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조선을 설계했으나 조선에서 금기어였던 그의 이름
1. 정도전, 공민왕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했던 '신진사대부'였다
1374년 9월 22일 고려말,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 개경의 궁궐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정적을 꺠고 이렇게 외칩니다.
'역적이 들어왔다!'
역적이 뛰쳐나온 곳은 바로 왕의 침전이었습니다.
대체 왕의 침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침전 바닥은 새빨간 피로 흥건했고 방 가운데 처참한 모습으로 시신이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이 침전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람은 바로 고려의 제31대왕 '공민왕'(재위 1351~1374년)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공민왕과노국공주2
공민왕을 살해한 범인은 공민왕이 직접 키운 '홍륜'을 비롯한 최측근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나라의 왕이 끔찍하게 죽었는데 어떤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로 고려 후기 지배계층으로 군림한 귀족이었던 '권문세족(權門勢族)'들입니다.
권문세족은 고려 말 높은 권세를 누리던 지배층으로 공민왕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공민왕이 원나라에 대해서 반대하는 정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1231년~1257년까지 고려는 원나라와 긴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려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폐배 후 97년간 원나라의 지독한 간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약 100년간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에서 득세한 무리들이 바로 친원파였던 권문세족이었던 것입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의 비호를 받으면서 고려 조정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고려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원나라의 풍습을 없앱니다.
그리고 고려내의 친원세력을 숙청하면서 강력한 반원 정책을 펼칩니다.
권문세족에게 공민왕은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권문세족은 기록상 공민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죽음에 대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양한 의혹들이 제기되는데, 정황상 볼때 공민왕의 정책에 불만이 많이 쌓여 있었던 권문세족이 공민왕의 죽음에 개입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반대로 공민왕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이들도 있었으니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고려말 공민왕의 편에서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힘을 보태면서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였고 쓰러져 가는 고려를 바꿔보려 했던 개혁 세력이였습니다.
이런 신진사대부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공민왕의 죽음에 슬퍼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도전'입니다.
2. 정도전, 원나라 사신을 맞으라는 권문세족의 명을 어기고 유배보내지다
당시 정도전은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한 문신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일처리에 있어서 깔끔했고 정치적으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공민왕은 정도전을 아꼈습니다.
정도전 역시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공민왕과 함께 고려를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개혁에 힘을 쏟던 공민왕이 무참히 시해되었고 당연히 정도전으로서는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권문세족에 비해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신진사대부는 공민왕의 죽음 이후 급격히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이 죽은 뒤 권문세족은 공민왕의 아들 '우왕'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겨우10살이었던 어린 우왕 뒤에서 권문세족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런데 이때 정도전과 신진사대부가 경악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반원 정책을 편친 공민왕이 죽었으니 다시 원나라와 교류를 재개하겠다'
권문세족들이 반원 정책을 편친 공민왕이 죽었으니 다시 원나라를 섬기겠다면서 원나라와의 교류를 더욱더 강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원나라의 사신이 곧 고려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때 정도전에게 믿을 수 없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바로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를 정도전에게 맡긴 것입니다.
정도전은 자신의 신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명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정도전이 이 명령을 거부한다면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그는 무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은 정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삼봉 정도전은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입궐하는 그 어떤 원나라 사신이라도 목을 베겠다!'
이렇게 거친 말과 행동으로 원나라 사신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정도전은 어떻게 됐을까요?
권문세족은 정도전에게 곧장 유배형을 내립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권문세족이 유배를 취소할 수 있다라면서 정도전을 회유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냅니다.
이 말을 들은 정도전은 오히려 화를 내며 권문세족의 제한을 거절하고는 스스로 말을 타고 유배지인 전라남도 나주로 떠나버립니다.
정도전의 이런 말과 행동을 전해듣고 더 화가났던 권문세족들은 곤장형까지 추가하려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3. 정도전, 유배지에서 철저히 고립되다
그렇게 정도전은 가족과 떨어져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아내에게서 편지가 도착합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텅텅 비었고 항아리에는 쌀 한 톨 없어서 방에 가득한 어린 자식들은 춥다 외치고 배고프다 울었습니다. 당신은 끝내 국법을 어겨 이름이 더렵혀지고 행적이 깎였으며...형제들은 나뒹굴고 가문은 망가져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
<삼봉집>
아내는 정도전에게 자신의 신념을 지킨 대가로 맞이한 가혹한 현실을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 또한 정도전에게 편지를 쓰거나 안부도 묻지않거나 찾지 않았습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철저히 고립된 채 이전에 없었던 외로움과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4. 정도전, 유배지 나주에서 고려의 끔찍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다
이때 절망에 빠진 정도전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배지의 나주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도전이 유배갔던 나주 지역은 고려 하층민들이 사는 특별행정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 중 '부곡'이었습니다.
나주는 하층민들만 사는 특별구역인 부곡으로 고려에서 과중한 세금 등의 차별을 받던 지역이었습니다.
나주 부곡민들은 이런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혼자 외롭게 보내고 있는 정도전을 찾아가서 술도 권하고 심지어 집을 짓는것까지 발벗고 나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정도전은 개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유배지 나주에서 보고 말았습니다.
당시 고려의 끔찍한 현실이 정도전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보였던 것입니다.
'노인과 어린아이는 도랑과 골짜기에 뒹굴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넘어져 있습니다'
<고려사>
먹을 것이 부족해서 온 나라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 백성들은 농사를 짓고 싶어도 농사를 지을 땅이 없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짜 땅 문서까지 만들었고 심지어 하나의 땅에 주인이 여러 명인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내야 했던 소작료는 누가 내야 했을까요?
농민들이었습니다.
결국 소작료를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은 땅의 주인 권문세족의 노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노비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었고 농민들이 권문세족들의 노비가 되어가니 점점 더 세금을 낼 백성들이 줄어 들었습니다.
결국 고려 조정의 재정적 위기가 닥칩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 백성들에게는 나라를 지키는 군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노비에게는 군역의 의무도 없었습니다.
노비가 늘어나고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이 줄어드니 당연히 국가 안보에 비상이 걸리게 됩니다.
이 결과 시시때떄로 고려를 침략한 왜구에 온 나라가 시름해야 했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로 고려가 점점 황폐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고려 사회의 모순을 똑똑히 목격한 것입니다.
5. 정도전, 유배지를 벗어나 정계에 복귀할 날만 기다리며 유랑생황을 하다
유배생활 중 정도전은 백성이 잘 사는 이상적인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유배당한지 3년째 되던 해인 1377년, 드디어 정도전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옵니다.
유배지인 나주를 떠나도 좋다는 소식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었습니다.
고려의 수도이자 중앙 정치가 이루어지는 개경에는 절대 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도전이 중앙정계의 관직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고 곧 정도전의 정치인생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였습니다.
정도전은 정계에 복귀해 그 뜻을 펼칠 날만 기다리며 영주, 제천, 단양, 안동, 원주를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시작합니다.
6. 정도전, 고려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길 꿈꿨던 '이성계'와 운명적으로 만나다
권문세족의 방해로 정계로 돌아갈 길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보이지 않던 정도전, 일반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의지가 꺽여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결코 의지가 꺾이지 않았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심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인물을 직접 찾아가기로 합니다.
바로 홍건적과 왜구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명장 '이성계'(1335~1408)입니다.
강력한 사병 가별초를 거느린 백전무패의 영웅으로 당시 많은 백성의 지지와 고려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성계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던 함길도 함주에 있었으나 정도전이 본인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정도전'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고려 조정을 떠나서 유배지를 떠돌던 정도전이 어떻게 함주에 이성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을까요?
신진사대부의 거두이자 정도전과 오랜 벗으로 정치적 동반자였던 정몽주(1337~1392)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을 주선한 것입니다.
정몽주 역시 신진사대부로 정도전과 같은 썩어 빠진 고려를 바꿔보고 싶은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정몽주의 도움으로 이성계를 만나게 된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당시 이성계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었고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발복을 잡은 한계는 바로 출신이었습니다.
이성계가 동북면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로 중앙정계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이성계 역시 자신을 도와줄 인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려의 개혁을 꿈꾼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고려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길 꿈꿨던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이이렇게 이루어집니다.
7. 정도전, 정몽주의 도움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다
이성계와 만남 1년 후인 1384년, 정도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권문세족에 의해서 쫒겨났던 정도전이 무려 9년여만에 개경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게다가 정도전은 고려 조정의 중앙 관리로 당당히 복귀합니다.
바로 '정몽주'의 도움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명나라 황제와 돈독한 인연을 쌓는 등 명나라 외교 최고권위자였습니다.
명나라 외교를 담당한 정몽주가 명나라에 갈 사신단에 정도전을 추천합니다.
정몽주의 도움으로 정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명나라와의 성공적인 외교를 마친 이후에 왕의 교서를 관리하는 업무로 다시 중앙 정계에서 일하게 됩니다.
8. 드디어 고려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지닌 3인방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뭉치게 되다
그리고 정도전이 개혁의 핵심인물로 생각한 이성계에게도 아주 큰 변화가 생깁니다.
당시 우왕이 온갖 횡포를 부리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권문세족의 거두 이인임을 제거라하고 명령했는데 이성계가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계는 지금의 부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에 오르게 됩니다.
드디어 고려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지닌 3인방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뭉치게 된 것입니다.
9. 이성계, 위화도 회군 후 고려 조정의 실세가 되다
4년이 지난 1388년, 정도전의 삶은 물론이고 한국사를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하러 갔던 중 말머리를 돌려 고려로 돌아온 사건, '위화도 회군' 이 일어난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 조정은 이성계가 휘어잡게 됩니다.
이때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왕 '우왕'을 폐위시켰고 다음으로 즉위한 '창왕'까지 연달아 페위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비록 왕은 귀한것이 맞지만 왕이 정치를 잘못했기 떄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무능력한 왕은 폐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에 대해 고려 조정에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의 계획대로 창왕까지 폐위되었고 고려 왕족 가운데 가장 혈통이 뚜렷했던 인물을 왕으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입니다.
정도전은 조정의 실세가 된 후 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까닭은 무엇일까요?
정도전은 공양왕을 통해서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10. 정도전,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해서 경작권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2년이 지난 1390년 9월, 정도전은 왕을 교체하는데 이어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벌입니다.
'이 나라의 땅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외치며 정도전은 문서들을 불태웁니다.
도대체 무슨 문서들이었을까요?
바로 '토지문서'입니다.
권문세족과 고려의 지배층이 불법적으로 모은 토지를 조목조목 적어놓은 토지문서였습니다.
토지문서를 태우면 땅의 주인을 증명할 길이 없어지기때문에 권문세족들이 땅을 잃게 되는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해서 백성들에게 경작권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공평하게 경작권을 분배해준다는 정도전의 구상을 듣고 몹시 기뻐합니다.
11. 토지 개혁문제를 계기로 정도전을 필두로 한 '급진 개혁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 개혁파'로 신진사대부 내에서도 파벌이 나뉘게 되다
그런데 당연히 정도전의 급진적인 토지 개혁안에 반발을 하는 세력들 또한 있었습니다.
이때 정도전의 생각에 반대하고 나선 세력은 예상외로 신진사대부들이었습니다.
토지 개혁을 하는 것은 좋은데 정도전의 생각은 너무나도 급진적이라 이를 반대하고 나선것입니다.
토지 개혁문제를 계기로 정도전을 필두로 한 급진 개혁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 개혁파로 신진사대부 내에서도 파벌이 나뉘게 되다
12. 급진파와 온건파 사대부의 의견이 절충된 '과전법(科田法)'이 시행되다
1391년, 결국 급진파와 온간파 사대부의 의견이 절충된 절충안으로 토지 제도가 시행됩니다.
바로 '과전법'입니다.
정도전 뜻대로 토지를 국가가 모두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경작권을 나눠주는 형태는 아니고 몰수한 땅을 관리들에게 나눠준 뒤 이들을 통해 세금을 걷게 한 제도입니다.
백성들에게 수확량의 약1/10만 세금을 거두도록 제한을 했기 떄문에 세금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과전법은 조선을 세울 때도 큰 역할을 합니다.
일단 나라를 세우려면 경제적 기반이 필요한 데 기득권세력의 곳간을 털어서 자금도 확보하고 무엇보다도 고려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과전법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13. 정도전, 정몽주의 모함으로 탄핵되고 유배당하다
정도전의 파격적인 행보에 급제동이 걸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도전이 고려 조정에서 아주 강력한 인물의 모함으로 탄핵당한 뒤 왕으로부터 유배까지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정치적 동반자였던 '정몽주' 때문이었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떄문에 이를 제지하려 한 것입니다.
14. 정도전,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꾸다 위기에 처하다
정도전이 품고 있던 계획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역성혁명'입니다.
고려 왕의 성씨인 '왕씨'에서 조선 왕의 성씨인 '이씨'의 나라로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고려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 새로운 나라를 만들 혁명을 꿈꿉니다.
그런데 정몽주는 고려를 더 좋은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도전에 대한 압박은 유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조정대신들의 상소문까지 올라옵니다.
15.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 이성계 아들 이방원에 의해 죽다
바라는 목표를 목전에 두고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된 정도전은 유배를 떠난 다음해인 1392년 6월, 기적처럼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정도전을 압박했던 '정몽주'가 살해됐기 떄문입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유배보낸 후 정도전과 같은 뜻을 품었던 이성계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결국 정몽주에게 칼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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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도전,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하다
다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아온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진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움직임에 힘이 없었던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습니다.
공양왕은 새로운 왕에게 왕좌를 넘겨주겠다는 교지와 국새를 건내줍니다.
정도전의 혁명에 화룡점정을 찍을 왕조의 주인은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결국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성 '수찬궁'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475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한 나라 고려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이렇게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17. 정도전, 이성계의 수도천도 선언에 반대하지만 결국 받아들이다
드디어 새 나라 조선을 만들고 이성계를 조선의 태조로 세우는 데 성공한 정도전은 그 공을 인정받아 조선 개국 1등공신으로 책봉되고 조선의 핵심 실세로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숭록대부' 자리까지 꿰차게 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후 서로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성계와 정도전이 크게 의견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 생깁니다.
이성계가 개경이 아닌 다른곳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천도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하게 되면 물적, 인적으로 백성들이 힘들어지니 이에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나라가 좀 안정이 되면 수도를 이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정도전의 뜻과는 반대로 이성계는 수도 천도를 고집하며 밀어부칩니다.
고려 개경 주변에 '두문동'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고려의 충신들이 이곳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조선건국을 계속해서 반대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개경에는 고려 역대 왕들의 능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개경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쉽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의 정도전이었지만 이성계 수도천도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18. 정도전, '한양'을 새로운 수도로 추천하다
수도 천도에 찬성한 정도전은 대신들과 수도가 될 좋은 땅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신들의 노력끝에 조선의 새로운 수도 후보로 지목된 2곳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의 광화문 일대인 '한양' 도성과 신촌, 연희동 일대인 '무악' 도성입니다
무악에도 왕궁터가 들어올 만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현재 연세대학교 부지입니다.
당시 이성계는 풍수지리적으로 좋았던 '무악'쪽을 선호했습니다.
풍수적으로 훌륭했던 무악은 사실은 수도로서는 성을 세우기에는 땅이 좁았습니다.
정도전은 한양은 총 면적 16㎢로 13.4 ㎢인 무악보다 땅이 더 넓어 성을 세우기 적격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더해 정도전이 쐐기를 박는 말을 합니다.
'좋은 나라를 만드는 건 풍수보다 사람 능력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정도전은 무악보다 땅이 넓어 효율적인 공간 활용이 가능했던 한양을 추천한 것입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서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선택합니다.
19. 정도전, 이성계의 명령에 도성의 궁궐과 전각의 이름까지 모두 지어 올리다
그리고 1398년 8월, 이성계는 수도 한양의 설계를 정도전에게 맡깁니다.
600년 전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이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이어집니다.
정도전의 주도로 새로운 수도가 완성되고 조선의 첫 궁궐까지 완성이 됩니다.
정도전은 궁궐이 완공되고 이성계에게 또 다른 막중한 어명을 받게 됩니다.
'그대는 속히 대궐의 이름을 지어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태조실록>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그 안에 건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을 내린것입니다.
한번 붙여지면 후대에 걸쳐 만백성에게 불리울 이름을 지어 올리라는 이성계의 어명에 정도전은 준비라도 했다는 듯 새 대궐의 이름을 척척 지어 바칩니다.
이때 지어진 궁궐의 이름이 바로 '경복궁(景福宮/클경, 복 복, 궁 궁)'입니다.
경복궁은 '큰 복을 누리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자손 만대로 복이 이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궁 안 전각들의 이름도 모두 짓습니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전각인 '근정전(勤政殿/부지런할 근, 정사 정, 대궐 전 )'입니다.
근정전은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정도전이 이름을 붙힌 건물 중 돋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편안할 강, 편안할 녕, 대궐 전)'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왕에게 이곳에서 편안하게 쉬라고 붙여준 이름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도전은 왕이 쉴 떄도 늘 백성을 생각해야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디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입니다.
20. 정도전, '이방원'에 의해 어린 세자를 앞세워 권력을 탐했다는 역적으로 몰려 목이 베어 죽다
요동정벌 준비가 항창이었던 1398년 8월 25일 밤, 정도전은 오랜 친구의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기와에 그대로 꽂힙니다.
그리고 집근처에 큰 불이 번지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립니다.
큰소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도전은 황급히 이웃집에 몸을 숨깁니다.
한밤중에 정도전의 집을 습격한 사람은 다름아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습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정도전을 결국 자신 앞에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방원은 끌려나온 정도전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립니다.
이방원은 '사병혁파' 라는 이유말고 또 어떤 이유때문에 정도전을 습격한 것일까요?
바로 조선의 첫 세자 책봉이 발단이 됩니다.
이성계가 첫 번째 부인 원경왕후에게 태어난 아들이 아닌 두 번쨰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막내아들인 당시 8살밖에 되지 않은 '이방석'을 세자로 세웁니다.
이때 세자가 책봉되는 논의의 자리에서 정도전이 이방석의 세자 책봉을 논의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서운하거나 불만을 가졌고 이방원에 의해 어린 세자를 앞세워 권력을 탐했다는 역적으로 몰리면서 정도전은 결국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21.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 한 후 정도전의 이름은 조선의 금기어가 되다
정도전의 죽음이후 조선은 큰 변화를 겪습니다.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정도전의 죽음으로 이성계의 시대도 막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합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집을 없애고 그 위에 말을 기르는 관청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방원은 정도전이 만든 '경복궁'에 머물지 않고 경복궁 좌즉에 '창덕궁'을 지어서 머물렀습니다.
이후 정도전의 이름은 조선에서 거론조차 할 수 없는 금기어가 됩니다.
그렇게 이방원은 자신이 세운 조선에서 철저히 외면당하면서 역사속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2. 정도전이 죽은 지 467년 후인 1865년, 정도전의 이름이 다시 조선 역사에 등장하다
정도전이 죽은 지 467년 후인 1865년, 정도전의 이름이 다시 조선 역사에 등장합니다.
정도전의 이름이 부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의 26대왕 고종은 임진왜란때 소실된 이후 273년간 방치되었던 궁궐을 다시 지으라고 명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흥선대원군
바로 '경복궁'입니다.
이때 경복궁을 복구하기 위해 기록을 찾던 중 정도전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것입니다.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의 재건과 함께 정도전의 이름 석자가 46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복궁 뿐만아니라 한양도성을 설계하고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고종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정도전의 공신 칭호를 회복시키고 '문헌공' 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지금도 정도전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조선의 설계자, 조선의 역적
비록 정도전이 '왕자의 난'때 사라지고 그 이름 자체가 조선에서 금기의 이름이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정도전의 창조적인 생각은 현재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똑같은 인물이라도 시대상황에 따라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 인물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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