주에 쓰이던 물건이 마구 발견된 것입니다.

심지어 왕이 덮고 자던 이불에서도 저주물이 발견됩니다.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주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인조는 궁안팎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원손이 지낼 예정이었던 곳에서도 저주물이 발견됩니다.

조사과정에서 오랫동안 벼르던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바로 7년 전 저주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정명공주'입니다.

정명공주의 집에 무당이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또다시 의심을 받게 됩니다.

정명공주 측은 저주와 상관없는 일이었다고 부인하지만 인조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명공주 측에 무당이 드나들었다는 말은 있지만 정명공주가 저주물을 묻었다는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조사 또한  흐지부지되면서  결국 이번에도 정명공 주을 벌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주물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조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조의 불안감을 해결하는 데 앞장선  후궁 조귀인에 대한 인조의 신뢰는 급상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조는 더욱 조귀인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7. 조귀인, 아들을 낳고 '소용'으로 품계가 올라가다

조귀인은 인조에게 또 다른 큰 기쁨을 안기게 됩니다.

임신 중이던 조귀인이 드디어 아들 '숭선군'을 낳았고 조귀인은 궁녀로 들어와 인조의 아들까지 낳게 됩니다.

1640년 8월, 조귀인은 딸에 이어 아들까지 낳아주니 인조에게 다시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정 3품 소용(昭容)으로 품계가 올라가게 됩니다.

조귀인의 권세는 더욱 강력해지고 인조는 더욱더 조귀인을 가까이하며 의지합니다.

이제 궁 안에서 인조의 총애로 조귀인을 넘어설 여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실상부 조귀인은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8. 승은상궁 이 씨의 등장으로 인조와 조귀인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하자 조귀인, 자작극을 꾸며 이 씨를 제거하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인조와 조귀인의 사랑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조귀인만 바라보던 인조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조가 새로운 궁녀와 하룻밤을 보내며  승은을 내립니다.

승은상궁 이 씨의 등장이었습니다.

조귀인에게는 인조의 사랑을 빼앗아갈지도 모를 경쟁상대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조귀인은 목숨을 위협받는 일까지 겪게 됩니다.

누군가가 조귀인을 저주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주라면 치를 떨던 인조는 그 사건에 대해서 듣고 크게 분노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조귀인에게 저주를 한 것일까요?

조사 결과 조귀인만 인조의 총애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던 승은 상궁 이 씨가 인조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조귀인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승은 상궁 이 씨의 자백을 들은 인조는 그녀를 유배 보내고 사형시켜 버립니다.

인조는 사랑했던 여인일지라도 조귀인을 저주하자 사형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승은 상궁 이 씨의 저주 사건을 둘러싸고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언급이 나와 있습니다.

' 사실은 조 씨가 스스로 저주하여 이 씨를 모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인조실록>

조귀인은 저주사건을 꾸미고는 승은 상궁 이 씨가 한 것으로 덮어 씌운, 즉 조귀인의 자작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9. 인조, 중전 장렬왕후 별거하다

인조와 장렬왕후 사이에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인조가 중전을 다른 궁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것인데 이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인조가 장렬왕후를 홀로 경덕궁, 지금의 경희궁으로 옮겨 살게 한 것입니다.

왕과 왕비가 서로 다른 궁을 쓰는 별거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장렬왕후와 별거를 선언하게 된 인조의 명분은 중전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궁을 옮겨 치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전 장렬왕후는 한 나라의 국모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후궁인 조귀인에 밀려 궁을 옮기는 이 상황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10. 조귀인, 인조의 전복구이 독살 사건의 범인으로 세자빈 강 씨가 지목되도록 해 사형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백성들의 의심을 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mmtaYbK8F1Y

중전 장렬왕후를 경덕궁으로 옮기게 하고 약 2개월 후인 1646년 1월, 인조를 또 한 번 불안에 떨게 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왕이 먹을 전복구이에 누군가 독을 넣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을 탔다는 것은 역모에 해당하는 중차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인조는 배후로 의심되는 사람으로 '세자빈 강 씨'를 지목합니다.

세자빈 강 씨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어떠한 자백도 없었지만 인조는 세자빈 강 씨가 이 독살을 주도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세자빈 강 씨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646년 3월, 인조는 세자빈 강 씨를 퇴출시키고 사약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때 민심을 적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악(세자빈 강 씨의 죽음)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 숙의(조귀인)에게 죄를 돌렸다'

<인조실록>

세자빈 강 씨의 죄가 드러난 것도 없는데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으니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세자빈 강 씨가 죽은 것은 모두 조귀인의 탓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자빈의 죽음마저도 조귀인의 모함 때문이라고 백성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11. 조귀인, 김자점과 사돈이 되다

1647년 8월, 조귀인에게 경사가 찾아옵니다.

조귀인의 딸 효명옹주가 혼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귀인과 사돈이 된 인물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는 바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자점'입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 1등 공신으로 인조의 최측근 대신이었습니다.

김자점의 손자와 조귀인의 딸 효명옹주가 혼인을 하게 되어 조귀인과 김자점이 사돈지간이 됩니다.

인조의 변함없는 총애를 받고 영의정과 사돈이 된 조귀인은 날로 권세를 등에 업고 내명부의 실세로 군림하게 됩니다.

1649년 2월, 조귀인의 입지가 한 번 더 달라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귀인이 종1품 귀인(貴人)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알고 있는 '조귀인'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첩의 딸로 태어나서 궁녀로 시작하여 19년 만에 오른 종1품 귀인의 자리였습니다.

12. 조귀인, 인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궁을 떠나다

인조의 애정을 독차지하며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조귀인에게 귀인책봉 3개월 만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조귀인의 전부였던 인조가 쉰다섯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조귀인의 권력에 힘을 설어주던 인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조귀인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조 뒤를 이은 조선 제17대 왕은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입니다.

인조를 잃은 조귀인은 얼마 후 또다시 슬픈 일이 또 벌어지고 맙니다.

후궁들은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궐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조귀인은 19년 만에 온갖 권세를 누리던 궁궐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13. 조귀인, 왕실 최고어른이 된 장렬왕후를 저주하다

궁을 떠나 불안감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던 조귀인을 지켜보고 있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조의 중전이었으며 경덕궁으로 쫓겨나 인조와 별거를 했던 장렬왕후였습니다.

장렬왕후는 인조 사후에 쫓겨났던 경덕궁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왔고 효종의 어머니로서 대비가 되어 왕실 최고 어른이 됩니다.

한 순간 조귀인과 장렬왕후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조 씨가 매번... 아침저녁으로 우물물을 길어 놓고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몰래 기도하였습니다'

<효종실록>

조귀인은 인조가 죽은 후에 무속신앙과 불교에 더욱더 심취하고 매달립니다.

이런 조귀인의 행동을 보고받은 장렬왕후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인조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사적으로 불공을 드리거나 무당을 부른 것은 유교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렬왕후는 미신행위를 문제 삼아 조귀인의 여종을 매질합니다.

결국 조귀인은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장렬왕후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생각하며 암암리에 왕실 최고어른인 대비 장렬왕후를 저주한 것입니다.

14. 조귀인의 엽기적인 저주행각이 드러나다

장렬왕후는 조귀인의 저주사건에 대해 효종에게 보고하고 효종은 조귀인이 저지른 섬뜩한 행동들에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조귀인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국문하라!'

1651년 11월, 노비, 무당 등 수십 명의 조귀인의 측근들이 잡혀와 조귀인의 저주사건에 대한 국문이 시작됩니다.

국문의 강도가 얼마나 셌는지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조귀인의 엽기적인 저주행각이 드러납니다.

'대궐(창경궁) 안으로 들어가서 땅을 파게 해 뼛가루를 얻었는데, 색이 재와 같았다'

<효종실록>

국문을 통해 드러난 사건에 대해 현장검증을 했는데 조귀인이 시킨 뼛가루 저주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조귀인이 쓴 저주물은 뼛가루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귀인은 죽은 사람의 뼈와 치아, 손톱, 발톱, 머리카락등을 구해오라고 시키고, 심지어 시신의 살이나 관조각등 온갖 엽기적인 저주물까지 모두 원했던 것입니다.

조귀인의 특기는 저주하는 것이었고 이와 관련하여 조귀인이 했다는 말이 실록에 기록되어 남아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로는 저주가 최고다'

<효종실록>

15. 조귀인, 아들 숭선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역모를 하여 죽음을 맞이하다

조귀인의 저주사건을 조사하던 중 또 한 번 조정이 발칵 돼 집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조귀인의 저주 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 1651년 12월, 누군가 역모를 모의한 정황이 포착된 것입니다.

효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입니다.

조사 중에 김자점의 아들이 충격적인 자백을 합니다.

'효명옹주가 은밀히 저에게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조귀인)와 내가 대전(大展)을 저주하였다. 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숭선군을 세우고자 한다"하였습니다'

<효종실록>

조귀인이 첫째 아들인 숭선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딸인 효명옹주와 저주행위를 했고 김자점 일가가 이를 돕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귀인의 저주행위는 역모까지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효종은 이 말을 듣고 저주에 역모까지 저지른 조귀인의 행동들에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1651년 12월 14일, 화가 난 효종은 조귀인에게  이런 명을 내립니다.

'귀인 조 씨는 자진하게 하라'

<효종실록>

조귀인에게 사약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궁녀로 입궁한 지 21년 파란만장했던 조귀인의 삶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조귀인은 저주라는 악랄한 방법을 욕망을 채우는 방법이자 생존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조귀인은 저주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저주는 부메랑이 됐고 그 저주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JTBC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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