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성의 가계에서 왕이 나타나고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신라
신라와는 달리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딸이 왕위를 잇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라에서처럼 사위나 외손주가 왕위를 계승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여성의 가계에서 왕이 나타나고 여왕이 탄생하는 그런 일은 유독 신라에서만 있었던 일입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 실마리는 '황남대총'이라는 무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은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으로서 동서의 길이가 80m, 남북의 길이가 120m 그리고 높이가 25m나 됩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뿐 아니라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독특한 생김새입니다.
황남대총은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기기도 했고 또는 낙차등처럼 생기기도 했습니다.
황남대총의 모양이 이렇게 독특한 것은 2개의 무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황남대총에서는 고대 신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북조 무덤에서는 수천 점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순금제 관'입니다.
옥과 각종 장식으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금관을 썼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금관과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에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허리띠 한쪽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바로 '부인대'라는 글자입니다.
이것은 북쪽무덤의 주인이 '여성'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북분과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주로 무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이 무덤이 남자의 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순금이 아닌 금동으로 만든 관입니다.
금관에 이어 은관도 출토됐는데 여자의 무덤에서 나온 금관에 비하면 장식도 단순하고 규모도 작은 편입니다.
거대한 릉의 규모나 화려한 유물들이 이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데 귀족이거나 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무덤에서 왜 남녀 유물에 차이를 둔 것일까요?
이 무덤은 여러 가지 출토유물로 추측해 볼 때 부부의 무덤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인 남자의 무덤에서 금동제의 관이 출토되었고 북쪽인 여자의 무덤에서는 순금제관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의 차이로 볼 때 북쪽의 여자 주인의 신분은 적어도 남쪽의 남자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신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남녀의 유물들을 통해 당시 신라여성의 지위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신라여성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보다 신분이 높은 여자는 결혼을 해도 그 지위가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선도산 에는 당시 신라 여성의 지위를 알려주는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운제부인'이라고 하는 신라의 여성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터가 남아있습니다.
운제부인은 신라 2대 왕인 남해왕의 아내였습니다.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는 운제부인은 선도산에 산다고 해서 '선도산 성모'라고도 불렸습니다.
지금도 제단터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신라시대의 기와 파편이 발견되고 있어 오랫동안 이곳이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운제부인뿐 아니라 당시 신라에서는 박혁거세의 부인인 아령부인, 박재상의 부인인 치술부인도 국신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여성을 국신으로 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고대사회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이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여성이 신모가 되기도 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여성이 국가의 제사를 직접 주관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2대 남해왕이 시조인 혁거세의 사당을 만들었고 그 후 왕의 누이인 '아로'가 제사를 주관했던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어떠했을까요?
고구려는 유화분인을 여신으로 숭배했고
고구려 주몽왕의 부인이자 백제시조인 비류,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는 자식들과 함께 백제를 세우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소서노가 죽자 백제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워졌다며 사당을 세운 후에 국모로 숭배했습니다.
이렇게 삼국의 3 나라 모두 여성을 국신으로 받들거나 제사장을 지냈던 전통이 남아있었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신분이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초기까지만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유독 신라에서만 여성을 숭배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구려, 백제의 경우에는 중국의 영향과 선진문물의 수용이 빨랐으나 신라의 경우에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선진문물을 수용하기 어려워 전통문화가 오랫동안 존속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문화는 불교문화나 유교의 수용에 있어서도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늦었던 것을 봐도 확실히 보이는 부분입니다.
여성을 국신으로 숭배했고 여성이 제사장으로 군림했던 전통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사회였던 신라의 전통이 여왕을 탄생시킨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신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여성을 지위를 보여주는 유적이 있습니다.
경남 울산군 안동면 천전리에 있는 바위에 신라시대 여성들의 지위를 알 수 있는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바위의 글귀 중 오른쪽 내용입니다.
을사년(525년)에 사탁부소속의 '갈문왕'이 놀러 왔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온 아름다운 누이동생이 있는데 '어사추여랑왕'(於史鄒女郎王)입니다.
왼쪽 내용입니다.
을사년에 '사부지갈문왕'과 그의 누이동생 '어사추여랑왕'이 이곳에 놀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겨놓은 글입니다.
여기서 갈문왕은 앞서 다룬 바와 같이 왕과 아주 가까운 친척에게 내려주는 명예적인 칭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사추여랑왕'입니다.
여성에게도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바위에는 그때 함께 왔던 귀족들의 이름들도 새겨져 있는데 '일 길 간지'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는 영지지의 처 '거 지시혜부인', 사간 지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는 진육지의 처 '아유보호부인'도 함께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일리등차부인과 사효공부인등 이렇게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귀족들과 함께 그 부인들도 같이 유람을 왔고 특이할 만한 것은 이 부인들의 이름을 모두 실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왔던 여성들은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여성도 있고 또 다른 귀족부인들도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떳떳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실명을 밝히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성들이 존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떳떳이 밝힐 수 있는 그런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바위야말로 신라 여성들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인 것입니다.
4. 신라사회에 있어서 여성들의 지위
그럼 실제 신라사회에 있어서 여성들의 지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은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당시 신라여성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신라시대 창건된 취서산(경북 봉화군 물야면, 현재명칭은 축서사)에는 당시 신라여성의 경제력을 알려주는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취서사 석탑으로 한 여성의 재력으로 이 탑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기단과 1층만 남아 있지만 취서사 석탑은 본래 3층탑이었습니다.
1930년대 탑을 해체했는데 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이찬 김량중의 딸 명단이 취서사 불탑을 조성할 때 시주했다고' 시주자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정도 규모의 탑은 조성하기도 어렵거니와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냈습니다.
이찬이라는 고위 관직자의 딸이기는 했지만 당시 '명단'에게는 상당한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으로 지금의 사회활동에 해당하는 시주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여성에게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을 본인 스스로 처분한 예는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빼어난 자체를 자랑하는 갈항사 석탑은 동탑과 서탑으로 한쌍을 이루는 이 탑을 세울 때도 여성의 경제력이 뒷받침 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갈항사의 두 탑이 생질과 누나, 누이동생 이 세 사람의 힘으로 세워졌다는 내용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라에서는 남성과 여성 양쪽 모두가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속은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인접시대인 고려시대를 보면 아들, 딸 구별 없이 균등 상속을 했고 그다음 세대인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시대는 여자들이 많은 재산을 불사에 시주를 했고 이를 통해 개인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시대에도 아들, 딸 차별 없이 균등 상속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속 만으로 경제력이 보장됐던 것일까요?
신라시대 만들어진 위의 기와들은 당시 신라여성들의 재력이 얼마 정도였는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기와 중에는 삼베자국이 남아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기와를 구울 때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안쪽에 삼베를 깔고 굽는데 굳고 나면 이렇게 선명하게 자국이 남게 됩니다.
기와마다 이런 삼베를 이용했다면 당시 신라에서는 삼베를 대량으로 필요했을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삼베를 비롯해 직물을 생상하는 일은 대대로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신라시대 벽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같은 시기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서 여성이 베를 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한가위'의 유례가 되는 '길삼'을 했다고 신라여성들이 공동으로 직물을 생산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베를 짠 것으로 보아 길삼이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 차원의 길삼놀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견포, 마포와 같은 직물류를 세금으로 냈기 때문에 직물은 화폐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물생산은 아주 중요한 경제활동에 하나였습니다.
직물을 생산하는 일은 국가의 주력사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직물의 생산을 관장하는 관서를 두었고 그 관서는 직물의 종류에 따라서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직물을 생산하는 관서마다 생산을 총괄하는 여성 감독관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모(母)'였습니다.
이 '모'는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관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직물을 생산하는 관서가 있는데 '장인'이나 관리들이 모두 남자였던 것과 달리 신라시대에는 여자가 직접 직물을 생산하고 감독하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보입니다.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는 당시 신라가 일본과 교역할 때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여겼던 신라의 직물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신라에서 수출했던 양탄자가 남아 있는데 이 양탄자 끝에 달려있는 꼬리표에는 '자초랑댁'이라는 글자가 남겨있습니다.
이 글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초랑댁은 신라 귀족의 가호(집이름)를 가린 킵니다.
그런 가호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 자신이 제조했던 삼베와 일본 명주를 교환하는 것을 지시한 꼬리표입니다.
여기 표시된 자초랑댁은 삼베 제조의 주체, 제조업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초랑댁이라는 귀족의 가호에 쓰인 '랑'이라는 글자는 자료에 의하면 귀족의 딸, 특히 '공주'를 뜻합니다.
자초랑댁이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체라면 자초랑은 직물을 수출하는 업체의 대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렇게 수출상품에까지 여성의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신라사회의 여성들은 집안에만 갇혀있던 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이나 상속을 통해서 경제적인 기반을 갖췄고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이런 신라사회의 분위기로 '여왕'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요?(1) (tistory.com)
<출처: KBS역사저널 그날/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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