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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를 주장하며 32살에 순국하신 안중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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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를 주장하며 32살에 순국하신 안중근의사

1. 안중근, '동학농민혁명'에 '진압군'으로 참전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참지 못하고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던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봉기였습니다.

1894년, 생전 처음으로 이 동학농민혁명에 안중근은 전투에 참전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의 물결이 안중근이 살던 황해도 지역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느 편으로 참전했을까요?

안중근과 아버지 안태훈
안중근과 아버지 안태훈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관리의 요청으로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섭니다.

그리고 아들인 안중근 역시 진압군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안응칠 역사'라는 안중근의 자서전을 보면 그 당시 안중근은 동학 농민군이 외세와 싸운다는 핑계로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안중근 관점에서 나라에 불충하는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이기에 진압에 나선 것입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은 어찌 본다는 '난'으로 보인 것입니다.

안중근 부자는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2. 안태훈, '종현성당'에 몸을 숨기며 천주교 신자가 된 후 안중근 등 가족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급히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동학농민군과 맞서던 당시에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이 쌓아놓았던 곡식들을 빼앗은 적이 있었고 그 곡식은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웠던 군사들을 위해 군량미로 사용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정리된 이후에 조선의 고위관료들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뺏었던 그 곡식을 안태훈에게 다시 내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안태훈은 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한양으로 갔는데 고위관료들이 조선조정에 안태훈을 반역죄로 몰아가려고 해 위기에 몰리게 된 안태훈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몸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종현성당(현재 명동성당)
종현성당(현재 명동성당)

급하게 안태훈이 피신했던 장소는 현재 명동성당이 된 종현성당이었습니다.

당시 종현성당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운영하는 종교시설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 성당에서 지내면서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되고 그 뒤 천주교의 교리를 안중근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전파합니다.

안중근도 역시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을 접하며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 깊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자가 됩니다.

3. 국제정세에 눈 뜬 안중근, 구국 활동을 모색하다

천주교를 통해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안중근은 국내외 신문을 살피면서 국제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에게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중국 상해에 한국인이 머물러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도 그곳으로 이주한 뒤에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90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가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해입니다.

을미사변-아관파천-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보내진 조선사절단-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조선왕국에서 대한제국으로의 근대사(그 안에서의 민영환의 활약상) (tistory.com)

 

을미사변-아관파천-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보내진 조선사절단-을사늑약으로 이어지

을미사변-아관파천-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보내진 조선사절단-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조선왕국에서 대한제국으로의 근대사(그 안에서의 민영환의 활약상) 1. 벼랑 끝 조선, 그들은

donbuller.tistory.com

무인 기질의 안중근은 부당하고 치욕적인 현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고 일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미 일제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상황이었고 대한제국의 무력과 그 격차가 너무 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해외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할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런 안중근의 제안에 아버지 안태훈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아버지 안태훈은 아들 안중근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상의를 마친 안중근은 바로 계획을 실행합니다.

1905년 답사를 위해 홀로 상해로 떠난 안중근
1905년 답사를 위해 홀로 상해로 떠난 안중근

안중근은 답사를 위해 홀로 상해로 떠납니다.

상해에 가서 힘이 있거나 잘 사는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함께 나설 것을 설득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중근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낯선 땅으로 떠났던 스물일곱 살의 안중근은 동포들의 외면에 좌절하고 수개월만에 국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안태훈 앞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다

그리고 귀국한 안중근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이었습니다.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줬고 자신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지지해 줬던 아버지 안태훈의 사망소식에 안중근은 통곡하면서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고 합니다.

부친의 혼백을 모셔둔 제사상 앞에서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계획했던 항일 독립운동에만 정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5. 안중근,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다

평안도 진남포
평안도 진남포

그렇게 해가 바뀐 1906년, 안중근은 가족을 이끌고 평안도 진남포로 향합니다.

안중근은 때가 오면 언제든 다시 해외로 망명해서 항일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항구와 가까운 진남포로 거주지를 옮긴 것입니다.

안중근이 당장 군사를 결집해서 일제와 싸우기에는 무력도, 세력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안중근은 항일운동을 위해서 실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로 다짐합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안중근 유묵 中>

학교를 짓고 교육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안중근은  집안의 논과 밭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습니다.

1906년 봄, 안중근은 진남포 '돈의 학교'를 인수한 뒤 교장이 되고 돈의 학교 교육과정에 교련과목을 넣어 총기 훈련을 포함합니다.

같은 해 6월에는 영어를 가르치는 '삼흥학교'까지 설립합니다.

안중근은 학교를 세워 군사훈련과 영어교육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쳐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가족들 또한 항일운동의 씨앗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라고 본 안중근의 행보에 기꺼이 힘을 보탭니다. 

6. 안중근, 가족을 떠나 총을 들기로 결심하다

그렇게 약 1년 넘게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안중근은 어느 날 갑자기 교장을 그만두고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합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군대까지 해산시켜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기력화 시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은 더 이상 애국계몽운동과 같은 소극적인 방식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제 몸과 가족만 돌보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나는 집과 나라를 멀리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나랏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안중근이 이런 결심을 할 때 밟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중근의 여섯 살 딸과 세 살 된 아들, 그리고 돌도 채 지나지 않은 막내아들까지 세 자녀와 아내였습니다.

이렇게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떼어 놓고 떠나는 안중근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럼에도 안중근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7. 안중근,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연해주 항일 의군부대'를 조직하다

연해주 블라디 보스토크
연해주 블라디 보스토크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난 29살의 안중근은 연해주의 블라디 보스토크로 향합니다.

기반조차 없는 낯선 땅 연해주에서 안중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울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동포가 단합하지 못한 탓에 삼천리강산을 왜놈에게 빼앗기고 이 지경이 되었도다. 청년 형제들은 결사하여 우리 국권 어서 회복하고 대한 제국 만만세를 온 세상이 놀라도록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불러보세'

안중근은 신문에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기고 글을 실어 항일운동을 함께 할 동지들을 모읍니다.

안중근의 절절한 심경이 담긴 글에 감동받은 연해주 동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1908년 4월, 안중근은 기존에 연해주에 자리 잡고 있던 인사들과 연합해서 드디어 ' 연해주 항일 의군부대'를 조직하고 그곳의 의병 참모 중장이 됩니다.

이렇게 안중근이 이끈 의병부대의 규모는 무려 3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었던 안중근이 총을 쥔 의병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의병 지휘관으로 국경 지대에서 일본군 소탕에 나섭니다.

위쪽부터 왼쪽으로 신아산&#44; 홍의동&#44; 영산&#44; 무산
위쪽부터 왼쪽으로 신아산, 홍의동, 영산, 무산

안중근은 함경북도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치러진 두 차례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합니다.

마침 마주친 일본군이 소규모로 움직이고 있었던 대다 안중근의 의병부대가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이 적중했기에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연이어 영산에서 세 번째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300여 명 중 20여 명만이 겨우 생존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일본군은 두 번의 패배 후에 안중근 부대에 보복하면서 치러진 전투였는데 일본군의 엄청난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패배의 진짜 원인은 안중근에게도 있었습니다.

사실 홍의동, 신아산의 앞선 두 전투에서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과 일본인 상인 등을 포로로 붙잡게 됩니다.

의병부대는 일본인 포로들을 사살하려고 하지만 안중근이 이를 저지합니다.

'전쟁 포로는 죽여선 안 된다는 만국공법(=현재 '국제법') 모르십니까? 풀어주시오'

국제법에 따르면 전쟁 중 사로잡은 포로는 죽이지 않고 인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안중근은 이런 원칙과 함께 자신이 믿고 있었던 찬주교의 박애주의도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중근의 결정에 따라 의병부대는 일본인 포로들을 석방합니다.

하지만 그때 석방된 포로들이 일본군에게 의병부대가 있는 곳의 위치나 규모 등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기습적인 공격 해서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쓰라린 참패를 당해야 했습니다.

8. 안중근,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며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다

https://youtube.com/shorts/wUr76Kt4I3Y?si=gF9v0vCcI986_yl5

안중근은 한 번의 패배에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포기하지 않고 재기를 꿈꾸며 연해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연해주 동포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결과 그와 뜻을 함께 하는 11명의 동료들을 가까스로 모을 수 있었습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은 동료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손가락을 끊어 맹세합시다. 이것을 증거로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기어이 우리 목적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가락을 잘라 굳은 결심의 뜻을 보이는 '단지(斷指)'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에 꺼져가는 항일 정신을 다시 이루고자 했던 비장한 결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안중근이 가장 먼저 칼을 들어 자신의 약지를 힘주어 잘랐습니다.

11명의 동료들도 주저 없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단지동맹
단지동맹

비장하기까지 한 이들의 행동을 우리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고 합니다. 

위 그림에 나온 손바닥 도장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단지동맹은 단순히 손가락을 잘랐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기존의 항일의병투쟁의 방식으로 투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항일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전환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단지동맹의 취지를 적절히 이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 안중근과 동료들이 남긴 태극기
실제 안중근과 동료들이 남긴 태극기

안중근은 단지동맹 후 동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가락에서 피를 모아 붓에 묻힌 다음, '대한독립' 네 글자를 태극기에 남깁니다.

9. 안중근, 하얼빈으로 떠나다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애국지사가 결연한 의지를 다진 후 1909년 10월, 드디어 안중근에게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은 지체 없이 연해주를 떠나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기 위해서 하얼빈으로 향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설치된 조선총독부의 전신이었던 통감부의 초대 통감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일제 침략에 핵심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안중근 역시 하얼빈으로 출발합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왜 하얼빈으로 갔을까요?

일제와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를 사이에 둔 일종의 경쟁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결국 한반도의 독점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확실히 대한제국을 넣기 위해서 러시아와 외교 협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만주에 속한 하얼빈에서 러시아 대표와 회담을 갖기로 결정된 인물이 일제의 거물 정치인인  이토 히로부미였던 것입니다.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이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토를 처단하지 않고는 대한 제국과 동양의 평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안중근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로 동지들과 결의를 합니다.

10.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여러 종류의 신문을 사서 읽기 시작합니다.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아옵니다.

안중근은 낡은 양복을 입고 권총을 챙겨 오전 7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9시가 되자 이토를 태운 기차가 하얼빈역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분 이초가 영원처럼 흘러가던 이때 열차 안에서 러시아대표와 30여 분간 대화를 나눈 이토 히로부미는 드디어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으로 내려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중근의 사정권에 들어온 순간, 안중근은 방아쇠를 당겼고 그 저격은 정확했습니다.

히토 히로부미는 피격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졌고 약 30분이 지난 오전 10시경에 사망합니다.

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유묵 中>

안중근은 이렇게 대한 만세를 외친 후 달려드는 러시아 헌병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합니다.

11. 안중근, '뤼순감옥'에 갇히다

안중근의사의 의거 소식은 가족들에게도 전해집니다.

당시 24살, 20살이었던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가족을 대표해서 형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낯선 타지로 떠납니다.

뤼순 감옥
뤼순 감옥

이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안중근이 갇혀 있던 중국 '뤼순 감옥'이었습니다.

하얼빈에서 뤼순까지의 거리 약 900km
하얼빈에서 뤼순까지의 거리  약 900km

하얼빈에서 뤼순까지는 약 900km로 기차를 타고 이틀이나 이동해야 하는 그런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안중근은 왜 하얼빈이 아닌 멀고 먼 뤼순 감옥에 갇힌 것일까요?

하얼빈 의거로부터 약 10여 년 전 중국정부와의 러청 조약을 통해서 러시아는 하얼빈 일대의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하얼빈 일대에 광활한 철도부속 지를 지정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하얼빈은 중국땅이지만 사실상 러시아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러시아 통치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원칙상으로는 안중근은 러시아정부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국제관계를 무시한 채 안중근의 신병과 재판권은 바로 일제에 넘어갑니다.

하얼빈역의 경비를 맡았던 러시아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러시아는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서 의거 당일 바로 안중근의 신병과 재판권을 일본에 넘겨 버린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러시아는 또 한 번 일본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엄청난 외교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재판권을 넘겨받은 일본은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에 차지했던 중국 뤼순지역의 감옥에 안중근을 가둔 것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뤼순지역은 일본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통치권 아래에 있었던 뤼순지역이라면 일본인 판사와 일본인 검찰과 변호인을 두고 자신의 입맛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일제가 안중근의 재판을 두고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12. 안중근, 재판 시작 일주일 만에 사형선고를 받다

1910년 2월 7일, 마침내 안중근의 첫 번째 공개재판이 시작됩니다.

이 공개재판을 보기 위해서 방청객만 무려 500여 명이 새벽부터 법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10년 2월 7일 안중근의 공개재판 사진
1910년 2월 7일 안중근의 공개재판 사진

위 사진은 북새통을 이룬 재판 현장 사진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진 상 맨 앞줄의 제일 오른쪽에 앉아있습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어마어마한 사건에 대해서 세간의 관심이 많았던 만큼 발 디딜 틈 없이 재판정은 사람들로 가득 메워집니다.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왜 이토를 사살했는지 묻습니다.

재판장의 질문에 안중근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국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또 참모 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인데, 지금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1910년 2월 7일 1차 공판 中>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일제와의 독립전쟁 중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이기에 전쟁 중에 붙잡힌 자신을 국제법에 따라 포로 대우해 달라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안중근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공개재판에서 일제의 침략행위와 대한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안중근이 일제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 발언을 하는 것에 재판부는 당황해하며 방청객을 퇴장시키고 재판을 비공개로 돌려버립니다.

첫 번째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일주일 뒤인 1910년 2월 14일, 속전속결로 안중근의 사형 선고가 내려집니다.

왼쪽부터 안정근&#44; 안공근&#44; 안중근
왼쪽부터 안정근, 안공근, 안중근

이 사형선고를 들은 안중근의 앞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었습니다.

갑자기 내려진 사형 선고에 형 안중근을 면회하며 통곡을 참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13. 안중근, '동양평화론'을 통해 죽음 앞에서 의연히 평화를 외치다

일제의 일방적인 재판과정 끝에 내려진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뤼순법원 최고 책임자인 고등법원장에게 깜짝 놀랄만한 요청을 합니다.

바로 사형 집행 날짜를 미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사형 집행일을 미뤄달라고 한 이유는 판결에 대한 부당함이나 죽음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아닌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개 중 14번째가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대한제국, 청, 일본 동아시아 3국이 서로 주권을 인정하고 국제기구를 만들어서 서로 안정되게 협력하고 교류하는 이런 사회가 동양평화를 달성하는 사회라는 것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평화'라는 단어는 굉장히 낯선 단어였습니다.

때문에 그 당시 안중근이 평화 사상을 사고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를 앞서 나갔다는 반증이 됩니다.

동양평화론에는 대한제국만의 이익이나 일제를 향한 분노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안중근이 제시한 동양평화의 방법은 조국의 이익만이 아닌 세 나라가 동등한 입장에서 노력하는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꿈꿨던 것입니다.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단결해서 극렬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아이 일지라도 극히 아는 일이다...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 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동양평화론 中>

14. 안중근, 32살의 나이로 순국하다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안중근의 사형 집행 직전의 사진입니다.

시선이 밑을 향하지 않고 위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음까지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안중근은 32살이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순국합니다.

안중근이 죽기 전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유언 中>

15. 일제, 안중근의 시신이 묻힌 곳을 끝내 알려주지 않다

안중근의 유언은 지켜졌을까요?

안타깝게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당일,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감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은 형 안중근의 시신을 넘겨받지 못합니다.

너무 황당하게도 가족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일제가 뤼순 감옥 어딘가에 시신을 묻어버린 것입니다.

동생들은 대성통곡하며 울부짖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형을 두 번 사형하는 것이냐!'

하지만 그 비통한 울음소리에도 일제는 끝내 안중근의 시신이 묻힌 위치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던 독립운동의 영웅 안중근, 돌아오지 못한 그의 유해대신 죽음 이후 안중근이 남긴 물건들이 있습니다.

안중근 자서전 &#39;안응칠 역사&#39;와 동양평화론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안중근의 자서전과 미완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의 가족사진(아내와 자녀)
안중근의 가족사진(아내와 자녀)

그리고 가족사진입니다.

이 가족사진에 담긴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안중근은 거사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동지에게 부탁합니다.

이 연락을 받고 출발했던 안중근의 아내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의거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안중근은 끝내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위의 가족사진만을 전달받았던 것입니다.

이 한 장의 가족사진을 안중근은 죽음 직전까지 마르고 닳도록 꺼내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죽음 이후 아내와 아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해주에 자리 잡게 됩니다.

16. 안중근의 가족들, 조국을 떠나다

그렇다면 조국에 남아있던 안중근의 어머니와 동생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헌병과 순사들이 매일 그 대문을 두드리고 그 출입자들을 탐문하고 그 의사를 캐물으니 옥리가 죄수를 감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려수필>

창살 없는 감옥에 매일매일을 보내  조국에 남아있던 안중근의 가족들 역시  등 떠밀리듯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17. 안중근 사후 안중근의 뜻을 이은 가족들의 독립운동

마지막까지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했던 두 남동생은 안중근의 죽음 이후 무슨 일을 했을까요?

안중근 대신 집안의 장남 노릇을 했던 차남 안정근은 1919년 가을, 돌연 중국 상해로 향합니다.

평소 친한 형님으로 모시던 한 인물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안중근 동생 안정근과 도산 안창호
안중근 동생 안정근과 도산 안창호

위 사진 상 뒷줄의 맨 왼쪽 인물이 바로 도산 '안창호'입니다.

안정근은 안청호의 요청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한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북간도 특파원으로 선발돼서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서기도 합니다.

게다가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이 활약했던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서거 78년 만에 유언대로 조국으로 돌아온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2)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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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19년. 때를 기다리고 있던 홍범도에게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었던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3.1 운동입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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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막내 안공근은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막내 안공근을 감시하던 일제 고등경찰이 남긴 글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령 행동은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이뤄진다'

안정근이 안창호의 최측근이었다면 안공근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오른팔이었던 것입니다.

안공근은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거나 게릴라 작전과 같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김구가 만든 비밀결사 조직인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합니다.

윤봉길
윤봉길
이봉창
이봉창

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봉길과 이봉창이 있습니다.

이봉창(1901~1932년)은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순국한 한인애국단원입니다.

윤봉길(1908~1932년)은 홍콩 항커우에서 일본군 수뇌부에 수류탄을 던지고 순국한 한인애국단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위 사진들을 찍은 장소는 모두 다름 아닌 안공근의 집이었습니다.

극도로 보안이 중요한 선서식이 안공근 집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보면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안중근의 동생들 뿐 아니라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사촌에 조카까지 안중근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안중근 집안에서 무려 15명의 건국훈장이 나왔을 만큼 독립운동 명문가입니다.

이렇듯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안중근 가족의 묵묵한 지원이 있었기에 안중근의 의거 또한 가능했던 것입니다.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에 단지로 맹세하고 구국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의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

<안중근 유묵 中>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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