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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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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3)

5. 여왕이 통치하는 일에 대해서 여왕에게 반발하는 세력은 없었던 걸까요?

그러나 후대에 비해서 아무리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여왕이 탄생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연'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록상 '연'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신라 때 일입니다.

그런데 신라 때 사용된 연은 선덕여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선덕여왕말기에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었는데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연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선덕여왕말년에 있었던 반란은 신라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사용한 연은 선덕여왕의 최후와 두 번째 여왕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647년 '비담의 난'때 있었던 일입니다.

비담이 이끄는 반란군은 한밤중 반월성에 떨어진 별을 보고 승리를 장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반란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왕군이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연에 불을 붙여 날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별이 하늘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이 사용된 후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이런 '비담의 난'은 신라의 역사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선덕여왕에 이어 또 한 명의 여왕이 왕위에 오르고 여왕을 지지했던 신흥세력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6. 이렇게 '연'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비담의 난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명활산성부지
명활산성부지

선덕여왕말년 비담은 명활산성을 본거지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명활산성 성곽 둘레
명활산성 성곽 둘레

현재 발견된 성곽의 둘레는 4.5km인데 명월산성은 자비왕 때 궁궐로 사용했을 만큼 중요하고 유서 깊은 성이었습니다.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 명월산성을 본거지로 사용했다는 것은 당시 비담의 세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은 '상대등'이었습니다.

상대등은 지금의 국무총리급으로 왕위에 오를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관직입니다.

7. 이런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란당시 내세운 명분은 '여왕의 통치를 따를 수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4년 전에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경멸하고 있다. 또한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앞으로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당태종이 제기했던 명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여왕에 대해서 별다른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는 당태종의 말은 신라에 파문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자격이 있었던 상대등 비담에게 난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승만공주가 바로 왕위를 잇는데 그녀가 바로 2번째 여왕인 진덕여왕입니다.

진덕여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란군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비담의 난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살아있을 때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비담의 난 때 선덕여왕이 죽고 굉장히 신속하게 진덕여왕의 즉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선덕여왕 파라고 하는 김춘추가 일본에 가 있었던 상황에서 굉장히 빠르게 진덕여왕의 즉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인데 생전에 선덕여왕 때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려웠던 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담은 진덕여왕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반란군에 맞섰던 왕 군의 총사령관은 김유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왕군에 맞설 만큼 막강했던 반란군이 갑자기 진압됩니다.

8. 반란군은 어떻게 진압되었던 것일까요?

압량 유적지
압량 유적지

수세에 몰렸던 김유신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에게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산군 압량면에서 김유신이 군사를 훈련시키는데 당시 백제의 경계와 접해있는 경산은 신라의 최전방기지였습니다.

김유신은 '압량주'의 군주를 역임하면서 이곳의 군사들을 최적의 부대로 훈련시켰습니다.

김유신이 수세에 몰렸을 때 이곳에서 지원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팽팽한 접전 끝에 비담의 난은 10여 일 만에 진압되고 마침내 진덕여왕의 지지파가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왕을 뒷받침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신흥귀족이 전통귀족과의 결전에서 승리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비담의 난'이라는 진통을 겪으면서 신라는 또 한 명의 여왕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김유신을 비롯한 신흥귀족들은 진덕여왕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정치일선에 나서고 삼국통일의 길을 열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삼국통일을 생각하면 김유신이나 김춘추를 연상하게 되는데 실제 그들이 통일의 역군으로 성장하는 데는 여왕통치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어머니가 자식을 북돋아서 그들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하듯 인재로 등용하여 그들을 믿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통일에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여왕 특유의 통치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

문무왕은 긴박한 전쟁 중에도 '사천왕사'를 건립합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사천왕사터
사천왕사터
선덕여왕능 밑에 위치한 사천왕사
선덕여왕능 밑에 위치한 사천왕사

호국의 상징이었던 사천왕사는 통일을 염원했던 선덕여왕의 뜻을 받들어 선덕여왕의 능 바로 밑에 세워집니다.

문무왕은 출전에 앞서 군사들을 이곳에 열병시키고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선덕과 진덕여왕이 등장하고 250년이 흐른 뒤 신라는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문헌에 따르면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선덕과 진덕여왕의 전례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까지도 신라인들은 여왕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멸망한 후부터 여왕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왕의 존재를 특별한 사례로 보는 시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잣대일 뿐 그 시대로 돌아가서 신라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라로 다시 되돌아가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던 신라사회와 그 사회에서 역동적으로 생활했던 신라여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이런 사회의 분위기로 신라는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3명의 여왕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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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BS역사저널 그날/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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