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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성덕임의 사랑(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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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성덕임의 사랑(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모티브)

1. 정조와 성덕임의 첫 만남 

 

때는 영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1762년 윤 5월 13일 새벽, 당시 좌의정이었던 '홍봉한의 집에서 갑자기 통곡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궁에서 출발한 가마들이 홍봉한의 집으로 연달아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가마에 탄 사람이 누구길래 이렇게 통곡했던 것일까요?

바로 궁으로 시집갔던 딸 '혜경궁 홍 씨'와 당시 11살이었던 홍봉한의 손자이자 세손이었던 '정조'였습니다.

뒤이어 정조의 아내 세손빈 김 씨와 공주 2명도 홍봉한의 집에 도착합니다.

캄캄한 새벽 대체 이들은 왜 홍봉한의 집으로 온 것일까요?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둬서 죽인 사건을 일컬어 '임오화변'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 씨와 아들 정조와 공주 2명이 모든 직책을 잃고 궁궐밖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폐위되면 더이상 왕실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궁궐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이 날벼락같은 상황에 비참하고 한스럽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들오들 떨고 있는 고작 11살의 정조, 10살인 세손빈과 어린 공주들을 달래며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있었습니다.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홍봉한의 집에서 안정을 취할 때, 집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10살의 '성덕임'이었습니다.

성덕임은 왜 홍봉한의 집에 있었던 걸까요?

당시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덕임의 아버지는 바로 주인 홍봉한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주인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는 사람인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은 집안의 노비는 아니었고 중인신분으로 지금으로 치면 집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정조와 성덕임은 이맘때쯤 처음 만나게 된 걸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란 역할 자체가 그 집안하고 대대로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성덕임도 아버지 일을 도우며  세손 정조가 외갓집에 왔을 당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난 홍 씨 집안에서 집안일을 도왔을 성덕임은 생전처음으로 또래 왕족들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가 홍봉한의 사가에 온 지 9일 후, 성덕임은 더 이상 정조를 볼 수 없게 됩니다.

혜경궁 홍 씨와 세손 정조가 다시 궁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수원화성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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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덕임, 혜경궁 홍 씨의 본방나인 궁녀가 되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당일 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로 복권시킵니다.

그래서 혜경궁 홍 씨와 정조 또한 복권되어 혜경궁 홍 씨는 '창경궁'으로 세손 정조는 '경희궁'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손 정조가 궁으로 들어오고 몇 개월 뒤, 정조와 성덕임의 만남은 홍봉한의 사가가 아닌 예상치 못하게 '궁'안에서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성덕임이 궁녀로 입궁을 했기 때문입니다.

창경궁에 있던 혜경궁 홍 씨가 본인 처소에 본방나인으로 성덕임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본방이란 왕비의 친정이라는 뜻입니다.

즉 본방나인이란 중전이나 세자빈 등 결혼해서 들어온 내명부 여인들이 친정에서 데리고 온 궁녀를 말하며 일종의 낙하산 궁녀라고 보면 됩니다.

혜경궁 홍 씨는 왜 성덕임을 궁녀로 불러들였을까요?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겨우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았다'

<어제의빈묘표지명>

혜경궁 홍 씨에 사가에 머무는 며칠 동안 성덕임의 이런 면모가 눈에 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기록을 보아도 성덕임이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글을 곧잘 알았다고 하니 총명함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혜경궁 홍 씨는 성덕임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스럽게 생겼구나'

복스러운 외모부터 반짝이는 총명함까지 성덕임은 혜경궁 홍 씨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타고난 품성이 탁월하여 능히 겸허하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검소하고 절약함을 실천했다'

<어제의빈묘표지명>

또한 성덕임은 타고난 품성이 탁월하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덕임의 이런 면모가 궁궐 나인으로서 역할에 상당히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궁안 예절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데다 주변을 잘 살펴서 처신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처신을 아주 잘하는 면이 혜경궁 홍 씨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3. 정조, 어머니 혜경궁 홍 씨에게 문안인사를 하며 성덕임과 다시 궁에서 만나게 되다 

똑똑하고 매사에 겸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던 성덕임은 혜경궁 홍 씨에게 신뢰받으면서 궁녀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혜경궁 홍 씨의 본방나인인 덕임과 혜경궁 홍 씨의 아들 세손 정조가 궁에서 자연스럽게 만남을 갖게 됩니다.

당시 경희궁에서 지내던 정조는 자주 오지는 못해도 한 번씩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창경궁에 오곤 했습니다.

사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 씨에게 문안인사 드리러 오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그나마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까지 죽인 정말 무섭고 깐깐한 할아버지 영조와  자신을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안달 난 조정대신들까지 궁에서 도무지 내 편이라고는 없는,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했던 정조였습니다.

사실 정조는 11살 때 결혼해서 아내 세손빈 김 씨가 곁에 있기는 했습니다.

세손빈 김 씨는 왕비를 배출한 적이 있는 명문 집안의 인물이었습니다.

명문가 자제인 세손빈이 들어와서 당시 아들이 귀했던 왕실의 대를 이을 적장자를 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조의 베필로 맺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세손빈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안식처나 의지가 되어주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정조는 아내조차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전히 내 편인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정조는 얼마나 좋았을까요?

바로 이때 정조와 혜경궁 홍 씨의 애틋한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성덕임'입니다.

성덕임은 혜경궁 홍 씨의 궁녀로 조용히 소임을 다하며 지냈습니다.

4. 정조, 남몰래 성덕임을 향한 첫사랑을 시작하다 

그런데 성덕임이 14살이 됐을 무렵, 그녀 일상에 큰 파문이 생깁니다.

누군가가 성덕임을 궁궐 으슥한 곳으로 불러냅니다.

바로 15살의 세손 정조였습니다.

세손 정조는 성덕임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용모가 깨끗하고 단정하며 성품은 단아하고 장중하며 인자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사실 정조는 그동안 경희궁을 오며 가며 마주친 성덕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외갓집에서 온 나인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한해, 두해 지나면서 정조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성덕임을 쫒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를 보던 정조의 눈동자는 차를 내오는 덕임을 따라 움직였고 고개를 숙이고 배웅을 하는 덕임의 앞을 괜히 천천히 지나치기도 합니다.

예쁘고 똑똑한 덕임을 남몰래 지켜보면서 정조의 사랑은 풍선 부풀듯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처음 가져보는 감정, 그렇게 정조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5. 정조, 성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는 1차 고백 후 거절당하다

하지만 야속한 현실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거처가 다른 두 사람은 매일 볼 수 없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경희궁에서 지내다가 어쩌다 틈이 나면 어머니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세손 정조는 동궁에 앉아서 책을 볼 때도 언제 어디서나 덕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견디다 못해 덕임을 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정조가 덕임을 몰래 불러냈던 것입니다.

정조는 덕임을 몰래 불러내 쓸데없는 소소한 일상을 묻다 갑자기 이런 말을 건네었을 것입니다.

'내 후궁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

한낱 궁녀인 나인이 차기 왕이 될 세손에게 고백을 받은 것입니다.

궁녀들이라면 누구나 상상 속에서만 꿈꿔왔을 벅찬 순간이 덕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덕임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조에게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성덕임은 아직 '세손빈'이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입니다.

세손빈과 정조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아이도 생기지 않았는데 자신이 정조에게 고백받고 후궁이 된 후 세손빈보다 먼저 아이를 가질 수 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 덕임은 세손빈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며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장차 조선의 왕이 된 정조의 이런 은밀한 사랑이야기는 그야말로 야사 수준의 디테일인데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까요?

어제의빈묘표지명
어제의빈묘표지명

놀랍게도 이 내용은 바로 정조가 직접 자신의 흑역사를 기록한 <어제의빈묘표지명>이라는 책에 모두 써놓은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정조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후대 사람들도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덕임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감동하여 더는 다그치지 못하였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정조는 덕임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더는 후궁이 되어 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조의 당찬 고백은 대실패로 이어집니다.

세손 정조의 첫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6. 덕임이 평범한 궁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세손 정조는 정적들의 위협에 맞서 홀로 견뎌야만 하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고백의 날이 지나고 정조와 성덕임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성덕임은 궁녀로서 자신의 생활을 충실히 이어갔습니다.

성덕임은 옷감을 빠르게 잘 만들고 요리도 잘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글도 잘 썼다고 합니다.

성덕임은 궁에서 필요한 기예와 재능을 모두 갖춘 소문난 팔방미인이었던 것입니다.

성덕임은 쉬는 시간이 생기면 궁녀들과 모여서 소설 '필사'를 하곤 했습니다.

1773년 덕임이 필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책의 일부
1773년 덕임이 필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책의 일부

위 글은 성덕임이 21살이 되던 1773년, 덕임이 필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책의 일부입니다.

당시 궁녀들이 이런 글을 많이 쓰고 또 쓴 글을 돌려보고 하다 보니 글씨를 잘 쓰는 궁녀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현재 쓰이는 '궁서체'의 시초가 '궁녀들의 글씨'였던 것입니다.

덕임이 평범하게 궁녀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정조는 어땠을까요?

세손 정조는 그야말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들이 그대로 궁궐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힘이 없었던 정조는 홀로 수시로 찾아오는 살해위협에 맞서서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세손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좋아하는 덕임을 향한 마음을 묻어두기로 합니다.

7. 정조, 왕으로 즉위 후 후사가 없자 최측근 홍국영 동생 '원빈 홍 씨'를 후궁으로 들이다 

그리고 이때 정조의 마음에 쏙 드는 오른팔이 되어준 인물을 얻습니다.

바로 '홍국영'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홍국영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추심을 잃어 내쳐진 '홍국영'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추심을 잃어 내쳐진 '홍국영' 1. 홍국영,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풍산 홍 씨 집안에서 태어나다 혜경궁 홍 씨는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그

donbuller.tistory.com

외롭고 쓸쓸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궁에서 홍국영이라는 존재는 정조에게 한줄기 빛이자 믿을 구석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고단한 세손 시절이 지나고 1776년, 드디어 25살 세손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의 승하 후 조선 제22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왕이 된 정조를 보는 덕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덕임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왕이 되기 위해 살얼음판을 걸었을 정조가 신경 쓰였던 같습니다.

덕임은 왕이 된 정조와 그 옆에 왕비로 선 효의왕후를 보면서 정조가 훌륭한 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며 이제야 한시름 놓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정조가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1778년 어느 날, 궁에 비상이 걸립니다.

정조가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후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왕실 어른들의 마음을 더 졸이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궐 안에 있는 궁인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조실록>

무엇보다 후사가 급한 상황에서 정조가 알아서 승은을 내려 후궁을 들이면 좋으련만 도통 후궁 들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왜 이렇게까지 다른 궁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일까요?

정조의 마음에는 여전히 단 한 사람 성덕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본 뒤로 20년 동안 후궁의 반열에 두었다
처음 본 뒤로 20년 동안 후궁의 반열에 두었다

'처음 본 뒤로 20년 동안 후궁의 반열에 두었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정조는 처음 본 뒤 20년 동안 말을 못 꺼냈지만 마음속에 계속 두고 있으면서 성덕임을 후궁 1순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의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왕실에 필요한 것은 바로 후사였던 것입니다.

왕실 큰 어른인 정순왕후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명을 내립니다.

'후궁을 간택하라. 후사가 급하니 이 할미가 후궁을 정해드리겠습니다'

왕실에 후사가 급한 상황에서 왕실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정조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순왕후의 간택 명령이 이뤄진 후 속전속결로 후궁이 결정됩니다.

이때 후궁으로 간택된 사람은 바로 홍국영의 동생 '원빈 홍 씨'였습니다.

당시 정조는 외척 세력을 경계했는데 홍국영은 왕권을 강화시키겠다는 명목하에 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게 해 결국 홍국영이 정조가 그렇게도 경계했던 외척세력이 됩니다.

홍국영의 동생 원빈 홍 씨는 대단한 예우를 받으며 후궁으로 간택됩니다.

원빈 홍 씨는 정조와 정식 가례도 치렀고 궁에 들어오자마자 후궁 중에서 가장 높은 품계인 '빈'으로 봉해집니다.

8. 정조, 믿었던 홍국영을 내치다

이렇게 어렵게 들인 후궁이었던 '원빈 홍 씨'가 입궁하고 1년 뒤, 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하게 중궁전에서 궁녀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중궁전의 궁녀들을 끌어내서 칼을 들며 위협한 것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원빈 홍 씨의 오빠 홍국영이 '중전이 자신의 동생을 독살했다'라고 모함하면서 궁녀들을 고문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홍국영은 다시는 후궁을 들이면 안 된다면서 막기까지 합니다.

왕의 외척이 된 홍국영이었지만 1년 만에 동생 원빈 홍 씨가 후사도 없이 죽게 되니 또 다른 후궁은 홍국영에게는 곧 엄청난 위험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치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가장 믿었던 홍국영 역시 외척이 되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그동안 권력을 얻은 뒤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데다 외척으로서 이런 불란까지 일으키게 되니 더 이상 홍국영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조의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홍국영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고하고 궁을 떠납니다.

믿었던 홍국영의 사직에 혼란스러운 후궁 문제까지 전쟁터 같은 궁안에서 더 외롭고 비통하게 정조는 머물렀을 것입니다.

9. 정조, 성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는 2차 고백 후 또다시 거절당하다

마음 둘 곳 없는 정조가 이때 떠올렸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이때 정조는 마음에 두고 있는 덕임을 후궁으로 들인다면 후궁으로 인한 분란이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15년 만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기로 합니다.

궁안에서 마음을 의지할 수 있고 자신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성덕임을 첫 번째 고백 후 15년 만에 다시 한번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당시 정조는 30살, 덕임은 29살이었습니다.

'내 후궁이 되어달라!'

이 말을 들은 덕임은 정조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요?

'15년 뒤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또다시 고사하였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성덕임은 왜 또다시 2번씩이나 정조의 고백을 거절했을까요?

왕실 전체가 걱정할 정도로 정조의 후사가 급한 상황에서 덕임이 생각했을 때는 보잘것없는 자신보다는 명문가 여인이 후궁이 되어 후사를 얻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전이 아직도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0. 간택 후궁 '화빈 윤 씨', 상상임신하다 

덕임이 고백을 거절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780년 3월, 정조가 궁에서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올립니다.

바로 왕실 어르신들이 간택해서 뽑은 두 번째 간택 후궁이었던 '화빈 윤 씨'와의 혼인이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노론'과 '소론'으로 당파가 나뉘어 있었습니다.

정조대의 영의정과 이조판서등이 '소론'계열인물이었는데 이때 권력을 잡고 싶은 소론 쪽 인물들이 추천한 후궁이었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후사를 갖는 데 성공했을까요?

정조와 합궁하고 2개월이 흘렀을 무렵 화빈윤 씨가 임신 소식을 알립니다.

1781년 1월, 어느덧 임신 9개월 차가 된 화빈윤 씨를 위해 '산실청'이 세워집니다.

화빈 윤 씨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왕실과 조정의 기대는 후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날이 커졌을 것입니다.

한 달 후 궁안의 모든 눈과 귀가 화빈 윤 씨의 궁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화빈윤 씨의 처소에서는 아이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화빈 윤 씨가 후사에 대한 압박감이 극심하여 '상상임신'을 한 것이었습니다.

산실청이 세워졌다는 것은 내의원에서 임신진단이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이후 사산, 유산, 출산 그 어떤 기록도 전무합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소론 쪽에서 곧 아가기 태어난다고 주장하면서 무려 30개월이나 산신청을 유지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 정조의 후계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또 조정 내 암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화빈 윤 씨는 그렇게 10개월이 지나고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기대가 바스러진 정조와 왕실어르신들은 기대만큼 커진 실망감에 한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1. 정조, 성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는 3차 고백만에 성공하다

화빈윤 씨의 상상 임신 사건 1년 후인 1782년 9월 7일, 궁궐에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분주하게 정조에게 달려간 환관과 상궁들에게 정조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왕자 아기씨 옵니다'

정조는 31살이 되어서야 오매불망 기다리던 첫아들을 품에 안게 됩니다.

정조는 귀하디 귀한 왕자의 이름을 '이순(李㬀)'이라고 지어줍니다.

그리고 정조는 그 벅찬 마음을 신하들에게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그런데 정조의 아들을 낳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성덕임'이었습니다.

정조는 성덕임에게 두 번씩이나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지만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백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

굳게 닫힌 성덕임의 마음을 어떻게 열어야 할까 정조는 밤낮으로 고민합니다.

성덕임은 왜 정조의 마음을 받아줬던 것일까요?

이 무렵 정조가 덕임의 관심을 받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면서 어떤 일을 합니다.

바로 성덕임의 허드렛일을 봐주는 하인을 불러서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가벼운 벌을 내립니다.

이런 식으로 덕임의 주변사람들을 공략해서 성덕임의 관심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겠다는 정조의 선언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쉬쉬하고 있던 관계가 궁 안에 퍼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덕임이 정조의 마음을 받아준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덕임이 임신한 시기가 화빈 윤 씨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 무렵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화빈 윤 씨의 임신으로 후궁이 된다는 부담을 덜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덕임이 후궁이 되어 아들을 출산한다 하더라도 굳이 내 아이가 후계자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도 화빈 윤 씨가 먼저 임신을 한 상태였기에 중전에 대한 죄책감도 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덕임의 마음이 조심스레 열린 것입니다.

정조의 한결같은 마음에 성덕임은 결국 마음의 문을 열고 말았습니다.

덕임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고 이제는 정조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정조의 짝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BXGPMB_lE

옷 소매 붉은 끝동

12. 정조, 덕임을 '빈'으로 봉하다 

드디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정조와 성덕임, 정조는 정 5품 상궁이었던 덕임을 정 3품 '소용'으로 봉합니다.

승은을 입은 후에도 상궁의 지위에 머물렀던 덕임이 정식 후궁으로 등극했습니다.

정조의 성덕임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정조는 정 3품 '소용'으로 봉한 지 단 5개월 만에 성덕임을 정1품 '빈'에 봉합니다.

그리고 '화목하다'는 의미를 담아 직접 '의빈'이라는 명칭을 내립니다.

덕임에 대한 정조의 애정은 정말로 각별했습니다.

정조는 국사를 마치면 곧장 성덕임을 찾아갔고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피로를 풀었습니다.

성덕임이 읽어주는 책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한 요리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조와 성덕임은 알콩달콩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깁니다.

거기에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두 사람입니다.

정조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후계자를 낳은 성덕임의 위세는 엄청났을 것이고 왕실 어르신들 입장에서도 덕임은 복덩어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13. 덕임, 아들을 낳은 이후에도 중전 효의왕후에게 도리를 다하다 

그렇게 대단한 지위에 올라서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성덕임이 늘 마음에 걸렸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옳고 유익한 것을 행했고 겸손히 억누르고 두려워 조심해 행동했다. 내전을 모시는데 성심을 다해 준비했다'

<어제의빈묘표지명>

덕임이 항상 신경 쓴 사람은 바로 중전인 '효의왕후'였습니다.

효의왕후는 결혼하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아이 한 명도 낳지 못한 상태로, 당시의 왕실 법도에 따르면 중전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죄인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 정조는 덕임만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원자와 덕임 그리고 왕자가 가족처럼 오붓하게 지내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효의왕후가 덕이 넘치는 사람이었어도 궁궐 안에서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임은 외롭고 쓸쓸했던 중전 효의왕후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덕임은 효의왕후 앞에서 항상 조심 또 조심했으며 자신을 낳기만 했을 뿐 원자는 중전의 아이라며 몸을 낮추고 예의를 지킵니다.

당시 관례에 의하면 후궁이 아들을 낳으면 중전의 아들로 입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중전의 아이가 되는 것이니 양육 또한 중전의 몫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후궁인 덕임은 중전과 원자 사이에 사실상 낄 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덕임의 마음에 효의왕후는 감동하여 기꺼이 덕임이 직접 아들을 기를 수 있도록 허락해 줍니다.

웃음과 사랑이 넘치던 왕실에서 원자는 왕실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리고 원자가 3살이 되던 1784년 8월, 왕실에 오랜만에 큰 경사가 생깁니다.

문효세자 책례도
문효세자 책례도

'문효세자 책례도'는 문효세자가 책봉식이 열리던 날을 그린 8폭짜리 병풍입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가 세자 책봉을 선언하는 모습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가 세자 책봉을 선언하는 모습

먼저 앞 세 폭에 그려진 것은 당시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가 세자 책봉을 선언하는 모습입니다.

중앙에 비어있는 자리는 정조의 자리입니다.

왕이나 세자는 그려 넣지 않는 것이 당시 원칙이었기 때문에 비어둔 것입니다.

창덕궁 중희당에서 의식을 치르는 세자의 모습
창덕궁 중희당에서 의식을 치르는 세자의 모습

다음 세 폭에 그려진 것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의식을 치르는 세자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것도 위쪽 중앙 '세자'의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이 날 책봉된 세자는 훗날 '문효세자(文孝世子)'라고 불리게 됩니다.

'문효'는 '강함과 유연함을 두루 갖추고 효를 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문무백관과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인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정조와 덕임 사이 사랑의 결실인 아들이 세자가 된 순간이었기에 정조와 덕임은 책봉식 내내 행복했습니다.

정조는 오직 덕임만을 찾았고 둘은 매일 밤 이야기를 나눕니다.

덕임은 정조의 이야기를 매일 밤 들어주며 정조의 안식처가 되어 줍니다.

14. 정조와 덕임 부부, 첫아들 문효세자를 홍역으로 잃다 

1785년 12월, 금슬 좋은 정조와 덕임에게 또다시 선물이 찾아옵니다.

덕임이 또다시 아이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덕임이 임신한 지 5개월째 되던 1786년 5월 11일, 덕임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정조와 덕임의 금지옥엽이자 정조의 후계자였던 '문효세자'가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정조와 덕임의 금지옥엽 아들을 앗아간 것은 다름 아닌 '홍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홍역의 치료약이 마땅치 않아서 걸리면 죽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홍역이 조선 전역에 퍼졌는데 궁까지 침투해서 결국 문효세자의 목숨마저 앗아간 것이었습니다.

귀하게 얻은 첫아들의 황망한 죽음에 넋을 잃은 정조의 당시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도중에는 믿게 되었으니 끝내 또 아득하여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정조어제효창묘신도비명>

정조는 도무지 아들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잃은 엄마 덕임의 마음을 어땠을까요?

이때 궁안의 사람들은 아들의 죽음을 맞닥뜨린 성덕임의 모습을 보고 괴상하다며 수군댔다고 합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면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에 덕임은 아들의 죽음에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정에 끌려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하며 제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면 나라에 죄를 짓는 겁니다'

<어제의빈묘표지명>

덕임은 왕의 아이를 품고 있는 자신의 몸은 나라의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마음대로 슬퍼하는 것은 나라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더욱 마음 아팠던 것은 덕임은  아들이 홍역으로 아파할 때 임신한 몸이라 홍역에 감염될까 아들에게 가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플 때 한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아들을 떠나보낸 덕임은 왕실의 후사를 위해 임신한 아이를 무사히 나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슬픔을 삼키고 버텨야 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슬픔에 잠겼던 정조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정조는 사랑하는 아들을 궁궐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자리에 묘를 조성합니다.

효창묘
효창묘

그곳의 이름이 바로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묘'입니다.

15. 의빈 성덕임, 만삭의 몸으로 죽음을 맞다 

문효세자를 잃은 후에 덕임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정조와 덕임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새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둘에게는 삶의 희망이 되어줬을 것입니다.

문효세자가 죽은 지 4개월 후인 1786년 9월, 덕임은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이 됩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덕임의 처소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덕임이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의빈은 '자현증'을 앓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자현증을 현대적인 용어로 풀어보면 임신 후 자궁이 커지면서 자궁 주변의 장기들이 압박을 받게 되면서 위경련, 호흡곤란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덕임은 아들을 잃은 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스트레스로 몸이 망가져 갔던 것입니다.

덕임은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정조가 오면 늘 말끔하게 차려입고 온화하게 늘 웃는 모습으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정사를 마친 정조가 덕임을 찾았는데 덕임이 평소와는 달리 근심 어린 얼굴로 정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건대 정전에 자주자주 나아가서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한다면 곧 경사가 찾아올 겁니다. 또 장차 지하에서도 즐겁고 좋아할 겁니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자신이 혹여 죽더라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꼭 아들을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품에 안겨서 그동안 못했던 말을 천천히 하는 덕임을 바라보며 알겠다는 듯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궁궐 전체 통곡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의빈 성덕임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정조는 불과 4개월 사이에 아들 문효세자를 잃고 사랑하는 덕임마저 잃습니다.

이 시기 정조는 사랑하는 덕임은 물론 뱃속의 아이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16. 정조, 덕임의 유언대로 예법을 어기고 덕임을 아들 문효세자의 곁에 묻히게 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786년 12월, 덕임의 묏자리를 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정조는 대신들이 깜짝 놀랄 명을 내립니다.

'문효의 묘와 백 보 거리로 빈의 소원을 따른 것이다'

<어제의빈묘표지명>

의빈 성덕임이 아들 문효세자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덕임을 문효세자의 묘와 단 백 보 떨어진 곳에 묻으라고 명합니다.

정조의 이 명을 들은 대신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례상 문효세자는 효의왕후의 양자로 중전의 자식이었고 또 세자였기에 덕임은 후궁으로서 예법상 세자와 묫자리를 함께 조성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조의 이런 명은 결국 성덕임의 유언을 들어주면서 예법까지 어긴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조가 얼마만큼 성덕임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덕임이 죽어서라도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바람과 배려가 있었던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정조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던 것입니다.

정조는 죽어 땅에 묻었다고 해서 덕임을 쉽게 잊을 수 있었을까요?

정조는 이후로도 3년 동안 해마다 빠지지 않고 덕임의 제삿날에 올리는 제문을 직접 지어 올립니다.

'영원히 이별하니 내가 어렵고 힘들구나.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영원히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의심한다. 어찌하여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너도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

남긴 글 마디마디마다 정조가 덕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덕임을 그리워하면서 일을 마치고 홀로 있을 때, 궁궐을 걸을 때, 덕임과 함께 했었던 시간들을 문뜩문뜩 떠올리곤 했을 것입니다.

정조가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여인이 바로 '성덕임'이었습니다.

정조는 덕임이 죽고 14년을 보낸 후,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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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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