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출신 메디치 가문이 유럽최고의 가문이 되는 과정(조반니, 코시모, 로렌초)
1. 르네상스가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메디치 가문
15세기 유럽에서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엄청난 부자들이 등장하고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다이내믹한 시대였습니다.
오늘은 한 시대를 이끌고 세계사를 바꾼 이탈리아의 한 로열패밀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대체 어떤 가문일까요?
바로 예술가보다 더 예술을 사랑한 '메디치 가문'입니다.
메디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와 같이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르네상스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빠짐없이 소장했고 예술가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유일한 가문이었습니다.
당시 메디치가문이 예술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 르네상스가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도 직접 후원하였으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것도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예술품들을 단독으로 소유한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아트테크
2. 유럽의 유명한 가문 TOP 3
첫 번째는 유대계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이고 두 번째가 오스트리아 최고 명문가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다룰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이스라엘하마스전쟁
3. 평민 출신 메디치 가문, 15세기 유럽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유럽 최고의 부자 중 하나로 가문의 재산 규모가 당시 시세로 약 6,000억 원 정도였습니다.
정학하게 지금 화폐 단위로 추정하기 힘들지만 이것을 현재 가치로 추산한다면 수십조 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파급력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돈으로 정치를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고 유럽 최고 권력자인 교황들과 얽히면서 종교까지 관여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메디치 가문이 평민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4. '조반니 데 메디치',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개업하며 평민가문에서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하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중세시대에 어떻게 평민 출신인 메디치 가문이 유럽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평민가문에서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한 인물은 당시 피렌체에 살던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9)'였습니다.
조반디의 조상들은 피렌체에서 멀리 떨어진 '무젤로'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살다가 12세기 경 대도시인 '피렌체'로 이주했습니다.
이주민의 후예였던 조반니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별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5살이 되던 해, 조반니는 자신의 인생을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조반니가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은행업'이었습니다.
당시 은행은 지금의 은행과 비슷하게 예금을 받기도 하고 돈을 빌려 준 후 이자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나라 간의 환율을 따져서 외환 거래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 간에는 돈을 옮겨주는 일종의 계좌 이체 업무도 처리했습니다.
약 700년 전인 은행에서도 현대 은행의 기본적인 업무 처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반니는 자본금도 없었고 운영방식도 모르는 상태에서 은행을 차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반니는 은행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로마로 가서 친척이 운영하는 은행에 취업해서 일을 시작합니다.
조반니는 약 10년 간 은행직원으로 일하면서 거대한 돈의 흐름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친척이 운영하던 로마 은행을 인수한데 이어서 피렌체로 돌아와서 동업자들과 새로운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디치 은행'의 시작이었습니다.
5. 조반니,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전담 은행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를 세우다
당시 피렌체는 중세 유럽에서 은행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이 발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탈리아에 있던 교화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전 유럽에 수많은 교회 건물과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교황청에는 매년 한 국가의 1년 예산에 필적할 만큼 엄청난 현금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때 교황청의 현금을 관리한 것이 피렌체 은행들이었습니다.
그중 크고 유력한 일부 은행이 교황청의 전담은행이 돼서 교황청의 금고를 관리했습니다.
이를 위해 약 70여 개의 은행들이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은행 사이에서 메디치 은행은 어떻게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메디치 은행의 시작은 평범 그 자체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메디치 은행이 돋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업 당시 자본금이 1만 플로린으로 지금으로 치면 약 100억 원 정도였는데 은행 개업자금으로는 그리 많은 자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을 개업한 지 약 18개월 만에 1200 플로린, 약 12억 원 정도의 순수익을 올렸습니다.
1년 반 만에 12억 원이면 엄청난 수익금으로 보이지만 당시 피렌체가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은행을 열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수익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을 피렌체 최고의 은행으로 만들기 위해 한 가지 목표를 세웁니다.
바로 교황청의 전담 은행가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6. 조반니, 교황이 되겠다고 돈을 빌리러 온 '발다사레 코사'에게 100억 원의 돈을 빌려주는 일생일대의 베팅을 하다
교황청의 전담 은행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교황청과의 연줄이 절실했습니다.
조반니가 은행의 규모를 점차 늘리면서 교황청과의 연을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때, '발다사레 코사'라는 한 인물이 메디치 은행을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교황이 되고 싶다며 활동 자금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메디치 은행에 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금액이 무려 약 100억 원 정도였습니다.
사실 조반니는 로마에서부터 은행을 운영할 때부터 발다사레 코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코사는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알려진 명문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에 대한 법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교회법 분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셀럽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반니는 코사에게 약 100억 원의 돈을 빌려주면서 일생일대의 베팅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100억 원의 돈이 있다고 해도 돈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조반디는 도대체 왜 이런 무모해 보이는 결정을 한 것일까요?
사실 중세 말기는 교황청의 부패가 엄청나게 심했었던 시기로 당시 교회에서는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이 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사고팔고 했었습니다.
코사 역시 메디치 은행에서 빌린 일종의 선거자금을 밑거름 삼아서 자신의 주변 인맥을 총동원하려 했던 것입니다.
7. '아비뇽 유수(1309~1377)'와 '피사 공의희' 결과 3명의 교황이 탄생하는 혼란한 시기에 코사가 피사 교황으로 선출되다
그 결과 1410년, 코사는 계획대로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이때 코사가 받은 교황명이 바로 '요한(요하네스) 23세'입니다.
코사가 이렇게 단숨에 교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톨릭 교회가 극도로 혼란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가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서방 교회 내부의 큰 분열로 교환권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사 공의회(1409년)'에서 새 교황을 선출하면서 정상적으로는 교황이 로마에 한 명만 있어야 되지만 아비뇽 교황, 로마 교황, 피사 교황 이렇게 동시에 세 명의 교황이 있었던 굉장히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코사 또한 교황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 메디치 은행, 피사 교황청 전담 은행이 되지만 요한 23세가 5년 만에 교황에서 폐위되며 위기를 맞다
1410년, 코사는 그간의 은혜를 잊지 않고 메디치 은행을 피사 교황인 자신의 전담은행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피렌체에서 메디치 은행이 최고의 은행이 되었을까요?
요한 23세라는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승승장구하던 메디치 가문은 겨우 5년 만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요한 23세가 5년 만에 교황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종교회의에서 교황 3명을 모조리 폐위하고 단 한 명의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요한 23세는 이단, 매관매직, 동성애, 폭정, 근친상간, 전임 교황 독살 등 온갖 죄목이 붙여져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게다가 한국돈으로 약 35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벌금까지 물어야만 했습니다.
9. 조반니, 쫓겨난 요한 23세를 보살폈고 고마움의 표시로 죽기 전 자신의 '손가락'을 선물하다
조반니는 요한 23에게 다시 돈을 빌려주고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도록 힘을 써줍니다.
또 피렌체에서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생활비도 지원해 줍니다.
심지어 요한 23세가 죽자 두오모 성당 앞 세례당에 묘까지 만들어 줍니다.
이 묘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조각의 거장 '도나텔로'가 조반니의 요청을 받아 만든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 요한 23세는 자신을 챙겨준 조반니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르며 크게 고마워했고 사망 직전 메디치 가문에 대단한 선물을 하나 남겨줍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손가락'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손가락을 포함해 성자들의 신체일부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엄청난 보물로 취급된 것은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귀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손가락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메디치 가문의 보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0. 메디치 은행, 교황 요한에 보인 신뢰를 높이 사 다시 교황청 전담 은행으로 선택되다
조반니는 왜 쫓겨난 교황 요한 23세를 끝까지 도와준 것일까요?
조반니는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과 '신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인연 맺은 고객에게 끝까지 신뢰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요한 23세를 통해서 귀한 고객을 대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예상되었던 일이지만 요한 23세는 메디치 은행에서 빌린 선거 자금 100억 원과 벌금 350억까지 이 돈을 거의 못 갚고 세상을 떠납니다.
때문에 메디치 은행은 요한 23세에게 빌려줬던 돈은 다 떼이고 교황청의 지정 은행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위기 속에서 메디치 은행은 1420년, 다시 기사회생을 하게 됩니다.
새로 즉위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메디치 은행을 전담 은행으로 다시 선택한 것입니다.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메디치 은행의 규모와 현금 동원력, 그리고 전 교황에게 보여준 신뢰 등을 보고 자산울 지지해 줄 믿을 만한 은행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메디치 은행은 서유럽을 호령하는 단 한 명의 교황의 기존의 3배 이상에 달하는 온전하고도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420년, 메디치 은행은 비로소 교황청 전담 은행이 된 것입니다.
11. 조반니 큰아들 '코시모',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열다
교황청과의 커넥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가던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후계자가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마침내 유럽 최대 은행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평민의 신분을 뛰어넘어 피렌체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 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반니를 뒤를 이어 그의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가업을 승계하게 된 것입니다.
코시모는 가문의 핵심 사업인 은행은 물론 피렌체 도심의 각종 건물과 부동산, 대토지까지 물려받게 됩니다.
30대 초반에 코시모가 물려받은 재산은 한화로 약 1,8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습니다.
코시모는 이렇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만큼 인정받는 후계자였을까요?
코시모는 천재 사업가로 불릴 만큼 돈을 기가 막히게 잘 벌었던 인물로 철저하고 빈틈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코시모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 갖가지 계산과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조반니는 코시모의 이런 성향을 꿰뚫어 보았고 코시모는 어릴 때부터 은행 운영 교육을 배우고 좋은 수도원 학교도 다니면서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코시모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 이외에도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까지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을 정점에 올리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을까요?
먼저 사업을 키우기 위해 아버지 조반니와 같은 방법을 쓰기로 합니다.
바로 교황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황이 활동자금으로 쓸 수 있는 많은 돈을 빌려주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결과 교황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코시모가 메디치 가문의 사업을 얼마나 키웠을까요?
코시모가 특히 주목한 사업은 양모와 비단을 중심으로 한 '직물업'이었습니다.
직물업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업이었고 코시모는 양모와 비단을 수입, 제조, 수출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늘어난 교역량만큼 은행을 키울 수 있도록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코시모는 영국, 벨기에, 스위스, 프랑스 등 서유럽 주요 나라에 해외 지점을 설치했으며 코시모는 이렇듯 중세시대에 은행을 프랜차이즈화 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왕들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이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 되었으며 각 나라의 왕들은 수천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메디치 은행에서 빌렸고 그 대신 메디치 은행은 유럽 각 나라에서 각종 사업 특혜를 받았습니다.
12. 메디치 가문, 교황청의 도움으로 '백반 광산' 독점권을 얻어 큰 이득을 얻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의 사업에 있어서 교황청은 무슨 특혜를 줬을까요?
가장 큰 특혜는 1460년대 메디치 가문이 백반 광산을 독점하게 해 준 것입니다.
백반은 흔히 우리가 봉수아물을 손톱에 들일 때 사용하는 가루인데 당시 유럽에서는 옷감 염색을 할 때 많이 쓰였습니다.
교황이 이 백반광산을 메디치 가문이 독점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수준으로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13. 메디치 가문, 가문의 '문장'을 만들어 명예를 드높이다
코시모는 이렇게 메디치 가문을 중세 최대의 글로벌 대기업으로 끌어올렸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가문의 문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문의 문장은 주로 왕이 작위와 함께 내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귀족이 아닌 평민이 갖기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은 가문의 문장을 조반니 시기부터 자체 제작해서 사용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은 유럽 귀족 가문에서 많이 쓰던 노란색 방패와 여러 개의 붉은 원으로 그려진 모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은 초기에는 단출하고 장식도 없었지만 가문의 위세가 높아지며 점점 화려해지게 됩니다.
14~15세기 무렵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 대해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거인이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침입합니다.
그 당시 아주 용감한 기사였던 메디치 가문의 선조가 이 거인을 무찌릅니다.
이때 거인이 들고 있던 곤봉으로 메디치 가문 기사가 들고 있던 방패에 내려쳤는데 이때 방패에 곤봉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방패에 남은 흔적의 모양을 따서 붉은 원을 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를 축적했던 메디치 가문은 이제 가문의 문장을 만들어서 명예를 드높였던 것입니다.
14. 메디치 가문, '돈'으로 나라를 구하고 '권력'까지 얻게 되다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재산과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의 복잡한 상황을 이용해서 권력까지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중세 이탈리아는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다스리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경,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가 황제와 싸워 자치권을 얻게 됩니다.
중세말에는 이 도시들끼리 서로 정복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힘이 셴 다섯 세력만이 남아경쟁하는 체제가 만들어집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위 그림에서 보듯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교황령' 이렇게 다섯 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이 다섯 개의 나라가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과 암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이탈리아 '풍자 시'가 있습니다.
'돈이 사람의 모든 죄악을 숨겨주고, 돈이 남들의 부러움을 사게 하고, 돈이 매력적인 여자를 대령하고, 돈이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주고, 돈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고, 돈이 원수를 땅에 쓰러뜨리지! 그러니 돈 없으면 패가망신이요, 세상만사는 돈으로 돌아가지, 돈만 있으면 천국도 갈 수 있으니, 현명한 자들이여, 돈을 쌓아라!'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습니다.
피렌체 역시 15세기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피렌체 사람들은 매번 살인적인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때 돈이 많아야 더 강한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용병 가격이 국가를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피렌체 정부는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막대한 전쟁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 이자율이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피렌체 정부에서 발행한 공채 이율은 나중에는 최대 100%까지 상승했던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피렌체 정부에서 돈이 다급해진 이때 공채 형태로 약 15만 플로린, 즉 한화로 약 1500억 원 이상을 빌려준 곳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습니다.
그 정도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는 메디치 가문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메디치 가문을 보는 피렌체 시민들의 시선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도시가 위기에 빠졌을 때 정부에 돈을 빌려준 메디치 가문을 시민들이 칭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은 돈도 벌고 피렌체 권력에도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5. 코시모, '알비치 가문'의 음해 때문에 유배당하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을 못마땅하게 보는 세력은 없었을까요?
승승장구하던 메디치 가문은 1430년대 피렌체 내에서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피렌체의 권력을 잡고 있었던 알비치 가문이 코시모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세력까지 키우자 코시모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비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 '코시모가 피렌체를 장악하려는 위험한 야심을 품고 있다'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알비치의 명령으로 정부가 코시모를 체포했는데 과연 코시모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비치 가문은 코시모를 사형에 처하고 싶어 했지만 위협적인 코시모의 지지자들 때문에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그칩니다.
코시모가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베네치아는 외교관을 보내 피렌체 정부에 항의합니다.
또한 다른 메디치 가문에 돈을 빌린 국가와 권력자들이 모두 메디치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코시모가 감옥에 있을 때, 재판을 담당하던 피렌체의 시장을 직접 매수하기도 했습니다.
피렌체 시장은 원래 알비치 가문에서 이미 매수된 사람이었는데 코시모가 몰래 10억을 줬고 시장은 10억을 받자마자 재판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16. 다시 돌아온 코시모,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피렌체 국가 권력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다짐하다
그렇다면 코시모가 유배된 후 추방을 당한 뒤 그 많은 재산은 어떻게 됐던 것일까요?
놀랍게도 코시모의 재산은 그대로였습니다.
코시모는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눈치채고 100억 원에 가까운 피렌체 정부의 채권을 다른 지점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현금은 여러 수도원에 수십억 원씩 나눠서 맡겨두었습니다.
코시모는 이런 방법으로 자금을 유지하며 피렌체로 돌아올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뒤 갑자기 상황이 코시모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메디치 가문과 친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피렌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코시모의 지지자들로 정부를 채운 것입니다.
교황의 도움으로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코시모는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피렌체라는 도시 국가 권력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17. 코시모, 선거위원회를 매수해서 피렌체의 정치와 권력을 손에 넣다
이때부터 코시모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갖가지 권모술수로 피렌체를 장악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코시모가 제일 먼저 손을 뻗은 곳은 피렌체 정부였습니다.
당시 피렌체 정부의 구성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추첨으로 시장과 정부 위원들을 뽑았습니다.
선거 방법은 간단했는데 선거위원회가 명망 있는 시민들의 이름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두면 이 주머니에서 무작위로 시장과 정부위원들 총 9명을 뽑아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코시모가 정권장악을 결심한 후부터 이상하게도 선거에서 메디치가문의 사람만 뽑혔습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일까요?
코시모가 쓴 방법은 바로 선거위원회를 매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거위원회가 가죽 주머니에 이름을 넣는 과정은 비공개였기 때문에 주머니에 어떤 이름이 들어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코시모는 이 맹점을 노린 것입니다.
코시모는 선거위원회를 매수해서 코시모 지지자 명단만 가죽주머니에 넣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공정한 선거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철저한 선거 조작이었고 코시모의 의도대로 메디치 지지자들만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권모술수로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뜻대로 정부대표들을 움직였고 마침내 피렌체의 정치와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8. 코시모, 돈으로 군사력을 사다
하지만 코시모는 피렌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늘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한번 돈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언제나 다시 자기 이익을 위해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코시모는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과 가문을 지킬 압도적인 무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때 코시모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밀라노의 강력한 지배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 공작이었습니다.
1430~40년대부터 코시모는 스포르차 공작의 막강한 무력을 얻기 위해서 큰돈을 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스포르차는 코시모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합니다.
즉 돈으로 스포르차 군대를 메디치 가문의 방패로 삼은 것입니다.
코시모가 이런 식으로 스포르차에게 빌려준 돈은 한화로 무려 1천억 원이 넘었습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은 돈, 정치, 권력, 군사력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19. 메디치 가문, 피렌체 공의회를 개최시키며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다
메디치 가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코시모는 이번에는 가문의 영향력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코시모는 이때 교황청이 기독교 최대행사인 공의회를 개최하는데 난항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공의회는 기독교 최고위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모인 최고의 종교 회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세계 주요 국가 회의를 G7이라고 하는데 공의회는 중세 종교 버전의 G7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중요한 행사였던 것입니다.
코시모는 곧장 교황에게 달려가서 국제적인 행사에 드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메디치 가문에서 후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대신 공의회가 열리는 장소를 페라라에서 피렌체로 옮기라는 조건을 겁니다.
그 결과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은 '피렌체 공의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안으로는 피렌체의 명성을 드높인 가문으로 인정을 받았고 밖으로는 동서 교회의 화합을 논의하는 중대한 행사를 지원한 기품 있는 가문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공의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들의 행렬>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그림 속이 인물들이 코시모와 코시모 아들 피에로를 포함해서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코시모 때 이르러 15세기 유럽 최고의 가문 중 하나로 올라서는 데 성공합니다.
20. 메디치 가문을 유럽 최고 명문가로 올려놓은 '로렌초 데 메디치'
가문의 위세가 최정점에 이른 시기, 메디치 가문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그야말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명문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바로 '로렌초 데 메디치'입니다.
할아버지인 코시모가 죽은 후 병약했던 아버지 피에로 마저 사망하면서 1469년 겨울, 20살의 어린 나이로 로렌초는 거대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로렌초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인물로 공부뿐 아니라 노래, 무술 등 못하는 것 없이 다재다능했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뛰어났던 것이 말솜씨였고 로렌초가 말만 하면 듣는 사람이 홀딱 넘어갈 정도로 말을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1. '파치가문', 로렌초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하다
가문의 수장이 바뀌는 혼란한 틈을 타서 할아버지 코시모때와 같이 견제하는 세력이 나타납니다.
로렌초가 권력을 잡는 것에 불만을 가진 가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피렌체 귀족가문인 '파치 가문'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휘어잡으면서 서서히 권력에서 멀어져 갔던 파치 가문은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을 군사적으로 든든히 뒷받침해 줬던 군사적 파트너 밀라노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공작이 갑작스럽게 암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때다 싶었던 파치가문은 곧바로 메디치 가문을 없앨 음모를 꾸밉니다.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하기로 계획한 것입니다.
우선 무술 실력이 뛰어난 로렌초를 상대하기 위해서 당시 유명한 용병대장을 암살자로 가담시켰습니다.
거사일은 그 유명한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이었고 암살을 할 장소는 성스러운 '두오모 성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암살이 개시되지 직전, 어이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로렌초를 암살하기로 한 용병대장이 갑자기 암살을 그만두겠다며 성당을 빠져나가 버린 것입니다.
성스러운 공간인 대성당에서 암살을 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죄라며 용병 대장이 거절을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파치 가문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음모를 같이 짰던 성직자들에게 급하게 칼을 쥐어주고 로렌초 암살을 맡기게 됩니다.
암살을 위해 몰래 칼을 쥔 성직자들은 미사가 시작되자 계획대로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가운데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입니다.
그는 이날 파치 가문 사람들에 의해 온몸에 무려 19번이나 칼에 찔려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로렌초는 그를 암살하기로 한 성직자가 칼을 휘둘렀지만 로렌초가 재빨리 피한 데다 친구들이 급하게 막아내면서 대신 다치고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았습니다.
22. 로렌초, 파치 가문에 피의 복수를 하다
혼자 살아남은 로렌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사건 당일 오후 피렌체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로렌초의 명령에 따라 정부관리들이 암살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 정부관리들은 암살자들을 고문하고 죽인 뒤, 그 시체를 벌거벗겨서 시뇨리아 궁 높은 창문에 내다 걸어놓았습니다.
매달린 시체가 아래로 떨어지면 흥분한 시민들이 몰려들어서 시체를 토막을 내기도 하고 떨어진 시체를 끌고 피렌체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피와 광란의 풍경이 펼쳐졌던 것인데 시민들도 많이 분노했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이때 처형 모습을 그린 유명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성벽에 매달린 시체를 보고 이를 바로 스케치로 남깁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메디치 가문이 암살 사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으면 본인에게 의뢰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이런 의뢰는 없었다고 합니다.
23. 로렌초, 피렌체를 탄압하며 독재국가화 되며 시민들 공포에 떨다
암살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시민들도 충격적인 암살사건에 메디치 편에 서서 함께 분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노는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렌초가 암살 사건을 계기로 철저하게 피렌체를 휘어잡겠다고 결심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독재국가로 변해갔기 때문입니다.
로렌초는 메디치를 지지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특별헌법기구를 만들어 운영했고 여기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의견이 하나만 나와도 눈을 부릅뜨고 철저히 견제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특별 경찰기구 '팔인회'를 통해 피렌체 안에서 로렌초의 반대파들을 색출하고 탄압했습니다.
24. 교황, 피렌체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하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로렌초가 피렌체를 장악하고 있던 이때 피렌체 밖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황이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당시 교황의 '파문'이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죄악의 자식들'로 낙인찍혔고 이들에 대한 전쟁과 파괴가 용인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로렌초 암살 사건의 배후에 당시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도 처음에는 로렌초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식스투스 4세는 자신의 지휘를 이용해서 조카와 친척 등 자기 식구를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로렌초는 교황이 자신의 조카를 성직자로 앉히려고 하면 방해를 하고 조카에게 도시를 사주기 위해서 돈을 빌리려고 하면 이 또한 퇴짜를 놓기 일쑤였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 주변에서 교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자신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로렌초를 증오하게 되었고 파치 가문과 결탁한 조카들이 교황에게 로렌초 암살계획을 털어놓자 이를 침묵함으로써 암묵적을 승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암살이 실패하고 암살 주동자들이 참혹한 몰골로 피렌체에서 목이 매달리자 이게 교황이 격분하게 된 것입니다.
25. 교황 '식스투스 4세', '나폴리'와 연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기로 하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번 기회에 로렌초를 몰아내고 직접 피렌체를 장악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은 피렌체에 파문을 선언한 후 곧이어 옆 나라 나폴리 왕과 협공하여 피렌체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나폴리 왕은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넓히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폴리왕은 교황과 손을 잡고 피렌체를 침공한 것입니다.
아무리 로렌초가 돈으로 용병을 사더라도 연합군에게는 수적으로 불리했고 피렌체는 연합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1년 반이 넘도록 전쟁을 치렀지만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돌고 흉작까지 들면서 피렌체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26. 로렌초, 직접 나폴리왕을 만나 전쟁을 멈출 것을 설득하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로렌초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합니다.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로렌초는 1479년 12월, 배를 타고 나폴리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3달 가까이 나폴리에 머물면서 온 힘을 다해 나폴리 왕을 설득했습니다.
이대로 피렌체가 교황의 손에 넘어가서 교황이 세력을 키우면 교황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폴리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반대로 로렌초 자신이 피렌체를 계속 다스리게 해 주면 피렌체는 영원히 나폴리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까지 합니다.
로렌초의 이 제안에 나폴리 왕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결국 나폴리왕은 로렌초의 설득에 따라서 군대를 피렌체에서 물리기로 했습니다.
로렌초는 나폴리와 피렌체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로렌초는 권모술수의 대가답게 미리 선물과 현금을 준비해서 로비도 했습니다.
또한 미리 편지로 조율하고 그 뒤에 나폴리로 가서 구체적인 조건들만 추가 협상하는 등 이미 가기 전에 사전 협상이 됐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27. 로렌초, 교황과 극적으로 화해하며 피렌체의 파문 결정도 철회되다
로렌초가 무사히 협상을 마치고 피렌체로 다시 돌아왔을 때, 피렌체 사람들의 반응을 어땠을까요?
예상대로 로렌초는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들여지게 됩니다.
교황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피렌체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자 로렌초는 교황의 화를 풀기 위해서 즉시 사절단을 꾸려서 교황에게 보냅니다.
교황은 이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로렌초의 사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로렌초와 교황 두 사람이 화해하면서 피렌체가 당한 파문도 없었던 일로 처리됩니다.
로렌초가 나폴리로 가서 피렌체를 구했다는 사실은 곧 이탈리아와 유럽은 물론 이집트에까지 알려지니다.
이후 각국의 사절단들이 메디치를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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