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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흘)천하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혁파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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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흘)천하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혁파 김옥균

1.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의 개항이 시작되다

1875년 일본의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도에 불법 침투해 전투가 벌어졌고 바로 그다음 해인 1876년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을 요구합니다.

위부터 원산항, 인청항, 부산항
위부터 원산항, 인청항, 부산항

일본의 요구로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순차적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화도조약 이후에 조선의 개항을 지켜본 미국, 영국, 러시아등 세계열강들 역시 통상을 원한다며 조선에 통상 수교를 요구했고 이에 조선은 차례차례 문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 왕인 고종은 빠른 시간 내에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군사적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 고종에게 필요했던 것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고종과 같은 개화사상을 가진 젊은 신진 관료들입니다.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옥균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옥균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김옥균'입니다.

김옥균은 어린 시절부터 언변이 좋아서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머리 또한 비상해서 22살 어린 나이에 과거에 장원 급제 하게 됩니다.

김옥균은 조정에 진출한 뒤 고종과 한 뜻으로 근대화를 추진합니다.

2. 고종,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개화를 추진하다

고종은 개화파 관료들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화를 추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을 만듭니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 고종이 조선의 근대화를 총괄하기 위해 세운 기관입니다.

통리기무아문 산하에는 12개의 부서가 있었고 외교, 통상, 무역, 군사 등  체계적으로 근대화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고종은 특히 통리기무아문을 통한 군대 양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통리기무아문에서 내놓은 야심 찬 국방정책으로는 신식 부대 '별기군 창설'이 있습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초빙해서 근대식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별기군
별기군

별기군의 무기 역시 그동안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총 같은 신식 무기들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고종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뜻대로 조선은 조금씩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김옥균,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 나가사키로 가다

통리기무아문 설치 1년 후인 1881년 어느 날, 고종이 김옥균을 급하게 찾습니다.

김옥균에게 해외에 파견 나가서 선진 문물들을 보고 배워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의 명을 받고 김옥균이 향한 곳은 '일본'입니다.

일본 됴쿄와 나가사키
일본 됴쿄와 나가사키

1881년 12월, 김옥균은 근대화된 일본의 실상을 배우기 위해서 도쿄와 당시 일본 외교의 중심지였던 나가사키로 갑니다.

김옥균은 일본의 조선소와 제련소, 탄광을 순서대로 둘러보고는 눈앞에 채굴 기계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조선에서는 사람이 수작업으로 했던 일들을 일본에서는 기계화된 공장 시설로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김옥균은 조폐국을 둘러본 후 지폐로 된 돈을 처음보고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는 동전만 있던 시기라 근대화된 일본이 김옥균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상황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던 당시 일본은 차근차근 근대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4. 구식군인들의 분노로 '임오군란' 발발하다

임오군란은 임오년에 일어난 군인들의 난으로 조선의 구식 군대가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입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생기면서 이전에 있군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구식 군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별기군과 구식 군의 대우가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구식 군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월급 체납이었는데 무려 13개월간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구식군인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구식군인들에게 무려 13개월간 밀렸던 월급의 일부를 쌀로 주시고 했는데 그 쌀에 양을 늘리기 위해 겨와 모래가 절반이상으로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부패한 관리들이 쌀을 빼돌렸던 것입니다.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향한 곳은 평소에 차별대우를 하던 관료들 집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쳐들어가서 부패한 관료들의 집을 불태워버립니다.

또한 별기군을 훈련시킨 일본인 교관을 찾아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후에는 일본 공사관까지 불태워버립니다.

당시 구식군인들은 일본의 근대화 정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노한 군인들의 거침없는 행보로 조선전체는 발칵 뒤집힙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난 구식군인들과 백성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구식 군은 고종이 있던 창덕궁을 습격합니다.

궁궐로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명성황후가 이미 궁궐을 탈출합니다.

5. 흥선대원군, 구식군인과 백성들의 요구로 다시 돌아오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구식군인들과 백성들은 고종에게 '흥선대원군(1820~1898년)'을 다시 불러오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한 인물입니다.

구식군인들과 백성들은 고종이 개화 정책을 버리기를 요구하며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원합니다.

이렇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던 흥선대원군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조선 조정의 실세로 복귀합니다.

다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고종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펼칩니다.

별기군을 바로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 또한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개화정책을 완전히 갈아엎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고종과 김옥균은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된다면 그토록 힘들게 추진했던 근대화정책은 모두 수포가 될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대 반대합니다.

6. 고종,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걷잡을 수 없게 끌어 오르는 임오군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궁리 끝에 고종과 민 씨 세력들은 당시 조선이 사대하고 있었던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청나라는 군인 3천여 명을 조선으로 보냅니다.

청나라 군대는 창덕궁을 수비하던 조선의 구식 군인들을 몰아내고 도망갔던 명성황후도 두 달 만에 겨우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에 파병 온 청나라 군인들이 고종도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청나라군대 가 철수하지 않고 남아버린 것입니다.

조선에 돌아와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옥균은 초조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때부터 사대하던 청나라가 결국 군대까지 주둔시키면서 철수하지 않고 내정 간섭하는 모습을 보며 김옥균은 청나라에 대한 거부감이 차오르게 됩니다.

7. 일본, '제물포 제약'을 체결하다

이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김옥균에게 들려옵니다.

바로 청나라에 이어서 일본마저도 조선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이 있었습니다.

임오군란 때 화가 난 구식군인들이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던 것에 대해서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7월에 이미 피해보상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일본이 입은 금전적인 부분을 보상하고 일본인을 죽인 조선인을 처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제물포 제약'을 체결합니다.

제물포 조약은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포 조약에 일본군을 파병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에 천 명의 군사 '공사관 수비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사관 수비대라 함은 보통은 100~200명 정도가 일반적인데 1000명이 넘는 군사를 파병합니다.

사실 이것은 일본이 영국, 미국 등 서양 국가와 교류하며 먼저 겪은 일입니다.

일본은 서양 열강들에게 당한 방법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8. 김옥균, 사죄 사절단으로 일본에 다시 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땅에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모두 다 들어오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제물포 조약 때문에 김옥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일본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하면서 '사죄 사절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김옥균은 사죄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행에 참여하게 됩니다.

김옥균은 이미 일본을 시찰하고 온 경험이 있는 데다가  일본인사들과의 친분을 이미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적임자였습니다.

김옥균은 사죄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기 전에 고종에게 '차관'을 얻어오겠다고 말합니다.

차관이란 국가 간에 돈을 빌리는 것을 말하는데 김옥균은 이때 차관을 도입하는 것은 실패합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가까이 지내면서 개화하자는 친청세력인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개화하자는 친일세력인 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를 따르는 친청 세력이 득세했던 조정에서 급진개혁파인 김옥균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9. 좌절한 김옥균, '갑신정변'을 계획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던 이때 김옥균에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옵니다.

조선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군대 3천 명 중에 절반인 1500명의 군사가 조선에서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1884년 8월 청불전쟁 발발
1884년 8월 청불전쟁 발발

1884년 8월, 베트남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서 청불전쟁이 발발합니다.

청불전쟁에 군대가 필요했던 청나라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중 절반을 철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김옥균은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김옥균은 동료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하는 엄청난 계획을 준비합니다.

김옥균은 1883년에 일본에서 일본인 정치가들과 이미 정변 모의와 구상을 시작합니다.

마침 청불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도 청나라가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게 되어 급하게 정변의 기회로 삼습니다.

김옥균은 정변을 계획하면서 일본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비록 차관도입은 실패했지만 일본 인사들과 여전히 가까웠던 김옥균은 1884년 9월 20일에 다급하게 일본공사관을 찾아갑니다.

김옥균의 정변 계획을 들은 일본 공사관측은 신식 군대 백여 명을 지원해 주기로 합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청나라를 몰아냈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김옥균을 지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김옥균은 일본 군대 백여 명을 확보하기는 했으나 정변을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군사였습니다.

그래서 김옥균과 동료들은 정변에 동원할 군사를 자체적으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모은 군사는 모두 200여 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김옥균은 쿠데타를 실행할 때 고종의 재가만 받는다고 2000명 정도의 조선군대는 충분히 동원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10. 갑신정변 1일 차(정변세력 고종부부의 신병을 확보하다)

1884년 10월 17일, 이날은 우정총국 설립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리던 날이었습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온건개혁파였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연회장으로 들어와 쓰러집니다.

우정총국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갑신정변 세력 이동경로
갑신정변 세력 이동경로

연회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김옥균은 동료들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황급히 달려갑니다.

일본 공사가 100여 명의 군사를 지원해 줄 것인지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 공사의 군사 지원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정변세력은 이번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있었던 창덕궁으로 향합니다.

김옥균은 고종 부부가 있는 침전으로 곧장 달려갑니다.

겉으로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만약 김옥균이 고종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하고 고종이 김옥균을 반역자로 낙인찍어 버리면 갑신정변을 그 자리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옥균입장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침전으로 들이닥친 김옥균은 별란이 일어났으니 고종부부에게 몸을 급히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김옥균과 동료들은 고종과 상의도 없이 이런 어마어마한 정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창덕궁을 뒤흔들며 쾅하는 폭발음이 들려옵니다.

바로 김옥균이 부하들을 시켜 미리 묻어둔 화약이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폭발소리에 화들짝 놀란 고종과 명성황후는 김옥균을 따라 황급히 피신합니다.

김옥균은 고종부부를 경우궁으로 데려갑니다.

창덕궁은 면적이 넓어서 만약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친다면 방어할 범위가 너무 넓었던 것입니다.

반면 경우궁은  궁궐이 작고 면적이 좁아 방어하기 수월했습니다.

일본군은 경우궁 대문 안팎으로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서재필과 수십 명의 급진개혁파들 역시 경우궁 앞을 철통같이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합니다.

그렇게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급진개혁파 5인방은 갑신정변의 첫째 날, 계획한 대로 고종 부부의 신병을 성공적으로 확보합니다.

11. 갑신정변 2일 차(친청파 온건개혁파를 숙청하다)

1884년 10월 18일, 새벽부터 고종의 외침이 경우궁에 울려 퍼집니다.

'임금께서 연거푸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명을 듣지 않았다'

<고종실록>

김옥균이 청나라에 우호적이었던 온건개혁파 관리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황후가 믿고 신임하던 측근 환관까지 죽입니다.

김옥균은 친청세력 핵심에 있던 총 7명을 하룻밤만에 차례로 제거한 것입니다.

김옥균은 고종이 말렸는데도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김옥균 등 정변 세력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장간섭을 굉장히 증오하게 됩니다.

그래서 청나라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친청파인 온건개화파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규정하고 제거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정변세력들은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고종이 반대하더라도 거리낌 없이 죽입니다.

12. 갑신정변 3일 차( 정변세력들의 갑신정변 개혁 정강 공포)

1884년 10월 19일, 김옥균과 동료들은 내각발표에 이어 쉴 새 없이 다음 단계를 밟아나갑니다.

정변세력들은 그야말로 조선의 근간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게 됩니다.

'갑신정변 개혁 정강'이란 1884년 갑신정변 셋째 날 개화당이 개혁정책의 지침으로 공포한 조항입니다.

김옥균과 급진개혁파는 조선을 어떻게 바꾸고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남은 개혁정강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발표된 개혁 정강에는 80여 개의 조항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14개의 조항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조, 흥선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할 것

쇄국정책을 하는 흥선대원군이 급진개혁파 입장에서는 달가운 존재가 아닌 것은 맞으나 흥선대원군이 인질로 잡혀 있는 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으니 데려오자는 것입니다.

정강 1조의 내용은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13조, 대신들은 궁궐 안 회의소에서 회의하고 왕에게 보고한 뒤 법령을 발표하여 시행할 것

왕의 나라 조선에서 왕인 고종을 배제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심지어 갑신정변 세력들이 법령 발표까지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런 개혁정강의 내용을 보고 고종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김옥균을 아꼈던 만큼 배신감도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개혁 정강을 발표한 그날 오후,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 청나라군사 1500명이 창덕궁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비밀리에 청나라군대에 연락을 취했던 것인데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들이 청에 연락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은 청나라군과  격렬한 전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투가 계속될수록 전세가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정변 세력들을 따르던 군사들이 청나라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애초에 군사들은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을 완전히 믿고 따르던 상황이 아니었고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청일 간의 교전 중에 갑자기 일본군이 도망을 가버리는데 퇴로를 보장할 테니 철수하라는 일본과 청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싸우다가 그냥 퇴각해 버립니다.

정변 3일 차저녁,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3.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 일본으로 망명하다

'몰래 인천으로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

<고종실록>

김옥균이 선택한 곳은 그에게 익숙한 일본이었습니다.

1884년 10월 26일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은 일본에 도착하고 일본은 김옥균과 정변 세력들의 망명을 받아줍니다.

이후 김옥균은 10년간 일본에서 지내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합니다.

결국 김옥균은 일본을 떠나게 됩니다.

14. 김옥균,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청나라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김옥균이 향한 다음 행선지는 그토록 타도를 외쳤던 '청나라'였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조선 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일본 정부가 전혀 도와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김옥균 때문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니까 그를 골치 아파하며 남태평양 근처에 있는 섬으로 보내버립니다.

김옥균은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가 혹시나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1894년 2월 17일, 김옥균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상하이로 떠납니다.

김옥균은 측근 2명 그리고 통역이 함께 합니다.

며칠 후 김옥균은 상하이에 도착하고 동행자들과 상하이에 있는 호텔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상하이에 도착한 다음 날, 김옥균은 호텔방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김옥균의 방으로 김옥균을 따라 청나라로 온 동행자 중 한 명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조심스레 들어옵니다.

김옥균은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는 사이 그 남자는 자신의 품 안에서 총을 꺼내어 김옥균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김옥균은 머리와 몸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과연 그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김옥균을 저격한 남자의 이름은 '홍종우(1850~1913)'입니다.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유학생 출신인 홍종우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김옥균이 상하이로 갈 때 동행합니다.

그렇다면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죽인 것일까요?

홍종우는 다름 아닌 고종이 보낸 자객이었습니다.

김옥균의 더 나은 조선을 향한 개화, 개혁의 여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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