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2(의금부로 끌려가서 사형당하기까지/조선시대 여성상)
9. 어우동, 의금부에 끌려가다
어우동의 화려한 행적에 대해서 한양 곳곳에 소문이 파다하게 납니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지목하며 점수를 매기는데 계집종이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라고 하면 어우동은 또 "아무개는 내가 취하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라고 실없는 말로 희롱하며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용재총화>
어우동은 이렇게 조선시대에는 금지된 자유연애를 즐깁니다.
그러던 중 어우동은 결국 의금부에 끌려가게 됩니다.
의금부는 조선 시대 특수수사기관으로서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수사, 추국, 재판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1480년 6월 한양 의금부로 한 남자가 끌려오게 됩니다.
어우동의 저고리에 사랑의 시를 썼던 '방산수 이난'이었습니다.
태강수 이동의 부인과 방산수 이난이 불륜 및 근친상간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정은 발칵 뒤집힙니다.
이때 어우동은 이미 몸을 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우동이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성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죄가 중한 것을 알고도 도망치다니 끝까지 잡아내라'
결국 어우동은 의금부로 끌려와 취조를 받게 됩니다.
어우동은 처음에는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법적으로 여전히 종친의 아내로 기록돼 있었고 사대부의 여성이었으므로 혐의가 없으면 신분상 풀려날 거라고 기대하며 보인 행동이라고 판단됩니다.
10. 침묵을 지켰던 어우동, 결국 만난 남자들의 정체를 모두 공개하다
그런데 의금부의 분위기가 어우동의 예측과는 달리 심상치 않았습니다.
'(어우동이 간통하고도 죄를 숨기고) 자백하지 않으니 형을 가하고 국문하소서!'
'국문'이란 임금의 명령으로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입니다.
결국 어우동은 그동안 만난 남자들의 정체를 모두 공개합니다.
침묵을 지켰던 어우동이 결국 실토한 이유는 감옥에서 마주친 '방산수 이난'의 조언 때문이었습니다.
'(이난이 말하길) 예전에 '감동'이 많은 간부(간통남)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당신도 사통 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요'
<성종실록>
예전에 '유감동'이라는 여인이 간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백을 하여 중죄를 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우동은 세종 때의 유감동처럼 감형되길 바라면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의금부에 자백하게 됩니다.
11. 어우동의 자백 1. 사랑을 나눈 남자의 수가 무려 17명
어우동의 자백을 접한 뒤 조정이 예상과는 달리 발칵 뒤집혀버립니다.
어우동의 첫 번째 자백으로 관계된 남자의 수가 무려 17명으로 밝혀집니다.
어우동과 관계된 남자가 한 명씩 나오는 모습에 조정에서는 놀라 이런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음란하고 방탕한 것이 몸을 파는 기생과 같구나'
지체 높은 종친의 아내이자 양반가의 딸이 수많은 남성과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12. 어우동의 자백 2. 사랑을 나눈 곳이 가히 대범한 장소
어우동의 두 번째 자백으로 사랑을 나눈 곳이 가히 대범한 장소임이 밝혀집니다.
수산수 이기와 사랑을 나눈 곳은 공공기관의 건물이었습니다.
김휘라는 남자와는 길가의 집을 빌려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랑을 나눈 장소는 바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습니다.
12. 어우동의 자백 3. 충격적인 불륜 상대들
어우동의 세 번째 자백으로 충격적인 불륜 상대들이 밝혀집니다.
어우동이 왕가의 남자들과 관계를 하는 것을 넘어 가장 충격적인 불륜대상은 '노비'였습니다.
신분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금기했던 조선에서 신분이 다른 양반집 딸과 노비가 간통을 한다는 것은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위신분의 남성이 상위신분의 여성을 농락하는 것은 조정대신들에게는 지배층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들 일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우동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정을 나눴다는 것은 조선의 기본이념인 유교 윤리를 무시한 행동으로 더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13. 어우동의 처벌, 사형파 VS 장형파
어우동의 처벌 문제에 대해서 조정대신들은 사형파와 장형파로 팽팽히 맞섭니다.
어우동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조정대신들의 입장은 이러하였습니다.
'양반의 딸이며 종친의 아내로서 음란하고 추잡함을 자행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온 나라의 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에 맞서는 장형파는 이렇게 말하니다.
'지금 어우동은 (법) 율이 사형에 이르지 않으니, 청컨대 사형을 감하여 먼 곳으로 유배하소서'
14. 성종, 어우동에게 '교부대시'를 명하다
쉽사리 조정대신들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가운데 성종은 45일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합니다.
2 달이라는 시간을 갖자고 했지만 성종은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미 마음속에는 어우동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 어우동은 음란함이 지나쳐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는데 이런 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인들을 어떻게 깨우치게 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율을 헤아려 아뢰게 하라'
<성종실록>
이와 같은 성종의 확고한 의지가 반영되어 대명률에 따르면 장형 100대, 유배 2,000리에 해당됐던 어우동의 간통죄는 45일 후 대명률과는 전혀 다른 죄목과 처벌로 바뀌게 됩니다.
어우동의 죄목은 이러하였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한 법을 적용해서 교부대시에 처한다'
교부대시(絞不待時)의 '교'는 '교형'을 말하며 이는 사형 중에서도 목에 형구를 사용해 죽이는 형벌입니다.
'부대시'는 기다림 없이 곧장 사형을 집행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사형은 보통 추분 즉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사형집행을 미뤄서 누명을 벗거나 감형이나 사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우동은 남편을 배신하지도 재혼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남편을 배반하고 개가한 법을 적용하기에는 그 상황이 맞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끝까지 결정을 번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종의 결정에는 '고려말의 음란한 풍속이 다시 일어날까 두렵다고 하면서 어우동의 처벌은 단순한 형벌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풍속을 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함이다라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종이 교부대시를 명령한 당일 어우동은 교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15. 그렇다면 같이 사랑을 나눴던 남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놀랍게도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있지만 돈을 내고 풀려났거나 귀향 갔다 풀려났거나 심지어 무고로 인정돼 죗값을 치르지 않기도 했습니다.
함께 간통을 저질렀음에도 남자들은 어우동과는 전혀 다른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성종을 포함한 위정자들의 논리는 이러하였습니다.
'천한 기생과도 같은 행동을 한 어우동 때문에 오히려 뜻있는 선비들이 큰 피해를 본 것'이라는 것입니다.
16. 성종, 조선시대 통치기준이 된 법전 '경국대전'을 편찬하다
그렇다면 없는 법까지 끌어와서 일벌백계할 정도로 어우동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봤던 성종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 것일까요?
성종은 가장 큰 업적인 '경국대전' 편찬입니다.
이 업적 때문에 '성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경국대전이란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대에 완성한 것으로 조선 시대 통치 기준이 된 법전입니다.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규정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인 것입니다.
경국대전은 어우동이 죽고 5년 후에 완성, 반포됩니다.
16. 성종이 지향한 조선시대의 여성상은? '경국대전'에서 그 답을 찾다
경국대전 속 여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먼저 여성들은 재혼 절대 금지였습니다.
경국대전 내 담긴 법률 중 '재가녀 자손 금고법'이 있으며 재혼한 여성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재혼이 금지되다 보니 경제적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한 과부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과부들의 경우 흉년이 들 경우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 없는 젊은 과부의 재혼은 허락하고 최소한 먹고살게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기는 하나 이 절충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굶어 죽는다는 핑계로 정절을 잃는 과부가 많아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러면서 점점 여성들의 재혼은 비윤리적인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 여성들은 남성과 접촉 절대 금지였습니다.
경국대전의 '내외법'은 모르는 남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법입니다.
함부로 밖에 나간 여성이 남성과 불필요하게 마주치고 혹시나 정절을 잃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 여성을 집안에 가둬놓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내외법이 생기면서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해야 할 경우에는 '장옷'이라고 하여 조선 시대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던 옷을 쓰고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가마를 이용할 때도 여성의 경우 가마가 지붕으로 덮여 있어야 하며 4면에 벽이 있어야 했으며 이를 '옥교자'라고 합니다.
밖에서 안을 못 보도록 완벽히 차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선의 여성상은 '성종' 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여상상을 지향했던 성종의 입장에서는 어우동의 파격적인 행적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우동이 원래 받아야 했던 장형을 뛰어넘어 사형까지 처해졌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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