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19년. 때를 기다리고 있던 홍범도에게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었던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3.1 운동입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전국적으로 터져 나온 비폭력 만세운동입니다.
이런 저항의 바람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와 만주까지 번졌고 일제에 맞서 무장 투쟁의 기운이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아래의 글이 선포됩니다. (독립기념관 제공)
총포에 맞서 몸을 던져서라도 민족과 자손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내용의 글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홍범도는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에 모여드는 의병들을 군조직으로 재편해서 만들어진 '대한독립군'이라는 독립군의 대장이 된 것입니다.
당시 홍범도의 나이는 52세였습니다.
쉰이 넘은 나이에 독립의 의지가 꺾일 수도 있던 상황에도 연해주 땅에서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비로소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10년의 기다림 끝에 그의 총구가 다시 일제를 향하게 됩니다.
13. 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결성
홍범도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 300여 명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동합니다.
홍범도는 왜 북간도로 이동했을까요?
당시 북간도에는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간도에는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는 '독립군에게 하나의 큰 군대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북간도 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6개 독립운동단체의 주요 간부들과 만나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결성된 독립군 연합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입니다.
그리고 홍범도는 이 700여 명에 달하는 연합독립군의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14. 봉오동 전투(일본군이 두려워한 '봉오동 호랑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고립된 봉오동은 외부의 눈을 피해서 군대를 모으기 좋은 데다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봉오동에 자리 잡은 홍범도의 다음 공격 목표는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함경북도 지역의 일본군 소대였습니다.
이미 홍범도는 연합독립군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약 7개월간 수차례 게릴라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괴롭힙니다.
홍범도의 이 전략은 성공해고 국경지역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일본군은 무시무시한 '월강 추격대대'를 보내 독립군을 쫓아오게 됩니다.
월강 추격대대는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며 만든 약 300여 명의 일본군 정예부대입니다.
그리고 이 일본군 추격대대는 중국에 아무런 사전통보 없이 무단으로 북간도로 넘어옵니다.
독립군은 1920년 6월 7일 새벽 6시경에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목격합니다.
일본군을 보자마자 몇 발의 사격을 시도한 뒤 독립군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일본군의 강력한 무력 앞에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치는 줄만 알았던 독립군은 사실은 일본군을 유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군이 독립군의 뒤를 쫓아서 봉오동 골짜기 한가운데 들어선 그 순간.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독립군들의 무차별 사격이 시작됩니다.
월가 추격대대는 그때서야 포위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기관총을 앞세워서 대응사격을 시작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상황이라 일본군은 깊은 골짜기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됩니다.
봉오동에서 전투가 계속되던 오후 4시 20분경에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져 내립니다.
홍범도의 독립군도 이런 기상상황 때문에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소강상태를 틈타 재빨리 도망치게 됩니다.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두 방향으로 정신없이 도망치던 일본군이 후퇴하다 서로 마주치게 되고 최악의 기상상태로 제대로 보이지 않은 상황에 독립군으로 착각해 일본군은 서로에게 총을 쏘게 됩니다.
이렇게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독립연합부대의 매복과 유인으로 기세 등등 했던 일본군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1920년 6월 22일 독립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립니다.
'독립군 승첩, 봉오동에서 적을 대파'.
이 기사를 통해 국내외 조선인들에게 독립군의 승전보가 날아들게 됩니다.
홍범도는 봉오동의 승리로 명실상부 독립군의 영웅이 됩니다.
15. 청산리 전투
청산리 일대에서는 6일 동안 총 10여 번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에 대해 10전 10승!
완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치러졌던 '완루구 전투, 어랑촌 전투'를 포함해 총 10여 번의 전투를 통틀어서 '청산리 전투'라고 하는 것입니다.
15. 1. 완루구 전투
봉오동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그로부터 4개월 뒤에 북간도를 초토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엄청난 수의 일본군을 이끌고 다가옵니다.
무려 2만여 명의 일본군 총공세에 독립군은 다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일본의 본격적인 북간도 공격을 작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홍범도는 '백두산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지형이다. 조국 땅과 더 가까이 가서 조선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전투를 준비하자'라고 말하면서 일본인을 피해 독립군의 근거지를 봉오동에서 조선땅과 좀 더 가까운 백두산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를 알아차리고 일본군은 독립군을 바짝 추격하게 되고 이 추격전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홍범도는 '모두 여기서 멈춰라'라고 독립연합군에게 말합니다.
한시라도 일본군을 따돌려야 했던 독립군에게 멈추라고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홍범도는 이런 식으로 해서 일본군에게 따라 잡혀 억지로 이 전투가 시작된다면 독립군에게 불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멈춰 선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청산리'입니다.
청산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하 김좌진)'입니다.
김좌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으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과 함께 홍범도 역시 활약했습니다.
이 사실은 의외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청산리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던 홍범도에게는 굉장히 풀기 힘든 난제가 있었습니다.
청산리 일대가 '은세계'로 바뀌어 군사행동이 곤란할 정도였다. (간도독립운동소사 중)
맞습니다.
북쪽 산악지대였던 청산리에서 10월은 이미 한겨울이었습니다.
홍범도와 독립군은 겨우 솜바지 하나에 방수도 되지 않는 짚신 하나로 청산리의 추위를 이겨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악조건과 압도적인 병력차이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매복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산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에 여기저기로 밀고 들어옵니다.
그들의 목적은 산 정상에 있는 홍범도 부대였기 때문에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 정상으로 오릅니다.
그런데 이때 일본군이 하나 둘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이번에도 일본군이 홍범도의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는 산 정상으로 이동하는 척하며 일본군을 산 정상으로 유인하고는 홍범도 부대는 사실은 산기슭을 통해서 몰래 산을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일본군은 이번에도 일본군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봉오동 전투에서의 오인사격이 악천후에 정신없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서로 엇갈려 내려오던 일본군끼리 만나 이뤄졌던 것과 달리 청산리전투에서는 백두산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홍범도의 절저 한 계산으로 만들어낸 오인사격입니다.
홍범도의 묘책으로 승리한 이 전투를'완루구 전투'라고 합니다.
15. 2. 어랑촌 전투
완루구 전투를 끝낸 홍범도는 한숨을 돌리기도 전인 그다음 날 곧바로 다른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또 다른 매복장소를 찾아 이동하던 홍범도 부대가 김좌진부대와 일본군의 전투를 목격하게 됩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뒤로 은밀하게 접근해서 협공을 벌입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 공격당하는 일본군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고 혼비백산하며 일본군 전열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진행되던 전투는 일본군의 후퇴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싸움을 우리는 '어랑촌 전투'라고 하며 홍범도, 김좌진이라는 독립 영웅들의 합작으로 이뤄낸 청산리에서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16. 간도참변
북간도의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던 일본군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독립군에게 패배한 후 일본군의 칼날은 북간도의 조선 민간인들을 향하게 됩니다.
간도참변은 1920년 간도의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일본군은 간도의 마을을 포위하고 습격한 후에 모든 남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총과 창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심지어는 일본군은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데 이렇게 두 번 학살당한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 가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간도참변은 국민, 인종, 이념 등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인 '제노사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노사이드였던 간도참변으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희생됩니다.
일본군이 초토화시킨 북간도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은 홍범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17. 소련공산당 입당
그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당장이라도 북간도로 달려가서 조선인들의 복수를 하자는 마음으로 들끓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홍범도의 독립군 대원들은 이미 너무 지쳐있었고 탄약과 무기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북간도의 기반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홍범도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 열린 한 국제대회에 참석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습니다.
홍범도는 무장단체였던 독립군이 일본군도 개입하고 있던 러시아의 내전에 참가해서 일본군과 싸우는데 힘을 보탠다면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추위,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원조를 받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홍범도는 원하는 것을 과연 얻을 수 있었을까요?
러시아는 홍범도와 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희망을 안고 찾은 러시아에서 독립군들은 분열이 되었고 흩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소련이 된 러시아에 남아 얼마 남지 않은 독립군들과 함께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군자금을 모읍니다.
항일무장투쟁에 대비하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홍범도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러시아 관리들이 홍범도를 찾아와서 독립군이 농사짓는 땅을 환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홍범도가 선택한 것이 바로 '소련 공산당 입당'입니다.
당시 소련 공산당 당원이 되면 좀 더 신분이 보호되고 그렇게 되어야 '동포들을 더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 안정된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18. 소련 스탈린의 강제 이주 명령
이렇게 홍범도가 러시아에서 지낸 지 16년이 흐르게 됩니다.
어느덧 그의 나이 69세가 됩니다.
그런데 1937년 69세의 홍범도에게 '고려인들은 모두 짐을 싸서 기차에 탑승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에 주로 거주하며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한민족 동포를 고려인(카레이스키)라고 칭했습니다.
러시아의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다짜고짜 기차를 타고 떠나라는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 내에서 일본인의 간첩활동이 있어왔고 바로 조선인이 일본 사람들과 닮아 조선인 중에서 혹시 일본의 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러시아에서 아주 먼 곳으로 강제이주를 시킨 것입니다.
무려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잃고 떠나야 했습니다.
홍범도 역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무려 40여 일을 달려 '카자흐스탄'에 도착합니다.
19. 홍범도. 서거 후 78년 만에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시다.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 후 홍범도의 삶은 어땠을까요?
6년 후 어느 날 카자흐스탄 고려인 신문에 홍범도의 소식이 실립니다.
홍범도 동무는 여러 달 동안 숙환으로 집에서 신음하시다가 그만 75세를 일기로 하시고 1943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홍범도는 광복을 2년 남긴 1943년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2억만 리 카자흐스탄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런 홍범도가 죽기 전에 한 마디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면 꼭 나를 조국에 데려다주시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 서거 후 78년 만에 귀환길에 오릅니다.
일본군 상대로 60전 60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1)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