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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일개 궁녀에서 중전이 된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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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일개 궁녀에서 중전이 된 장희빈

1. 숙종, 궁녀 장희빈에 빠지다

1686년, 궁궐에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립니다.

왕이 한 신하를 잡아 가두라는 매서운 어명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재위 1661~1720)이었습니다.

숙종이 이 신하를 잡아 가두라고 한 것은 신하가 올린 상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국가의 재앙과 난리는 여인을 총애하는 데에서 옵니다'

당시 조선에는 수해, 지진 등 재난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재난이 일어난 원인이 바로 숙종이 한 여인을 총애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의 상소였습니다.

신하가 올린 상소의 말미에서 그 여인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숙종실록>

상소문 속 인물은 바로 궁녀였던 '장희빈'이었습니다.

상소문은 숙종이 일개 궁녀인 장희빈에 빠져서 국정에 소홀한 숙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또 이런 상소들이 올라옵니다.

'미색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옵소서!'

'미인을 경계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장희빈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상소를 쓴 신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벌을 내립니다.

2. '장옥정'은 왜 '장희빈'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불리고 있을까요?

오늘 다룰 주인공은 상소 속에 등장하는 장희빈(張禧嬪)입니다.

흔히 장희빈의 성이 장 씨이고 이름이 희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단암만록>이라는 책을 통해 장희빈의 본명이 알려졌으며 그녀의 본명은 '장옥정'입니다.

'희빈'이 어떻게 붙여진 명칭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빈'은 서열 1위 후궁의 명칭입니다.

장(張)은 성씨이고 ) 빈(嬪, 서열 1위 후궁) 앞에 희(禧, 복되다 희)라는 존칭을 붙여 장희빈이 된 것입니다.

장희빈이라는 명칭은 그녀가 일개 궁녀에서 후궁 서열 1위가 된 드라마틱한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장희빈이라는 명칭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장희빈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입니다.

3. 장희빈, 궁녀가 되다

장희빈은 오늘날 통역사 역할을 하는 역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납니다.

당시 역관의 신분은 중인이었고 장희빈 역시 중인 신분이었습니다.

비록 양반만큼은 아니었지만 재력 있는 중인 집안의 딸로 성장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희빈의 아버지가 병으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죽으니 장희빈 집안의 가세 또한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장희빈의 어머니는 딸을 궁녀로 들여보내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장희빈은 중인출신의 궁녀로 궁생활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장희빈이 궁녀가 된 지도 10년이 지날 무렵, 다른 궁녀들처럼 장희빈도 하루하루 궁의 일을 하면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희빈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못(매우) 얼굴이 아름다웠다'

<숙종실록>

실록에 궁궐 여인의 미모가 언급된 것은 장희빈이 유일무이합니다.

1680년 겨울, 한 남자가 그런 장희빈에게 완전히 반해버립니다.

그 남자는 바로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숙종'이었습니다.

4. 장희빈, 숙종과 하룻밤을 보내고  '승은 궁녀'가 되다

당시 숙종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의 첫 번째 아내였던 인경왕후가 전염병으로 죽은 후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여 허한 숙종의 마음에 장희빈이 쏙 들어옵니다.

당시 숙종의 나이는 20세였고 장희빈은 22세로 연상연하 커플이었습니다.

장희빈을 보고 반한 숙종은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을 운명적인 사랑 장희빈을 통해 서서히 잊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급격하게 가까워진 숙종과 장희빈은 하룻밤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궁에서 왕과 궁녀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승은'을 입었다고 합니다.

숙종과 하룻밤을 보낸 장희빈은 일반 궁녀에서 벗어나 '승은 궁녀'가 됩니다.

5. 승은 궁녀가 되면 뭐가 달라질까요?

승은 궁녀는 그동안 해왔던 궁내 일을 더 이상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보다 더 파격적인 혜택은 진정한 왕의 여자 '후궁'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후궁은 지위에 따라 정1품에서 종 4품까지 높은 품계를 받고 왕의 공식 '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6. 숙종의 친어머니 '명성왕후', 장희빈을 내쫓으라 명하다

그런데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 장희빈을 쫓아내겠다는 명령이 누군가에 의해서 내려집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숙종의 친어머니 명성왕후(1642~1684)였습니다.

명성왕후는 조선 18대 왕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친어머니입니다.

명성왕후는 중전이 공석인 상황에서 왕대비로서 내명부를 이끌던 인물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왜 장희빈을 내쫓으려고 했을까요?

'그 사람(장희빈)은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 주상이 평일에도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명성왕후가 느끼기로 장희빈은 간사하고 악독해서 궁내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성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을 쫓아낸다는 것은 아무리 왕의 어머니라도 부담스러운 결정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코 명성황후가 장희빈을 쫓아내려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숙종시대의 신하들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숙종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던 이때에는 서인세력이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내명부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명성왕후가 바로 서인 세력과 관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장희빈을 둘러싼 세력들은 남인 세력이었습니다.

장희빈이 쫓겨난 이유에 바로 당파 싸움이라는 정치적 계산도 일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숙종은 어머니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장희빈에 대한 마음을 접습니다.

7. 숙종, 새로운 아내 '인현왕후'와 재혼하다

장희빈은 한순간에 궁에서 쫓겨나 숙종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희빈이 궁에서 나가고 얼마 되지 않은 1681년 5월에 조선이 떠들썩해지는 성대한 행사가 열립니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위 그림은 숙종의 두 번째 결혼식을 그린 '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입니다.

숙종의 첫 번째 아내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비어있는 중전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숙종은 새로운 중전인 '인현왕후'와 재혼한 것입니다.

숙종의 두 번째 아내는 당시 15살의 인현왕후(1667~1701)였습니다.

인현왕후는 지금의 장관급이라고 할 수 있는 판서를 역임한 '민유중'의 딸이었습니다.

민유중은 서인의 실세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서인 집안의 딸 인현왕후는 장희빈과는 달리 명성왕후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렇게 국혼이 치러지던 날 장희빈은 궁에서 쫓겨난 채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8. 장희빈, 인현왕후의 요청에 궁에 다시 돌아오다

숙종이 인현왕후와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1686년 어느 날, 궁에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 여인은 장희빈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다시 궁으로 불렀는데 그녀는 일면식도 없던 장희빈을 왜 궁으로 불렀을까요?

숙종이 쫓겨난 궁녀 장희빈을 그리워하는 것을 인현왕후가 눈치채버린 것입니다.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숙종실록>

승은을 입은 궁인을 민가에 그대로 두는 것은 민망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위 기록은 왕실의 체면을 지키고 왕비의 덕목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되는 인현왕후의 성격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비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나서준 덕분에 궁녀 장희빈은 쫓겨난 지 5년여 만에 궁궐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9. 인현왕후, 장희빈에게 회초리를 들다

다시 만난 장희빈과 숙종, 둘의 사랑은 다시금 불타오릅니다.

그렇다면 장희빈을 불러들인 정실부인 인현왕후와 숙종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희빈이 나타난 이후 숙종은 왕비가 있는 중궁전에 발길을 끊어버립니다.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넘치는 총애가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 날, 궁에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장희빈이 회초리를 맞은 것입니다.

'내전(인현왕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했다'

<숙종실록>

놀랍게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장희빈에게 회초리를 든 것입니다.

당시 지위로 따지면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내전(인현왕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숙종실록>

어느 날, 인현왕후가 장희빈에게 오라고 명령했는데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시를 하며 점점 오만방자해져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한 벌을 내린 것입니다.

10. 장희빈, '승은 궁녀'에서 '정식 후궁'이 되다

이때 충격적인 어명이 내려옵니다.

'장 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숙종실록>

이제까지 장희빈은 승은을 입은 궁녀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숙종의 명으로 장희빈은 종 4품 '숙원'이라는 품계와 직책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숙원부터는 왕의 정식 후궁으로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개 궁녀에서 정식 후궁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장희빈은 숙원 책봉과 함께 노비 100명이라는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장희빈은 몇 달 뒤 종 2품 '숙의'를 거쳐서 정 2품 '소의'까지 승승장구하며 품계가 올라갑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3급 공무원에서 차관급으로 초특급 승진을 한 것입니다.

숙종은 이 정도로 장희빈에 빠져 있었습니다.

장희빈은 인현왕후의 심기를 거스른 채 승승장구하며 궁내에서 입지를 굳혀갑니다.

11. 장희빈, 숙종의 아들을 낳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실부인 인현왕후를 넘어설 기회가 찾아옵니다.

숙종이 무려 즉위 15년 만에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숙종과 장희빈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일어납니다.

장희빈의 출산 소식을 듣고 장희빈 어머니 윤 씨가 '옥교'를 타고 궁으로 들어서는데 신하들이 윤 씨가 옥교를 탄 사실에 크게 분노하며 옥교를 불태워버립니다.

12. 장희빈의 어머니가 수모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은 후 장희빈의 어머니 윤 씨가 산후조리를 도우려고 입궁했습니다.

그때 덮개가 있는 가마인 '옥교'를 타고 온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옥교는 사대부집 부녀자들도 함부로 탈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장희빈집안은 중인 신분이었기에 '감히 중인 주제에 옥교를 타고 입궐한 것'은 조선의 법도를 어긴 일이라 하여 신하들이 크게 분노합니다.

신하들은 아랫사람들을 시켜 가마를 메고 왔던 하인에게 벌을 주고 급기야 장희빈 어머니의 옥교를 빼앗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숙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장희빈 어머니의 옥교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일에 관계된 두 명을 잡아서 엄벌을 줍니다.

그 엄벌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잡혀온 두 명은 죽습니다.

숙종의 절대적 총애와 유일하게 아들까지 낳은 장희빈은 더 이상 궁궐에서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13. 숙종,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인 원자로 세우다

그리고 1689년 1월, 갑자기 궁에서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숙종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장희빈의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인 원자로 세웁니다.

숙종의 명에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하며 그중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중전의 춘추(나이)가 지금 한창인데 너무 급한 결정이십니다'

중전인 인현왕후가 나중에 왕자를 낳을 수 있으니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원칙상 원자는 정실부인인 중전이 낳은 적장자만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전이 아닌 중인출신의 후궁이 낳은 왕자가 다음 왕위를 이어받는 원자가 된다는 것은 숙종이 아무리 강력하게 밀어붙인다고 해도 신하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숙종은 말을 꺼낸 지 단 하루 만에 바로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세웁니다.

14. 장희빈, 후궁 중 최고인 정 1품 '빈'이 되다

숙종은 장희빈을 위해 또 하나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 중 최고인 정 1품 '빈'으로 임명합니다.

비로소 희빈 장 씨, '장희빈'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15. 인현왕후, 폐위되고 장희빈이 새로운 중전으로 책봉되다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고 조정 내 남인세력까지 불러들인 숙종이 생각한 또 다른 선물이 있었습니다.

숙종은 대신들을 조정에 모아 폭탄선언을 합니다.

'실로 종묘사직에 죄를 짓는 사람이다.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국모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숙종이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아내인 인현왕후를 쫓아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숙종은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장희빈을 위해 중전까지 내치려 합니다.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숙종에게는 인현왕후를 쫓아낼 명분이 없었고 쥐어짜 내듯 무려 3년 전일을 들추어냅니다.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했던 꿈이야기를 들고 나옵니다.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내전(인현왕후)과 다른 후궁은 선묘 때처럼 복되고 영화로움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장희빈)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인현왕후가 꿈을 꿨는데 선대왕과 명성황후가 나와서는  '인현왕후와 다른 후궁들은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을 것이지만 숙원(장희빈)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꿈 내용을 숙종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꿈과 반대로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러므로 인현왕후의 꿈은 투기한 증거라는 논리였습니다.

사실 인현왕후가 투기를 했다는 기록은 따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숙종이 이야기한 3년 전 꿈 이야기가 유일한 투기의 증거인 것입니다.

신하들은 인현왕후의 폐비만은 안된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숙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인현왕후를 폐비시켜 버립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4일 뒤, 차기 중전이 새로 책봉됩니다.

바로 '장희빈'이었습니다.

장희빈은 궁녀 출신의 후궁이 왕비가 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조선판 신데렐라의 탄생이었습니다.

후궁을 아무리 총애해도 중전을 내치면서까지 후궁을 중전으로 세우지는 않는데 조선왕실을 넘어서 백성들까지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16. 숙종, 사랑이 변하기 시작하다

이렇게도 장희빈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내던 숙종은, 어느 날부터인가 장희빈이 있는 중궁전을 찾는 빈도가 줄기 시작합니다.

장희빈은 이때 차마 믿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숙종이 과거 인현왕후를 모셨던 궁녀에게 푹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장희빈을 또 한 번 절망시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숙종이 총애하던 궁녀가 후궁이 되고 임신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장희빈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야사집의 기록에 의하면 장희빈은 그 후궁을 불러서 가차 없이 매질을 합니다.

그리고는 항아리를 거꾸로 뒤집어 세우고 항아리 안에 궁녀를 가두기까지 합니다.

장희빈이 그 후궁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후궁이 낳은 아이가 만약 아들이기라도 한다면 장희빈 아들 원자의 장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소식을 듣고 숙종이 들이닥쳐 장희빈에게 크게 화를 냅니다.

숙종은 새로 택한 후궁이 매 맞는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 후궁은 이후 결국 아들을 낳게 됩니다.

숙종이 사랑에 빠진 후궁의 정체는 바로 '숙빈 최 씨(1670~1718)'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uLQXkC2THo

숙빈 최 씨는 대중들에게는 '동이'로 알려진 인물이며 숙종의 후궁이자 제21대 영조의 어머니입니다.

장희빈으로서는 너무나도 불안한 상황이 계속 벌어지게 됩니다.

17.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환국'이 일어나다.

'환국'이란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이라는 뜻으로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지배 세력을 교체해 버리곤 했는데 이를 환국이라고 합니다. 

환국이 일어난 이유는 서인과 남인 양측에서 들어온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 때문이었습니다.

각각 상대방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숙종은 이전과는 달리 서인의 편을 들어주게 됩니다.

숙종은 즉각 영의정, 좌의정 등 주요 관들을 서인으로 교체합니다.

숙종이 장희빈의 편인 남인을 버리고 조정을 물갈이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과 행동들은 결국 숙종의 마음이 장희빈을 떠났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당시  장희빈 오빠, 장희재의 부정부패 사건이 문제가 됩니다.

그 사건에 남인이 이렇다 할 정치적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 실망 끝에 서인을 다시 신임하게 되며 환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18. 인현왕후, 다시 중전으로 복귀하다

장희빈은 흔들리는 숙종의 마음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또 다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인현왕후가 다시 궁으로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겠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심지어 폐비한 일이 잘못됐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인현왕후의 복귀를 마냥 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현왕후의 복귀로 장희빈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인데 문제는 장희빈이 바로 다음 왕이 될 세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연산군대에 생모의 폐비로 인해 조선에 피바람이 불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끔찍한 왕의 복수극을 생각하면 세자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폐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신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숙종은 본인 뜻대로 다시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 곁으로 5년여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19. 장희빈,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다

잠시 후 장희빈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 어명이 떨어집니다.

'한 나라의 중전이 둘일 수 없으니 중전 장 씨의 옥보를 부수고 타고 다니던 가마를 불태우라'

옥보
옥보

장희빈의 '옥보'와 가마 등 왕비의 상징을 모두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장희빈을 중전에서 다시 희빈, 즉 후궁으로 강등시키라고 명합니다.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장희빈의 5년간의 중전생활은 이렇게 처참하게 끝이 납니다.

20. 장희빈,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발각되다

인현왕후는 복위 7년 만에 후사도 없이 서른다섯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에 대성통곡하며 비통해했다며 <인현왕후 전>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죽고 한 달 후 누군가가 숙종에게 충격적인 밀고를 하게 됩니다.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 때마다 2,3인의 노비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숙종실록>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몰래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숙종에게 밀고한 이는 숙종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바로 '숙빈 최 씨'였습니다.

분노한 숙종은 그 길로 장희빈의 처소로 찾아갑니다.

장희빈의 처소를 찾은 숙종의 눈에 유독 눈에 띄는 병풍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병풍을 치워 보라!'

숙종의 어명을 들은 궁녀가 병풍을 걷자  그 뒤에는 화살에 맞아 구멍이 숭숭 뚫린 인현왕후의 초상화가 걸려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궁궐을 발칵 뒤집은 '인현왕후 저주 사건'입니다.

화가 난 숙종은 저주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혹독하게 심문합니다.

며칠간의 가혹한 국문이 이뤄지고 연루된 인물 중 한 명이 결국 털어놓습니다.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사실입니다'

21. 숙종,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다

국문의 결과를 들은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합니다.

그 후 숙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희빈에게 자진할 것을 명한다'

대신들은 숙종의 명에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장희빈은 비록 희빈으로 강등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자의 친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세자의 어머니를 그렇게 죽일 수는 없다며 신하들은 반발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이렇게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 장희빈을 죽이는 게 세자를 위하는 길이다'

숙종의 명이 내려진 지 이틀 후 숙종은 장희빈의 죽음을 세상에 공표합니다.

이때 장희빈의 나이 43세였습니다.

22. 숙종,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법으로 정하다

장희빈에게 영광과 비극을 안겼던 왕인 숙종은 장희빈이 죽기 직전에 이런 명을 내립니다.

'빈어가 후빈의 자리에 오르 수가 없게 하라'

<숙종실록>

후궁이 다시는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숙종은 법으로 명백히 후궁의 왕비등극을 금지시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장희빈 특별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3. 장희빈 아들 경종, 어머니의 복위를 추진하지만 실패하다

숙종이 죽은 후 장희빈의 아들이 결국 왕위를 이어받았고 그는 바로 조선 제20대 왕 '경종(1688~1724)'입니다.

경종은 즉위 후 어머니인 장희빈을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경종은 신하들의 반대에 족족 부딪치면서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다 경종은 후사도 없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경종의 다음 왕은 경종의 배다른 동생이자 숙빈 최 씨의 아들  '영조'였습니다. 

장희빈과 대립했던 숙빈 최 씨의 아들인 영조의 즉위로 장희빈이 명예회복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관계로 지금도 장희빈을 조선 최악의 악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의 삶을 통해서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할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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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3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3(옥지화 사건부터 죽음까지) 10. 장녹수가 연산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잘 읽었는지 보여주는 사건 어느 날 연산군은 조정 신료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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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2(의금부로 끌려가서 사형당하기까지/조선시대 여성상) (tistory.com)

 

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2(의금부로 끌려가서 사형당하기까지/조선시대 여성상)

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2(의금부로 끌려가서 사형당하기까지/조선시대 여성상) 9. 어우동, 의금부에 끌려가다 어우동의 화려한 행적에 대해서 한양 곳곳에 소문이 파다하게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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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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