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혈혈단신! 홍범도의 어린 시절은?
홍범도 장군(이하 홍범도)은 1868년 10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고종이 재위 중이던 조선 말기였습니다.
'모친은 칠일 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을 얻어먹고 자랐다'(홍범도 일지)
의 내용에서 보듯 홍범도를 출산 한 지 7일 만에 홍범도의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때문에 홍범도의 아버지는 갓난아이였던 홍범도를 품에 안고 이 집 저 집 아이가 있는 어머니를 찾아다니며 젖동냥으로 홍범도를 키우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홍범도의 아버지의 직업은 머슴이었습니다.
머슴살이로 생계를 유지해 간 홍범도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혈혈단신이 된 홍범도는 결국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머슴살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부터 평탄치 않았던 홍범도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이 되었던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평양관청에서 군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군 입대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머슴살이보다는 군인 생활이 좀 더 낫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홍범도를 가로막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이였습니다.
당시 15세였던 홍범도는 입대 가능 나이 17세에서 2살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홍범도는 포기하지 않고 나이를 속이기로 결심하고 기어코 평양 소속의 조선군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생계를 잇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2. 과연 홍범도의 군대생활은 어땠을까요?
남다른 신체 조건과 발군의 사격술까지 갖춘 홍범도는 그야말로 딱 군대체질이었습니다.
군대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던 홍범도에게 군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걸핏하면 병사들을 구타하는 군 장교들의 가혹 행위였습니다.
어느 날 홍범도는 더 이상 군생활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병사들을 괴롭히는 장교를 때려눕히게 됩니다.
당시 홍범도의 하극상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머슴출신 홍범도가 양반 신분의 장교를 때린 것입니다.
군에 계속 남을 경우 아주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홍범도는 약 4년간의 군인 생활을 뒤로하고 결국 도망치게 됩니다.
3. 제지소 노동자로의 삶
의지할 곳 없는 홍범도가 군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였습니다.
1888년 제지소노동자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3여 년이 지나 홍범도가 22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제지소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갈 때 없는 홍범도의 사정을 알고 제지소 주인이 3년여간 괴롭힙니다.
폭언과 폭력은 물론 임금도 제때 주지 않았습니다.
3년 여동안 계속되던 이 부당한 대우에 폭발하고 만 홍범도는 제지소 주인을 때려눕히게 됩니다.
4. '신계사'에서의 삶
홍범도는 제지소를 도망쳐 나와 강원도 금강산에 위치한 '신계사'로 가서 그곳의 스님에게 오갈 데 없는 사정을 말하고 절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절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불교경전을 배우며 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절에서 생활한 지 1년 반이 지나던 어느 날 홍범도는 불현듯 절을 나오게 됩니다.
5. 평생의 반려자인 '단양 이 씨'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다.
절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단양 이 씨'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씨의 고향이었던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이동을 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북청군에서도 생계 수단은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장 홍범도는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이 됩니다.
북천군은 바닷가 빼면 3면이 산악지대인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곰, 멧돼지, 표범, 호랑이 등 맹수들의 서식지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홍범도는 이런 북청에서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6. 홍범도의 사냥 실력은?
사냥꾼은 홍범도에 딱 맞는 천직이었습니다.
홍범도는 북청군 일대의 대표 사냥꾼이 됩니다.
사냥꾼으로 인정받게 된 홍범도는 먹고사는 걱정 없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생계 걱정 없이 가족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홍범도의 평온했던 일상에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7. 홍범도에게 찾아온 또 다른 위기는?
바로 사냥꾼이란 직업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1907년 자주 외교를 펼치려던 우리의 황제였던 고종을 일제가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정미년(1907년)에 일본군과 싸우겠다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며 이때 일어난 의병 전쟁이 바로 '정미의병'입니다.
8. 정미의병과 홍범도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총'을 압수합니다.
그리고 민간인들의 총기와 탄약을 정부가 관리하고 위반할 때는 처벌하는 단속법인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까지 만듭니다.
사냥꾼에게 제일 중요한 '총'을 압수당하면 생계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총을 빼앗겨 굶어 죽느니, 놈(일본군)들과 싸웁시다!"
홍범도는 이렇게 말하며 사냥꾼 홍범도의 총구가 일제를 향하게 됩니다.
총을 압수당하기 전에 북청군 일대의 일본군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동료포수들을 설득합니다.
자신과 함께 할 사람들을 모아서 이렇게 이름 짓습니다.
이른바 '산포수 의병부대'입니다.
9. 산포수 의병부대 활동
함경남도 북청군 근처에는 높이 약 1,335m의 험준한 고객, '후치령'이 있습니다.
후치령은 북청군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길목이었습니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계획합니다.
1907년 11월 22일 오후 4시경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2명과 순사 1명이 쓰러집니다.
후치령에 매복해 있던 홍범도의 산포수 의병부대가 지나가던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홍범도는 적을 기습적으로 소탕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첫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공격한 일본군은 동료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고 있었던 일본군이었습니다.
산포수 의병부대는 빼앗겼던 총을 그대로 되찾았습니다.
더불어 일본군경이 가지고 있었던 신식무기와 장비까지 챙겨 무장을 더욱더 강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군을 처단했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홍범도는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존재를 알게 된 일본군 수비대가 같은 해 11월 24일 무려 60여 명의 병력을 후치령으로 급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적은 숫자의 일본군만 급습해 왔던 홍범도 의병 부대가 처음으로 신식무기로 무장한 다수의 일본군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치령에서 세 시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일본군이 갑자기 전투 중이던 후치령을 벗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화력은 일본군이 월등했으나 산악지형에서 민첩하게 움직였던 홍범도의 의병부대를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홍범도의 산포수 의병부대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연달아 격파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이후 1년여 동안 연전연승의 신화를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전적은 바로 60전 60승!
일본군은 홍범도를 두려워하면서 그를 '날으는 홍범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10. 홍범도의 아내와 두 아들을 일제에 의해 잃다.
의병부대 대장 홍범도가 일본에 맞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이때, 홍범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홍범도를 잡기 위해 홍범도의 아내와 두 아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일제는 홍범도 아내에게 그를 회유하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합니다.
"만약 회유 편지를 쓰지 않으면 너와 아들을 죽이겠다. 그리고 그 시체로 어육을 만들겠다."
는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받은 홍범도의 아내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런데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히 버틴 홍범도의 아내에게 일본군은 끊임없이 고문을 하고 그 후유증으로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홍범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또 생기게 됩니다.
일본군은 큰아들 홍양순을 내세워서 아버지 홍범도에게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합니다.
일제의 협박에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 귀순 청원 편지를 건네게 된 큰아들에게 홍범도는 '항일무장 투쟁'을 함께 할 것을 청합니다.
결국 아들은 홍범도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홍범도 일지 중)
아들 홍양순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연달아서 아내와 아들을 일제의 손에 아내와 큰아들을 잃게 됩니다.
가족이 자신의 항일 운동 때문에 죽었음에도 개인의 사적인 복수심으로 해소하지 않고 가족이 희생되는 과정에서 민족의식이 생겨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홍범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까지 홍범도에게 일제가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怨讐). 죽여 없애야 할 원수(怨讐))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홍범도의 비극은 그의 동료 나아가 우리 민족이 함께 겪게 될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11. 가족을 잃은 홍범도의 분노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가족의 죽음 이후 항일 운동에 더욱 몰두하는 홍범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의병 탄압이 극심해졌기 때문에 일제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홍범도는 큰 결정을 하게 됩니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1908년 11월 국경을 넘어 조선을 떠나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주로 한반도 북부와 인접한 지역이었던 연해주로 향합니다.
연해주에서도 의병 활동을 진행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맞서 싸우던 항일 독립 무장세력들을 김시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9101년 맺은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합병됨을 의미)라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들려오게 됩니다.
이러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러시아에서 의병활동도 여의치 않게 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홍범도는 이때 호랑이를 사냥하던 그때처럼 몸을 낮추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3) (tistory.com)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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