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을 뒤흔든 여인 어우동 1(어우동의 출신부터 신분을 속이고 자유연애를 시작하기까지)
1. 어우동, 장형 100대를 넘어 왕이 관여해 사형까지 내려지다
위의 그림은 조선시대 처벌받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어우동은 회초리인 '태'보다 조금 더 두꺼웠던 '장'형을 당시 최고형이었던 100대나 선고받았습니다.
나아가 왕이 직접 어우동에게 '사형'을 명합니다.
도대체 어우동 어떤 죄를 지었길래 원래의 형벌이었던 장형 100대를 넘어 사형까지 선고를 받았을까요?
더구나 왕이 직접 관여해 벌을 내린 어우동이라는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2. 어우동은 과연 누구인가?
먼저 어우동에게 죽음을 선고한 왕, '성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일은 1480년, 성종(재위 1469~1494) 즉위 11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성종의 할아버지는 '세조'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종은 세조와는 다르게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경'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신하들과 소통했던 '왕도 정치'를 펼칩니다.
성종 집권기의 조선은 이렇듯 왕과 신하가 대화를 나누며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어우동은 이 성종 시대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어우동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접한 대중에게는 그녀가 매혹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우동에게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어우동이 태어난 곳은 한양에 있는 지체 높은 양반집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어우동의 집안은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를 칭했던 '공신'집안으로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 국장급에 해당하는 승무원지사까지 지낸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르지 않아 잘 남아있지 않아 정확 지는 않지만 어우동의 이름은 '박구마( 朴丘麻 )'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즉 어우동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그녀의 별명으로 보입니다.
어우동( 於宇同 )의 의미는 '같이 어울려서 통하다' 혹은 '야무지지 못하다'는 '얼동'의 잘못된 표기라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어우동은 지승문 박 선생의 딸이다. 집안이 부유하고 아리따웠다'
<용재총화>
조선의 역사서에서 여성의 외모를 기록으로 많이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우동을 지칭해 '아리따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면 진짜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어우동은 집안에 돈, 명예, 미모까지 조선시대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엄친딸이었던 것입니다.
3. 어우동,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 '태강수 이동'과 혼인하다
어우동의 혼기가 차니 혼담이 오고 갑니다.
태강수 이동은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로 무려 조선의 왕가에서 혼담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어우동과 태강수 이동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어우동은 왕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의 품계와 동일한 오늘날로 따지자면 3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정 4품 혜인' 작위를 받게 되었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까지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즉 지체 높은 양반집 딸에서 다시 한번 신분의 업그레이드되어 왕실의 종친 며느리까지 된 것입니다.
어우동은 남편 태강수 이동과의 사이에서 딸도 낳습니다.
4. 어우동,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며 남편에게 쫓겨나다
이렇게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어우동의 결혼생활이 풍비박산 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남편 태강수 이동이 어우동과는 못살겠다며 그녀를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어우동이 남편을 두고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실 종친 며느리와 바람을 피운 간 큰 상대는 누구였을까요?
남편 태강수 이동이 데려온 은그릇을 만드는 은장이었습니다.
'어우동이 그(은장이)를 좋아해 매번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 한 솜씨를 칭찬했다. 마침내 내실로 끌어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눈치를 보고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했다'
<용재총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적힌 태강수 이동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이 이야기의 반전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태강수 이동이 기녀 연경비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 씨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처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헤어지는데 한편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성종실록>
태강수 이동이 기생 연경비에게 빠져서 어우동에게 한 행위를 '종부시'의 누군가가 왕에게 고한 것입니다.
'종부시(宗簿寺)'란 조선 시대 왕실의 족보를 편찬하고 왕실 종친의 허물을 감찰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종부시는 폐단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종부시에서 아뢰기를 "태강수 이동처럼 기생에게 빠져 아내를 버리는 일이 많아지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폐단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라고 보고 한 것입니다.
종부시에서 결론 내리기로
'어우동은 은장이와 간통을 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어우동은 실제로는 은장이와 간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종 역시 종부시의 의견을 수용하여 어우동과 태강수 이동의 재결합을 명합니다.
기생첩에게 빠져 처를 버린 남편 태강수 이동의 잘못이 크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양반 이상의 신분이 이혼을 하려면 원칙적으로 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는 이만큼 이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 태강수 이동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아내 어우동을 집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성종의 재결합 명령을 어긴 태강수 이동은 어명을 어겼음에도 3개월 뒤 작위를 돌려받게 됩니다.
임금이라 할지라도 부부관계가 이미 파탄 난 상태였기 때문에 재결합하라는 어명은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명망 있는 사대부집 딸로 태어나 정말 곱게 자라 왕가의 종친 며느리가 되었던 어우동에게는 생애 최대의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5. 어우동, 여종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이다
조선시대에서는 남편 없이 여자 혼자 경제적 자립이 어려웠습니다.
어우동이 차라리 남편과 사별을 했거나 공식적인 이혼을 했다면 재혼을 하고 새 출발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을 텐데 공식적인 이혼도 못하고 쫓겨난 처지이니 이것조차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때 어우동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어우동의 여종(여자종)이었습니다.
어우동이 남편에게 쫓겨나 너무 슬퍼하고 힘들어하니 여종이 어우동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어우동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여종이 말하길)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상심하고 탄식하고 계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 출세하여 사헌부의 도리(하급 관리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전 남편) 태강수보다 월등히 낫고 족계(종족의 계통, 즉 집안 혈통을 일컫는 말)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성종실록>
어우동은 여종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성종실록>
어우동은 태강수 이동이 버린 처, 즉 '기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기처'라는 용어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부인으로 가정이 파탄 난 상태로 쫓겨난 여성을 뜻했습니다.
어우동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겨났고 친정부모님도 품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혼을 하지 않아 재혼 역시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어우동은 자신의 신분인 양반가 여성의 삶 대신에 자유로운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6. 어우동, 오종년과의 만남 후 자유연애를 시작하다(남편의 6촌 형제 방산수 이난과의 연애)
어느 날 허름한 차림으로 길을 가던 어우동을 보고 한 남자가 쫓아옵니다.
이 남자는 길 위에서 어우동에게 한눈에 반합니다.
어우동은 결국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눕니다.
그의 정체는 놀랍게도 남편이 아닌 또 다른 왕가의 남자 '방산수 이난'이었고 어우동의 남편과는 6촌 형제 관계였던 것이며 이는 '유복친' 관계였습니다.
'유복친'은 장사를 지내는 유교식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을 의미하며 보통 고조부모를 공동으로 모시는 8촌 이내를 의미합니다.
어우동의 전남편 태강수 이동과 방산수 이난은 장례가 있을 때 함께 상복을 입는 아주 가까운 관계인 유복친에 해당했습니다.
법적으로는 태강수 이동과 이혼을 하지 못한 어우동은 결국 방산수 이난과 만나면서 남편의 6촌 형제와 사랑을 나눈 격, 즉 근친상간을 한 것이 돼버린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스캔들이 발각될 경우 철저한 유교사회인 조선을 뒤흔들 엄청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어우동과 이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남을 멈추지 않고 이어갑니다.
이난은 어우동을 향해서 애틋한 '연정을 시'(연시)로 남깁니다.
어느 날 이난이 비어 있는 어우동의 집을 찾아 집을 둘러보다 벽에 걸린 어우동의 붉은 소매 저고리를 보게 됩니다.
이난은 그 저고리에 연시를 적어 내려갑니다.
'물시계는 똑똑똑 밤기운 청아한데 흰 구름 활짝 걷히니 달빛 환해라. 빈방 고요한 중에 향기가 남아 있어 오늘도 꿈에도 그리운 정 그려 보오 '
어우동은 연시에 감동을 받고 이난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유교사상이 근본이 되는 조선시대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어우동은 이런 유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문신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어우동과 방산수의) 서로 사귐이 매우 깊어 이난에게 부탁하여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었다'
<성종실록>
여기서 더욱 반전이 있었으니 어우동 몸에 새겨진 이름이 이난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7. 어우동, 또 다른 남자들의 이름을 몸에 새기다
어우동 몸에 새긴 두 번째 이름은 바로 '박강창'입니다.
박강찬은 현재 의대생과 유사한 '전의감'의 생도였습니다.
어우동은 이난의 이름이 새겨진 팔의 반대쪽 팔에 '박강창'이라는 이름을 새깁니다.
세 번째로 몸에 새긴 이름은 '감의향'입니다.
어우동은 감의향의 이름을 등에 문신합니다.
'서리 감의향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우연히 만났는데... 어을우동이 사랑하여 또 등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성종실록>
8. 어우동, 신분을 속이고 또 다른 왕가의 남자들을 만나다
어우동, 신분을 속이고 왕가의 또 다른 남자를 만나다.
어우동이 이렇게 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데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더 많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신분을 속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우동은 신분을 속인 뒤에 다시 또 다른 왕가의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어우동의 새로운 남자는 전남편과 같은 항렬의 시아주버니 관계, '정종의 증손자'였던 수산수 이기였습니다.
어우동과 수산수 이기와 만남은 단옷날에 이루어집니다.
수산수 이기는 단옷날 곱게 차려입고 그네를 타고 있는 어우동에게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이기는 어우동 곁에 있는 여종에게 저 여인은 누구인지 묻습니다.
여종이 말하길 '내금위의 첩'이라고 대답합니다.
왕실을 호위하는 내금위 중에서도 하급 군인의 첩이라고 어우동의 신분을 속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급관리의 첩으로 속인 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어우동은 이번에는 왕가의 자손이 아닌 사위와 만남을 가집니다.
전남편 이동과 춘양군은 사촌 형제 관계인데 이 춘양군의 딸이었던 완산이씨의 남편 이승언과 사랑을 합니다.
이승언은 춘양군의 사위 즉 왕가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항렬로 따지면 어우동의 자식뻘인 관계와 사랑을 나눈 것이 됩니다.
어우동과 춘양군의 사위 이승언과의 만남은 길을 가다 마주친 어우동을 향한 이승언의 관심으로 시작합니다.
이승언이 어우동의 여종에게 저 여인이 지방에서 온 기생인지 여부를 묻자 여종은 어우동이 기생이 맞다고 답합니다.
이번에는 기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녀는 왜 신분을 속이며 왕가의 남자를 만났을까요?
당시 일부일처제의 조선에서 양반 여성은 남편만을 섬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반면 기생과 첩은 어느 정도 성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어우동은 신분을 속이고 자유연애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우동은 조선 왕가의 남자들과 얽히고설킨 조선 왕가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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