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에서 조선의 왕이 된 철종
1. 강화도에 살던 나무꾼 청년 이원범,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 '철종'이 되다
1849년 6월 7일, 조용했던 섬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강화도의 한 나루터에 배 한 대가 도착하자 비장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조선의 영의정과 관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을 곳곳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들을 붙잡고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그런데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강화도에서 농사도 짓고 나무도 베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열아홉의 나무꾼이었습니다.
이 나무꾼은 사람을 찾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군관들은 이 나무꾼을 향해 점점 다가옵니다.
나무꾼은 무서워 벌벌 떨며 급기야 자신의 형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당연히 관군들도 도망가던 그들을 뒤쫓아갑니다.
나무꾼과 관군들의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 끝에 나무꾼은 관군들에게 포위되고 맙니다.
그렇게 관군들 사이에서 떨고 있는 나무꾼 앞에 조선의 영의정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나무꾼은 자포자기한 듯 자신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의 이름을 들은 영의정은 화들짝 놀라며 그 나무꾼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립니다.
바로 이 나무꾼이 영의정과 관군들이 간절하게 찾던 인물,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당시 강화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 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강화도에 살던 나무꾼이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된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2. 조선 제25대 왕 철종, 조선 조정이 나무꾼을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조선 역사상 다시없을 초유의 인생 역전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 제25대 왕 '철종'입니다.
나무꾼이었던 철종은 도대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조선 조정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1849년 6월 6일, 이른 아침부터 조선 궁궐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왕을 가까이 모시는 궁녀들은 물론이고 신하들까지 긴급소집됩니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제24대 왕 헌종이 병으로 승하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헌종이 23살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헌종의 죽음은 당시 조정에 엄청난 숙제를 안길 수밖에 없었는데 헌종이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헌종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 왕실 족보의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왕실 족보의 몇 대까지 거슬러 올라갔을까요?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는 헌종외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인 제23대 왕 순조, 증조할아버지인 제22대 왕 정조 역시 대를 이을 아들들이 딱 한 명 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아들 1명씩 장자 계승만 해 온 상황에서 당시 헌종 뒤를 이을 적통이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왕의 후계자가 없으면 당시 조선에서는 어떻게 후계자를 선정했을까요?
보통 이럴 때에는 족보를 뒤져서 얼마나 혈통이 가까운지를 보는데 이때에는 무려 제14대 왕 선조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할 만큼 왕실의 혈통이 모자랐던 시기였습니다.
지엄하신 조선의 임금자리를 단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신하들은 왕실가문을 샅샅이 뒤져 다음 왕을 찾아냅니다.
그 인물이 바로 19살의 나무꾼 '이원범', 즉 '철종'이었습니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언군, 또 그 아들 이광(전계대원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뻘의 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원범은 조선에서 절대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철종은 왕족이지만 역적 집안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3. 철종 집안이 역적의 가문이 된 이유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이 역모에 가담한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언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은언군 집안의 다른 식구들은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철종 가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1844년, 철종의 큰형 이원경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유배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4살의 어린 나이였던 철종은 집안에 상계군에 이어 이원경까지 두 차례 역모 사건으로 인해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좀 전에 강화도로 찾아온 영의정과 관군들이 누군가를 찾고 다녔을 때 또다시 역모에 휘말려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도망쳤던 것입니다.
4. 철종, 강화도에서 '종'과 같은 생활을 했었다
철종은 왕족이지만 역적 집안사람으로 유배되어 왔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충격적인 대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현재의 임금님(철종)은 사냥꾼으로 불리었고 자기 친척 집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이 기록은 천주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실록에 있는 자료는 아니며 나무꾼 시절의 사료 중 하나일 뿐이지만 철종이 강화도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그 고생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입니다.
철종은 역적 집안의 자식으로 먹고살기 위해 농사는 물론이고 나무꾼 생활을 해왔습니다.
5. 철종, 항렬상 헌종의 삼촌뻘로 헌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아
그런데 이원범이 역적의 자식이라는 것 이외에도 헌종의 뒤를 잇는 왕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헌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찾는 것인데 이원범은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입니다.
즉 이원범은 헌종의 삼촌뻘이었던 것입니다.
헌종이 뒤를 이어 철종이 왕이 된다는 것은 삼촌이 조카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것이 되고 삼촌이 조카의 제사까지 지내야 하는 일이 벌이지는 것이 됩니다.
철종 이전에 조선 역사상 딱 한번 조카를 뒤를 이어 삼촌이 왕이 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삼촌 '세조'의 사례입니다.
즉 당시 조선에서 이러한 일은 쿠데타 정도는 있어야 생길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 2(피부병에 걸려 결국 죽음까지) (tistory.com)
6. 철종, 조선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해 왕이 되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역적집안과 전대 왕 보다 높은 항렬은 왕이 되기 어려웠던 조건'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로서는 왕이 되기에는 말도 안 되는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종이 조선이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철종을 뒤에서 강력히 밀어주는 의문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세도정치'란 조선 후기 특정한 '몇 가문'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 형태였습니다.
조선 후기는 왕권이 약화되고 왕권 못지않게 세도 가문의 권력이 강력했던 시기였습니다.
철종은 바로 이 세도 가문 중 한 가문의 지원을 통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세도정치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조선의 세도 정치의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죽은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성군인 정조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순조는 겨우 11살이었습니다.
정조는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어린 아들 순조가 조선 대신들에게 휘둘릴까 걱정하며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는 신하의 딸과 아들 순조를 결혼시키고 그 신하에게 아들 순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아들에게 든든한 지원군을 만들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정조가 선택한 신하가 바로 안동 김 씨의 '김조순'이었습니다.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의 옆에 선 장인 김조순은 왕의 결정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 김조순과 함께 강력해진 것이 '안동 김 씨' 집안입니다.
어린 왕을 대신해서 '안동 김 씨' 외척가문이 순조 대부터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합니다.
더 문제는 순조의 뒤를 있어 왕이 된 헌종 역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린 나이의 왕을 대신하여 왕실 어른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수렴청정'이라고 하며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왕을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하곤 했습니다.
나이 어린 헌종이 왕이 됐을 때 헌종의 할머니이자 김조순의 딸 안동 김 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조순부터 시작된 안동 김 씨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8. 철종, 안동 김 씨 세도 정치의 꼭두각시 왕이 되다
이원범의 집안은 역모 이후 거의 평민이 됩니다.
철종에게는 힘 있는 친척 또한 없었습니다.
이렇게 안동 김 씨 집안이 선택한 꼭두각시 왕이 바로 철종이었던 것입니다.
철종은 세도 정치의 기득권을 위해 선택된 왕이었던 것입니다.
9. 안동김 씨와 순원왕후의 철종 왕 만들기 프로젝트, 철종이 역적 집안 출신인 것을 지워라
철종이 역적 집안이란 문제점은 안동 김 씨가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요?
안동 김 씨는 철종을 헌종의 할아버지인 순조의 아들로 입양하여 호적을 옮겨버립니다.
이런 방법으로 철종은 역적 집안의 후손에서 순조의 양아들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순조의 왕비인 안동 김 씨 순원왕후가 철종의 수렴청정까지 가능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순원왕후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수렴청정을 2번 하게 됩니다.
이원범은 이런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안동 김 씨의 선택으로 한양에 도착한 후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리게 됩니다.
1849년 6월 8일에는 강화도 나무꾼이었던 이원범이 단 하루만인 1849년 6월 9일 조선의 왕 '철종'이 된 것입니다.
10. 순원왕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철종에게 공부를 시키다
그런데 왕이 된 첫날 철종이 꺼낸 말에 조정 신료들은 경악을 하게 됩니다.
'일찍이 통감 두 권과 소학 1,2권을 읽었었으나 근년에는 읽은 것이 없소'
<철종실록>
철종이 자신 배움이 부족하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철종의 교육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소학은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초등학교 교과서라고 보면 되는데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초등 1, 2학년 수준의 두 권만 읽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철종은 역적 집안의 왕족 후손이었습니다.
역적 집안의 왕족 후손 중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하게 되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 오히려 위험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역적 집안의 왕족들은 살림이 어려워서도 그랬지만 어렸을 때부터 일부로라도 교육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순원왕후는 철종의 자기 고백을 들은 후 철종을 왕다운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철종에게 공부할 것을 요구합니다.
만약 철종의 기본소양이 없으면 신하들에게 공격받거나 자칫 왕의 자질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안동 김 씨가 지지하는 왕이 다른 왕으로 바뀔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순원왕후는 정권 안정을 위해서 철종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11. 순원왕후, 철종의 집안 전체를 신분 세탁하다
게다가 순원왕후는 이미 죽은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사면하고 첩이었던 철종의 어머니 염 씨의 신분을 높여주기까지 합니다.
왕 벽한 왕을 만들기 위해서 철종뿐 아니라 집안 전체를 모두 신분 세탁해 버린 것입니다.
또한 왕실의 최고 어르신인 순원왕후는 비밀리에 또 하나의 명령을 하게 됩니다.
위 그림은 조선 후기 왕의 일기인 일성록입니다.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잘라낸 면 뒤로 뒷장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왕의 일기를 잘라내라고 했을까요?
바로 순원왕후입니다.
순원왕후는 철종의 정통성을 위해서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 집안과 관련된 기록을 모조리 지우라고 명령합니다.
일성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 등 철종 집안의 부정적인 내용은 모두 찾아내어 삭제해 버립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이고 그 기록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조선의 전통임에도 이런 일까지 자행한 것입니다.
철종은 왕실 법도가 무너지는 상황에도 공부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계속합니다.
12. 철종, 아내 철인왕후와 혼인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 순원왕후가 아들 철종을 다급히 부릅니다.
'즉위하고 1년이나 지났으니 왕비를 들이시지요'
바로 철종의 결혼식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스무 살의 철종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느라 당시 기준으로는 혼인이 늦은 상태였습니다.
조선이 이 지경에 처한 것은 왕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무엇보다도 철종의 후사가 급했던 상황입니다.
철종의 결혼과 후사 문제는 안동 김 씨 일가 모두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순원왕후는 철종의 왕비를 찾기 위해서 '금혼령'을 내립니다.
즉 왕의 배필을 찾을 때까지 혼기에 찬 여인들의 혼인을 못하게 하는 명이었습니다.
철종의 왕비를 찾고자 백성의 혼인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1년여에 걸쳐 고르고 골라 간택된 철종의 왕비는 누구일까요?
바로 드라마 속 허구 인물로 알려졌지만 실제 철종의 아내였던 '철인왕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3SngLUy6hw
철인왕후는 어릴 때부터 효심이 깊고 말수가 적어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을 만큼 속내가 깊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 말고 그녀가 철인왕후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안동 김 씨 가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철인왕후의 아버지가 안동 김 씨 김 씨 가문이었고 안동 김 씨 가문은 철종의 아내마저 자신의 집안 여인으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철종은 자신의 아내를 고르는 일조차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철종의 왕의 나라가 아닌 안동 김 씨 가문의 나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3. 세도 정치하에 극심해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고통받는 백성들
안동 김 씨 가문은 철종을 앞세워 끊임없이 권력을 유지해 갑니다.
이렇게 안동김 씨가 철종을 내세워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도정치를 하는 동안 가장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당연히 힘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삼정의 문란은 삼정이라고 하는 조선의 세 가지 제도가 부정부패하고 아주 혼란스러워진 현상을 말합니다.
삼정은 전정(田政, 밭 전, 정책 정), 군정(軍政, 군사 정, 정책 ), 환곡( 還穀, 돌아올 환, 곡식 곡 )입니다.
전정이란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기준으로 수확량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는 제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1년에 군포라고 하는 옷감 1 필씩을 세금으로 내면 병역이 면제됐습니다.
이렇게 군포를 내면 병역을 면제해 주던 제도를 군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이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환수하는 제도입니다.
즉 삼정이란 배고프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돈으로 관직을 산 탐관오리가 많아지면서 그들이 삼정을 악용해서 백성들을 갈취했던 것입니다.
탐관오리들은 이 삼정을 어떻게 악용했을까요?
전정으로는 실제로 땅이 없는데도 허위문서를 만들어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두 번째 군정으로는 '백골징포(白骨徵布, 흰 백, 뼈 골, 징집할 징, 옷감 포)'를 합니다.
즉 죽은 사람도 병역대상자로 올려놓고 강제로 군포를 거둬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성을 위한 구휼제도였던 환곡은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에 모래를 섞어서 빌려주는 쌀의 양을 줄여버립니다.
세도 정치 아래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14. 철종, 안동 김 씨 세력에 맞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다
철종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철종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철종이 21살이 되던 1851년 12월 철종 2년, 철종이 드디어 안동 김 씨 세력에 맞설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순원왕후가 3년간의 수렴청정을 마치고 물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철종은 신하들에게 작심한 듯 결의에 찬 말을 던집니다.
'현재 삼정이 모두 병들어서 민생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슬프다. 우리 적자(백성)는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겠는가'
<철종실록>
철종이 백성이 고달픈 이유는 삼정의 문란에 있다며 대놓고 지적한 것입니다.
삼정을 통해서 호의호식하던 안동 김 씨 세력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철종은 삼정의 폐단을 해결할 비장의 카드를 꺼냅니다.
바로 안동 김 씨에 맞서다 파직, 유배 갔던 신하들을 사면합니다.
철종은 안동 김 씨 세력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삼정의 문란을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던 철종의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철종의 이러한 의지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15. 비변사( 備邊司)를 장악한 안동김 씨 세력에 의해 철종의 의지가 가로막히다
비변사는 조선 중 후기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실질적 최고 정무 기관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몇 개의 행정부서를 합쳐놓은 기관으로 당시 국정 현안을 총괄했던 막강한 기관이었습니다.
비변사는 왜 철종이 개혁을 막는 장벽이 된 것일까요?
비변사를 장악한 사람들이 안동 김 씨 세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동 김 씨 세력을 겨냥하면서 삼정의 폐단을 고치겠다는 철종의 의견은 비변사에서 통과될 리 만무했습니다.
이렇게 왕의 의지마저 막는 안동 김 씨의 영향력을 두고 신하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이 나라가 김 씨의 나라인가, 이 씨의 나라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 씨 세력의 세도 정치를 비판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그야말로 온통 안동 김 씨 세력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철종은 힘을 잃고 고립되어 갑니다.
16. 철종, 유일한 혈육 외삼촌 '염종수'에게 큰 벼슬을 내리다
조정에 자기편 하나 없이 철저히 고립되어 가던 철종에게 반가온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느 날 철종에게 전해진 족보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바로 철종의 어머니 '염(廉)씨 집안'의 족보였습니다.
철종은 어머니가 죽은 뒤 강화도로 쫓기듯 오느라 외가 쪽 사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살펴본 족보에서 살아 있는 혈육인 외삼촌이 한 명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철종의 외삼촌 이름은 '염종수'였고 반가운 마음에 곧장 그를 궁으로 부릅니다.
철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외삼촌 염종수에게 남쪽 해안을 총 지휘하는 현재 해군 중장급의 수군절도사라 큰 벼슬까지 내립니다.
당시 조정에는 철종의 뜻에 힘을 실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철종은 염종수가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큰 벼슬을 내린 것입니다.
철종은 이제야 믿을 만한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고 생겼다고 몹시 기뻐합니다.
17. 철종, '가짜 외삼촌' 염종수에 분노하다
그런데 1861년 10월, 철종을 놀라게 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철종은 크게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염종수의 조사를 시행할 동안 우선 잡아 가두게 하라'
<철종실록>
철종이 믿고 의지하던 염종수가 가짜였습니다.
염종수는 어떻게 철종을 속이고 가짜 외삼촌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철종 외가의 성씨는 염 씨였고 본관은 용담, 즉 '용담 염 씨'였습니다.
그런데 염종수는 '파주 염 씨'였습니다.
출세를 꿈꿨던 욕심 많던 염종수가 철종 외가의 성이 자신과 같은 염 씨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용담 염 씨 가문의 자손까지 끊겼음을 알게 됩니다.
염종수는 용담 염 씨 가문의 족보를 구해서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염종수가 벌인 파렴치한 짓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용담 염 씨 가문의 묘지 비석에 파인 자국이 보입니다.
염종수는 몰래 묘비석의 '용담'이라는 글자를 긁어내고 자신의 본관인 '파주'로 바꿔놓습니다.
염종수는 철종 외가의 묘비석까지 조작한 희대의 사기꾼이었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철종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철종의 기록을 읽어보면 더 가슴이 아픕니다.
'조사한 내용을 보니, 더더욱 마음 아프고 부끄럽구나'
<철종실록>
철종은 사실을 안 다음날 바로 염종수를 참수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철종의 가짜 외삼촌사건은 씁쓸하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철종은 가짜 외삼촌 사건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18. 철종, '삼정이정청'을 만들어 삼정의 폐단을 고치려 하지만 실패하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수만 명의 백성들이 봉기합니다.
백성들이 각종 수탈에 못 이겨 관아를 습격한 것입니다.
이 봉기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합니다.
임술 농민 봉기는 무려 전국 각지 70여 개의 고을로 번져 나갑니다.
백성들이 봉기가 전국으로 번지게 되니 철종은 더 이상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종은 백성들을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삼정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만든 관청인 '삼정이정청'을 만들고 백성들을 위해서 삼정의 개혁을 실시하려 합니다.
삼정이정청은 어떻게 삼정의 폐단을 고치려 했을까요?
바로 환곡이라는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파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높은 이자를 매겨 백성을 수탈하는데 악용됐던 환곡제도를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을 위해 만든 '삼정이정청'은 결국 실패합니다.
환곡을 개혁해서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토지세를 거두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토지를 가진 양반들이 거세게 저항한 것입니다.
양반에게서 거두지 못한 세금은 백성들에게서 거둘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백성을 구하겠다고 내놓은 해결책이 결국은 백성을 도리어 힘들게 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만들어 삼정의 폐단을 없애려 하지만 특별한 성과 없이 수개월만에 삼정이정청이 폐지됩니다.
세도 가문의 거센 저항으로 백성들을 위한 철종의 개혁이 물거품 되게 됩니다.
19. 철종, 개혁 실패 후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다
삼정이정청 폐지 이후 철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년 후, 서른세 살의 나이에 후사도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평범한 강화도의 나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된 주인공 철종,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 발버둥 쳤지만 그마저도 안동 김 씨 세도 가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꼭두각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왕 철종이 된 것이 이원범에게 인생역전이 되었던 건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광해군2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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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흘)천하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혁파 김옥균 (1) | 2023.10.25 |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일개 궁녀에서 중전이 된 장희빈 (0) | 2023.10.23 |
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2(의금부로 끌려가서 사형당하기까지/조선시대 여성상) (0) | 2023.10.22 |
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1(어우동의 출신부터 신분을 속이고 자유연애를 시작하기까지) (1) | 202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