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터디 위드 돈벌러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1)

반응형

1.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

우리 역사상 여왕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 이렇게 3명 있었습니다.

이 3명의 여왕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신라에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신라와 동 시기였던 고구려와 백제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여왕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서 여왕이라는 존재는 아주 특이했기 때문에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뭔가 전설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있어서 여왕은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땅에서 여왕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일에 싸여있는 신라의 여왕을 다뤄보고 신라에서만 여왕이 존재했던 이유를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은 선덕여왕입니다.

경주에 있는 '분황사'에는 선덕여왕 때 세워진 탑이 하나 있습니다.

분황사 석탑
분황사 석탑

634년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된 국보 30호 분황사 석탑입니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아름다운 탑입니다.

 바로 이 탑에서 선덕여왕과 관계가 있는 아주 독특한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분황사 돌사리함
분황사 돌사리함

1915년에 이 탑을 수리할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사리함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이 사리함 속에는 '옥'으로 된 장식품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들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독특한 유물이 있었습니다.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실패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실패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금바늘, 은바늘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금바늘, 은바늘

실패와 바늘통을 비롯해서 각종 바느질 용구가 발견된 것입니다.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바늘통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발견된 바늘통

사리함에 담겨 있는 이러한 유물들은 사리를 봉안할 때 탑을 세운 사람의 소망을 담아 사리와 함께 넣은 공양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리 공양품은 불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분황사 탑 안에서 실패와 바늘통, 가위와 바늘 등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금바늘과 은바늘'입니다.

이런 바늘은 이전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사리 공양품이었습니다.

분황사를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선덕여왕이기 때문입니다.

'금'이나 '은'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용품이라기보다는 왕실 용품에 가까운 성격으로 분황사 사리탑이 선덕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좀 더 여왕과의 관련성이 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이 여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찰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로울 분(芬), 황제(임금) 황(皇), 절 사(寺)로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뜻입니다.

사찰의 이름 자체가 여왕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덕여왕 3년 봄에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고 분황사를 세웠습니다.

몇 년 동안 연호를 사용하지 않다가 분황사를 세울 당시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왕권이 확립'되던 시기로 보입니다.

당시 사찰은 대부분 국가의 안위와 백성을 평안을 위해서 짓고 기원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이 사찰 역시 '호국'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분황사 복원 조감도
분황사 복원 조감도

지금의 분황사는 그렇게 큰 사찰은 아니지만 창건당시에는 경주 7대 사찰로 꼽힐 만큼 화려하고 큰 편이었습니다.

분황사를 창건했던 시기와 규모로 비춰볼 때, 선덕여왕이 이 절을 세운 것은 통치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황룡사지
황룡사지

이러한 추측은 분황사 바로 옆에 있는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에서 뚜렷해집니다.

황룡사 목탑지
황룡사 목탑지

이곳은 경주 어디서나 그 모습이 보였다는 '황룡사목탑'이 있었고 이것 또한 선덕여왕 때 세워졌습니다.

이 탑 밑에서 분황사에서 보였던 바늘통과 가위, 칼, 실패 등 바느질과 관련된 유물과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 최고의 탑에서 이러한 유물이 발견된 것은 분황사탑에서 나온 금바늘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됩니다.

황룡사탑은 삼국유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탑은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탑을 9층으로 하고 층마다 의미를 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

9층은 층마다 각각 일본과 중화, 오월과 말갈 등 주변의 9개 국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라의 9적을 물리쳐서 나라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황룡사탑은 신라를 세상의 중심으로 세우고자 했던 선덕여왕의 기원 그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탑을 세웠다.

과연 삼한을 합했고

군신이 안락함은 

지금까지 그것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황룡사 목탑을 세운 의미'를 나타낸 구절)

 

분황사탑에서 발견된 '금바늘'이 상징하는 것은 위와 같은 황룡사탑을 세운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강력한 신라를 만들어가려는 의지이자 그 뜻을 실행해 옮긴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외모나 성품등을 알 수 있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평소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지귀'는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영묘사탑에서 여왕을 기다립니다.

여왕을 기다리다 지귀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선덕여왕이 왔다 가면서 지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팔찌를 두고 가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여왕의 팔찌를 보고 심장이 불타올랐고 그 불에 탑이 불탔고 영묘사까지 불탔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왕이 대단히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것이고 이렇게 팔찌를 두고 간 것으로 봐서 성품 또한 자상할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몇 살 때 왕위에 올랐을까요?

그리고 여왕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 선덕여왕 즉위 당시의 나이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부인사'에는 선덕여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숭모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공덕이 추앙되고 있지만 이 선덕여왕에 대해서는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선덕여왕의 집안을 살펴보면 아버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대신 진평왕에게는 3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맏딸은 덕만이었고 이 덕만공주가 훗날 왕위를 잇는 선덕여왕입니다.

둘째 딸 천명은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입니다.

그리고 막내딸 선화공주는 훗날 백제 무왕과 결혼하는 인물입니다.

선덕여왕의 나이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아버지 진평왕의 재위 기간에 있습니다. 

진평왕은 무려 53년 동안 통치합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몇 살에 즉위했을까요?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는 632년.

이 해를 중심으로 주변인물을 통해서 여왕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조카인 김춘추의 나이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춘추는 603년에 출생했으므로 선덕여왕이 즉위했던 632년에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김춘추의 어머니이자 선덕여왕의 여동생이었던 천명부인의 나이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천명부인은 최소한 20살에 김춘추를 낳았다고 한다면 언니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이 서른 살이었기 때문에 천명부인은  50살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명부인의 언니인 선덕여왕의 나이가 밝혀집니다.

왕위에 오를 당시 동생이 쉰 살이었다면 선덕여왕은 50세 이상의 나이에 즉위한 것이 됩니다.

 

선덕여왕은 결혼했을까요?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결혼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결혼을 했고 '음갈문왕'이라는 결혼한 남편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갈문왕'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붙는 명예적인 호칭으로 왕과 왕비의 아버지나 동생 그리고 여왕일 경우에는 남편에게도 붙여집니다.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의 '음'자를 단서로  선덕여왕의 남편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음'(飮:마실 음)이라는 글자는 마신다는 뜻인데 선덕여왕이 활동하던 전후 시기의 기록을 찾아보면 '음'이라는 인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이라는 글자와 유사한 글자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飯: 밥 반)이라는 글자인데 '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2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백반'이라는 인물이고 또 한 명은 '국반'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음'과 '반'이라는 글자는 지금 보면 전혀 다른 글자임이 틀림없지만 그 당시 흘려 써서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글자이기도 하고 목판에 새기면서 같은 글자로 새겨질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음갈문왕은 백반 아니면 국방 이렇게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해당된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반과 국반중에서 어느 쪽이 선덕여왕의 남편이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국변은 선덕여왕의 뒤를 잇는 진덕여왕의 아버지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 간입니다.

국방이 아니라면 백반만이 남습니다.

'백반'이 남편이라면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과 결혼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고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근친혼'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관행이었습니다.

이로서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결혼한 여성이었고 쉰 살이 넘어서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위에 올랐을까요?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단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선덕여왕의 성품에 대해서는 '도량이 어질고 넓고 아주 민첩하고 총명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 가지의 단서는 선덕여왕이 왕이 된 이후에 붙여진 '존호'입니다.

선덕여왕은 왕이 된 이후에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가 붙여지는데 '성스러울 성, 조상 조, 황제 황, 시어머니 고'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신성한 황제의 피(혈통)를 이어받은 여인'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덕여왕이 왕이 되기 이전에 왕들에게는 이런 존호가 붙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선덕여왕에게만 이러한 신성한 혈통을 강조한 것일까요?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경주에 있는 낭산의 소나무 숲은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고 해서 신라 때부터 '신유림'으로 불렸습니다.

이 신유림 안에 선덕여왕의 릉이 있습니다.

신라의 왕위계승을 살펴보면 '사위'가 왕이 되는 일이 많이 발견됩니다.

신라에서만 5명의 사위가 왕위에 올랐고 통일신라에서도 3명의 사위가 왕위에 오릅니다.

사위뿐 아니라 '외손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라는 남자 쪽에서만 왕위를 잇는 것이 아니라 여자 쪽에서도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자 쪽에서도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여성이 왕이 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직접 왕이 된 일은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 '삼국유사 완력보 선덕여왕 조'를 살펴보면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골'은 일반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왕족계층을 말합니다.

모계사회는 특수한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각 신문들은 자기의 입장을 강화 내지는 체면을 세우는 여러 계층을 계급을 강조하게 됩니다.

왕실이나 특권층은 그들의 우월한 배타적인 신성성을 강조하는 '제1 신분층'을 자칭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왕들의 경우 성골이라는 것을 굳이 밝힌 적이 없는데 선덕여왕 때만 이 성골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골 남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성골여자가 얻을 수 있는 어떤 명분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당시 사회구조상 신분 혈통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아무리 진평왕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하여 기반을 다졌다고 하더라도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여러 가지 명분축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40년 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코 천황' 탄생했습니다.

스이코 천황이 즉위했을 때 신라는 진평왕 때였는데 이 진평왕은 일본과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신라에서 일본에 불상, 까치도 보내고 사신도 파견해서 일본 조종에 다녀왔습니다.

일본에 갔다 온 사신들이 일본에 여자천황이 있다는 것을 진평왕에게 알렸을 것이고 진평왕은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자신의 후계자로서 여왕을 생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일본의 상황과 진평왕의 뜻이 맞았다고 해도 전통적으로 귀족의 입김이 센 신라에서 여왕의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면 선덕여왕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여왕을 옹립했던 대표적인 세력은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의 뜻을 펼쳐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여왕을 뒷받침했던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이 여왕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춘추와 김유신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진골(일반적으로 왕족이기는 하나 성골보다는 낮은 신분을 가리킴) 귀족들의 반발로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왕위에서 쫓겨났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김춘추는 자연히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유신도 마찬가지로 '금관가야'의 귀족후예로 금관가야가 멸망한 후에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했지만 보수적인 진골귀족들로부터 상당히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연히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 의기투합을 할 수밖에는 없었고 그에 따라 진골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지지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여왕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여자 쪽에서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특성 때문에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KBS역사저널 그날/역사스페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