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한 여자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조선여성셀럽
1. 나혜석,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조선 명문가댁 규수로 태어나다
때는 조선 후기였던 1896년 4월 18일, 나혜석은 수원에서 유명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납니다.
나혜석 집안이 수원에서 유명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혜석 집안은 '나 참판 댁'이라고 불리는 관직이 높은 명문가 집안이었습니다.
나혜석의 할아버지가 순조대에 나라의 재물을 담당하는 '호조 참판'을 지냈고 아버지는 시흥, 용인 군수를 역임했습니다.
대대로 국가요직을 지내면서 심지어 부유하기까지 했던 집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혜석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조선 명문가댁 규수였습니다.
2. 나혜석,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다
나혜석이 11살이 되던 1906년, 수원의 자택 근처에 있는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혜석이 유독 두각을 보이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술'이었습니다.
나혜석의 손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펜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습니다.
뒤뜰에 나무나 꽃들을 포함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혜석의 그림을 본 선생님이 학교 학생 들 중에서 나혜석이 가장 그림을 잘 그린다고 엄청나게 칭찬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이미 나혜석은 미술에 아주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것입니다.
3. 나혜석, 공부까지 잘하는 '엘리트'였다
어느덧 나혜석이 15살이 된 1910년, 나혜석이 수원 고향집을 떠나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혜석이 경성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조선 여성에게는 경성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혜석이 입학한 학교는 당시 학업에 욕심 있는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던 '진명여학교'로 손꼽히는 명문학교였습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1913년 4월 1일 18살이 된 나혜석, 그녀의 소식이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실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나혜석은 졸업 시험 전 과목 평균 100점 만점에 99점을 맞았다고 합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나혜석은 미술뿐만 아니라 공부까지 잘했던 엘리트였습니다.
4. 나혜석, 둘째 오빠 '나경석'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도 공부를 쭉 이어나가려던 나혜석이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빠집니다.
나혜석의 학업을 중단시키려고 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과연 누구였을까요?
수원에 있는 나혜석의 부모님이 나혜석에게 갑자기 시집을 가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20살만 돼도 노처녀 소리를 들었습니다.
때문에 18살 정도면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였던 나혜석이 계속해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나혜석이 혹시나 혼기를 놓칠까 봐 학업을 중단하게 한 것입니다.
나혜석은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학업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혜석은 시집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나혜석에게 돌파구가 생깁니다.
나혜석에게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은 당시 조선 여성들에 있어서 아주 드물고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나혜석에게 더 큰 배움의 기회를 열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나혜석의 둘째 오빠 나경석이었습니다.
오빠 나경석은 이미 일본으로 가 도쿄고등공업학교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나혜석의 재능을 여기서 묵힐 수 없다고 판단한 나경석은 완강했던 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해서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후인 1913년 4월, 나혜석은 18살의 나이로 드디어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5. 나혜석, '서양화' 학부를 선택해 일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다
당시 됴쿄로 온 나혜석이 입학한 학교는 됴쿄의 명문 당대 최고의 여성들만 다닌다는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였습니다.
이곳은 당시 일본에서 여성이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학교였습니다.
조선 여성 나혜석이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에 당당하게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나혜석이 아주 파격적인 결정을 합니다.
전공을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르게 '서양화 학부'를 선택합니다.
이 당시 여성들은 미술대학내에서도 신부수업 일환으로 자수, 재봉 등 가정학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사회적 통념이나 다른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배우고 싶은 분야를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나혜석이 경성에서 회자되기 시작합니다.
1914년 4월 7일 매일신보에 '조선인 유학생이 도쿄에서 일본인들을 제치고 월등한 성적을 거두는 등 두각을 나타낸 것이 축하하일'이라면 나혜석의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학을 통해서 고등교육을 받는 신여성을 보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나혜석은 경성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6. 나혜석, 아버지의 반대를 꺽지 못하고 귀국하다
그런데 이렇게 일본에서 예술적 재능을 뽐내면서 이름을 날리던 나혜석이 또 한 번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역시 결혼 문제로 발목을 잡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학업을 중단할 수 없다며 결사 반대하면서 버팁니다.
그리고 사실 나혜석이 학업 말고도 결혼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결혼을 강요했던 아버지가 본처인 어머니 외에 여러 여성들을 첩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첩들 중에는 나혜석보다 겨우 한 살 많은 기생출신의 어린 첩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첩에게 같은 동네로 집까지 얻어주고 생활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혜석은 결국 아버지를 꺾지 못한 채, 휴학을 신청한 뒤 귀국하게 됩니다.
7. 나혜석, 미술학도에서 미술교사를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돈을 벌다
1915년, 학업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나혜석은 귀국 후 아버지 뜻대로 결혼을 했을까요?
절대 학업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나혜석은 바로 결혼하지 않았고 추후 다시 일본으로 꼭 돌아가서 미술을 계속 공부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아버지의 간섭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직접 학비를 벌기로 결정합니다.
얼마 뒤 나혜석은 미술학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나혜석이 미술 학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여주공립보통학교에 미술 교사로 취직하게 된 것입니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우선 돈을 모으기로 합니다.
8. 나혜석, <경희>라는 자전적인 소설을 통해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지다
그리고 1918년 3월, 나혜석의 대표적인 작품을 하나 발표합니다.
당시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고하면서 자신의 심경이 담긴 자전적 소설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나혜석 이 쓴 소설 <경희>의 일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조선의 낡은 관습에 억압받던 여성의 자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여성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이었고 여자이기보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많이 배워봐야 가정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삶을 살 텐데 무슨 교육이 필요하고 직업이 필요냐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전형적인 삶에 대한 낡은 사고방식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소설을 통해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나혜석은 직접 쓴 소설을 통해 당시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9. 나혜석, 오빠 친구 '김우영'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묵묵부답하다
그리고 10개월 후 미술교사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모은 나혜석은 교편을 내려놓게 됩니다.
나혜석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에 다시 복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건너간 일본에서 나혜석은 훗날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꿔버릴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나혜석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김우영(1886~1958)'입니다.
김우영은 부산의 부유하고 명망 높은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최상위 명문대학인 '교토대학교 법학부'에 다니는 대단한 엘리트였습니다.
이런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반한 것입니다.
나혜석과 김우영, 두 사람은 과연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요?
나혜석의 둘째 오빠 나경석과 김우영이 절친이었고 나경석이 동생 나혜석과 친구 김우영의 만남을 주선했던 것입니다.
'우영 씨는 내게 장찰(長札/내용이 긴 편지)을 보내었습니다. 솔직하고 열정으로 써있었습니다...두 번째 편지가 또 왔습니다. 며칠 후에는 그가 찾아왔습니다. 파인애플과 과일을 사가지고'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나혜석은 과연 김우영의 마음을 받아줬을까요?
나혜석은 김우영의 마음을 쉽게 받아주지 않습니다.
김우영은 포기하지 않고 무려 2년 동안 나혜석에게 계속해서 구애합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나혜석은 변함없이 나혜석에게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나혜석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김우영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미술에만 전념합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결혼을 하면 사실 자신의 일을 이어나가기 어려운 사회였습니다.
나혜석은 결혼해서 누군가의 여자가 된다기보다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10. 나혜석,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의해 감옥에 잡혀 들어갔지만 혐의입증 부족으로 풀려나다
나혜석은 1918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19년 너무나도 충격적인 나혜석의 소식이 경성에 들려옵니다.
나혜석이 감옥에 잡혀 들어간 것입니다.
나혜석의 죄목은 '독립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한반도 전역에 들불처럼 번진 만세 시위였던 '3.1 운동' 당시 화가 나혜석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요?
당시 나혜석은 자신의 모교인 진명여학교 후배들에게 3.1 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은밀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개성과 평양에서도 활동하면서 자신의 친구나 지인들에게도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결국 3.1 운동이 일어나고 3월 5일 이후 나혜석을 포함한 동료들이 모두 일제에 검거됩니다.
일제는 나혜석에게 끊임없는 취조와 심문을 이어갔으며 감옥에서 나혜석은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나혜석의 죄를 입증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혜석은 혐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5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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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혜석, 김우영에게 청혼받다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나혜석을 꼭 만나야겠다면서 급히 찾아온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도쿄 유학생활중에 나혜석에게 끊임없는 구애를 보냈던 김우영이었습니다.
김우영은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나혜석을 찾아온 것입니다.
호감을 갖게 된 지 비록 3년이나 흘렀지만 김우영은 나혜석을 마음에 품고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우영이 던진 한마디에 나혜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결혼을 하자고 한 것입니다.
김우영의 청혼에 나혜석은 어떻게 답했을까요?
나혜석은 이번에도 거절합니다.
사실 나혜석이 김우영의 청혼을 승낙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김우영은 이미 한 번 혼인을 했던 남자였던 것입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을 했고 전처와의 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혜석과 김우영의 나이차이가 무려 10살 차이였습니다.
'우영 씨의 말, 우영 씨의 행동은 이성을 초월한 감정과 열뿐이었사외다. 나는 이 열을 받을 때마다 기뻤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그 열 속에 녹아드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혜석은 김우영의 열정적인 고백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립니다.
12. 나혜석, 김우영에게 파격적인 결혼 조건 4가지를 제시하다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던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을 위한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나혜석이 내건 조건을 보고 김우영은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도 파격적인 결혼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나혜석은 무려 이 파격적인 결혼 조건을 네 가지나 제시합니다.
결혼 조건 1.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결혼하면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당시에는 결혼한 남자가 따로 첩을 두는 것이 당연시되던 '축첩 제도'가 성행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이 조건이 파격적인 요구던 것입니다.
결혼 조건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여느 조선 여성들처럼 결혼 후 살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절대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결혼 조건 3.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결혼 조건 4. 신혼여행은 나혜석 첫사랑의 무덤으로 가주시오
네 가지 조건을 내세운 나혜석의 요구에 김우영은 어떻게 답했을까요?
김우영의 대답 역시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첫사랑 무덤으로 기꺼이 신혼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김우영은 나혜석을 아내로 맞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혜석이 내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인 김우영을 보고 나혜석은 결국 청혼을 승낙하고 그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13. 나혜석과 김우영, '정동교회'에서 신식 결혼식을 열다
그렇게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을 하게 된 나혜석과 김우영,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경성이 떠들썩해집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신문에 실릴 정도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습니다.
실제 두 사람의 결혼식 당일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100여 년 전인데 요즘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결혼식 모습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곳은 현재도 남아 있는 중구 정동에 있는 정동교회입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정말 신식결혼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의 신여성 나혜석이 결혼식도 파격적으로 치른 것입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에도 자신이 원하던 대로 여학교에서 미술 선생님으로 일을 하며 그림도 마음껏 그립니다.
14. 나혜석, 만삭의 몸으로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 비싸게 그림들이 팔려나가다
결혼 3개월 뒤 나혜석 부부에게 소중한 선물이 찾아옵니다.
나혜석이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혜석이 만삭의 몸을 이끌고 또 한 번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행보를 보입니다.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연 것입니다.
나혜석은 이로서 조선 미술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한 것입니다.
이때 전시회에서는 나혜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 나혜석 여사의 전람한 그림을 보다 그 가운데 <신춘>이란 그림은 350원이다'
<이병기, 가람일기>
나혜석의 그림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신춘>이라는 작품은 현재가치로 약 3,500만 원 상당으로 고가에 팔립니다.
나혜석은 조선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서 그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은 것입니다.
15. 나혜석, '모성'은 여성의 본능이 아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글을 쓰다
1921년 9월, 나혜석이 갑자기 경성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경성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소속의 부영사라는 직책이 높은 외교관이 되면서 남편의 근무지가 '중국 단둥'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습니다.
나혜석은 남편과 아이와 함께 중국 단둥으로 가서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나혜은 중국에 가서도 여전히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셀럽의 면모를 보입니다.
나혜석이 또 한 번 아주 파격적인 글을 발표합니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다. 모친의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母)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 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 모(母)된 감상기>
1923년 1월에 발표된 < 모(母)된 감상기>는 나혜석이 엄마가 된 감상을 적은 기록입니다.
나혜석이 여성 입장에서 발표한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기록인 것입니다.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면서 자신의 심정과 출산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 모(母)된 감상기>는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나혜석은 기존 사회 통념과는 다르게 모성애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써 내려간 것입니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모성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감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혜석은 모성이라는 것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생기는 감정이지 천부적인 여성들의 본능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모성애를 비판하는 글을 쓴 것입니다.
예술가 나혜석은 세상이 정한 틀에 박혀 사는 것을 거부하면서 조선의 금기를 깨부숩니다.
16. 나혜석,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다
그런데 나혜석의 놀라운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혜석이 중국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바로 '독립운동 지원'을 합니다.
나혜석은 중국에 있을 당시 독립운동 단체였던 '의열단' 단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합니다.
의열단에 총과 폭탄이 든 가방을 자신의 숙소에 숨겨주고 경성으로의 무기 반입을 도와준 것입니다.
나혜석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협조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총과 폭탄이 든 가방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가방에 '일본 외무성 표식'을 붙여줍니다.
나혜석은 남편의 신분을 대담하게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의열단 사건으로 옥중 생활을 했을 때 나혜석은 우리를 찾아와 건강을 걱정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의열단 단원 유석현>
17. 나혜석, 세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모성애'를 알게 되다
그렇게 나혜석이 중국에서 보낸 시간은 무려 6년이었습니다.
6년 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나혜석은 두 아이를 더 출산해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나 기르고 둘 기르는 동안 지금까지 애인에게서나 친구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나이다'
<삼천리(1934년)>
나혜석은 세 아이를 키우며 육아하랴 틈틈이 그림 그리랴 중국에서 정신없이 바쁜 워킹맘으로 살면서 비로소 모성애를 느끼게 됩니다.
18. 나혜석, 남편 김우영과 함께 1년 9개월간 13개국을 여행하다
그런데 어느 날 워킹맘으로 바쁘게 지내던 나혜석에게 예술가 인생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엄청난 기회가 찾아옵니다.
남편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입니다.
바로 '세계 여행'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는 외지에서 일한 근무자를 서양으로 포상 휴가를 보내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남편 김우영이 단둥에서 외교관으로서의 일을 잘 수행해 일본 외무성에서 관례대로 세계여행을 보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1년 9개월간의 세계 여행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여기서 또 한 번 조선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나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며 그동안 그 어떤 여성도 간 적 없는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1927년 6월, 나혜석은 드디어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이때 경성 최고의 셀럽 나혜석은 파격적인 단발을 했고 나혜석과 김우영, 두 사람은 완벽한 서양식 복장을 갖춘 상태로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간 다음에 유럽 내에서 폴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을 거쳐 미국과 일본까지 1년 9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무려 13개 나라를 여행합니다.
19. 나혜석, 프랑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그녀의 화풍에도 변화가 생기다
이 많은 나라 중에 나혜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프랑스'입니다.
'파리의 시가 설비, 공원 시설, 모든 것이 미술적인 것은 물론이요. 연극, 활동사진 어느 것 하나 미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 화가가 있어야만 할 파리요. 파리는 화가를 불러온다 '
프랑스 파리에 반한 나혜석은 세계여행 기간 중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약 1년간 파리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프랑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그녀의 화풍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거친 붓질과 강렬한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원래 세계 여행 전 나혜석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지만 세계여행 이후에는 색감이 강렬한 인물화도 남기게 됩니다.
20. 나혜석, 귀국전시회를 대성공시키다
그렇게 예술가로서 크나큰 변화를 이룬 나혜석은 1928년 9월, 프랑스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혜석이 넷째를 임신한 상태여서 세계 여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혜석부부는 유럽을 떠나 마지막으로 6개월 동안 미국과 일본을 여행한 뒤에 1929년 3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이 있는 부산에 도착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남편 김우영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겠다면서 부산을 떠나 경성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3개월 후 부산에서 넷째 아이를 무사히 출산합니다.
출산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나혜석은 바쁘게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귀국 전시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1929년 9월 23일 동아일보의 기사입니다.
나혜석은 여행 중에 그린 그림과 자신이 여행 중에 구매한 그림을 함께 전시하는 전시회를 수원에서 엽니다.
전시회 결과,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경성 최고의 셀럽 천재 예술가답게 나혜석은 또 한 번 예술가로서 조선 전체에 신드롬을 일으킵니다.
21. 나혜석, 남편 김우영에게 친구 '최린'과의 불륜사실이 발각되어 이혼을 요구받다
예술가로 승승장구하던 1930년 어느 날, 나혜석에게 경성에 있던 남편 김우영이 너무나 충격적이니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편 김우영이 '이혼'을 요구한 것입니다.
김우영은 대체 왜 이혼을 요구한 것일까요?
사건의 발단은 3년 전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합니다.
나혜석이 프랑스에서 그림공부에 한창이던 시기에 남편은 법학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부부가 떨어져 지낸 사이 사건은 터지고 맙니다.
사실 프랑스에서 나혜석이 빠져 있었던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혜석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는 '최린(1878~1958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최린은 당시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나 1933년에 친일민족행위자로 변절하여 반민특위에 끌려왔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린은 나혜석보다 무려 18살이나 연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부남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최린을 파리에서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일까요?
나혜석과 최린, 두 사람을 소개해 준 것은 놀랍게도 남편 김우영이었습니다.
당시 최린 역시 유럽을 유람하는 중이었습니다.
프랑스에 잠시 머물렀던 최린을 당시 친구였던 김우영이 친구라며 부인 나혜석에게 소개하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게 된 나혜석과 최린은 남편 김우영이 독일에 간 동안 파리에서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결국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프랑스 파리에서 나혜석이 불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뜩 든 나혜석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는 이런 행동은 잘못인 것 같다고 판단하고 최린과의 불륜 관계를 깨끗이 정리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끝났던 일이 3년 후, 조선에서 엄청난 문제로 불거집니다.
그 시작은 이랬습니다.
1930년 경성, 세계여행을 끝내고 조선으로 귀국한 뒤 나혜석 부부가 경제적인 위기를 겪습니다.
장기간의 세계여행으로 사비를 많이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귀국 후 남편의 변호사 개업 비용까지 들어가다 보니 생계는 더욱더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혜석은 전시회를 열어서 그림을 팔면서 노력을 했지만 가세는 점점 기울게 됩니다.
이렇게 팍팍한 살림으로 네 명의 자식까지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에 날이 갈수록 나혜석의 근심 또한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그 근심을 털어놓게 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최린입니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 한 장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옵니다.
나혜석이 최린에게 편지를 쓴 사실을 남편 김우영이 알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최린이 나혜석이 자신에게 편지 보냈다는 사실을 지인에게 털어놓은 것이었고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 흘러 결국 남편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편지사건으로 이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의 관계까지 남편 김우영이 모두 알게 됩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남편 김우영은 불륜을 저지른 나혜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22. 나혜석, 어린 자식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남편에게 '현모양처'가 되어 살겠다며 용서를 빌며 이혼하지 말자고 애원하다
남편 김우영은 결판 짓기 위해서 경성에서 부산으로 내려옵니다.
부산에서 만난 나혜석과 김우영,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냉정하게 이혼하자고 하고 선언합니다.
남편 김우영의 이혼 요구에 나혜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180도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나혜석은 이혼하지 말자고 빌면서 남편을 붙잡습니다.
나혜석은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무릎까지 꿇으며 용서를 구합니다.
간절히 빌면서 용서를 구한 나혜석,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혼을 하면 법적을 친권과 양육권은 아버지가 갖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대로 이혼을 하면 남편 허락 없이는 아이들을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4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였던 나혜석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이혼만은 막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나혜석은 상상할 수 없는 말까지 하면서 애원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살겠습니다'
이런 절절한 나혜석의 애원을 들은 남편 김우영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김우영은 이혼하겠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었고 이혼하겠다며 쐐기를 박고는 부산을 떠나 경성으로 돌아가버립니다.
다급해진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이 머물던 경성 여관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때, 여관방에서 나혜석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듯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김우영이 있는 사랑에서는 기생을 불러다가 흥이냐 흥이냐 놀며 때때로 껄껄 웃는 소리가 스며 나왔다'
나혜석을 충격에 빠뜨린 소리는 껄껄대며 흥이 올라 웃는 남편 김우영과 기생의 목소리였습니다.
나혜석의 남자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혼을 요구했던 남편 김우영이 경성에 기생 애인을 두더니 다른 여성과도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혜석은 더 이상은 남편 김우영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갑니다.
23. 나혜석, 결국 결혼 11년 만에 이혼하다
부산으로 돌아간 후 끊임없이 남편 김우영의 이혼 독촉 편지가 날아옵니다.
'이혼해주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소'
바로 남편 김우영의 이혼을 독촉하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오랜 시간 동안 나혜석을 괴롭힙니다.
남편의 끈질긴 이혼 독촉에 못 이긴 나혜석은 결국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맙니다.
1930년 11월, 결혼 생활 11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때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나혜석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24. 나혜석,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는 조선사회를 강력히 비판하다
이혼 후 초라한 신세가 된 나혜석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934년, 경성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 파격적인 글을 또 발표합니다.
'조선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1934년 삼천리 中>
조선남성은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아내나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똑같이 불륜을 저질러놓고 나혜석 탓만 했던 남편의 뻔뻔함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쓴 글입니다.
나아가 남편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만 정조를 지킬 것을 강요하는 조선 사회를 강력히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내용보다 나혜석이 쓴 이 글의 제목이 더 놀랍습니다.
이글의 제목은 바로 <이혼고백장>입니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의 결혼부터 이혼까지 남들은 숨기기 급급했을 이혼의 모든 과정을 고백하듯 적은 것입니다.
25. 나혜석,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걸다
나혜석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욱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갑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34년 9월,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을 벌입니다.
대체 어떤 일을 벌였을까요?
바로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건 것입니다.
나혜석이 제기한 소송의 핵심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최린이 자신의 정조를 유린했다
둘째, 최린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스캔들이 터졌을 당시 최린은 자신 역시 간통죄로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서 나혜석에게 이혼을 종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나혜석에게 이혼하고 오면 추후 보살펴 주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송의 결론은 어땠을까요?
나혜석은 결국 위자료 청구소송을 취하합니다.
더 이상 사회적 체면을 잃기 싫었던 최린이 나혜석에게 일정 금액을 주고 소송을 취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위자료 청구 소송은 최린이 어느 정도 금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26. 나혜석, 스캔들 메이커로 사회적 비난이 끊이지 않다
하지만 나혜석과는 다르게 최린은 사회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나혜석과의 스캔들로 법적으로 벌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어떤 타격도 입지 않습니다.
반면 나혜석은 이혼고백장발표와 연이은 위자료 청구 소송까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나혜석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과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은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을 바라고 자실(자신의 존재를 잊은 정도로 얼이 빠짐)하여 할 뿐입니다'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왜 사람들의 이런 비난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나혜석이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당시의 통념을 대놓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런 생각들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후 생계를 위해 했던 나혜석의 행보들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혜석은 소중한 네 명의 아이들과 평생을 일궈온 재산과 예술가의 명성까지 이혼과 함께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 나혜석은 경성에서 영영 잊히게 됩니다.
27. 나혜석, '무연고자' 신세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다
그런데 15년 후 1949년, 나혜석의 소식이 또 신문에 실리게 됩니다.
국가기관지인 관보 제56호(출처: 국가기록원)에 나혜석의 사망소식이 실린 것입니다.
그것도 가족, 주소 등을 알 수 없어서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일컫는 '무연고자'로 시신을 찾아가라는 공고란에 나혜석의 이름이 발견된 것입니다.
나혜석은 무연고자신세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찾는 이 하나 없이 무연고자처리되어 화장됩니다.
생을 마감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53세였습니다.
한때 경성에서 가장 주목받던 여성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1호 여성 전시회 개최자, 최초의 여성세계여행자등 조선에서 최초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모조리 휩쓸었던 천재 예술가 나혜석의 쓸쓸한 마지막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혹은 개인적인 일탈을 일삼았던 여성이라는 등 여러 가지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입니다.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고 싶었던 나혜석, 여러 각도에서 인간 나혜석의 삶을 바라봤던 시간이었습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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