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혈통이지만 평생 신라를 지킨 명장 김유신
1. 김유신 가문이 살았던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1세기 경, 낙동강 하류에서 형성된 나라입니다.
우리가 '가야'라고 부르는 나라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뭉쳐져서 만들었던 연맹국가입니다.
그렇다면 김유신 가문은 여러 가야 중에서 어느 가야에서 살았을까요?
바로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입니다.
금관가야는 42년에 김수로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며 가야 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했던 나라입니다.
2.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 금관가야의 제10대 왕 '구해왕', 신라 법흥왕에 항복선언을 하다
그런 금관가야의 제10대 왕 '구해왕(김구해/재위 521~532)'은 김유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입니다.
구해왕과 김유신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구해왕은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 경, 가야연맹이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신라가 야욕을 드러내고 영토를 넓히려고 가야연맹에 맹공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연맹은 신라에 총력을 다해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532년, 금관가야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구해왕은 신라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신라에 항복하러 간 것입니다.
가족을 모두 데리고 신라 법흥왕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선언했고 법흥왕은 구해왕의 항복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구해왕과 그 가족들을 신라 '진골' 신분으로 살도록 해줍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가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골'과 '두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혈통에 따라서 등급을 구분하는 제도였습니다.
'골'은 성골과 진골로 왕족에 해당되는 신분층이고 두품은 일반 귀족 및 평민들이 등급에 따라 1~6두품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복한 금관가야의 구해왕과 가족들이 진골이 되었다는 것은 금관가야의 왕족출신으로서 신라에서도 왕족급에 해당되는 신분을 보장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김유신 집안은 법흥왕의 배려로 가야 왕족으로서 예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가야 왕족으로서 예우를 받아 신라 진골이 된 김유신 집안은 신라에서 왕실의 친인척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 이후 남은 여러 가야도 차례로 신라에 합병되고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3.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 관산성 전투를 신라의 승리로 이끌다
그렇게 22년이 지난 554년, 신라 '진흥왕' 재위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신라에 엄청난 위기가 닥쳐옵니다.
백제군이 신라의 요충지 '관산성'을 습격한 것입니다.
관산성이 뚫려버리면 백제와의 영토전쟁에서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어떻게든 관산성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백제군은 이 관산성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고 이때 관산성을 지키기 위해 신라에서 출격한 인물이 바로 '김무력'입니다.
김무력은 구해왕의 셋째 아들이었고 가야 항복 이후 신라의 대표 장군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관산성 전투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신라의 압승이었습니다.
신라군은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물리치고 결국 백제의 '성왕'까지 죽입니다.
그렇게 백제군을 괴멸시키고 왕마저 죽인 관산성전투를 신라의 대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적국이었던 신라에 김무력이 이렇게까지 충성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김무력 집안이 있었던 금관가야는 스스로 항복한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국가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김무력은 신라사회 내에서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김무력의 활약에 힘입어서 김유신 집안은 중앙무대에서 신라의 신흥 무장세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4. 신라 영웅 김유신의 탄생 이야기
그 사이 김무력은 아들 '김서현'을 얻게 됩니다.
김서현 역시 신라를 위한 영재로 성장하는데 김서현의 아들이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의 탄생에는 그의 아버지 김서현의 아주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에서 태어나서 신라 정계에서 일하던 김서현은 어느 날,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김서현이 반한 그녀의 이름은 '만명'입니다.
만명은 신라 정통 왕실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심지어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이라는 인물은 신라 진흥왕의 친동생이었습니다.
김서현과 만명은 애틋한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둘의 사이가 만명의 아버지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딸 만명의 연애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숙흘종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김서현과 야합(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몰래 정을 통함) 한 것을 알고서 이를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숙흘종은 김서현과 만명 사이를 떼어 놓기 위해서 딸 만명을 집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숙흘종은 왜 이렇게 까지 했던 것일까요?
숙흘종은 가야 혈통인 김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고 때문에 김서현과 만명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 놓기 위해서 딸만명을 가두는 초강수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명이 갇혀 있는데 김유신은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갇혀있던 만명 부인이 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김서현과 만명은 지금의 충북 진천지역인 '만노군'으로 도망칩니다.
이곳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 데 그가 바로 김유신이며 이렇게 갖은 우여곡절 끝에 김유신이 태어납니다.
5. 김유신, '화랑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가야혈통으로 태어나 무럭무럭 자란 김유신, 그의 이름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의 나이 15살 때입니다.
만노군에서 수도 경주로 온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도(花郞徒)'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화랑도는 신라 청소년들이 무예와 학문을 익히는 신라의 인재 양성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다 유사시에는 전쟁에 참전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김유신이 바로 이 화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랑 김유신은 역사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요?
기록으로 보면 수많은 낭도가 김유신을 따랐다고 전해지는데 김유신이 그만큼 화랑 활동을 잘해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김유신, 인생의 파트너 '김춘추'를 만나다
화랑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인재로 거듭난 김유신,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인연이었던 신라 진골 귀족 '김춘추'를 만납니다.
김춘추는 신라 정통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최상위 혈통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춘추는 굉장히 슬픈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신라 제25대 왕 진지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의 조카였던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쫓겨난 이후 김춘추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김춘추와 가깝게 지냅니다.
김유신은 쫓겨난 왕족인 김춘추와 왜 가까이 지내려고 했을까요?
당시 신라 제26대 왕 진평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력한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김춘추가 언젠가는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은 자신이 군사적 능력으로 뒷받침해 준다면 김춘추가 언젠가는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김춘추를 통해서 신라의 이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7. 김유신,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를 철저히 계획하에 만나게 하다
그리고 김유신은 김춘추와 더 끈끈하게 힘을 합칠 방법을 생각합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혼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김춘추공 우리 축국 한판 하시죠'
축국은 지금의 축구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가죽 공을 여럿이 발로 차고 받는 민속놀이입니다.
그렇게 김유신과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축국을 하던 중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았고 김춘추의 옷고름이 뜯어지게 됩니다.
당황한 김춘추를 보면서 김유신이 이렇게 권합니다.
'저의 집에 가서 옷고름을 다시지요'
그렇게 집으로 온 김유신은 빈방에서 김춘추를 잠시 기다리게 합니다.
잠시 후 김춘추가 있던 방문이 열리고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가 들어옵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가 있는 방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김유신의 큰 그림이었습니다.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여동생을 소개해주기 위해서 김유신의 옷고름을 밟은 것입니다.
그렇게 김유신의 계획은 통했고 김춘추와 문희는 이날 이후로 연애를 시작합니다.
8. 김유신,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의 결혼을 왕실에 허락받기 위해서 문희의 화형식을 거행하다
그런데 몇 개월 후, 갑자기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놀라운 일을 벌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의 죄를 내가 불태워 없앨 것이니 죄인을 데려오너라!'
김유신은 분노하며 여동생 문희를 불태우려 한 것입니다.
충격적인 여동생의 화형식, 김유신이 노렸던 것을 무엇일까요?
이는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왕실에 허락받기 위해서 벌인 김유신의 대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일단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불태운다고 주변에 소문을 냅니다.
화행식이 치러지는 날은 신라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진평왕의 딸 '덕만공주'가 김춘추와 함께 김유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날로 정합니다.
김유신은 덕만공주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집 앞을 지나갈 때 보란 듯이 진짜 불을 지핍니다.
김유신 집에서 연기가 피어나니 당황한 덕만공주는 상황을 파악해보게 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덕만공주는 김춘추에게 말합니다.
'김춘추는 어서 문희를 구하시오!'
이는 곧 왕실이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김춘추와 문희가 사랑에 빠졌지만 문희가 가야계라는 출신 때문에 결혼까지 하기에는 상황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김유신이 기지를 발휘해서 택한 파격적인 방법이 신라 왕족 김춘추와 사돈을 맺을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것입니다.
9. 신라,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김유신의 대활약으로 대승을 거두다
그렇게 김춘추와 결혼으로 맺어진 김유신은 이후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더 높일 신분상승의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629년, 김유신은 35살의 원숙한 장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신라는 한강유역을 더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북쪽으로 영토를 더 확장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고구려를 향해 신라가 선제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가 공격하려고 했던 곳은 고구려의 요충지인 '낭비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신라와 고구려, 두 나라사이에 '낭비성'에서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의기양양하게 북쪽으로 향하는 신라군은 낭비성에 도착하자 그곳을 향해 돌격합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쳐들어간 신라는 고구려군에 대패하고 신라군의 사기는 한순간 꺾여버립니다.
이에 신라장군들은 어떻게 하면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서 기세를 전환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전세가 고구려 쪽으로 기울어가던 이때, 장수 중 한 명이 전세를 뒤집을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한 장수가 홀로 나서서 말을 타고 고구려 진영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은 누구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김유신이 곧 말에 올라 검을 뽑아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끌고 왔다'
<삼국사기>
김유신은 혼자 고구려 진영으로 돌진하여 고구려 장군 한 명의 목을 베어서 들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김유신의 모습을 본 신라군들은 사기가 다시 끌어 올랐고 김유신은 이 기세를 몰아서 군사들과 함께 직접 고구려 진영을 습격하여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전멸시킵니다.
그리고 낭비성 성주의 항복마저 받아냅니다.
10. 선덕여왕, 즉위 후 김춘추와 김유신을 자신을 도울 인재로 등용하다
632년, 마침내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즉위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라여왕3
즉위 후 자신을 도울 인재를 뽑는데 이때 선택된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전쟁과 군사 담당이었던 김유신과 정치와 외교 담당 김춘추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중앙 정계를 주도하게 되고 선덕여왕, 김유신, 김춘추 이 3인방이 의기투합하여 신라 역사에 중흥기를 맞이합니다.
11. 김춘추와 김유신, 백제 '의자왕'에 대야성을 함락당하며 최대의 위기를 맞다
그런데 선덕여왕 즉위 11년 후인 641년 , 갑자기 신라 조정에 아주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듭니다.
백제 의자왕이 작심하고 신라에 총공세를 펼친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의자왕
즉위 후 기세등등하게 신라를 총공격하기 시작한 의자왕에게 신라는 지금의 경남 합천 대량주에 있던 미후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대야성'까지 순식간에 함락당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신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놓입니다.
신라조정 또한 위기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신라 조정에서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춘추'였습니다.
대야성 함락에 김춘추가 비난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대야성을 지키고 있던 성주 '김품석'이 바로 김춘추의 사위였는데 이 김품석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야성을 허무하게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대야성 함락이 김춘추, 김유신 둘에게 치명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대야성의 위치가 옛 가야의 영토였기 때문에 김유신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 대야성에 김춘추가 자신의 사위를 성주로 보냈다는 것은 두 사람의 공동의 근거지였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대야성을 빼앗긴 것은 공동의 세력 근거지를 잃었다는 말이 되고 이 두 사람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12. 김유신,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러 간 김춘추가 감옥에 체포되자 그를 구하다
대야성 함락으로 수세에 몰렸던 김춘추에게는 사실 개인적으로 더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이 있었습니다.
대야성 함락당시 대야성 성주였던 사위옆에 김춘추의 딸 '고타소'가 함께 있었는데 이때 사위와 딸까지 백제군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위와 딸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제가 김춘추를 모욕하려고 김춘추의 사위와 딸의 시신을 백제 감옥바닥에 묻어 백제 죄인들에 의해서 짓밟히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김춘추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복수를 결심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남은 생을 걸고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고 642년 겨울 고구려로 향했고 고구려에 도착해 고구려에게 백제를 칠 군사를 요청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개소문2
과연 김춘추는 고구려와 동맹에 성공했을까요?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은 한강 유역의 땅을 내주면 신라를 도와준다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김춘추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김춘추가 이에 거부하자 갑자기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김춘추는 도움을 구하러 간 고구려에서 졸지에 포로가 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며칠 후 김춘추가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이 신라에 전해졌고 김유신이 중심이 된 신라군이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서 고구려로 진격합니다.
김유신은 최정예 병사 3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국경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김춘추가 그저 살아있기만을 바라면서 찬 겨울바람을 뚫고 매서운 기세로 고구려 국경에 다 달았습니다.
'김유신이 행군하여 한강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기세등등했던 연개소문이 김유신이 국경에 서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풀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김유신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탈출할 수 있었던 김춘추는 목숨을 구해준 김유신과 평생의 동지가 됩니다.
13. 김유신, '압량주' 군주로 백전백승의 신라최고장수로 거듭나다
그런데 신라조정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사정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와의 동맹에 대한 협상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라 조정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며 불안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위기의 김유신은 백제와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김유신은 자신이 가진 군사적 능력을 한껏 발휘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선덕여왕이 김유신에게 아주 중요한 보직을 맡깁니다.
신라의 최전방이었던 '압량주'를 김유신이 지키게 된 것입니다.
신라입장에서는 압량주가 뚫리면 수도 경주까지 위험해지는 물러설 곳 없는 곳이었고 김유신은 신라 최전방의 군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김유신은 압량주에서 어떻게든 백제에 공격을 막아야만 했고 압량주 군주로서의 제 소임을 다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빼앗겼던 대야성 근처 일부 영토를 백제군과의 접전 끝에 되찾아오기까지 합니다.
그 이후에도 김유신은 백제와 치른 전투마다 승전보를 울립니다.
김유신은 백제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며 백전불패의 장수, 신라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신라는 김유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김유신은 적국 백제를 상대로 끊임없이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김유신은 신라 최고의 장수로 거듭나고 있었고 김춘추 역시 신라 조정에서 입지를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14.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를 명분으로 '비담의 난(毘曇一 亂)'이 발발하다
선덕여왕 재위 16년이 되던 647년 1월,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기반이 다시 한번 흔들리는 큰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비담의 난'입니다.
비담의 난은 비담이라는 인물이 귀족들을 모아서 일으킨 난을 의미합니다.
당시 비담은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었습니다.
상대등은 귀족 연합을 이끌며 귀족회의를 주재한 지금으로 따지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신라 최고 관직입니다.
상대등 비담과 강력한 귀족세력들이 힘을 합쳐 선덕여왕을 몰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비담과 귀족들이 난을 일으키는 명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담은 '여자는 좋은 군주가 될 수 없다'며 난을 일으킨 것인데 그렇다면 비담은 왜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16년이 지나서야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요?
이때 선덕여왕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이때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지목된 이는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었던 '승만공주'였습니다.
선덕여왕에 이어서 또다시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되자 비담은 다시 남자를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비담이 이끈 반란파는 난을 일으켜서 차기 여왕의 즉위자체를 막고 정권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왕을 반대하면서 일어난 초유의 반란을 이끄는 반란군이 선덕여왕과 승만공주를 칠 경우 김유신과 김춘추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선덕여왕의 편에 서 있었던 김유신과 김춘추는 본인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제거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은 반란의 불씨를 끄기 위해서 왕실군대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비담이 이끄는 반란군과 전투를 시작하게 된 김유신은 각각의 진영에서 진을 치게 됩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왕실 군대는 선덕여왕이 있는 신라의 왕궁인 ''월성'에, 비담이 이끄는 반란군은 근거지였던 '명활성'에 진을 칩니다.
3k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양진영은 수일간 피 터지는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때 비담 쪽 반란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월성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별똥별'이었습니다.
그리고 별똥별을 본 비담이 씩 웃습니다.
비담은 자신이 이끄는 반란군을 모아놓고 별똥별에 대해서 충격적인 해석을 합니다.
'별은 곧 여왕을 의미하는데 별이 떨어졌으니 여왕이 패한다는 뜻이다'
이는 '하늘도 우리 편'이라는 의미로 군사들의 기세를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반란군은 '하늘도 여왕의 폐위를 말한다' 생각하며 기세가 들끓어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김유신은 높아진 반란군의 기세에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김유신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김유신은 한방 중에 허수아비를 연에 묶고 묶인 허수아비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병사들 몰래 하늘로 띄웁니다.
하늘로 날아간 불붙은 허수아비가 멀리 서는 별이 떠오르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김유신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병사들의 사기를 한순간에 끌어올리기 위한 김유신의 계책은 대성공을 거두며 전세가 한 번에 뒤집힙니다.
이번에는 왕실병사들이 '하늘은 다시 우리 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왕실군대는 기세를 몰아 비담이 이끄는 반란군을 제압합니다.
김유신은 주동자인 비담 등 귀족 30명을 참수형에 처합니다.
그렇게 열흘 넘게 지속된 비담의 난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됩니다.
15. 김유신, 김춘추와 의기투합해 공동 목표였던 백제에게 대야성을 되찾아 오다
비담의 난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여왕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반란 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승만공주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가 바로 진덕여왕입니다.
김유신 덕분에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의 시대, 왕실은 다시 안정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비담의 난이 제압된 이후에 김유신과 김춘추는 명실공히 신라 조정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는 접어두었던 목표인 백제의 멸망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둘은 목표를 위해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합니다.
김춘추는 백제를 무너뜨릴 군사적 도움을 받기 위해서 당나라로 향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절대권력자였던 '당태종'이 군림하는 아시아 최고의 군사 강대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김춘추는 동맹을 맺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그 결과 김춘추는 당태종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신라와 당나라가 힘을 합쳐서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함께 치기로 약속합니다.
김춘추는 더할 나위 없는 외교 성과를 가지고 다시 신라로 돌아옵니다.
김춘추가 나라밖에서 활약하는 동안 김유신은 신라 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두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던 그곳, 백제에 함락당했던 대야성을 6년 만에 되찾게 됩니다.
이로서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에 제대로 복수를 한 것입니다.
16. 김유신, 신라 최고 귀족 상대등에 오르고 숙적 백제를 멸망시키다
654년, 김유신에게 어마어마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김춘추가 태종무열왕, 신라의 왕으로 즉위한 것이었습니다.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던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게 되면서 진덕여왕의 가장 가까운 핏줄인 김춘추가 왕이 된 것입니다.
왕실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김유신이 일찍이 예측한 대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김춘추가 왕이 되기까지 가장 힘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660년, 66세의 나이에 김유신은 드디어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지위인 '상대등'의 자리에 오릅니다.
가야계 출신으로 무시당하고 견제에 시달렸던 김유신이 마침내 신라 귀족의 정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18년 동안 품어왔던 복수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출격합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를 공격합니다.
이때 김유신은 신라군을 이끄는 총지휘관으로 참전합니다.
김유신은 5만 명의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서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합니다.
결국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백제 의자왕은 항복하게 됩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백제 멸망의 순간이었습니다.
17. 김유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을 높이사서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다
668년, 마침내 신라는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한때 삼국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틀어쥐게 됩니다.
그렇게 김유신은 신라왕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국가영웅으로 여생을 보냅니다.
그리고 673년, 가야혈통이지만 평생 신라를 지킨 명장 김유신은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김유신은 사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신라의 적국이었던 가야의 후손이 신라의 '대왕'으로 추존되는 일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김유신은 신라 진평왕부터 태종무열왕까지 총 5명의 왕을 섬겼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삼국통일을 이루었고 그 이후 새로운 신라를 열기까지 한 인물로 두고두고 신라사회 내에서 김유신이 높이평가를 받고 추존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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